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교난-40화 (40/375)

40화. 허겁지겁 떠나다

정미는 차분하게 둘째 나리를 쳐다봤다.

“아버지께선 제게 규수의 덕목을 요구하셨으면서, 아버지는 군자의 덕목을 언제쯤 스스로에게 요구하실 건가요?”

정미의 손을 잡은 정철의 손에 힘이 들어갔지만, 표정은 침착했다.

그는 동생의 성정을 알고 있었다. 만약 정미가 오늘 하고 싶은 말을 다 내뱉지 않는다면 또 스스로에게 상처를 입힐 텐데, 어찌 막을 수 있겠는가.

아버지를 화나게 한 책임을 져야 한다면, 그때 그가 앞에 나서주면 될 일이었다.

“그게 아버지에게 할 말이더냐?”

“저는 그저 사실을 말했을 뿐입니다.”

정미는 동 이낭을 살짝 훑으며 마치 물건을 살펴보는 듯 쳐다보다가, 눈빛을 거두었다.

“만약 아버지께서 군자라면, 어찌 감히 이낭 하나가 아들을 아낀다고 말하게 내버려둔 반면, 양이와 동이의 입을 다물게 하실 수 있나요? 이낭이 뭐라도 된단 말입니까? 정동과 정양이 ‘어머니’라고 부른다고 정말 이들의 어머니가 되는 줄이라도 아나요? 감히 제 앞에 무릎 꿇고 용서를 빌다니, 이낭 하나에게 용서하고 말고 할 가치가 있습니까? 참으로 이해할 수 없군요!”

“정미, 입 다물거라!”

둘째 나리는 뜨끔함과 분노를 동시에 느껴 큰 소리로 꾸짖었다.

“네 아비가 어찌 돌아올 수 있었는지 잊으면 아니 된다. 설마 네 아비의 목숨이 동 이낭을 존중해줄 만큼도 소중하지 않다는 것이냐?”

보통의 소녀였다면 둘째 나리의 꾸짖음에 움츠러들었을지도 몰랐다.

만약 둘째 나리가 돌아오지 않았다면, 정미는 유복녀(*어머니 뱃속에서 아버지를 여의고 태어난 딸)로 남았을 터였다. 세상은 유복녀에게 각박했다. 아버지에게 해를 끼칠 만큼 박복하다고 여겨 시집가기에도 쉽지 않았다. 예를 들어 위국공부의 큰아가씨 한추화가 만약 어렸을 때 사위를 맞이하지 않았다면, 위국공부 사람들은 그녀의 혼사에 머리를 싸맸을 것이었다.

둘째 나리가 죽었다가 살아난 덕분에 정미는 유복녀 신세를 면할 수 있었고, 한 씨의 과부 신세 또한 면할 수 있었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딸로서 어찌 둘째 나리의 말에 말대꾸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정미는 그런 틀에 박힌 소녀가 아니었기에, 유복녀니 뭐니 하는 일은 생각지 못했다. 심지어 그녀는 여덟 살 이전의 생활이 지금보다 더 즐거웠다고 생각했으므로, 동 이낭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있을 리 없던 것이었다!

소녀는 눈을 커다랗게 뜬 채, 마음속으론 한 가지 생각만을 떠올렸다.

‘이 세상에 내 아버지만큼 뻔뻔한 사람은 정말 많지 않을 거야!’

그녀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는가 싶더니, 비웃는듯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아버지, 동 이낭의 부친께서 아버지를 구해주신 것 아닌가요?”

둘째 나리는 미간을 찌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미는 개의치 않고 손을 뻗어 동 이낭을 가리켰다.

“아버지께서는 혼인으로 은혜를 갚지 않으셨나요? 어찌 아직도 갚을 은혜가 남아있는지요. 아버지로도 부족하여, 이 딸까지도 몸과 마음을 바쳐야 합니까?”

“정미―”

둘째 나리의 얼굴이 돼지의 간처럼 검붉어졌다. 이를 갈며, 때려죽여도 시원치 않을 딸의 이름을 불렀다.

한 사내로서, 그것도 벼슬이 있는 사내로서 딸에게 ‘몸과 마음으로 은혜를 갚는다’라는 말을 듣자 피가 들끓는 것 같아, 입을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입을 열었다간 피가 뿜어져 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정미가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깨달은 듯 말했다.

“아, 이제 알겠어요. 아버지께선 동 이낭이 첩이 되어 억울할 거라 생각하신 거지요, 그렇죠? 목숨을 구해준 은인의 딸인데, 멀쩡한 정실부인에서 이낭이 되었으니, 억울하게 느껴지는 것도 당연해요.”

