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교난-41화 (41/375)

41화. 새로운 부적

정미는 정철의 생각을 알 수 없었지만, 그의 평범한 한마디에 눈물이 왈칵해 급히 고개를 숙여 눈시울이 붉어진 것을 숨겼다.

“그럼 오라버니는 아까 왜 도망쳤던 거야. 만약 오라버니가 가지 않았었다면 내 발도 다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데. 어쨌든 다 오라버니 탓이야.”

“그래, 모두 오라버니의 잘못이야.”

정철은 이렇게 여리고 귀여운 동생이 묵묵히 자신의 발에서 접시 조각을 빼냈던 장면을 떠올리자, 당시의 슬프고 분한 마음을 재차 느꼈다. 마음이 아파져 정미의 말을 반박할 수 없었고, 정미가 말한 대로 따라주었다.

정미는 오히려 더 억울해졌다. 이 억울함이 어디서 오는 것인진 알 수 없었으나, 오라버니가 한마디 할 때마다 마음이 시리고 떫었다.

“오라버니, 걱정 마. 내가 나중에 꼭 성공할 테니까. 그때가 되면 누가 날 가묘로 보낸다고 할 때, 내가 그 사람을 바로 가묘로 보내버리겠어.”

정미가 정철에게 팔짱을 껴오며 말했다. 소녀는 아버지와의 격렬한 논쟁 후 뭔가를 깨달은 듯했다.

“그래, 미미는 분명 크게 성공할 수 있을 거야.”

정미가 고개를 들었다.

“그나저나 오라버니가 날 다치게 했는데, 무슨 벌을 줘야 할까?”

정철은 불길한 예감이 들어 어색하게 웃었다.

“미미, 어떤 말들은 그저 듣고 넘기면 된단다.”

‘이 녀석, 어찌 그걸 진심으로 받아들일 수 있지?!’

정미가 낙담하며 눈을 내리깔았다.

“오라버니가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한 거였구나. 마음속으로는 발을 다친 건 내가 자초한 일이라고 생각하겠지…….”

정철은 철저히 패배하고 말았다.

“그럼 미미는 내가 어떻게 해주면 좋겠어?”

정미는 교활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지금 유행하는 책 다섯 권을 원해!”

“안 돼!”

정철이 단호히 거절했다.

“오라버니―.”

정미는 다리를 안고 그를 쳐다보며, 그렁그렁 눈물이 차오른 눈동자를 해 보였다.

“발이 아파…….”

정철은 또다시 패배했으나, 반격을 시도했다.

“두 권. 최대 두 권이야.”

“네 권!”

“세 권. 더 이상은 안 돼!”

“좋아. 그럼 세 권.”

정미가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세 권이면 그녀가 공부하고 남은 시간에 보기에 충분했다. 나머지는 내년에 정철이 시험을 준비하느라 정미를 지켜보지 못할 때 몰래 사 오면 될 터였다.

정철은 영문도 모른 채 손해를 본 느낌에 마음이 무거워져 돌아갔다.

‘세 권을 다 본 미미가 또 무슨 이상한 것을 배워둘지 모르겠군!’

* * *

정철이 떠난 뒤, 정미는 휘장을 내리고 아혜를 불렀다.

“아혜, 나와.”

그러자 머릿속에서 아혜의 나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시작해도 돼? 이렇게 바빠서야, 수신부를 외우는 것도 질질 끌겠어.」

“아혜, 나 발을 다쳤어. 지혈하고 새살이 돋는 부적도 있어?”

아혜는 정미의 느낌을 빌려 발바닥의 상처를 감지하고는 고소하다는 듯이 웃었다.

「하지만 지혈과 새살이 돋는 부적은 난이도가 높아. 네 재능은 나쁘지 않지만 배우는데 최소 보름이 걸릴 거야. 그때가 되면 이 상처는 이미 다 아물고 없을걸?」

정미는 이를 듣고 조급해졌다.

눈 깜짝할 새에 새해가 될 터였고, 매년 정월 초하루 아침이 되면 조모님이 백모님, 어머니와 함께 입궁하여 축하 인사를 올릴 터였다. 다음 날 아침이 되어야 정미도 어머니를 따라 입궁해 큰언니를 만날 수 있건만, 그때까지 발이 다 낫지 않으면 어떡한단 말인가?

아혜는 정미의 다급함이 만족스러운 듯 일부러 잠시 반응하지 않다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다른 두 가지 부적은 배울 수 있어.」

“무슨 부적?”

「통증을 멈추는 지통부(止痛符)와 흉터를 제거하는 거파부(祛疤符).」

정미는 잠시 멍해졌다.

