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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난-42화 (42/375)

42화. 화자는 고의가 아니었다

정미가 상황을 설명해주자, 한 씨는 분개했다.

“그 미천한 것, 정말로 가증스럽구나!”

정미의 입꼬리가 휘었다.

“어머니, 제 생각에 가증스러운 것은 동 이낭이 아니라 아버지예요!”

“미야!”

한 씨가 경고하는 듯이 외쳤다.

“네 아버지를 그렇게 생각해선 안 된다. 네가 이러다간 점점 더 아버지와 멀어질 테고, 마지막 마음마저 정동에게 갈 것이 분명해.”

정미가 가소롭다는 듯이 말했다.

“어머니, 저는 아버지가 저와 가깝든 말든 전혀 신경쓰지 않는 걸요! 그동안 어머니만이 신경쓰고 계셨을 뿐이지요.”

“입 다물거라!”

한 씨는 부끄럽고 분한 나머지 성을 냈고, 딸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눈빛에 저도 모르게 눈을 피했다.

“어머니.”

정미는 모처럼 한 씨와 가까워지자, 목소리를 낮췄다.

“방금 어머니께서 저를 안고 이모님의 이름을 부르며 우셨던 것은, 이모님이 그리우셔서가 맞나요?”

한 씨가 난처한 듯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정미가 이어서 물었다.

“사실 어머니께서도, 외조부님과 외조모님이 그리우시지요?”

한 씨는 입을 꾹 다문 채 이 난감한 질문에 대답하지 않으려 했다.

정미는 손을 들어 한 씨의 널찍한 소매를 흔들었다.

“어머니, 그럼 저와 둘째 오라버니를 데리고 다 함께 위국공부로 돌아가 살아요. 어때요?”

“미야, 어린아이 같은 소리 하지 말거라. 곧 있으면 새해인데, 어찌 국공부에 돌아갈 수 있겠니? 네가 가고 싶다면, 여느 때처럼 봄이 된 뒤 가서 잠깐 지내다 오거라.”

정미는 마침내 자신의 목적을 밝혔다.

“어머니, 어머니께선 어째서 아버지와 이혼하지 않으시나요? 그럼 저희 다 같이 계속 외가에 살 수 있잖아요.”

한 씨는 정미의 말에 멍해져 자기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너, 너 뭐라고 했니, 이……, 이혼?”

“맞아요. 이혼하면 어머니께서 저를 데려가실 수 있잖아요. 큰고모님이 진령운을 데리고 백부에 사는 것처럼 말이에요. 둘째 오라버니는 양자이니 서택(瑞澤) 오라버니처럼 진씨 가문에 남아있을 필요도 없겠지요. 둘째 오라버니와 함께 가면 아버지와 조모님이 기뻐할지도 몰라요.”

정미는 아주 예전부터 어렴풋이 이 생각을 품어왔으나, 오늘 둘째 나리와 부모 자식 간의 도리를 끊었기에, 한 씨에게 더욱 강력하게 이혼을 권했다.

‘이 집안에 좋은 사람은 극히 적고, 미운 사람은 이렇게나 많은데, 왜 떠날 수 없는 것일까? 설마 쥐구멍에 들어가 기어코 늙고 냄새나는 쥐들에게 물어뜯겨야 한단 거야? 여길 떠난다면 최소한 온몸에서 더러운 냄새가 나는 일은 없을 텐데!’

한 씨는 창백한 얼굴로 벌떡 일어났다.

“미야, 앞으로 다신 그런 미친 소리 하지 말거라!”

한 씨가 난처한 듯 자리를 떠나는 것을 눈으로 쫓던 정미는 실망스러워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다시 얼굴을 묻고, 아혜를 따라 지통부를 배우기 시작했다.

* * *

눈 깜짝할 새 연말이 됐다. 집안사람들 모두는 매우 분주하게 면모를 새로 하려 했다. 오직 셋째 아가씨만이 다른 사람들 눈에 아주 한가해 보였고, 섣달 그믐날 밤의 가족 식사에도 발이 아프다는 핑계로 불참을 고하더니, 비서거에 틀어박혀 넓고 심오한 부의(符醫) 이론을 공부했다.

아혜의 말처럼 정미의 타고난 재능은 나쁘지 않았기에, 지통부는 어젯밤에 이미 성공적으로 숙달했다. 하지만 이런 저급한 지통부는 약효가 짧아 반나절 정도만 지속될 거라 아혜가 경고했기에, 정미는 몇 장을 더 만들어 갑작스러운 상황에 대비하였다.

