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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난-45화 (45/375)

45화. 새해 선물 (2)

정영은 금땅콩을 받은 뒤 조심스럽게 염낭에 넣고는, 곧바로 정철의 팔짱을 끼더니 정미에게 우쭐대며 물었다.

“정미, 오라버니가 네겐 무슨 새해 선물을 줬어?”

‘이 파렴치한 것!’

정미는 화가 나 입술까지 하얗게 질린 채 벌떡 일어났고, 가만히 팔짱을 끼고 있는 정철의 팔을 내려다봤다.

정철은 정영이 이런 행동을 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기에, 급히 팔을 뺐다. 그러나 괜히 여자아이를 아프게 할까 봐 살살 빼냈고, 이는 정미의 눈에 정철이 정영에게 더없이 부드럽게 대하는 것으로만 보였다. 정영이 방금 한 말까지 생각하면, 정미는 송곳이 제 가슴을 찌르는 듯한 통증을 느낄 지경이었다.

그녀는 화를 꾹 참으며 입꼬리를 올리고 웃었다.

“이제 어린아이도 아닌데, 오라버니에게 새해 선물을 조를 필요가 뭐 있겠어. 그리고, 선물은 자발적으로 주는 것이란다. 눈 빠지게 쳐다보면서 손을 벌리는 사람이 어디 있어?”

정영은 반짝이는 금땅콩을 떠올렸고, 이내 의기양양한 눈빛으로 헤죽 웃었다.

“다른 사람에겐 안 되지만, 오라버니에겐 가능하지. 하하, 이렇게 말을 많이 하는 것 보니 오라버니가 네겐 선물을 주지 않았나 봐?”

“누가 안 줬대?”

정미가 턱을 살짝 치켜올렸다.

“교천성의 연지와 분, 그리고 향로를 종류마다 몇 가지씩 선물해줬는걸!”

그녀는 이전에 정철이 줬던 선물을 언급하며 정영의 입을 막았다. 이어 정철을 힐끗 흘겨보고는 정색하며 말했다.

“비서거로 돌아갈 거야. 장기가 너무 재미없어!”

정철은 정미가 흘겨보는 것을 알아채자 살이 떨리는 공포와 불안을 느꼈고, 다른 사람의 앞에서 군자의 품격을 유지하는 것도 잊은 채 급히 그녀의 뒤를 쫓았다.

정영은 멀어져가는 두 남매를 보며 기분 나쁜 듯 손수건을 쥐어뜯었다.

‘뭐가 저렇게 으쓱해? 오라버니는 분명 원래 내 친오라버니이거늘, 만약 정미네의 양자가 되지 않았다면, 정미가 오라버닐 열셋째 오라버니라 불러야 했을 텐데!’

정영도 마찬가지로 억울한 기분이 들어 둘을 쫓아가려고 하다가 멈춰섰다.

‘됐어. 정미, 저 체면 차리다 굶어 죽을 성정에, 내가 따라갔다가는 더 심하게 굴지도 몰라. 만약 쫓아가지 않으면 분명히 정미는 오라버니와 싸울 테고, 그때가 되면 오라버니도 누가 더 철들었는지 알게 되겠지. 그러면 다음엔 더 좋은 선물을 줄지도 모를 일이고!’

그녀는 염낭 안의 단단한 금땅콩을 만지작거리며 빙긋 웃었다. 그러더니 이름 모를 가락을 흥얼거리며 정요와 다른 사람들을 찾아 수다를 떨러 갔다.

* * *

정철이 정미를 막아 세웠다. 두 남매는 긴 복도 귀퉁이의 파초나무들 옆에 멈춰섰다.

조금 외진 곳이라 하인들이 게으름을 피웠는지, 파초잎 중 서리와 눈에 얼었던 부분을 제때 다듬지 않아 노랗게 변한 채였다. 다행히 이미 정월이 되어 새잎이 사이사이에 솟아오르고 있었다. 차가운 눈밭은 그 파릇한 생기를 가리지 못했다.

“미미, 오라버니에게 화났어?”

정철은 파초잎에서 떨어져, 정미의 어깨 자락에 내려앉은 눈을 털어주려고 하다가, 무언가 떠올랐는지 손이 허공에서 멈추고는 말없이 손을 거두었다.

정미는 남들이 없는 곳에선 가식 떨 필요를 느끼지 못했기에, 발을 들어 정철의 발등을 밟으려고 했다. 그러나 오라버니가 아파할까 겁이 나, 아주 살짝만 차기로 마음을 바꿨다. 그녀가 입술을 오므린 채 차갑게 말했다.

“내가 어찌 오라버니에게 화를 낼 수 있겠어? 괜히 화를 내고 다투다가는 오라버니가 나를 상대해주지 않을지도 모르는데. 여동생이 나만 있는 것도 아니니까!”

“미미…….”

