50화. 모녀의 잡담
예쁜 소녀가 장난기와 순진함을 머금은 눈빛으로 쳐다보니, 태자가 빙긋 웃으며 정아에게 물었다.
“오늘은 좀 어떠한가?”
정아는 아직 어린 동생의 말에 넋이 나가 있었고, 중얼대며 괜찮다고 대답했다.
“그럼 됐다. 날씨가 더 따뜻해지면 그대도 삼 개월이 지났을 테니, 자주 화원에 나가 산책할 수 있겠군. 너무 방 안에만 있지 말거라. 오히려 좋지 않을 테니.”
“전하의 관심에 감사드립니다.”
태자가 살짝 웃었다.
“태자비가 이리 겸손할 게 뭐 있느냐. 그대의 뱃속엔 짐의 적장자가 있는데.”
정아의 몸이 살짝 떨렸고, 억지로 웃는 얼굴을 지어보였다.
태자가 한 씨를 바라보며 말했다.
“모처럼 궁에 왔으니, 태자비와 시간을 보내주시게. 짐은 일이 있어 먼저 가보겠소.”
“예, 좋습니다. 태자 전하, 살펴 가세요.”
정미도 뒤이어 말했다.
“태자 전하, 살펴 가세요.”
태자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정미를 흘끗 쳐다보며 말했다.
“앞으로 계속 내게 형부라 부르면 되네. 더욱 친근하게 들리니.”
정미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예전엔 소녀가 철이 없어서 그랬지요. 앞으론 함부로 부르지 않겠습니다.”
“함부로 불렀다니? 짐은 오히려 그런 모습이 순진하고 귀엽다 느꼈거늘.”
정미는 몰래 냉소하며 일부러 태자의 말문을 막았다.
“그렇습니까? 하지만 둘째 언니도 항상 ‘태자 전하’라 불렀었지 않습니까.”
태자는 멍하니 말문이 막혀 잠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겸연쩍게 웃고는 급히 떠났다.
태자가 떠나자, 정아는 고개를 숙인 채 쓴웃음을 지었다.
‘이 깊은 궁의 안뜰에마저 역시 비밀이란 없구나. 나는 그저 어머니와 동생과 친밀한 대화를 하고 싶었을 뿐인데, 태자 전하께서 이리 오시니 누가 감히 막을 수 있겠는가?’
“정미야.”
정아가 정미를 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네?”
“앞으로 정미도 다 큰 아가씨니, 아무 말이나 다 해선 안 돼.”
정아가 탄식하며 말하자 한 씨도 뒤따라 꾸짖었다.
“화는 입에서 나온다는 것을 모르는구나. 뭐라, 태자비마마께서 꼭 황손자를 낳으실 거라고? 이런 말을 어떻게 함부로 할 수 있는 것이야?”
한 씨는 말할수록 화가 나 참지 못하고, 정아의 앞에서 정미를 노려보았다.
“어머니…….”
정아가 책망하는 듯 말했다.
“전하께서 이미 정미를 꾸짖으셨습니다. 그러니 어머니께선 더 이상 혼내지 마세요.”
“그건 전하께서 인자하시기 때문입니다. 태자비마마, 철이처럼 이 녀석을 감싸들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미야, 오늘 네 큰언니 앞에서 약속하거라. 앞으로 다신 허튼소리를 하지 않겠다고.”
“두 분 다 안심하세요. 앞으로 함부로 말하는 일은 없을 거예요.”
정미가 차분한 말투로 말했다.
“마마께서 황손자를 낳을 거라 한 것은, 제가 보고 알아차린 것이지 허튼소리를 한 것이 아닙니다.”
“너 이 녀석―”
정말로 화가 난 한 씨를 정아가 막아 세웠다.
“정미, 그럼 큰언니에게 말해보렴. 어떻게 알아본 거니?”
정미는 양쪽에 서 있는 궁인들을 훑어봤고, 이에 정아가 말했다.
“웅(熊) 유모와 약접(若蝶), 유형(流螢) 모두 충직한 자들이야.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해도 괜찮아.”
정아는 마음속으로 가볍게 탄식했다. 약접과 유형은 집에서부터 궁으로 데려온 아이들이라, 그나마 믿을 만하지만, 웅 유모는 귀비마마께서 골라주신 교육 유모였다. 그녀가 누구에게 충직한지는, 깊게 생각하기도 귀찮았다.
하지만 다른 방도가 없었다. 굳이 그녀가 아니더라도, 이 궁 안에선 황상께서 한마디만 해도 밖으로 새어나가니, 태자비인 그녀는 말할 것도 없을 터였다.
사실 정미는 궁인 몇 명이 알든 말든 신경 쓰이지 않았다.
정미는 곰곰이 생각해봤지만, 이유 없이 미래를 본다고 하거나, 영문도 모르고 사람의 병을 치유할 수 있다고 하면, 모두가 자신을 요괴로 취급할까 두려웠다.
