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직언
그렇게 정구백네 가족들이 떠나자, 정철은 문 앞에 서 있는 팔근을 흘겨보고는 다시 정미를 바라봤다.
“미미, 또 장난을 친 거니?”
정미는 눈썹을 치켜세우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당숙모의 말이 듣기 싫어서였지만 오라버니의 기분을 상하게 할까 정미는 그저 말을 아끼기로 했다. 어쨌든 그들은 오라버니의 친부모였다.
“됐어, 오라버니랑 차나 좀 더 마실래. 너희 먼저 물러가 있으렴.”
정미는 방 안의 하인들을 모두 내보냈고, 정철의 앞으로 다가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오라버니, 나 질문이 있어.”
“물어봐.”
정철이 자리에 앉았다.
“일반 백성이 관리가 될 수 있어?”
“그렇지. 예를 들어 나를 봐. 수재(秀才)에 합격하기 전엔, 그냥 일반 백성이었잖아.”
정미가 손을 내저었다.
“오라버니 같은 경우 말고. 예를 들어…….”
정미는 셋째 숙부를 언급했다.
“예를 들어 셋째 숙부님 같은 경우. 아니면 셋째 숙부님보다 나이가 더 많은 경우. 게다가 글도 모르고, 집안은 가난해. 그럼 어떻게 해야 관리가 될 수 있을까?”
정미는 견문이 좁은 자신을 원망했으나, 다행히 정미의 마음속에 둘째 오라버니는 못 하는 것이 없는 사람이었다.
역시나 정철이 바로 대답했다.
“꿈에선 가능하지.”
“오라버니!”
정철이 손바닥을 펴보이며 정미를 달랬다.
“미미, 네가 말한 조건으로는 정말로 꿈에서나 가능해.”
“누가 그래. 우리 고조부님도 유랑자 출신이시잖아!”
정미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오라버니, 나 정말 궁금하단 말이야. 잘 생각해봐.”
정철은 잠시 사색에 잠기더니 말했다.
“그런 극소수의 경우를 보자면, 세 가지 상황일 때 제일 가능성 있어. 첫 번째는 뜻밖의 횡재를 하는 거지, 재물로 실권이 없는 작은 관직을 사는 경우. 두 번째는 고조부님처럼 특수한 능력이 있거나, 공교롭게 윗사람들이 좋아하는 일을 했을 경우 공을 세웠다고 생각해 윗사람들이 은혜를 베풀어 관직을 주기도 해. 세 번째는 자식이 출세하여 부모에게도 은혜가 가는 경우. 예를 들어 지금의 황후마마의 아버지가 승은백(承恩伯)의 직위를 받은 것처럼.”
정미는 정철의 자세한 설명을 듣고 점점 깨달아 갔으나, 여태 정구백네 일가에게 호감과 관심이 별로 없었던 탓에, 어떤 경우가 가장 가능성 있을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었다.
정미는 어쩔 수 없이 앞으로는 정구백네 소식에 관심을 가지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왜 이런 이상한 질문을 하는 거야?”
정철이 그리 묻자, 정미는 잠깐 생각하다가 그에게 이야기를 조금 털어놓기로 결정했다.
“전에 내가 이상한 꿈을 꾸었는데, 꿈에서 당숙부님이 관직에 올랐거든. 그래서 계속 이상하다고 생각했어.”
정철이 실소했다.
“어쩐지 오늘 네가 계속 당숙부님을 쳐다보더니. 나는 무슨 일이라도 있는 줄 알았어. 네 꿈이 희한하긴 하다. 하지만 당숙부님이 정말 관직에 오른다면 좋은 일인데, 왜 정미가 기뻐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까?”
정미가 입을 삐죽였다.
“좋은 일이 아냐. 당숙부님이 관직에 올랐다가 만약 오라버니를 다시 데리고 가면 어떡해? 어렸을 때 유모가 말하는 걸 들었는데, 처음에 당숙부님 집안은 밥을 먹지 못할 정도로 가난했고, 나중에서야 점점 좋아졌다고 했어. 그 때문에 오라버니를 우리 어머니 아래의 양자로 보낸 거라고. 만약 당숙부님이 정말 관직에 오르면, 후회하는 마음이 들지도 모르잖아!”
“쓸데없는 생각이야. 그 사람들이 어떻게 후회할 수 있겠어.”
정철이 담담하게 말하자 정미가 의아한 듯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정철이 가볍게 웃었다.
“내 말은, 네 나이에 이런 걸 생각할 필요 없다는 뜻이야. 불가능한 일이라는 건 말할 것도 없고, 만약 정말로 당숙부님이 후회한다고 해도, 양자로 보낸 아들을 다시 데리고 가는 도리가 어디 있겠니.”