정철은 결국 참지 못하고 정미 어깨 위의 눈을 털어주었다. 그러다 자신이 정미를 돌보는 것이 습관이 되어버렸다고, 참으려 하면 온몸이 편칠 않으니, 이 버릇을 고쳐야 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다.

“그런 바보 같은 말 하지 마. 오라버니가 어떻게 너를 상대하지 않을 수 있겠어.”

정미가 그를 노려봤다.

“나를 상대해봤자 뭐해? 오라버니가 거짓말을 하는걸? 분명 여동생은 나 하나밖에 없다고 했으면서, 결국 난 정월 초하루날 아무 선물도 받지 못했어. 게다가 금땅콩을 정영에게 주기까지 했잖아. 역시, 역시…….”

정미는 ‘역시 친남매구나’라고 말하려고 했지만,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억지로 삼켰고, 이내 마음이 쓰려오는 것을 느꼈다.

정영이 너무 싫었다. 비록 그녀의 집안 사정이 백부보다 좋지 않아 백부 아가씨라는 명성도 없었지만, 사실 백부의 사정도 그와 비슷했다.

‘정영은 부모님과 두 오라버니에게 예쁨 받고 있으면서, 왜 둘째 오라버니를 기어코 뺏으려고 하는 거야?’

다른 방계 사촌들은 백부에 오는 일이 적었고, 오직 정영만이 명절 외에도 수시로 찾아오곤 했다. 마치 자기 집 채소밭을 구경하는 듯 찾아오니, 둘째 오라버니가 그녀의 집에 양자로 온 것을 잊을까 두려울 지경이었다!

하지만 오라버니 앞에서 너무 심하게 말할 수도 없었기에, 배 속에 가득 찬 정영에 대한 욕을 꾹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야말로 오라버니의 친여동생이었으니 말이다.

아버지도 문제가 있긴 마찬가지였다. 둘째 오라버니가 분명히 셋째 남동생보다 훨씬 우수한데도, 오라버니가 고 선생의 제자가 되었을 때, 기뻐하는 기색을 전혀 볼 수 없었다. 오히려 셋째 남동생의 공부에 조금이라도 진전이 있을 때, 아버지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피곤했다.

조모님도 다르지 않았다. 분명히 둘째 오라버니가 가장 오래 그녀를 ‘조모님’이라 불렀으나, 지금 일곱 살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조모님’이라 말한 셋째 남동생이, 그녀의 맘속에선 우선이었다. 둘째 오라버니에게 먼 듯 가깝게 구는 그녀의 태도는, 보기만 해도 마음이 아프고 답답해졌다.

정미는 그 금빛으로 반짝이는 땅콩을 떠올릴 때마다 화가 나 입술을 깨물었고, 괜히 억지를 부리게 되었다.

“오라버니, 만약, 만약에 나와 정영이 동시에 물에 빠지면, 누구를 먼저 구할 거야?”

“당연히 너를 먼저 구하지.”

정철이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이 명확한 대답에 정미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입을 열었다.

“오라버니, 나를 달래려고 하는 말 아니지?”

정철이 웃었다.

“미미, 오라버니가 언제 너를 속인 적 있어?”

“하지만……, 아무 고민도 없이 나를 먼저 구한다고 했잖아. 그, 그건 너무 가벼운 결정 아닐까?”

정철은, 여자아이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존재라고 생각했다.

‘늦게 말해도 불쾌해하고, 빨리 말해도 의심하니, 만약 다른 사람을 구한다고 했다면……. 허허, 바로 그냥 죽었겠구나!’

정철은 조금 긴장한 동생의 모습을 보고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미미, 속마음을 말한 것이니까 고민할 필요도 없는 거지. 만약 정말 그런 일이 생기면 오라버니는 당연히 너를 구할 거야.”

이 말을 들은 정미의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가다가, 너무 기쁜 티를 내면 안 될 것 같단 생각에 급히 참아냈다. 정철의 진지한 태도에 얼굴이 조금 뜨거워진 정미는 눈길을 옮기며 말했다.

“그럼 오라버니는, 그 이후에 정영을 어떻게 할지는 생각 안 해봤어?”

“미미는 사실을 듣고 싶어?”

정미가 눈썹을 치켜세웠다.

“응.”

“……오라버니도 어떻게 할지 생각해본 적 없어. 그저 그런 상황을 마주쳤을 때, 가장 확실한 건 너를 가장 먼저 구해야겠구나 하고 느꼈을 뿐이야.”

여기까지 말한 정철도, 마찬가지로 조금 쑥스러워져 가볍게 기침하고는 말했다.

“미미, 이제 화 안 낼 거지?”

“그럼 오라버니는 왜 그 애한테 금땅콩을 준거야?”

정미는 이미 몹시 만족스러웠지만, 한술 더 떠서 물어봤다.

“그건 잘못 꺼낸 거야!”

정철은 그 금땅콩을 떠올리자 머리가 조금 아팠다.

그 금땅콩을 주었으니, 당숙모와 정영이 또 이리로 부지런히 달려올 것이 눈에 선했다.

