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태자
“태자비마마…….”
정아가 미안한 듯 웃었다.
“어머니, 제가 아무 생각 없이 농담으로 물은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이 이런 데에 눈이 밝지 않습니까?”
한 씨가 참지 못하고 눈을 부릅떴다.
“그건 정말이지 열 살도 되지 않은 아이를 말하는 겁니다. 마마의 여동생은 이미 열몇 살이나 되었어요!”
그러나 정미는 정아의 말을 시험으로 받아들이고 진지하게 망진을 하고 있었고, 또 그 결론으로 아혜와 이야기까지 나누더니, 엄숙하게 말했다.
“제가 봤습니다. 마마께선 황손자를 낳으실 거예요.”
“뭐라고?”
정아는 저도 모르게 큰소리로 되물었고, 그녀의 시중을 드는 궁인을 한 번 쳐다보고는 정미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물었다.
“정미야, 정말 그렇게 생각하니?”
정미는 큰언니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웃었다.
“그럼요. 걱정 마세요. 분명 황손자를 낳으실 겁니다.”
하얘지고 날씬해진 정미가 이렇게 웃으니, 씁쓸하면서도 온유한 느낌이 나 그 모습이 무첫 사랑스러워 보였다.
정아는 잠시 멍하니 정미를 바라보았다.
그때, 어느 한 사내의 나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태자비가 분명 황손자를 낳을 거라 말한 사람이 누구인가?”
정미의 몸이 순식간에 경직되었고, 한참 동안 고개를 돌리지 못했다.
그녀는 환상 속에서 ‘형부’라고 불러왔던 그 사람이, 차가운 목소리로 ‘태손을 지키지 못했으니, 태자비와 함께 묻히거라.’라고 했던 장면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는 한 번도 큰언니가 어떤지는 묻지 않았지!’
더욱 가슴에서 지우기 어려운 것은, 그가 고개를 끄덕여 정요에게 큰언니의 배를 가르게 했다는 점이었다.
온화하고 친절한 큰언니가, 한 번도 사람에게 큰소리를 친 적이 없는 큰언니가, 태자비의 신분에 걸맞기 위해 어려서부터 열심히 공부한 큰언니가, 그 어두운 방에 외롭게 누워있고, 하체는 발가벗겨져 있으며, 배는 갈라져 있는, 그 조금의 존엄성도 남겨주지 않은 시체가 된 모습을 떠올리면, 정미는 그 두 사람을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 용서할 수 없는 한 사람은 정요였고, 다른 한 사람은 태자였다.
“전하.”
정아는 의외라는 듯한 표정으로 급히 몸을 일으켜 침상에서 내려왔다.
태자는 최근 일 년간 초하루와 보름날, 그리고 확실한 배란일 외에는 한 번도 다른 때에 찾아온 적이 없었다.
한 씨가 급히 몸을 돌려 예를 갖췄다.
“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정미가 아무 반응이 없자, 한 씨는 몰래 이를 갈며 정미를 조용히 잡아당겼다.
정미는 그제야 몸을 돌려, 한 씨 가까이에 붙어서 인사를 올렸다.
“태자 전하께 문안드리옵니다.”
태자가 안으로 걸어 들어가며 말했다.
“그리 예를 갖추실 필요 없다. 어서 일어나거라.”
그의 시선이 정미를 훑다가 생각에 잠긴 표정을 짓더니, 정아를 흘끗 쳐다봤다.
정아가 웃으며 말했다.
“전하께서 몰라보시나 봅니다. 정미입니다.”
“셋째란 말이냐?”
태자는 놀랐다는 듯 눈썹을 치켜세웠고, 고개를 숙인 소녀의 희고 부드러우며 윤기 있는 목덜미를 바라보았다.
“어느 아가씨인가 생각했다. 어찌 조금 달라진 듯하구나.”
태자는 말하면서 다가와, 정미와 가까운 곳에 섰다.
정미는 고개를 반쯤 숙이고, 네 발의 이무기가 수놓인 검정 신발이 자신과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것을 보자, 마음속에서 한기가 치밀어올라 무의식적으로 뒤로 반걸음 물러섰다.
그동안 정미는 태자와, 다른 집안의 형부들과 마찬가지로 친근하게 지내왔다. 그의 앞에서 절대 고분고분하게 굴지 않았고, 묻는 말에 통쾌하게 대답하곤 했다. 그러나 지금 정미는 처음으로 태자의 질문에 고개를 숙이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정아는 어린 동생이 최근 일 년간 여러 가지 일을 겪었고, 크게 아팠으며, 궁에 들어온 지도 아주 오래되었으니 태자가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다고 생각하여 대신 웃으며 설명했다.