그런데 부의가 되면 사람들의 의혹을 최대한 덜어낼 수 있을 테고, 심지어 회인백부는 부의로부터 시작된 가문이니, 가문에서 진귀한 비적(*秘籍: 진귀한 책)을 전수했는지 아닌지 누가 알 수 있겠는가?
그뿐만 아니라 진정한 부의는 아직 사람들의 존중을 받고 있었다. 아버지도 그 북명진인의 명성 때문에, 정미의 말을 듣고 평소 아끼던 딸을 꾸짖었으니 말이다.
큰언니와 다른 사람들의 신임을 빨리 얻기 위해선 감수해야 할 위험은 감수해야 했다.
“큰언니, 어머니께서 언니께 말씀하셨었지요. 제가 오랫동안 기절해있었을 때, 현청관의 북명진인께서 깨어나게 해주신 일을요.”
정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정미가 말을 이었다.
“북명진인의 부수를 마신 후, 그가 제 귓가에 많은 말을 하는 것이 어렴풋이 들렸습니다. 나중에 깨어난 후 그 말이 여전히 기억에 남았고, 처음엔 이해하지 못해 많은 책을 뒤져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말들이 부의의 이론과 관련된 것임을 알게 되었어요. 그동안 저는 그 말들을 계속 되풀이하며 공부했고, 점점 많은 것들을 알게 되었지요.”
정미는 망연한 표정으로 정아와 한 씨를 바라봤다.
“어머니, 큰언니, 제가 왜 북명진인의 말들을 들을 수 있었을까요?”
한 씨와 정아는 서로를 마주 보며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특히 한 씨는 아주 놀라며 의아해했다.
‘그때 그 북명진인이 정미를 치료할 때, 부수는 다른 사람이 먹였는데, 정미에게 무슨 말을 했단 말인가? 잠시만, 설마…….’
‘설마 정미에게 부의의 재능이 있는 건가?’
이 나라에선 보통 백성들은 부의를 신비롭고 예측 불가능한, 큰 재주를 가진 사람이라 여겼다. 하지만 부의의 상식과 이론을 말하라 하면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몇 없었다.
하지만 한 씨는 달랐다.
그녀가 시집가기를 기다리는 아가씨였을 때, 진심으로 둘째 나리를 마음에 두었었고, 그의 모든 것을 알기 위해서 그녀는 아주 많은 열정을 쏟아부었다. 그렇기에 회인백부가 부의로부터 시작된 가문이라는 배경은 당연히 알 수밖에 없었다.
전(前) 위국공과 현청관의 북명진인은 친분이 있는 사이였기에, 그녀는 아버지에게 달라붙어 부의에 대한 것을 많이 알게 되었고, 부의가 되려면 재능을 타고나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스승은 가르침으로 제자의 의혹을 풀어주려 하지만, 제자에겐 그저 귀로 듣는 것이 가장 쉽고, 눈으로 보는 것은 보통이며, 가장 어려운 것은 이해하는 것이었다.
듣고, 보고, 이해하는 것, 이 세 가지는 서로 다른 재능을 뜻했다.
예를 들어 북명진인의 유일한 여제자 소진 도사는, 그녀가 부적을 만드는 방법을 대부분 ‘이해’할 수 있었기에, 북명진인 또한 이례적으로 제자로 받아들인 것이었다.
이 외에는 또 다른 부류가 있었는데, 한 잔의 부수로도 그 부수에 깃든 정보를 현묘하게 감지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런 사람들은 부의들이 꿈에 그리는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며, 진리를 깨달은 자, 통현(通玄)이라 불리곤 했다. 그런 자들은 부의에 입문하기만 하면 타고난 자질에 빛나는 재능을 가진 사람이 되어, 덕망이 높은 부의들이 가장 갈망하는 계승자가 되는 것이었다.
이후 한 씨는 정씨 가문으로 시집온 뒤, 회인백부는 그녀가 생각한 것처럼 부의의 전승을 중시하지 않았고, 심지어 가족들은 그녀보다도 아는 것이 많지 않다는 사실에 놀라곤 했다.
그렇게 눈 깜짝할 새 이십 년이 지났고, 시집오기 전의 열정과 노력은 한 씨의 삶에서 지워버릴 수 없는 밝은 색깔이 되었기에, 이와 관련된 모든 일은 절대 잊히지 않았다.
여기까지 생각하자, 한 씨는 숨을 들이켜며 놀란 표정으로 정미를 바라봤다.
‘설마, 정미에게 부의의 재능이 있는 것뿐만 아니라, 심지어 그 재능이 가장 뛰어난 것이란 말이야? 어쩐지, 계속 답답했지. 내가 낳은 딸이 어찌 하나도 잘난 곳이 없을 수가 있겠어!’