정철의 목소리는 침착하고 표정은 차분했지만, 정미는 그의 모습에서 약간의 슬픔과 자조(自嘲)를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손을 뻗어 정철의 손을 잡았고, 눈을 떨구며 한탄했다.
“다른 집에선 안 된다지만, 우리집은 확실치 않잖아…….”
다른 집안에서 양자를 들일 때는 아들이 없는 경우겠으나, 정미의 아버지에겐 이미 두 명의 아들이 호시탐탐 자리를 노리고 있었다. 정미는 아버지가 둘째 오라버니를 다시 돌려보내지 못해서 한스러울까 두려웠다!
“그렇다고 해도, 오라버니에게 가장 소중한 여동생은 여전히 너야. 바보야, 이제 안심되지?”
정미의 마음속은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걱정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얼굴에 티를 낼 엄두가 나지 않아 그저 옅은 웃음만 지어 보이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 * *
어쨌든 그들은 정월 초하루를 무사히 넘겼다. 정미는 비서거로 돌아가 신을 벗고 오른발의 상처가 더 심해진 것을 발견하자, 급히 환안에게 최고급 연고를 가져와 바르게 했다. 이어 간단히 씻고는 마침내 침상에 누웠다.
그녀는 갑자기 베개가 높다고 느껴져, 눈썹을 치켜세우며 일어나 앉아 베개를 치웠다. 그러자 베개 아래에 붉은 나비매듭으로 묶여있는 네모난 나무상자가 보였다.
“이게 뭐야?”
정미가 환안을 흘겨봤다.
그러자 환안이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정미는 이번엔 화미를 쳐다봤고, 화미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소인도 모릅니다. 저는 이불을 정리하던 중에 발견했는데, 괜히 아가씨의 물건을 망가트릴까 봐 건들지 않았어요.”
“그럼 왜 나에게 말하지 않았어?”
정미는 말을 하며 매듭을 푼 뒤, 상자를 열었다.
“와, 엄청 예뻐요!”
화미가 놀라운 듯 탄성을 질렀다.
상자 안은 서른여섯 개의 칸으로 나뉘어 있었고, 각 칸에는 나무인형이 들어있었다. 크기는 겨우 성인의 집게손가락만 했지만, 이목구비는 또렷하여 생동감이 넘쳤다. 인물의 표정과 옷의 주름마저 선명하게 보였다.
정미는 손끝으로 나무인형을 만지며 중얼거렸다.
“이건 모두 《이지취담》의 인물들이잖아!”
《이지취담》은 서재에 예전부터 있었던 책으로, 세상에 알려진 지 오래된 것이었다. 정미에게 아주 익숙한 책이었지만, 길거리에서 이와 관련된 나무인형을 본 적은 없었다.
더 생각할 필요도 없이, 이건 정철이 직접 조각해 그녀에게 새해 선물로 준 것이 분명했다.
정미의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고, 나무 인형들을 하나씩 자세히 살펴본 정미는 그제야 여운을 남긴 채 상자를 덮고 적당히 정리해두었다.
* * *
그날 밤, 정미는 기이하고 현란한 꿈을 꾸었다. 그러나 깨어난 뒤에는 참을 수 없는 피곤함만 느껴질 뿐, 무슨 내용이었는지에 대해선 기억나지 않았다.
정미는 옷을 차려입고 한 씨에게로 가 곧바로 말했다.
“어머니, 오늘 둘째 언니와 함께 가고 싶지 않아요.”
“왜 그러는 것이야?”
한 씨의 관자놀이가 뻐근해졌다. 이 아이가 또 병이 난 것일까?
“둘째 언니는 지 오라버니가 나 아닌 언니를 좋아하는 걸 알고 있었으면서도, 내가 오라버니에게 고백하도록 격려했어요. 결국 전 창피를 당했구요. 이번에 궁에 들어갈 때, 저는 모르지만 언니는 아는 일이 또 있을까 봐, 그래서 또 창피를 당할까 두려워요.”
정미가 아무 생각 없이 이 말들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도 완곡하게 돌려 말하고 싶었지만, 정요와 이렇게 오랫동안 친하게 지내왔던 데다가, 심지어 처음엔 정미가 주동적으로 정요를 데리고 궁에 들어가 큰언니를 보러 갔었으니, 당장 정요를 집에 둘 수 있을 만한 다른 이유를 떠올릴 수가 없었다.
정미는 머리를 쥐어짜며 이유를 생각하다가 한 씨를 보는 그 순간 바로 번쩍 한 가지를 생각해낸 것이었다.
한 씨는 그녀의 어머니였다. 어머니로서 딸을 좋아하든 싫어하든, 이 관계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그녀의 겉모습이 출중해지면 어머니도 따라서 체면이 설 터였다. 마치 그날, 그저 조금 예뻐졌을 뿐인데도 한 씨는 뿌듯함을 감추지 못했던 것처럼.