“전하, 정미는 최근 몸이 좋지 않아 살이 빠지고 하얘졌습니다. 언뜻 보면 달라 보이지만, 사실 자세히 보면 그리 달라진 게 없습니다.”
“그런가?”
태자는 흥미로운 듯 정미를 살펴보았고, 호기심이 묻어나는 말투로 말했다.
“그럼 그만 고개를 숙이고 내게 얼굴을 보이거라. 나중에 길에서 마주쳤을 때 처제도 못 알아보면, 짐이 웃음거리가 되지 않겠느냐.”
태자의 목소리는 나른하면서도 낮아 듣기 좋았으나, 정미의 귀에는 뱀이 제 몸을 휘감으며 지나가는 것처럼 미끄럽고 차갑게 느껴져 비명을 지르고만 싶었다.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겉과 속이 다를 수 있단 말이야?’
늘 궁에 들어와 다 같이 화기애애하게 지냈던 터라, 정미는 저도 모르게 태자를 형부라고 여기곤 했고, 심지어 가끔 그가 큰언니에게 냉담하다는 말을 들어도 믿지 않았다.
‘그랬던 사람이 난산하다 죽은 큰언니에게 그토록 차갑게 대하다니!’
“이게 어찌 된 일이더냐. 반 년 동안 궁에 오지 않더니, 짐을 보고 고개도 들지 못하는 것인가?”
태자가 유유히 물었다.
예전엔 까맣고 통통했던 처제를 자세히 살펴본 적이 없었기에, 지금 그녀의 예전 모습을 떠올리려고 하니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았다. 그저 얼굴에 무더기로 났던 여드름이 잘라도 또 나는 부추 같았고, 굳이 한 번 더 쳐다보는 인내심조차 없게 했던 것만이 기억났다.
하지만 지금 이 뽀얀 목덜미를 보니 그는 그 까맣고 통통했던 처제가 도대체 어떻게 변했는지 보고 싶은 마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태자의 재촉하는 목소리에 정미는 놀라 정신이 들었다.
‘그래, 앞으로 그 험난한 길을 걸으며 최선을 다해서 가족들을 구해야 하는데, 다른 사람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여선 안 되지.’
정미가 약한 모습을 보여봤자 다른 사람들은 그녀를 무시하며 철없는 아가씨로 여길 뿐이었다. 그녀의 말은 사람들에게 조금의 영향력도 없을 것이고, 재난에 빠진 가족을 구하고 싶다고 해도 아무도 들어주지 않을 터였다.
정미가 굳세져야만, 최소한 다른 사람들 앞에서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아야만, 말과 행동이 다른 사람들에게 믿음을 줄 수 있을 것이고, 무게감을 가질 수 있게 되리라.
여기까지 생각이 닿자, 정미는 천천히 고개를 들고 입꼬리를 살짝 올린 채 차분하게 태자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정미는 태자의 눈에 알 수 없는 빛이 스쳐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이제 막 열네 살이 된 소녀는, 그 빛에 흠모하는 눈빛이 섞여 있는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여자아이 특유의 직감으로 태자가 그녀를 바라보는 시선이 평소보다 오래 머문다는 것은 느낄 수 있었고, 정미는 이에 마음이 불편해져 입술을 꾹 다물었다.
황궁에서 태어나고 자라 아래에 만인을 거느리는 황태자로서, 그는 어려서부터 많은 절세미인을 보아온 바였다. 하지만 정미의 변화에 한순간 넋을 잃었던 그는, 뒤늦게 정신이 들어 태연히 웃으며 말했다.
“셋째 소저가 이렇게 아름다워졌을 줄은 몰랐군. 역시 여인은 성장할 때까지 여러 번 모습이 바뀌는 모양이구나.”
정미가 무릎을 꿇고 예를 갖췄다.
“태자 전하의 칭찬에 감사드립니다.”
태자가 눈썹을 치켜올리며 정아에게 말했다.
“태자비, 보게. 예전에 이 아이가 짐에게 항상 형부라 불렀었는데, 지금은 말할 때마다 ‘태자 전하’라 하는군. 오랫동안 입궁하지 않아 많이 소원해진 것 같은데, 이것은 그대의 잘못 아니겠소.”
정아는 태자가 셋째 동생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을 이상하게 여겼지만, 내색하지 않고 온화하게 웃었다.