“지통부? 듣기에는 지혈과 새살을 돋게 하는 것과 차이가 없어 보이는데.”

「넌 정말로 조금의 의술 지식도 없구나!」

아혜는 한마디 비웃고는 이어서 설명했다.

「지통부는 통각을 느끼지 못하게 하는 부적이야. 그러니까, 네 목에 사발 만한 구멍이 생겨도 이 부적을 쓰면 통증을 느끼지 못한단 거지.」

“목에 사발 만한 구멍이 생기면 이미 죽었을 텐데, 통증을 어떻게 느끼겠어.”

정미가 비웃으며 말했다.

‘이 요괴는 정말 버릇이 들질 않는구나. 조금이라도 잘 대해주면 바로 올라서려고 하니!’

아혜가 조금 얌전해져서는 성을 내며 말했다.

「어쨌든 이 지통부와 거파부, 그리고 수신부는 연말 전에 하나는 배워야 해. 하나 골라봐.」

정미는 망설임 없이 지통부를 골랐고, 아혜를 따라 한낮까지 쭉 공부했다. 정미는 정월 둘째 날까지 배우지 못 할까 두려워 점심 휴식도 건너뛰었다.

그 무렵 한 씨가 찾아왔고, 두 모녀는 결국 만나게 되었다.

* * *

한 씨는 꽃이 새겨진 병풍을 돌아 들어갔다. 그리곤 항상 꿈에 나오던 아름다운 소녀가 창가에 단정하게 앉아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것을 보았다.

“옥주야!”

한 씨가 바람처럼 정미의 앞으로 달려가 그녀의 품에 안겼다.

“옥주야, 살아있구나!”

그녀는 말하면서, 난처한 얼굴의 정미를 더욱 세게 안았다.

“아니다, 분명 꿈을 꾸고 있는 걸 거야. 어찌 꿈인데도 이렇게 생생한지, 네 체온까지 느껴지는구나!”

한 씨가 이리저리 더듬은 탓에 정미의 얼굴이 까맣게 변했다. 정미는 전혀 알지 못하는 이모의 일에 호기심이 일기 시작했다. 평소 이모를 잘 언급하지 않던 어머니가 이렇게 많은 감정을 드러내는 걸 보자, 정미는 감정을 얼굴에 드러내지 않은 채 꾹 참았다.

한 씨는 오랫동안 마음속에 묻어두었던 말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옥주야, 너는 모르지. 네가 죽은 뒤로 네가 자주 꿈에 나타나더구나. 꿈에서 어릴 적 우리가 같이 답청을 갔을 때, 네가 꽃을 따서 화환을 만들어 너 하나, 나 하나 가졌던 그때가 보였단다. 나는 네가 나보다 예뻤던 것이 싫어 네가 준 화환을 땅에 버려버렸지. 너는 화환을 주워서 하나는 머리에 쓰고 하나는 목에 걸었는데, 더 예뻐 보이는 거야. 그래서 난 네가 더 싫어졌지…….”

정미는 고개를 숙이고, 자신을 안고 울며 하소연하는 한 씨를 묵묵히 쳐다보더니 얼굴이 어두워졌다. 이런 언니가 어디 있는가. 동생이 자신보다 예쁘다고 싫어하다니. 정미가 이랬다면, 그녀는 아는 모든 여인들을 싫어했어야 했을 터였다.

한 씨는 계속 이어서 말했다.

“나중에 내가 시집간 이후로, 나를 아끼시던 어머니가 되레 너를 아끼시게 되어 네가 조금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나는 네가 그런 일을 당할 줄 몰랐어. 자결까지 할 줄은 더욱 몰랐고. 동생아, 그때 네가 오히려 나를 위로했었지. 이 세상에 넘지 못할 고비는 없다고. 배 속의 아이를 무사히 낳아서 정미와 짝이 되게 하겠다고.

하지만 네가 나를 속였구나! 나도 속이고, 아버지, 어머니도 속이고, 화서를 남기고 모질게도 떠나버렸어. 그동안 나는 이런 생각이 드는 걸 참을 수가 없어 계속 너에게 묻고 싶었다. 도대체 이유가 무엇이냐고! 네가 무슨 불행을 겪어도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큰오라버니가 절대 너를 포기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잖아. 나……, 나도 너를 포기하지 않았을 텐데…….”

한 씨는 정미를 안고 여자아이처럼 서럽게 울었다. 눈물과 콧물이 정미의 옷깃에 다 묻었다.

정미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어머니를 불렀다.

그러자 한 씨는 온몸이 굳어진 채로 정미를 밀어냈다.

