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교난-44화 (44/375)

44화. 새해 선물 (1)

이때 여자아이의 즐거운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어휴, 어머니 보세요! 역시 제가 늦었지요. 제가 먼저 오겠다고 했는데 굳이 저와 같이 가겠다고 하셔서는…….”

정옥은 말하면서 큰부인 유 씨의 손을 놓고, 아가씨들이 모여있는 식탁 쪽으로 빠르게 걸어왔다.

정요는 빠르게 다가오는 정옥에게 부드러운 웃음을 지어 보였다.

“다섯째가 왔구나.”

하지만 정옥은 곧바로 정미에게 안겼다.

“셋째 언니, 정말 셋째 언니야? 어떻게 이렇게 예뻐졌어? 다른 사람들이 하는 말 안 믿었는데, 사실일 줄은 몰랐어. 셋째 언니, 나 언니랑 같이 있어도 돼?”

정미는 참새처럼 재잘대는 정옥에게 둘러싸여 조금 멍해져, 입을 열어 거절하는 것을 잊었다.

정옥은 곧바로 정미 곁에 앉아 아무 과일이나 집어 먹었고, 과일 하나를 다 먹고 나자 두 사람의 사이가 조금 가까워졌다고 생각해 정미에게 기대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셋째 언니, 병이 나서 오랫동안 누워있으면 정말 예뻐질 수 있어?”

정미는 친하지 않은 사람이 다가오는 것에 익숙하지 않아 조심스럽게 정옥을 떼어내려고 했지만, 떼어지지 않는 것을 보고 굳은 얼굴로 말했다.

“아니.”

“그럼 셋째 언니는 어떻게 예뻐진 거야?”

“몰라.”

정미는 묵묵히 생각했다.

‘내가 열 살일 때도 사람을 이렇게 귀찮게 굴었던가?’

정옥은 눈을 깜빡이며 생각했다.

‘셋째 언니가 내게 알려주기 싫은가 봐. 분명 우리가 아직 친하지 않아서 그런 걸 거야.’

정옥은 한 손으로는 정미에게 팔짱을 끼고, 한 손으로는 또 과일을 집어 들고 열심히 먹기 시작했다.

“어머니, 내려주세요…….”

그때,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방 안의 화목한 듯한 분위기를 깨트렸다.

모두가 목소리를 따라 쳐다보자, 그곳엔 동 이낭이 난처한 얼굴을 하고 있었고 정양은 그녀의 품에서 끊임없이 발버둥 치고 있었다.

“양아, 말 좀 들으렴.”

동 이낭이 낮게 말했다.

정양은 몹시 억울해져 낭랑한 어린아이의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니, 양이는 말을 안 듣지 않았어요!”

이때 마침 맹 노부인이 들어오며, 웃음을 띠고 물었다.

“양아, 무슨 일이냐. 조모님에게 말해보거라.”

노부인은 두 아들을 낳았고, 서자에게는 전혀 정을 주지 않았다. 하지만 두 서손(庶孫)에게는 꽤 잘해주었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한 씨는 아이를 낳지 못하기에, 맹 노부인이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둘째 아들에겐 서자뿐이었다. 그녀에겐 이 두 서손이 적손이나 마찬가지였다.

정양은 기댈 구석이 생기자 눈이 반짝이더니 손을 흔들며 말했다.

“조모님, 양이는 얌전해요. 말을 안 듣지 않았어요!”

“그럼 양이는 무얼 하고 싶은 것이냐?”

“내려가고 싶어요.”

노부인은 동 이낭을 한 번 흘겨보고는, 그런대로 온화한 태도로 말했다.

“동 이낭, 양이가 벌써 다섯 살이다. 더 이상 안고만 있어선 안 돼. 아이를 내려놓거라. 안 그럼 시끄럽게 울어 새해부터 성가신 일이 생기지 않겠느냐!”

노부인은 겨우 이만한 방에서 아이가 다녀봤자 어딜 갈 수 있겠냐고 생각했다.

동 이낭은 온유한 성정이었지만, 가끔 지나치게 신중한 탓에 대범함이 없었다. 그저 집안의 첩이 되는 정도로 만족하며, 차남이 그녀의 아버지 덕분에 목숨을 구했음에도 조금의 체면이 서는 정도로 기뻐했던 것이었다.

한 씨는 멀지 않은 곳에 서서 둘째 나리에게 향하던 눈빛을 막 거두고는, 평소 그녀에겐 차갑게 대하던 노부인이 동 이낭에게 부드러운 태도로 대해주는 것을 보고는 원망스러움을 느꼈다. 하지만 이 원망이 노부인에 대한 것인지, 동 이낭에 대한 것인지 몰라 멍해졌다. 갑자기 정미의, ‘어머니, 제 생각에 가증스러운 것은 동 이낭이 아니라 아버지입니다!’ 하는 말이 귓가에 맴돌았고, 또 저도 모르게 둘째 나리를 바라보았다.

