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교난-48화 (48/375)

48화. 태자비를 망진하다

“어머니.”

정미가 고개를 들어 한 씨의 눈을 그윽하게 쳐다봤다.

“어찌 되었든 간에, 어머니께선 아셔야 해요. 만약 지 오라버니가 둘째 언니를 좋아하는 것을 알았다면, 저는 절대 오라버니에게 마음을 털어놓는 멍청한 짓을 저지르지는 않았을 거라는 것을요.”

한 씨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 씨 또한 정미의 성정이 거칠고 또 제멋대로 구는 경향이 있음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정말 정미의 말처럼 한지가 예전부터 정요에게 정을 품고 있었다고 해도, 이 말만 듣고는 모조리 믿을 수가 없었다.

정미는 조심스럽게 한 씨의 안색을 살폈다. 그녀가 조금 동요하는 것 같자,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정미는 한 씨가 제 말을 모두 믿을 거라곤 전혀 기대하지 않았다. 그저 그녀의 말을 귀담아 들어주기만 해도 좋은 출발이었다.

“못 믿으시겠다면 기다려보세요. 지 오라버니가 둘째 언니에게 푹 빠져있으니, 조만간 어머니께 부탁하러 올 거예요. 그저 이번만, 둘째 언니를 데리고 궁에 가지 않으면 안 될까요?”

한 씨가 잠시 망설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이렇게 말하니, 일단 네 둘째 언니를 집에 남게 하도록 하마. 하지만 한지가 그런 뜻이 없다는 게 나중에 밝혀지면, 너도 더 이상 허튼 생각은 말거라. 그동안 정요가 네게 얼마나 신경을 많이 썼는데. 나중에 네 곁에 아무도 남지 않았을 때 후회한다면, 그땐 정말 늦은 것을 테야.”

한 씨는 자신의 말에 감정이 일어, 일찍 죽은 여동생 한옥주를 떠올렸다.

정미는 이 결과에 매우 만족했다.

‘이렇게 일을 처리해도 되는구나. 예전에 나는 너무 어리석어서 손해만 보고 좋은 결과를 얻지 못했던 거야.’

그때 마침 시종이 정요가 왔음을 알렸다.

“부인, 둘째 아가씨께서 오셨습니다.”

“들라 해라.”

옅은 자줏빛의 문발이 걷히고, 정요가 걸어들어왔다.

정요는 푸르스름한 회색 피풍을 두르고 있었으며, 안에는 노란색에 풀색 테두리가 둘린 윗옷과 수홍색(*水紅色: 회색빛을 띤 연한 붉은색) 치마를 입고 있었다. 이렇게 꾸며 입으니 명절 분위기가 나면서도 청아했고, 마치 분홍색 꽃잎 속에서 붉은 꽃봉오리가 드러난 수련처럼 단아해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어머니, 정미야.”

정요는 우선 말없이 웃었다.

“오늘 정미가 저보다 일찍 왔네요. 어머니, 제가 너무 늦게 온 건 아니지요?”

한 씨는 사실 말은 사납게 해도 마음은 여린 사람이었기에, 서녀의 온화한 태도를 보자 망설임이 일었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정미를 흘끗 쳐다봤다. 정미의 얼굴은, 마치 서리를 한 층 덮은 듯 창백했다.

‘됐다, 이번 한 번만이야. 나중에 정미의 말이 허튼소리라는 것이 밝혀지면, 그때 이 아이에게 다시 잘해주면 되지.’

정요는 한 씨의 안색을 살폈고, 마음속에서 불길한 예감을 느껴 가져온 선물을 펼쳐 보였다.

“어머니, 제가 태자비마마께 드릴 선물이에요. 괜찮은 것 같나요?”

한 씨와 정미가 동시에 이를 들여다봤다.

선물은 한 장의 베개 수건이었고, 위에는 살아 움직이는 듯한 통통한 남자아이 두 명이 수놓아져 있었다. 두 남자아이는 마주 보고 앉아있었고, 한 명은 생글생글 웃으며 석류를 먹는 중이었다. 다른 한 명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두 손을 뻗는 모습이었고, 손바닥 위에는 박쥐가 한 마리씩 놓여 있었다.

심지어 반짝이는 석류알들에는 하나하나 윤기가 가득해, 언뜻 보면 진짜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어머니, 어때요?”

정요가 웃음을 머금으며 물어봤고, 마음속으로 한 씨가 분명 이 베개 수건을 태자비마마께 드리는 것을 매우 기뻐할 거라 확신했다.

“정말 귀한 것이구나! 의미도 좋고, 자수 모양도 신선해. 게다가 자수 실력이 아주 정교하고 완벽하구나.”

한 씨는 연거푸 칭찬하다 마지막으로 말했다.

“요야, 태자비마마께서 홑몸이 아니시니, 너무 많은 사람이 찾아가면 폐를 끼칠까 걱정이 되는구나. 이번엔 네가 집에 남거라. 내가 정미를 데려가 뵙고 오면 된다.”