한 씨의 가슴이 빠르게 뛰었고, 그녀가 정미의 손을 잡으며 물었다.
“미야, 정말 누군가 귓가에 말하는 것이 들리니?”
“네.”
정미는 진지한 얼굴로 시원스럽게 대답했지만, 속으로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오늘부터 어찌 됐든 북명진인의 탓으로 돌리면 되었다.
‘이를 듣고 사실을 증명하려고 하든, 아니면 웃어넘기든, 이후 내가 부수로 병을 고치고 다니면 어쨌든 출처가 생기게 된 거니까!’
“어머니,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정아는 한 씨가 흥분한 것을 알아채고 물었다.
한 씨의 두 눈이 반짝였다.
“태자비마마, 마마의 동생이 부의가 될 수도 있겠습니다!”
정아는 눈살을 찌푸리며 한 씨를 이상하다고 여겼다.
한 씨가 희색이 만면하여 말했다.
“태자미 마마, 마마께선 아십니까? 정미에겐 만 명 중 한 명도 없는 재능이 있습니다. 정미는 통현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재능이라면 북명진인도 제자로 받아줄 테지요!”
이 말에 정아의 안색이 바뀌었다. 정아 뒤에 서 있던 웅 유모는 눈꺼풀의 주름을 다 없앨 듯이 눈을 내리깐 채 떨고 있었고, 정명한 눈빛으로 그 아름다운 소녀를 훑어보았다.
“어머니!”
정아가 꾸짖으며 외쳤다.
“왜 그러십니까?”
한 씨는 이해하지 못했고, 정아는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어머니, 만약 정미에게 그런 재능이 있다 한들 어떠합니까. 설마 정말로 북명진인이 정미를 제자로 받길 바라시는 겁니까?”
“그게 잘못된 일입니까?”
한 씨가 반문했다.
한편 정미도 마음속으로 같은 질문을 했다.
두 모녀가 보기 드물게 마음이 통한 듯했다.
정아는 머리가 아파와 관자놀이를 살살 문질렀다.
“어머니, 잊으신 겁니까. 정미가 북명진인의 제자가 되면, 평생 시집을 가지 못할 겁니다!”
‘그거 정말 좋네!’
정미가 갑자기 고개를 들고 반짝이는 눈빛으로 정아를 바라봤다.
정아는 손을 뻗어 동생의 머리를 툭툭 쳤다.
“정미, 걱정 마. 어머니께서는 너를 현청관으로 보내지 않으실 거야. 그저 너에게 타고난 재능이 있어 기쁘신 거란다.”
정미가 한 씨를 쳐다보자, 한 씨는 깊게 한숨 쉬고는 서운한 표정으로 성을 냈다.
“그래요, 잠시 기뻐서 제가 잊어버렸습니다. 현청관의 규율은 몹시 엄격한 데다, 여자아이가 시집을 가지 못하면 큰일이니.”
그녀는 정미를 보며 위로하듯 토닥였다.
“미야, 네 큰언니의 말이 맞다. 나는 그저 네게 재능이 있다는 사실에 기뻤던 것이지, 절대 너를 현청관으로 보낼 생각은 없어. 다른 사람은 둘째치고 네 외조모도 허락하지 않을 거야. 안심하렴.”
한 씨가 보기 드물게 참을성 있게 정미를 위로했다. 혹시 정미가 자극을 받아 여기 동궁에서 미쳐버리면, 그것이야말로 큰일이기 때문이었다.
한편 정미는 정말 울고 싶었다.
안심은 무슨 안심? 상심할 시간도 없었다. 만약 큰언니가 언급하지 않았다면 주의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알고 보니 현청관에 그렇게 마음에 드는 규율이 있었구나!’
언정이순(*言正理順: 말이 바르고 사리가 바름)하게 사람을 구하는 부의가 될 수 있다면, 예전에 맹세를 어긴 벌을 지키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부의에 대한 일을 접은 한 씨는 또 앞선 일을 곱씹어 보더니 감격했다.
“미야, 그럼 네가 태자비마마 뱃속에 황손자가 있다고 한 것은, 함부로 말한 것이 아니라 정말 네게 보인 거니?”
정미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요. 어머니, 저는 이미 열네 살이에요. 어찌 함부로 허튼소리를 할 수 있겠어요?”
한 씨가 기쁜 얼굴로 정아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정아는 복잡한 표정이었다.
여동생이 이렇게 침착하게 하는 말을 어찌 믿지 않을 수 있겠는가, 속으로도 무척 기뻤다.
‘하지만 얼마 전 소진 도사는 분명 이 아이가 여자아이라고 했는데……. 어머니가 정미에게 부의의 재능이 있다고는 했지만, 아직 확실하지 않은 것은 둘째치고, 정미를 소진 도사와 비교할 수는 없겠지?’
소진 도사는 이미 십 년 동안 북명진인의 제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