그러니까 정미의 체면이 구겨지면, 어머니의 체면도 구겨지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때문에 정미는 이를 직접 말하지 않을 필요가 없었다. 최악의 경우라고 해봤자 예전처럼 정요를 데리고 궁에 들어가는 일뿐이었다. 만약 어머니께서 정미의 말을 믿어주신다면, 아니, 믿어주지 않는다고 해도, 정요에게 조금의 의심이라도 생긴다면, 시간이 지날수록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워, 지금처럼 겉으로만 화목한 것보다 훨씬 상황이 나아질 터였다.
‘최소한, 오늘부터 난 어머니 앞에서 정요와 친한 척하지 않아도 되는 거지.’
“미야, 무슨 말을 하는 거니?”
한 씨가 똑바로 앉으며 재촉했다.
“다시 말해보렴. 내가 잘못 들은 거니?”
불과 일 년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 동안, 정미의 일상에는 아주 큰 변화가 생겼다. 마치 세월의 신이 힘이라도 쓴 듯, 아직 시집갈 나이도 되지 않은 소녀가 어느 방면에서 빠르게 성장하게 된 것이었다.
정미는 조급하게 굴면 말의 신뢰도만 떨어트린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조용히 숨을 마셔 말의 속도를 늦추고, 차분한 표정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어머니, 전에 제가 청설림에서 넘어져 기절한 일을 기억하고 계시지요?”
“그래.”
한 씨는 정미가 이렇게 차분하고 엄숙하게 말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기에, 자신도 모르게 덩달아 진지해졌다.
“그때 현장에 지 오라버니 외에도 둘째 언니가 있지 않았나요? 나중에 제가 깨어났을 때, 외조모님께선 둘째 언니가 넘어지고, 저와 오라버니가 동시에 잡으러 가다가, 오라버니가 실수로 저와 부딪혀 넘어지게 한 거라고 하시더군요. 그러고는 오라버니와 둘째 언니에게 책을 베끼는 벌을 줬고요. 맞나요?”
“맞다.”
정미가 자조하며 웃었다.
“하지만, 그때 저는 기절해있었고 이후 아무도 저에게 한마디도 물어보지 않더군요. 아주 오래 기다렸는데, 저는 결국 지 오라버니의 꾸짖음만 듣게 되었습니다.”
“꾸짖다니? 미야, 어미는 네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구나.”
한 씨가 눈살을 찌푸렸다.
“사실 별거 아니에요. 그저 둘째 언니가 조심하지 않은 탓에 미끄러져 넘어졌고, 지 오라버니는 제가 언니를 밀친 것으로 착각해 달려와 저를 밀쳐 넘어트린 것뿐이니까요.”
정미는 어머니라는 허울만 있을 뿐, 제게 관심을 가져준 적이 거의 없는 한 씨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하지만 말하고 보니,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는 걸 깨달았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잔혹하게 죽어가는 걸 무능하게 지켜보는 고통보다 어려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한 씨가 실소했다.
“미야, 농담하는 것이지? 한지는 어릴 때부터 네게 그렇게 잘해주던 아이 아니니. 작년의 일로 조금 피하긴 했지만 어쨌든 네가 그 애의 사촌 동생인데, 정요가 스스로 넘어진 건 둘째 치고, 한지는 정미 네가 정요를 밀친 것을 봤다고 한들 너를 해칠 아이가 아니다.”
“그럼 어머니께서는 제가 둘째 언니를 밀친 게 아니라, 언니 스스로 넘어졌다는 말은 믿으시는 거예요?”
한 씨는 정미의 훤하게 꿰뚫는 듯한 침착한 눈동자를 보며, 홀린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미는 잠시 멍하다가 그제야 한 씨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확인했다.
한 씨는 마음이 편치 않은 듯 시선을 옮겨,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말했다.
“그렇다고 해도, 한지가 네 둘째 언니에게 마음을 품었다고는 할 순 없는 일 아니겠니?”
정미가 웃었다.
“그건 어머니와 다른 분들 모두가 모르셔서 그래요. 사실 그때 지 오라버니는 저희를 우연히 본 것이 아니라, 갔다가 돌아온 것이거든요.”
“갔다가 돌아왔다고?”
“네, 제가 그날 무심결에 홍매나무 옆에 갔다가 지 오라버니와 언니가 서로 진심을 털어놓고 있는 것을 봤거든요. 그제야 지 오라버니가 아주 예전부터 언니를 좋아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챘지요. 하지만 둘째 언니는, 오라버니가 자신을 좋아하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제게 알려주지 않았어요.”
정미의 마음속에 씁쓸함과 슬픔이 차올랐다.
십여 년간 진심으로 친하게 지냈던 자매가 어쩌다 한순간에 이렇게 되었을까?
심지어, 정동처럼 서로 쳐다보기도 싫은 사이보다 못한 수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