“그걸 잘못 꺼낼 수도 있다고?”

정미는, 항상 진중한 둘째 오라버니도 이런 실수를 한다는 것을 감히 믿을 수 없었다.

정철은 매우 억울해했다.

“그때 영이가 네가 준 물고기 염낭을 뺏어갈까 봐 그랬던 거야. 정말 뺏어가면 내가 다시 빼앗아올 수도 없잖아. 그래서 급히 다른 물건을 찾았어. 원래 은땅콩을 주려고 했는데, 급한 나머지 잘못 꺼낸 거야.”

이어 그는 마음속으로 ‘옆에 한기를 내뿜는 여동생이 있어, 손이 얼어붙은 나머지 미끄러졌어!’라고 덧붙였다.

정미는 기분이 몹시 좋아져 입술을 오므리며 말했다.

“그것도 그래. 내가 준 염낭이 그 금땅콩보다 훨씬 귀하지. 그건 내가 한땀 한땀 수놓은 거니까. 오라버니가 정말 그걸 줬다면 나는 최소한…… 최소한 열흘은 오라버니를 무시했을 거야!”

정철은 입을 뻐끔거리다가 속으로 말했다.

‘셋째 동생아, 그랬다면 우리가 감히 앞으로 대화를 나눌 수나 있었을까?’

바람이 불어오고, 파초잎이 흔들렸다. 쌓인 눈이 우수수 떨어져 두 사람의 몸을 비스듬히 두드렸다.

정철은 그 방향을 훑어보았다.

“미미, 여기 모퉁이에 외풍이 많이 부는구나. 우리 화원의 응접실로 가 차를 마시자.”

정미는 비서거에 돌아가잔 말을 하는 대신, 유쾌하고 기쁜 마음으로 정철을 따라갔다. 오라버니에게 새해 선물을 받지 못한 것조차 따지지 않았다. 그저 자신이 준 염낭을 지키기 위해 얼른 아무거나 준 뒤 정영을 내쫓으려 했던 것이고, 위험한 상황에 그녀를 먼저 구할 거라 했으니, 선물이 있든 없든 전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 * *

두 사람이 입구에 다다르자, 정미에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버지, 어머니, 왜 이렇게 빨리 가는 거예요? 아직 오라버니와 몇 마디도 하지 못했단 말이에요!”

중년 사내 특유의 낮은 목소리가 울렸다.

“영아, 왜 이렇게 버릇이 없느냐. 내가 몇 번이나 말했어, 네 열셋째 오라버니이지, 네 오라버니가 아니라고!”

“하지만, 원래는 맞잖아요. 아니면 제게 왜 그렇게 유달리 잘 대해주겠어요?”

정영은 염낭에서 그 금땅콩을 꺼내 부모님께 보여드렸다.

“보세요. 이게 오라버니가 내게 준 새해 선물이란 말이에요!”

“아이고, 금으로 된 것이란 말이냐?”

진홍색 상의와 자색 치마를 입은 부인이, 그 금땅콩을 들고 입에 넣어 씹어보았다.

“정말 금이구나!”

“어머니, 뭐 하시는 거예요. 깨물어서 망가지면 어떡해요!”

정영이 다급하게 손을 뻗어 빼앗으려고 하자, 부인이 정영의 손을 찰싹 때리며 욕했다.

“못된 계집, 감히 부모에게서 물건을 뺏으려 하다니. 이건 금이야. 너 같은 어린아이가 가지고 있어서 뭐 하니? 이 어미가 네 대신 가지고 있으마. 나중에 네가 시집갈 때 주마!”

“어머니, 어떻게 이러실 수 있어요!”

세 식구는 앞으로 몇 걸음 다가서다 결국 정철 남매와 마주쳤다. 사내가 난처한 얼굴로 외쳤다.

“철이냐?”

정철은 멈춰서서 공손한 태도로 말했다.

“당숙부님, 당숙모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조카가 새해 인사 올립니다.”

“새해 복 많이 받거라. 새해 복 많이 받아.”

정구백(程九伯)이 연거푸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정철이 백부에서 자라니, 역시 해가 갈수록 출중해진다고도 생각했다.

그의 눈길이 옆으로 옮겨가더니 정미의 얼굴로 떨어졌다. 잠깐 망설이더니 물었다.

“정미 맞느냐?”

정미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 사내를 빤히 쳐다보자, 방금 그 대화를 이 아이가 들었다고 생각해 조금 난처해졌고, 고개를 돌려 부인에게 말했다.

“보게, 정미가 맞지? 이 아이가 입을 열지 않아 잘못 본 줄 알았네.”

부인은 이미 정미를 자세히 살펴보고 있었기에,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이목구비는 하나도 안 변했지만, 살이 빠지고 하얘져서 그런지 크게 변한 것처럼 보이네요. 역시 여자아이는 다 클 때까지 여러 번 모습이 바뀌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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