둘째 나리는 드디어 퇴로를 찾았다는 듯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미야, 네가 그 도리를 알았으니, 오늘 아비가 말을 헛되이 하지 않은 모양이구나.”

동 이낭이 둘째 나리의 품에서 고개를 들었다.

“나리, 첩은 한 번도 억울하다고 느낀 적 없습니다…….”

정미가 그녀를 차갑게 힐끗 쳐다보고는, 불쾌한 듯 경고했다.

“화 이낭, 또 끼어드는구나!”

‘화 이낭’ 소리에 동 이낭의 몸이 재차 떨렸고, 다시금 둘째 나리의 품에 파고들어 울기 시작했다.

정미가 비웃었다.

“아버지, 보세요. 화 이낭의 겉과 속이 다른 것을요. 분명히 속으론 몹시 억울한 것이 틀림없어요. 그렇지 않으면 어찌 이렇게 울겠어요?”

정미는 성질을 참으며 조금 따뜻해진 말투로 말했다.

“화 이낭, 울지 마. 오늘 말이 나온 김에 너에게 도리를 알려주마. 앞으로 억울해서 울더라도, 내 앞에서 울지는 마. 당신의 억울함은 다른 사람이 아닌 아버지께서 주신 것이잖아. 만약 아버지께서 당신을 첩으로 두기 아쉬우셨다면, 당신네 마을에 계속 남았어야 하지 않았겠어?”

여기까지 말하자 정미의 입꼬리가 또 올라갔다. 아가씨가 다른 사람을 비웃는 상황은 분명히 유쾌하지 않았지만, 지금의 정미는 눈 같은 피부에 꽃같이 아름다운 용모를 가진 데다가, 아직 소녀의 풋풋함이 남아있었기에 정철의 눈에는 그저 장난스럽고 귀여워 보일 뿐이었다. 그는 웃음을 머금던 눈을 급히 내리깔고, 뒤쪽에서 정미의 머리를 살짝 잡아당겼다.

정미는 정철의 격려를 받는다고 생각해 몸을 움직여 정철의 팔에 기댔다. 웃는 얼굴이 더욱 환해졌다.

“아버지, 제 말이 맞지요?”

둘째 나리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미야, 허튼소리를 함부로 해선 안 된다! 부모와 처자식이 있는데, 어찌 외진 마을에 남아 부모를 평생 아프게 할 수 있겠느냐!”

동 이낭이 고개를 들어 이해한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정미의 얇은 입술이 살짝 오므려졌다.

“그럼 아버지께선 그때 왜 어머니와 이혼하지 않으셨어요? 그럼 화 이낭이 첩이 될 필요도 없었을 텐데요!”

동 이낭의 안색이 창백해져, 둘째 나리의 품 안에서 약하게 몸을 떨었다. 둘째 나리도 정미의 말에 말문이 막혀 아무 말도 하지 못하다가, 한참 뒤에야 입을 열었다.

“됐다. 네 몸이 좋지 않으니, 아비가 너와 언쟁하지 않으마. 나중에 네 어미에게 예의를 더 가르치라 해야겠구나!”

둘째 나리는 낙담한 얼굴로 동 이낭과 자식들을 데리고 떠나려 했다. 아까 노부인과 한 씨를 모셔오라고 한 일은 일찍이 잊은 듯했다.

정양은 충격받은 동 이낭에게 안겨 나가면서도, 고개를 돌려 아쉬운 듯 정미를 바라봤다.

정미가 손을 흔들며 경쾌한 말투로 말했다.

“양아, 앞으로 자주 오렴.”

뚱보는 바로 활기를 되찾고 기쁜 듯 외쳤다.

“셋째 누님, 내일도 올게!”

정양은 정미에게 원앙내권을 준비해달라는 말을 하려고 했으나, 동 이낭이 그를 안고 빠르게 사라졌다.

정미는 긴장이 풀려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정철은 큰 베개를 정미의 등 뒤에 기대주며 반쯤 무릎을 꿇었다.

“오라버니가 상처를 치료해줄게.”

정미의 발엔 더 이상 피가 흐르지 않았고, 마른 핏자국이 발바닥과 덧신 사이에 붙어있었다. 정철이 교도로 조심히 덧신을 잘라내며 가슴 아프다는 듯 말했다.

“미미, 왜 아버지와 그리 다툰 거니. 너무 오래 지체되어 다 붙어버렸잖아. 좀 있으면 아프기 시작할 거야.”

정미가 되물었다.

“오라버니는 왜 또 왔어?”

교도를 든 정철의 손이 멈칫했다.

그는 정미에게서 대공주가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정신없이 뛰어갈 수밖에 없었다. 이후 조금 진정이 된 후에 동생과 아버지의 만남이 걱정이 되어 돌아온 것이었다.