정월 초하루가 되자 만성적으로 불면증에 편두통을 앓던 회인백부의 맹 노부인는, 불편함을 억지로 참아냈다. 그녀는 날이 밝기도 전에 일어나 고명(*诰命: 여인에게 내리는 봉호(封號))을 받은 며느리들을 데리고 축하 인사를 올리러 입궁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전(前) 회인백 어르신 또한 관직이 있는 아들과 손자를 데리고 조하(*朝賀: 조정에 나가 임금께 하례하는 일)에 참석했다. 정철처럼 아직 학문을 공부하고 있거나 셋째 나리처럼 일을 하고 있는 경우에도 밖으로 나가 단배(*團拜: 여럿이 모여 단체적으로 하는 절)를 해야 했기에, 백부에는 여인들과 어린아이들만 남게 되었다.

정미는 문을 닫고 나가지 않았고, 관례를 따라 아혜에게 태산과의 이론을 배우고 있었다.

태산과는 열세 가지 과목 중 가장 복잡한 것이었고, 하루아침에 배울 수 있는 것 또한 아니었다. 정미가 회임 기간 동안 태아의 안정과 산후의 질병을 공부하고자 함은, 태자비 정아가 무사히 출산하기 바랐기 때문이었다.

꼬박 두 시진 동안 공부를 하자 정미는 머리와 눈이 어질어질해지는 것을 느껴, 그제야 잠시 멈추고 환안을 불렀다.

“환안아, 오라버니가 어제 구해온 책 세 권을 가져와. 좀 봐야겠어.”

“네.”

환안은 익숙하단 듯이 줄지어 늘어진 책장에서, 둘째 공자가 새로 선물해온 책을 꺼내 정미 앞에 바쳤다.

정미는 책 이름을 한 번 훑고는 한숨을 쉬었다.

“환안아, 이거 말고, 네가 어제 주사(*朱砂: 은으로 이루어진 황화 광물로, 부적을 쓸 때 쓰임)를 사러 나갔던 김에 육출화재(六出花齋)에서 골라왔던 책을 가져와.”

환안이 멍하니 움직이지 않자, 그녀는 특별히 귀띔해주었다.

“네가 가져오자마자 책 표지를 씌웠던 그 책 말이야.”

“기억났습니다!”

환안은 재빨리 책장으로 향해, 《여계(女誡)》,《내훈(內訓)》《여범첩록(女范捷錄)》등의 책이 줄지어진 가운데, 잠화해서체(*여성스러운 서체, 혹은 작은 해서체로 불리기도 하며 깔끔한 것이 특징인 글씨체)로 《명녀열전》이라 쓰여진 책을 빼냈다.

그 서체는 우아하고 단정하여, 여전히 먹 향을 풍기는 듯했다. 보자마자 셋째 아가씨의 필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가씨, 책 드릴게요.”

환안이 책을 건넨 후, 말을 이었다.

“아가씨, 이 책은 소인이 나간 김에 사온 게 아닌걸요. 제가 육출화재까지 가는 데 여섯 골목을 더 걸었다구요!”

정미는 날쌔게 책을 빼앗고 차갑게 말했다.

“환안. 내가 말하지 않았니. 너는 말을 적게 하고 일을 많이 하라고!”

환안이 반박하려 하자, 정미가 눈을 부라렸다.

“말대꾸하면 점심에 만두를 하나 덜 줄 것이야.”

환안은 끽소리도 못한 채, 순순히 입구에 앉으러 갔다.

정미는 그제야 만족스러운 듯 침상 머리맡에 기대 책을 펼쳤다.

이 《명녀열전》이란 표지로 싸인 책은 사실 《수경기(水鏡記)》였다. 내용은 이러했다. 한 부잣집의 며느리가 회임했을 때 분향을 하러 외출했는데, 뜻밖에도 길에서 강도를 만났고, 충직한 시종이 목숨을 바친 덕분에 도망칠 수 있었다. 그녀는 교외의 한 허물어진 절에 숨어 비를 피했으나, 그 절에는 마찬가지로 비를 피하던 가난해 보이는 부부가 있었다. 공교롭게도 그 부인 또한 회임 중이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깊은 밤이 되자 그 며느리와 부인에게 나란히 진통이 와 날이 밝을 때쯤 동시에 딸을 낳았다는 것이었다.

날이 밝자 두 사람은 각자 떠났고, 16년 후에야 뜻하지 않게 두 딸이 바뀌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부잣집에선 농가의 딸이 된, 이제는 다른 집안의 민며느리가 되기로 한 친딸을 찾아내 데려왔지만, 두 소녀의 말투와 태도는 이미 하늘과 땅 차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저속하고 상스러운 농가의 딸은 응석받이로 큰아가씨를 질투했고, 많은 나쁜 짓을 저질렀다. 결국엔 자업자득으로 정신이 이상해졌고, 바람도 통하지 않는 작은 방에서 조용히 죽게 된다는 내용이었다.