둘째 나리는 동 이낭의 곁에 서 있었다. 푸른색 새 면포를 입어 더욱 준수해 보였고, 언뜻 보면 여전히 말을 타고 풍류를 즐기는 청년 같았다. 그는 웃는 얼굴로 동 이낭의 품에 안겨있는 정양을 바라봤다. 눈빛은 아주 따스했다.

한 씨는 이 장면이 유난히 눈꼴사납다고 느껴져, 입을 꾹 다물고 눈길을 거두었다.

노부인의 말에 동 이낭은 더는 정양을 막을 수 없었기에, 몸을 숙여 아이를 내려주곤 신신당부했다.

“양아, 그럼 나를 따라다녀야 한다. 마음대로 다녀선 안 돼.”

그러나 뚱보는 땅에 내려오자마자 후다닥 달려서 정미 앞으로 가더니 정옥을 밀어냈다.

“셋째 누님, 누님이랑 같이 앉을래!”

그는 손을 뻗어 어른 흉내를 내는 듯, 정미의 팔을 툭툭 쳤다.

“셋째 누님, 걱정 마. 이번엔 조모님이 계시니까, 우리 어머니가 쫓아오지 않을 거야.”

동 이낭은 하마터면 피를 토할 뻔했다. 하지만 여기선 한마디도 함부로 할 수 없었기에, 입술을 부들부들 떨며 어린 아들을 바라봤다. 아들이 정미와 정다운 모습을 보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대체 무슨 일인 건지, 그때 비서거에 남겨진 이후로 아이는 틈만 나면 그리로 가려고 하니, 친누이인 정동보다 정미와 더 친하게 지내려 했다.

그녀의 시선이 이리저리 옮겨지다가, 정미의 얼굴로 떨어졌다.

소녀는 얼음 같은 살결과 옥 같은 얼굴을 가져 놀랍도록 아름다워 보였다.

‘동이 말이 맞는지도 모르겠구나.’

이 셋째 아가씨는 정말로 조금 이상했다. 뜬금없이 예뻐진 것은 둘째 치고, 어린아이의 정신까지 앗아가다니!

동 이낭은 차가운 눈으로 아이에게 밀려 한쪽으로 밀려난 정옥의 불쾌한 모습을 바라보며, 더욱 일리 있다고 느꼈다.

정요는 담담한 표정으로 이 모든 것을 바라보며 마찬가지로 씁쓸함을 느꼈다.

‘역시, 예전부터 스쳤던 마음속 미안함과 동요는 쓸데없었어. 정미는 그저 얼굴만 변했을 뿐인데, 정옥과 정양이 갑자기 이렇게 친근하게 대하다니.’

만약 어려서부터 정미가 아름다웠다면, 정요가 설 자리가 어디 있었겠는가!

정요는 눈길을 거두고 제 연분홍색 손톱을 내려다봤다.

정미는 그저 오늘을 넘겨낼 생각뿐이었다. 그녀는 정옥과 정양이 옆을 둘러쌌지만, 꿋꿋이 구석에 앉아있었다.

그녀가 새해 인사를 올릴 차례가 되었을 때, 조금도 어긋나지 않게 인사를 올려 처음으로 어르신과 노부인의 덕담을 들었고, 세뱃돈을 받았다. 하지만 이전의 새해보다 조금 침울했다.

정미는 의혹스러운 듯 얼굴을 만지작댔다.

‘설마 조모님이 왕년에 주셨던 세뱃돈은, 얼굴을 보고 주신 것이었나?’

* * *

오후가 되자 정씨 가문의 방계친족까지 잇따라 새해 인사를 올리러 왔으며, 아랫사람들은 예년대로 모두 염송당에 남아있거나, 모여서 수다를 떨며 간식을 먹거나, 혹은 마당에서 산책을 했다.

정미는 진작에 배가 불렀던 데다, 아직 발이 다 낫지 않은 것을 알고 있었기에 더 걷지도 못했다. 그렇다고 방 안에서 사람들의 시끌벅적한 소리를 듣고 있는 것은 답답했기에, 바람이 없는 복도를 골라 정철을 데리고 장기를 두었다.

정미는 장기판을 노려보며 한 손으론 턱을 괴고, 한 손으론 장기말을 잡은 채 머리를 쥐어짰다.

정철이 실낱같은 희망을 안고 물었다.

“미미, 오라버니가 한 수 물러줄까?”

“안 돼, 안 돼.”

정미가 고개를 저었다.

“한 번 둔 말은 무를 수 없어. 내가 어찌 그런 수준 없는 짓을 할 수 있겠어.”

정철은 쓴웃음을 지으며 생각했다.

‘셋째야, 나는 네가 그런 수준 없는 짓을 하길 원하는 거란다. 지금도 이각(*二刻: 30분)이 넘는 시간 동안 말 하나를 놓지 못하고 있지 않니!’

