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교난-46화 (46/375)

46화. 난해함

“정미, 왜 아무 말도 안 해?”

정영이 불만스럽게 따져 묻자, 정철이 정미를 살짝 건드렸다.

정미는 그제야 정신이 든 듯 입을 열었다.

“당숙부님, 당숙모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조카딸이 새해 인사를 올립니다. 저는 한바탕 아팠던 탓에 누굴 보아도 오랫동안 못 본 사람처럼 보여, 잠시 멍해졌어요.”

“괜찮다, 괜찮아.”

정구백과 부인이 서로 한 번 마주 보더니, ‘소문이 가짜가 아니었구나, 이 조카에겐 예전 같은 분위기가 보이질 않아.’라고 생각했다.

부부 두 사람은 정철과 인사말을 몇 마디 나누었고, 정미는 그것을 모두 흘려들었다. 그저 정구백을 빤히 쳐다보며 조용히 생각했다.

‘환상 속에서 오라버니의 결말은 활에 맞아 죽는 것이었는데……. 그저 촌락에서 밭을 갈던 저 당숙부님은 어찌 구품(九品) 관복을 입고 있었던 거지?’

정미는 정구백을 쳐다보며 넋을 놓았고, 마음속에서 거친 파도가 치는 것을 느꼈다.

‘그동안 내가 봤던 것은 모두 악몽 같은 장면이었는데, 오늘 아홉째 당숙부네 식구들을 보니,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구나!’

정미는 양갓집에서 자란 규수였다. 회인백부가 아무리 사정이 좋지 않았다 한들 귀족은 귀족이었기에, 상식 정도는 알고 있었다. 예를 들어, 큰 사촌 오라버니이자 회인백 세자인 정명은 공부를 출중하게 잘하는 것은 아니었음에도 가관(加冠)을 한 후에는 관아에서 작은 업무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구백네는 그러하지 못할 터였다. 회인백부는 적계 자손들도 잘 보살피지 못하는데, 어떻게 방계 자손들까지 챙길 수 있겠는가. 게다가 정구백은 이미 사십이 넘은 사람이었고, 정미의 악몽 속의 나이가 되면 곧 오십이었다.

이른 봄추위는 살을 따갑게 했고, 바람이 소녀의 치맛자락을 살짝 말려 올라가게 해 빨간색 사슴 가죽 신발이 조금 보였다. 정미는 발을 살짝 숨기며 온몸에 한기가 도는 것을 느꼈다.

“오라버니, 나 추워.”

정미가 정철의 몸 뒤로 숨으며 말했다.

가장 가까운 사람의 생사에 관련된 일이었던지라, 소녀는 직감적으로 아홉째 당숙부네의 밝은 미래가 둘째 오라버니의 죽음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확신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리 생각해도 어찌 그리 될 수 있었던 것인지 알 수는 없었다.

“당숙부님, 당숙모님, 바람이 많이 부니, 여기 서 있지 말고 화원의 응접실로 가 앉을까요?”

정철이 공손하게 물었다.

“아니…….”

정구백은 두 글자를 내뱉자마자 뒤에 있던 부인에게 한 대 얻어맞았다.

부인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좋다. 철아, 숙모도 너와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지 못해, 늘 너를 생각하고 있었단다.”

정철의 입꼬리가 올라갔으나, 눈을 떨구며 티 내지 않으려 했다.

“당숙부님, 당숙모님, 그럼 이쪽으로 오세요.”

일행이 응접실로 향할 때, 정미는 조용히 뒤를 따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줄곧 아홉째 당숙부네 일가를 좋아하지 않았다. 당숙부와는 만나도 몇 마디 하지 않아 그나마 괜찮았지만, 당숙모는 그렇지 않았다. 매번 마주칠 때마다, 정미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예리하게 살펴보기에, 조금이라도 흠이 보일까 두려울 지경이었다. 처음엔 정미가 그 집안의 물건을 훔쳐 몸에 걸어놓았나 착각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어쨌든, 그런 느낌은 사람을 매우 불편하게 하는 종류였다.

하지만 정미는 이번엔 당숙모의 능구렁이 같은 행동에 아무 감정도 드러내지 않았고, 그저 이렇게 조용히 따라갈 뿐이었다.

이에 정철마저도 조금 이상함을 느끼고는, 고개를 돌려 동생의 기분을 살폈다.

결국 정영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

“오라버니, 왜 자꾸 정미를 보는 거야? 얼굴에 꽃이라도 피었어?”