“모두 신첩의 잘못입니다. 이후 신첩이 자주 정미를 불러오도록 하겠습니다.”
태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대가 회임 중이고, 태의가 본궁이 생각이 많아 마음을 편히 가져야 한다고 했으니, 자주 동생들을 불러 기분 전환을 하도록 하시오.”
그러고는 그제야 무언가 생각난 듯 말했다.
“예전엔 둘째 아가씨도 부인과 함께 궁에 왔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이번엔 오지 않았습니까?”
한 씨는 태자가 이를 묻는 것이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해 곧장 대답했다.
“태자비마마께서 회임을 하셨고, 아직 삼 개월도 지나지 않았으니, 사람이 많으면 너무 소란스러울까 그 아이는 집에 남도록 했습니다.”
한 씨는 영리한 생각이 든 듯 정미를 가리키며 말했다.
“만약 이 아이가 얼마 전 아파서, 태자비마마께서 걱정하지 않으셨다면 이번에 정미도 데려오지 않았을 겁니다.”
태자가 웃었다.
“부인은 지나치게 신중하시군요. 어린 아가씨들이 소란을 피워봤자 얼마나 피운다고. 예전에 셋째 소저도 간이 제법 컸던 것 같은데, 지금은 차분하고 얌전하지 않습니까. 앞으로도 아가씨들을 데리고 오시오. 태자비가 여동생들을 좋아하니, 동생들을 보면 기뻐하겠지.”
“예, 알겠습니다.”
정미는 이를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다가 갑자기 눈살을 찌푸렸다.
‘내가 너무 지나치게 생각이 많은 걸까, 아니면 그 가식적인 자매의 우정으로부터 빠져나온 후에야 비로소 잘 보이는 걸까? 왜 태자가 아주 이상하다고 느껴지지?’
그의 말이 듣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태자의 말을 들은 정미는 한 가지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태자가 정요를 궁에 들이고 싶어 하는구나!’
‘그리고, 내가 어렵게 어머니를 설득하여 둘째 언니를 집에 내버려 두게 했는데, 태자의 몇 마디에 그 노력이 물거품이 되고 말았어!’
정미는 이전에 한지에게 연모하는 마음을 고백한 적 있었지만, 소녀의 그런 감정은 때론 그저 사람들을 실소하게 만드는 것이기도 했다.
정미는 지 오라버니에게 시집간다면 계속 외가에 살 수 있고, 외조모님과 다른 사람들과 영원히 함께 할 수 있기에 좋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지금, 아직 남녀의 정을 진정으로 알지도 못하는 소녀는 그리 깊은 곳까지 생각이 닿지 않았고, 그저 태자가 아주, 아주 많이 이상하다는 것만 알 수 있었다.
‘다 큰 어른이 큰언니 배 속의 아이에게 관심을 가지긴커녕, 정요가 궁에 들어오고 말고를 왜 신경 쓰는 거야?’
“그리고 짐이 조금 전 들은 바로는, 태자비의 배 속에 있는 아이가 황손자라 생각한다지?”
태자가 궁금한 표정으로 정미를 바라보자, 정미는 침착한 얼굴로 대답했다.
“예.”
태자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몹시 궁금해지는구나. 이를 어찌 알아본 것이냐?”
한 씨는 정미가 또 허튼소리를 할까 급히 입을 열었다.
“태자 전하, 딸아이가 어린아이 같은 말을 하는 것뿐입니다. 진담으로 여기시진 마세요.”
“짐이 보기엔 농담을 하는 것 같지 않네. 게다가, 어찌 황가 앞에서 농담을 할 수 있겠는가.”
태자가 무덤덤하게 내뱉은 말에, 한 씨와 태자비의 얼굴이 동시에 창백해졌다.
정미는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미소지으며 말했다.
“어머니, 태자 전하의 말씀이 맞습니다. 저는 농담을 하지 않았는 걸요. 정말로 태자비마마께서 황손자를 낳으실 것 같습니다.”
태자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오, 왜 그렇게 생각하는가?”
“직감입니다.”
정미가 고개를 갸웃하며, 또래 소녀들 특유의 순진함을 보였다.
“태자비마마를 보자마자 마음속에, 마마께서 제게 남자아이 조카를 낳아주실 거란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 외에는 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어요. 전하, 보세요. 저는 분명 마음속의 진심을 말한 것이지, 절대 농담이 아닙니다!”
“그래, 그래. 셋째 소저는 농담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