하지만 정철은 이 사실을 절대 말할 수 없었고, 잠깐 망설이더니 재치있게 말했다.

“원앙내권을 담은 접시를 여기 두고 갔잖아. 오라버니가 가지러 왔지.”

접시를 생각하자, 정미의 눈에 분노가 스쳤다.

“그 뚱보 때문에, 오라버니의 접시가 깨졌어.”

“나중에 오라버니가 너 대신 그 아이를 혼내줄게.”

정미는 뚱보의 웃는 얼굴을 떠올리고는 뾰로통하게 말했다.

“……됐어.”

남매는 서로를 마주 보더니 동시에 웃었다.

* * *

정철이 마침내 정미의 덧신을 조각조각 잘라냈고, 소녀의 하얀 발바닥에 흉악한 상처가 있는 것을 보고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는 동생의 오른발을 무릎 위에 올리고 고개를 숙였다. 깨끗한 수건을 백주에 적시고 조심히 상처를 닦아주었다.

정미가 발을 움츠리며 아픈 듯 숨을 들이쉬자, 정철이 급히 멈추며 눈을 들었다.

“아파?”

“……안 아파.”

정미는 입술을 깨문 채 고개를 저었다.

조금 전 울컥한 탓에 접시 조각을 바로 빼내며 입술을 깨물어 터트렸던 정미는, 재차 깨문 입술 때문에 피 맛이 나는 것을 느꼈다.

“그만 깨물어야지.”

정철이 이를 급히 제지했다.

그는 평소 무예를 공부하느라 자주 부딪히며 때론 다치기도 해서, 자신의 상처를 봐도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동생이 다친 것을 보자 오히려 마음이 아파졌다.

정미는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입을 열면 험한 말이 나와 오라버니에게 걱정을 끼칠까 두려웠다.

정철은 수건을 한쪽에 놓고, 품에서 반듯한 손수건을 꺼내 정미의 입가에 건넸다.

“미미, 이걸 물고 있으렴.”

정미는 순순히 손수건을 물었고,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정철이 상처를 치료해주는 것을 기다렸다.

치료가 끝나자 정미는 땀범벅이 되었고, 정철의 이마 또한 땀방울에 젖어있었다.

정미는 손수건을 뱉으며 웃었다.

“왜 나보다 오라버니가 땀을 더 많이 흘렸어?”

정철은 어이없다는 듯이 그녀를 쳐다보며 가볍게 꾸짖었다.

“만약 네가 아버지와 그렇게까지 논쟁하지 않았다면, 이런 고생을 했겠어?”

그는 말하며 일어나서 정미를 안아 들어 침상 위에 눕혀주었다.

정철은 정미의 얼굴이 경직되는 것을 보고 가볍게 한숨 쉬며 한쪽에 앉았다.

“미미, 방금 아버지가 노부인을 모셔와 너를 가묘로 보낸다고 하셨을 때, 무섭지 않았어?”

‘가묘’라는 두 글자가 들리자 정미의 몸이 굳었다.

정미는 당연히 무서웠다.

하지만 그녀는 그저 말을 똑바로 하고 싶었을 뿐이었고, 이후 다시는 부모 자식 간의 도리 같은 연극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정씨 가문에 가묘가 있는 것조차 잊고 있었을 뿐이었다.

가묘에 들어가 사는 것 자체는 두렵지 않았지만, 이런 때에 그곳에서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었다. 가묘에서는 수많은 환자들을 관찰해 부의(符醫)와 망진(望診)을 배울 기회도 없었고, 궁에 들어가 큰언니의 운명을 구할 기회는 더욱이 있을 리 없었다.

그래서 그 순간 정미는 정말로 두려움을 느꼈다. 하지만 둘째 나리 앞에서 고개를 숙이는 것은 더욱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바보야, 오라버니와 약속해. 이후 또 이런 상황이 생긴다 해도, 마음먹은 대로 말을 해선 안 돼.”

동생이 입을 꾹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정철은 낮게 웃었다.

“만약 네가 도저히 참을 수 없다면, 최소한 오라버니가 온 뒤에 시작해.”

천성은 타고나는 것이기에, 동생의 외강내유한 성정은 그가 조심하라고만 충고하면 되는 일이었다. 성질을 억지로 참으면 정미가 어찌 쾌활하게 지낼 수 있겠는가?

그가 정씨 가문에 있는 동안은 최선을 다해 정미를 돌볼 것이며, 만약 어쩔 수 없는 때가 되어 그 ‘효(孝)’라는 큰 산을 넘을 수 없다면, 무슨 일이든 정미와 함께 하면 될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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