정철의 발걸음이 멈칫하더니 이내 미소를 지어보였다.

“정미가 며칠 전에 발을 다쳐서, 오래 걷지 못할까 걱정되어서 그래.”

정영이 정미를 흘겨보며 질투했다.

“오라버니가 너를 정말 신경 써주는구나. 내 두 오라버니는 내가 아플 때 이 정도로 걱정해주지 않는데.”

정미는 파초나무 옆에서 들었던 정철의 말들 덕분에 아무 걱정도 없었고, 정영이 또 도발하자 앞으로 다가가 정철의 손을 잡으며 빙그레 웃었다.

“당연하지. 어떻게 내 둘째 오라버니와 다른 사람을 비교할 수 있겠어. 우리 오라버니는 세상에서 제일 좋은 오라버니인 걸!”

말하면서 정영을 바라보는 정미의 눈빛엔 득의만만한 반격이 담겨 있었다.

‘자신 있으면 네 오라버니라고 말해보든가. 그런데 과연 네 부모 앞에서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지금은 감히 말할 수 없겠지.’

정영의 가장 싫은 점이 바로 이것이었다.

‘매번 만날 때마다 말에 질투심이 가득 담겨서는, 우리 집안이 오라버니를 뺏어온 것처럼 말하지.’

정영의 이런 모습은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익을 봤음에도 잘난 체 하다니. 정미는 정영의 두 오라버니가 이 때문에 부모와 싸웠단 사실을 전해 들은 적도 있었다. 양자로 보낸 것이, 왜 자신들이 아닌 정철인지에 대한 의문 때문이었다.

이윽고 그들은 응접실에 도착했다. 벽 모퉁이에 있는 화로가 활활 타오르고 있었고, 방 안은 봄날처럼 따뜻했다. 새해를 맞아 일부러 밖에서 앵초꽃을 사와 상 위에 올려둔 채였고, 수선화는 창가에 놓아둔 덕에 경사스럽고 즐거운 분위기가 났다.

정미는 이를 한 번 훑어보고는 곧장 정요가 조모님에게 효도하기 위해 보낸 꽃임을 알아챘고, 입을 꾹 다물어 비웃음을 감추려 했다.

“이런, 역시 백부라 그런지 화로가 아주 활활 타는구나. 들어오자마자 외투를 못 입고 있을 정도야.”

당숙모는 아까 노부인 쪽에 있을 땐 감히 자세히 살펴보지 못했으나, 여기에 와서는 거리낌 없이 이곳저곳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이 앵초꽃이 활짝 핀 것 좀 보렴, 보기만 해도 경사스럽구나. 이 수선화는 노부인 쪽에서 본 것과 비슷하고……. 마찬가지로 하늘색 꽃병에 담겨 있구나. 아주 산뜻해. 노부인 말씀으로는, 이건 둘째 아가씨가 직접 키운 것이라지?”

아무도 대답하지 않자, 그녀는 스스로 말을 이었다.

“둘째 아가씨는 정말 영리하고 재주가 좋구나. 역시 사람들이 그 아이를 수도 제일의 재녀라고 부를 만해!”

당숙모는 그렇게 말하고는 정미의 안색을 살피며 급히 웃었다.

“둘째 부인께선 정말 복도 많지. 큰딸은 궁에 들어가 태자비가 되셨고, 둘째 딸은 고아하고 순결하잖니. 정미 너도 훌륭하다. 수도의 제일 미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야. 이게 얼마나 큰 복이란 말이냐. 그리고 철이는…….”

“쿨럭쿨럭.”

정구백이 갑자기 기침을 했다.

당숙모는 그제야 입을 다물었고, 찻잔을 들고 계속 마셔댔다. 말을 너무 많이 한 탓에 건조해졌던 목이 바로 편안해졌다.

정미는 앉아서 아홉째 당숙부네 부부를 계속 쳐다봤다.

‘저렇게 쓸데없는 말을 많이 하는데, 왜 둘째 오라버니의 근황은 묻지 않는 걸까?’

정미는 정철을 쳐다봤고, 조금 야윈 그의 옆얼굴에 갑자기 마음이 아파왔다.

둘째 오라버니는 돌아온 이후에도 편히 쉬지 못했다. 그를 진심으로 신경 쓰는 사람은 어머니와 정미뿐이었다. 이 친부모의 눈에는 정철이 들어오지 않는 듯했고, 그저 그가 가진 것들만 보이는 것 같았다.