정미는 보면 볼수록 화가 나 책을 옆으로 던져버렸고, 목소리를 높여 외쳤다.

“화미야, 꿀물 한잔을 가져와!”

화미는 원래 여종이었으나, 교용이 간 뒤로 정미의 몸종이 되었기에, 유달리 열심히 일했다. 주인이 명령하자 그녀는 급히 꿀물을 타왔다.

정미는 꿀물을 건네받아 마셨다. 꿀물의 온도와 단맛이 입에 딱 맞아, 뱃속에 들어가니 따뜻하고 달콤하게 느껴졌다. 그제야 후련해진 정미는 침상 머리맡에 던진 책을 다시 들었고, 이 육출화재의 책들은 다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분명 보면서 이가 근질거릴 정도로 화가 나는데도 내려놓을 수가 없었으니 말이다.

“아가씨, 더 드시겠어요?”

정미가 입가를 닦았다.

“됐어. 방금은 너무 화가 났는데, 한결 낫다.”

그때, 마침 이리로 들어오던 정철이 이 말을 듣고 웃으며 물었다.

“미미, 누가 널 화나게 했어?”

둘째 오라버니의 목소리가 들리자, 정미는 허둥지둥 책을 내려놓았다. 정철이 병풍 위쪽의 조각꽃 구멍 사이로 이쪽을 볼 수 있다는 것을 떠올리자, 책을 책장에 꽂을 시간은 없었고, 베개 밑으로 넣어 오히려 더 드러나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그냥 베개맡에 놓고는 머리를 정돈한 뒤 걸어들어오는 정철에게 차분한 척 말했다.

“오라버니, 왜 이렇게 일찍 왔어?”

정철은 외투를 벗어 병풍 위에 걸친 뒤, 청색 면포만 걸친 채 다가왔다.

“너 헷갈렸구나. 벌써 정오야. 이따 조부님 조모님들께서 돌아오시면 어른들께 새해 인사를 드려야 하는 걸.”

정월 초하루, 수도의 귀족과 관리 가문의 가장들은 모두 황성으로 향했고, 정오가 지나서야 집안의 아랫사람이 그들에게 새해 인사를 올리곤 했다.

“응, 알겠어. 그럼 오라버니도 여기서 식사해. 이따 우리 같이 인사드리러 가자.”

정철의 눈빛이 정미의 발치로 떨어졌다.

“네 발이 아직 다 낫지 않았는 걸. 무리하지 마. 내가 어른들께 잘 설명해 드리면 돼.”

정미는 바로 아래로 내려가 몇 걸음 걷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오라버니, 봐. 이미 거의 다 나았어.”

지통부를 쓴 덕분에 조금의 통증조차 느껴지지 않았고, 마음대로 걸을 수도 있었다.

사실 정미도 알고 있었다. 이러다가 발의 상처가 더 심해질 수도 있단 걸. 하지만 오늘 사람들에게 새해 인사를 올리며 발이 괜찮아졌다는 걸 알리지 않는다면, 어떻게 내일 한 씨를 따라 큰언니를 보러 입궁할 수 있겠는가.

정철은 정미의 오른발을 빤히 바라보며 조금 의심스럽단 얼굴을 했다.

무술을 배우는 사람에게 부상이란 흔히 있는 일이었다. 그가 보기에 동생의 상처는 짧은 시간 안에 이렇게 멀쩡히 걸을 수 있는 종류가 아니었다.

‘설마 이 녀석이 내일 궁에 들어가 태자비마마를 뵙기 위해, 이렇게 멀쩡한 척 하는 건 아니겠지?’

머릿속에 이 생각이 스치자, 정철은 정미를 앉히고 손을 뻗어 그녀의 발을 살폈다.

“정말 다 나았어? 오라버니가 한 번 보자.”

들통나기 직전이 되자, 정미는 마음이 급해져 황급히 정철의 손을 잡았다.

정철이 눈썹을 치켜세웠다.

“응?”

“오라버니…….”

정미가 입술을 깨물고 그를 쏘아봤다.

“이러는 게 어딨어. 말도 없이 마음대로 발을 보려고 하다니!”

문 앞에 쪼그려 앉아있던 환안은, 아가씨에게 ‘며칠 전에도 둘째 공자께서 아가씨의 발에 약을 발라드렸는걸요.’라고 말하고 싶은 것을 참을 수 없었으나, 조금 전 주인이 한 경고가 문득 떠올라 얼른 입을 막았다.

정철의 손이 허공에서 굳었다.

그동안 매우 친밀했던 두 남매는 자주 허물없는 행동을 해왔으므로, 이런 상황은 한 번도 벌어진 적이 없었다. 소녀의 불평 가득한 목소리에 정철의 귀 끝이 빠르게 빨개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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