“너……, 너 정미였단 말이니?”

“어머니, 저도 못 알아보시는 거예요?”

정미가 차분히 물었다. 그녀는 그저 조금 마르고, 조금 하얘진 것뿐이었다.

‘친어머니조차 알아보지 못하다니. 역시 이 집안에선 오라버니만이 가장 나에게 관심을 두는구나!’

“미야.”

한 씨는 그제야 눈앞의 여동생과 닮은 소녀가, 자신의 그 까맣고 통통했던 친딸임을 알아보았다.

“어떻게 이렇게 변한 거니?”

정미는 이 말이 아주 듣기 싫다고 느껴졌고 입을 떼려고 한 순간 한 씨가 손뼉을 치며 그녀 앞에서 처음으로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아주 예쁘구나. 어쩐지, 나 한명주의 딸이 못생길 리가 있나!”

정미의 입꼬리가 들썩였다. 어이가 없어 말이 나오지도 않았다.

‘어머니의 말뜻은, 예전에 어머니가 나를 그렇게 냉대했던 이유엔 오라버니가 요절한 탓도 있던 데다가, 또 다른 이유로 내가 못생겼던 탓도 있었다는 말인가? 망했다……. 어머니가 더욱 싫어졌어. 어떡하지?’

어찌 된 일인지 죽은 여동생을 닮은 딸을 보자니, 한 씨는 이전처럼 냉담하게 대하지 못했다. 부드러워진 말투에는 망설임이 묻어나왔다.

“미야, 네 아버지…… 가 널 보러 오시지 않았니?”

“오셨었어요.”

둘째 나리를 언급하자 정미의 온몸에 한기가 맴돌았다.

“동 이낭과 아이들을 데리고 함께 오셨더군요. 연극을 보러 온 줄 알았어요.”

정미가 동 이낭 얘기를 하자, 한 씨는 은근히 주먹을 쥐었고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지만, 마음에 느껴지는 고통만큼은 아프지 않았다.

‘그 사람은, 그는 정말 이토록 모질구나! 그렇게 오랫동안 떠나있었던 것은 둘째 치고, 겨우 돌아와서는 노부인에게만 얼굴을 비추다니! 설마, 나 한명주가 정말로 그 산골에서 온 가난한 재녀보다 못한 건가?’

한 씨의 마음이 답답해졌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부모님과 형제들에게 실컷 예쁨을 받았고, 늘 부모님이 서로 사랑하는 모습만 보며 자라왔다. 어머니는 아이를 여섯 명이나 낳았고, 아버지는 첩도 전혀 들이지 않았다.

여동생이 죽고 한 씨가 위국공부로 갔을 때, 어머니는 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울고 있었고, 아버지는 어디에도 가지 않고 집에서 어머니 곁에 있곤 했다. 그리고 그때, 아버지는 위국공 자리에서 내려와 큰오라버니에게 직위를 물려주신 것이었다. 그러고는 어머니를 데리고 기분전환을 시키려고 동만(東灣)으로 놀러 갔으며, 어머니는 돌아오신 후 몸과 마음이 점점 좋아졌다.

이전에 어머니와 무슨 이야기든 다 하던 때에, 어머니는 그녀가 젊었을 때 사실 다른 사람을 좋아했었다고 얘기해준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 사람에겐 이미 정혼녀가 있었기에, 어머니는 조금도 티 낼 수가 없었다고 했다. 이후 아버지에게 시집온 뒤로 오랜 기간 동안 즐겁지 않았지만, 아버지의 자상한 애정에 점점 마음이 동했고, 시간이 지나면서 좋아했던 그 사람의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낙숫물이 댓돌을 뚫듯이, 오랜 시간이 지나면 정이 들기 마련인데, 한 씨가 이미 아버지처럼 행동하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그의 반응은 조금도 돌아오지 않는 것일까?

그는 결코 천성적으로 냉랭한 성정이 아니었다. 그저 그는 웃는 얼굴을 다른 여인에게만 보여줄 뿐이었다. 심지어 그 여인은 한 씨가 조금도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여인이었다.

한 씨가 입을 열었다 닫았다 하며 망설였다.

“미야, 그렇게 말하지 말거라. 네 아버지가 돌아오시자마자 너를 보러 왔음은, 너를 걱정하신다는 뜻이지 않겠니.”

정미는 곧바로 치마를 걷어 올려 면포를 두른 오른발을 내밀어 보이며 차갑게 웃었다.

“어머니, 보세요. 만약 아버지께서 저를 보러 오시지 않았다면, 제 발이 이렇게 되지도 않았을 겁니다!”

한 씨가 놀라 물었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거니!”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