“하지만…….”

정요는 자칫 예의를 잃을 뻔했으나, 한 씨의 눈빛을 마주하자 빠르게 마음을 다잡았다.

“어머니, 저도 태자비마마를 매우 염려하고 있는 걸요.”

한 씨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좋은 아이인 걸 알고 있다. 걱정하지 말거라. 이따 우리가 궁에서 돌아와 태자비마마의 근황을 네게 알려줄 테니.”

“그럼 이 베개 수건은…….”

“정미가 대신 가져가면 되지.”

한 씨가 재빨리 말했다.

그렇게 한 씨와 정미 두 모녀가 떠날 때까지, 정요는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지, 지금 내가 며칠 밤을 새서 수놓은 베개 수건은 궁에 들어가고, 나는 여기 남겨진 거야?’

* * *

정요가 울든 말든, 정미는 한 씨를 따라 황궁에 들어갔다.

두 사람은 궁인을 따라 동궁으로 향했다.

붉은 벽과 푸른 기와, 높은 처마와 서수(*瑞獸: 상서로운 징조로 나타나는 진슴) 조각, 기화요초(*琪花瑤草: 옥같이 고운 풀에 핀 구슬같이 아름다운 꽃)들이 황금빛과 푸른빛으로 휘황찬란한 궁성을 장식했고, 웅장하고 장엄한 분위기에 아름다움을 더했다. 걸어오는 길 모두 정미에겐 익숙한 풍경이었다.

하지만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낯섦이 느껴지기도 했다.

금칠한 현판과 주홍 대문은 날이 아직 이른 탓인지 살짝 음침해 보였고, 한눈에 보기에도 깊은 밤의 흐릿함을 가지고 있어 멀리서 보면 잘 보이지 않았다. 궁인을 따라 걸어 들어가자니 사나운 짐승의 거대한 입속으로 들어가는 듯한 긴장감이 들었다.

그러자 정미의 발걸음이 무의식중에도 느려졌다.

“미야?”

한 씨가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자, 정미가 고개를 들어 옅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한 씨가 잠시 망설이더니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발의 상처가 아직 다 낫지 않았니?”

정미는 한 씨의 물음이 매우 의외인 듯 잠시 멍해졌다가 말했다.

“다 나았어요.”

말을 하는 사이 두 사람은 동궁에 도착할 수 있었고, 관례에 따르면 한동안 대기해야 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궁녀가 바친 차를 몇 모금밖에 들이키지 않았을 때, 내시가 와서 말했다.

“부인, 셋째 아가씨, 태자비마마께서 부르십니다.”

모녀는 예상 밖이라는 눈빛으로 서로를 마주 보았다.

한 씨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설마 정아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이어 이런 생각을 한 자신에게 침을 뱉고 싶어졌다.

‘퉤퉤, 새해부터 무슨 재수 없는 소리를. 정아는 복이 두텁고 팔자가 귀한 아이이고, 게다가 황제의 비호까지 받고 있는데, 무슨 일이 생길 리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한 씨의 발걸음은 점점 빨라져만 갔다.

정미는 이를 보고 얼른 뒤따랐고, 일찍이 ‘지통부’를 복용한 덕분에 발이 아프지는 않았다.

* * *

전내로 들어서자 화려함이 어두움을 몰아낸 광경이 펼쳐졌다. 두 사람이 내실로 들어가자, 태자비 정아가 침상에 가로누운 채로 외쳤다.

“오셨군요!”

한 씨가 얼른 정미를 잡아당기며 무릎을 꿇었다.

“태자비마마께 인사올립니다.”

“얼른 일어나세요…….”

정아가 일어나 앉아 내려와서 한 씨를 부축하려 하자, 옆에 있던 유모가 얼른 한 씨를 일으켜 세웠다.

정아가 불평했다.

“어머니께선 왜 저에게까지 그렇게 예의를 차리십니까?”

“예의를 버려선 안 되지요.”

한 씨는 입에서 나오는 대로 한마디 해 궁인들의 입을 틀어막은 뒤, 정아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태자비마마, 살이 빠지셨네요.”

정아는 한 씨를 잡아당겨 자리에 앉혔고, 고개를 들어 정미에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정미도 내 옆에 와 앉으렴.”

두 사람이 자리에 앉자 정아가 궁인들을 훑어보며 말했다.

“너희는 물러나 있거라.”

“예.”

궁인들이 줄지어 나갔고, 이내 유모 한 명과 궁녀 두 명만 남아 정아와 멀지 않은 곳에 서 있게끔 했다.

정미는 역시 황가의 규율이라고 생각했다. 하고 싶은 말이 가득했지만, 이렇게 보고 있으니 한 글자도 내뱉고 싶지 않아지는 듯했다.

“마마, 요즘 식사는 잘 드시고 계십니까? 입덧이 심하진 않으시고요?”