당숙모의 주의력이 정철에게로 옮겨졌다.

“철아, 올해가 지나면 스무 살이지. 얼마 후면 관례를 치러야겠구나.”

정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가 되면, 나와 네 당숙부를 초대해주어야 한다.”

“당숙모님, 걱정하지 마세요. 당연한 일인 걸요.”

당숙모가 만족스러운 듯 웃어 보이며 정철을 살폈다.

“철이가 정말 많이 컸구나. 혼담도 꺼내야겠어.”

정철은 당숙모가 정미와 정영 앞에서 이 이야기를 꺼낼 줄 몰랐기에, 애써 침착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귀 끝이 붉어진 채 웃었다.

“저는 아직 혼인에 대해 생각해본 적 없습니다.”

“철아, 네가 이제 스무 살이다. 시골에서 스무 살이면, 낳은 아이가 뛰어다닐 때야. 생각하지 않으면 늦어버린단다. 그때가 되면 좋은 아가씨들은 다른 사람에게 시집가고 없어. 급히 생각해야지.”

“저는 정말 급하지 않습니다. 제 위의 형님은 이미 장가를 가셨고, 아래의 남동생들은 아직 어리니, 몇 년 뒤 혼담을 꺼내도 늦지 않을 겁니다.”

여자는 열다섯이면 시집을 가고, 남자는 스무 살이면 가관을 했다. 양갓집의 아들들은 공부를 하거나 무예를 익혀 이름을 떨치고 싶지, 너무 일찍 혼인하고 싶지는 않아 했다. 때문에 동년배의 형제와 자매들은 서로 다른 시기에 혼담을 꺼내곤 했다.

예를 들어 정철이 장가를 가지 않으면, 아래의 남동생들은 혼사를 논할 수 없으나 여동생들은 이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

당숙모가 웃었다.

“이 녀석아, 내 앞에서 쑥스러워 할 필요 없단다. 방금 노부인과 이야기를 나눌 때, 노부인께서 말씀하시는 것도 들었지. 이번 춘시 후에 네게 맞는 아가씨를 찾아보실 거라고 하셨다. 지금은 예전처럼 부모와 중매인의 말을 듣는 게 아니라, 너희 젊은이들의 의사도 물어봐야 하지? 예를 들어 단정하고 차분한 여인을 좋아하는지, 아니면 활발한 여인을 좋아하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두 사람이 서로 마음에 들어야 잘 지낼 테니까.”

그녀는 아주 많은 말을 하면서도 잠시도 멈추지 않았다.

정미는 당숙모의 태도를 정말 알 수가 없었다.

‘둘째 오라버니의 혼담에 당숙모님이 흥분할 게 뭐가 있어? 설마 오라버니의 아내가 숙모님을 어머니라고 불러야 한단 말이야?’

정미는 어두운 표정으로 당숙모를 차갑게 쳐다보았다. 그러나 뜻밖에도, 당숙모는 정미에게까지 물어보았다.

“미야, 너는 어떤 올케언니가 좋을 것 같니?”

당숙모의 질문에, 정철의 눈빛이 살짝 어두워져서는 정미에게로 향했다.

정미가 웃었다.

“둘째 오라버니가 고르는 거지, 제가 고르는 게 아닌걸요. 저는 오라버니가 좋다면 다 좋아요. 오라버니가 싫다면 저도 싫구요.”

정미의 대답에 당숙모는 어떻게 말을 이어야 할지 몰라 머쓱해하며 말했다.

“정미가 정말 철이 들었구나.”

당숙모는 이어서 정철을 둘러싼 혼담에 관한 혼잣말을 했고, 정미는 차가운 눈으로 지켜봤다. 그녀는 정철이 여러 번 미간을 찌푸리는 것을 발견하고는, 조용히 화미에게 눈치를 주었다.

화미는 환안보다 눈치가 빨랐고, 정미의 눈짓에 곧바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남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조용히 나갔다가 잠시 후 다시 돌아왔다.

잠시 후, 정철의 몸종 팔근(八斤)이 문 앞으로 다가왔다.

“공자님, 둘째 나리께서 부르십니다.”

정철이 일어났다.

“당숙부님, 당숙모님, 그럼 저는 이만…….”

그러자 정구백이 급히 말했다.

“얼른, 얼른 가보거라. 나도 네 당숙모와 먼저 가보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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