하지만 정철은 감히 이 말을 입 밖으로 꺼낼 엄두가 나지 않았기에, 그저 너그럽게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이런 일은 일 년에 몇 번만 겪으면 될 거야.’

정철이 이렇게 자신을 위로하고 있을 때, 소녀의 목소리가 울렸다.

“열셋째 오라버니(*대배항(大排行, 형제자매뿐만 아니라 아버지 쪽의 종형제 자매, 그 위에 손자·증손자까지를 포함한 장유의 순서)으로 따져, 정철의 항렬이 열셋째임), 여기 숨어있었구나. 드디어 찾았다.”

정미는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눈살을 찌푸리며 허리를 곧게 폈고, 손의 장기말을 꽉 쥐었다.

소녀는 이미 다가와서는 스스럼없이 정철의 옆에 앉더니, 빙그레 웃으며 손을 뻗었다.

“오라버니, 내 세뱃돈은?”

‘짝’ 하는 소리와 함께 흰 장기말이 장기판 위에 올라갔고, 곧이어 정미의 맑은 목소리가 울렸다.

“오라버니, 여기 놨어. 오라버니 차례야!”

정철은 정미를 흘끗 보고는, 정미 쪽으로 몸을 기울여 그 소녀와 거리를 두고는 미소지었다.

“영아, 새해 복 많이 받아.”

정영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채, 정철의 ‘새해 복 많이 받아.’라는 말에 그저 의기양양해졌다. 그녀는 희고 부드러운 손을 흔들며 애교스럽게 말했다.

“열셋째 오라버니, 세뱃돈은 어딨어? 나 벌써 열네 살이야.”

정미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차가운 얼굴로 손을 뻗어 정철의 허리를 꼬집었다.

“어―”

대답하려 입을 떼자마자 느껴진 허리 통증에, 정철은 반사적으로 정미의 사나운 손을 누르며 부끄럽단 듯이 말했다.

“영아, 오늘은 시간이 늦어서 바로 이쪽으로 왔단다.”

“그 말은, 내 세뱃돈을 준비하지 않았다는 거야?”

소녀가 불만스러운 듯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러다 정철의 허리춤에 있는 염낭을 바라보곤 눈을 반짝였다.

“오라버니, 이 작은 물고기가 새겨진 염낭이 조금 못생겼긴 하지만, 꽤 재미있게 생겼긴 해. 내가 보기엔 아직 새 걸로 보이는데, 이걸 내 세뱃돈 대신 주면 되겠다. 그럼 내가 이 이상 탓하지 않을게.”

정미는 화가 나서 죽을 지경이었다.

이 물고기 염낭은, 둘째 오라버니가 교천성의 연지를 준 이후, 정미가 수시로 연못가에 가 물고기들을 관찰한 뒤, 물고기를 그리는 것을 두 달간 연습해 적지 않은 천을 낭비한 후 만들어 준 것이었다!

자수 솜씨가 평범한 탓에 그리 정교한 염낭은 아니었지만, 이런 작은 물고기 모양의 염낭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특히 물고기의 눈은, 일부러 쌀알만 한 흑진주를 골라 넣은 것이었고, 흰자는 은실로 세세하게 수놓은 것이라, 보고 있으면 살아 움직이는 것만 같이 보였다.

정미는 오라버니를 살펴보고는 속으로 차갑게 웃었다.

‘정영이 바보는 아니구나. 오라버니의 몸에서 가장 좋은 물건이 바로 이 작은 물고기 염낭이니까!’

정미가 물건의 가치를 매기는 기준은 보통 사람과 달랐다. 최소한 정영의 눈에 그 염낭은 그냥 평범한 물건이었다. 그저 모양이 조금 독특하며 재미있었고, 천이 좋아 보여 새해 선물로 괜찮을 것 같았을 뿐이었다.

‘비싼 물건을 원하는 것도 아니니 오라버니가 거절할 리 없지.’

두 소녀의 눈길이 정철의 얼굴에 꽂혔다.

정철은 식은땀이 흐를 것 같아 난감했다. 웃는 얼굴로 세뱃돈을 뜯으려 하는 친척 동생이 무서운 게 아니라, 곁에서 한기를 내뿜는 동생 때문에 긴장이 되었다. 그는 급히 허리춤을 만지작거리더니 땅콩 모양의 금을 한 톨 꺼냈다.

금빛의 작은 땅콩이 햇빛 아래서 눈부시게 반짝였고, 두 소녀의 눈이 동시에 커졌다.

“오라버니, 이, 이걸 나한테 준다고?”

정영이 입을 막았다.

“이, 이건 너무 비싸고 귀하잖아. 이걸로 염낭을 얼마나 많이 살 수 있는데!”

그녀는 기쁨에 겨워 손을 뻗었고, 정철은 속으로 한숨을 쉬며 단념하고는 금땅콩을 건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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