“괜찮습니다.”

정아는 한 씨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아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미는 슬며시 눈을 들어, 아혜가 가르쳐준 이론대로 정아의 얼굴을 살폈다.

눈꺼풀이 조금 부어있었고, 입술색이 창백해 얼굴빛이 좋지 않았다. 부의 태산과의 이론대로라면 영양부족과 가벼운 빈혈의 증상이었다.

정미는 처음으로 이론과 맞는 망진(*望診: 겉으로 보이는 모습으로 진단하는 것)을 했고, 망설이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몰래 아혜에게 물었다.

그러자 아혜가 말했다.

「나에겐 사람이 보이지 않는데, 네 말만 듣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겠어? 이렇게 하자, 내게 네 눈을 빌려 보게 해줘.」

정미는 잠시 고민하다가 승낙했고, 아혜의 목소리가 빠르게 울렸다.

「정미, 이마 쪽과 다른 부분이 어떻게 다른지 자세히 살펴봐.」

정미가 열심히 살펴보더니 입을 열었다.

“여드름 두 개가 있고, 분으로 열심히 가려놨어.”

아혜가 귀띔했다.

「그게 아니라 이마 끝을 봐야지!」

정미가 계속 답을 내지 못하자, 아혜는 결국 참지 못하고 알려주었다.

「이마 끝의 피부색이 다른 곳보다 어둡잖아. 마음에 부담이 너무 커서 그런 걸 거야. 말해주자면, 회임했을 때 마음이 너무 힘들면 유산할 가능성이 커져.」

“그럼 어떡해?”

정미는 긴장이 되기 시작했다.

「너무 긴장할 필요 없어. 그저 그럴 수도 있다고 말해준 것뿐이야. 산모에게는 회임부터 출산까지 닥칠 수 있는 상황이 너무 많으니까. 돌아가면 우선 네게 태아를 지키는 부적인 ‘보태부(保胎符)’를 가르쳐줄게. 지금은 그저 네 언니에게 마음을 편히 먹게 하면 돼.」

“정미―.”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정미가 정신이 들어 말했다.

“응?”

정아가 웃으며 물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길래 그렇게 진지해?”

“저는……”

정미는 급히 둘러댈 말을 찾았다.

“여인은 정말 신기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자라면 여기에 아기가 생길 수 있다니요.”

어린 동생의 귀여운 말에 정아가 빙긋 웃었다.

정아도 예전엔 그런 생각을 했었다. 여인이 자라서 시집을 가고, 그저 사내와 한 방에서 잠을 자기만 하면 아이가 생기는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열세 살이 되던 그해, 궁에서 온 교육 유모가 내게 그렇고 그런 것들을 가르쳐주었지…….’

“정미는 언니가 황손자를 낳을 것 같니, 아니면 황손녀를 낳을 것 같니?”

정아는 묻자마자 바로 후회했다.

현청관의 북명진인 아래에는 소진(素塵)이라는 이름을 가진 여제자가 하나 있었는데, 실력이 나쁘지 않아 비빈궁에 자주 왕래해 비빈들의 총애를 받곤 했다. 정아는 얼마 전 입덧이 너무 심했고, 태의원이 처방한 약을 먹어도 효과가 없자, 귀비가 그 소진 도사를 불러 모셔온 적이 있었다.

소진 도사는 그녀에게 부수를 먹였고, 입덧은 꽤 괜찮아졌다. 그러나 정아에겐 다른 근심거리가 생겼다.

소진 도사가 말하기를, 정아의 태아는 십중팔구 여자아이라고 했던 것이었다.

만약 황손자를 낳고 싶다면, 소진 도사가 특별 제조한 부수를 태아가 삼 개월이 넘기 전에 마셔서 일정한 확률로 태아의 성별을 바꿀 수 있다고 했다.

여자아이가 남자아이로 변한다니, 정아의 마음이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면 믿지 않을 말이었다.

하지만 그 누구보다도 정아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있었다. 황태자는 그녀에게 매우 냉담했고, 만약 그 초하루와 보름의 규정이 없었다면 그녀는 태자의 얼굴조차 보기 어려웠을 것이다.

‘만약 이 아이가 여자아이라면…….’

정아는 더 이상 생각하기 싫었지만, 성별의 바꾸는 부수를 먹자니 또 결심을 내리지 못했다,

자식은 인연인데, 강제로 성별을 바꾸는 건 하늘의 뜻을 거스르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이 말을 한 사람은 또 현청관의 도사이고…….’

그동안 정아는 이 생각을 하느라 악마의 술수에 걸려든 듯 혼란스러워했고, 결국 참지 못하고 정미에게 물어봐 소녀를 곤란하게 한 것이다.

한 씨조차 정아의 질문에 난처함을 느꼈다. 특히 못 미더운 정미에게 물으니, 만약 저 녀석이 진지하게 여자아이라고 대답하면, 정아의 근심을 더하는 것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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