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교난-38화 (38/375)

38화. 부녀(父女)

정미가 정희를 바라보자, 정희도 눈살을 찌푸리고 마주보았다.

어려서부터 경전을 많이 읽은 소년의 눈에도, 정미에 대한 혐오감이 가득 차 있었다.

소년도 마찬가지로 연초의 그 일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때 그는 정말로 가족의 입장에서 생각했던 것이었고, 정미가 저지른 어리석은 일로 창피를 당하고 싶지 않았다. 만약 정말로 죽었다면 사람들의 칭찬을 받을 수도 있었을 텐데, 이렇게 낯짝 두껍게도 살아있으니 나중에 그녀가 좋은 집안으로 시집을 갈 수 없음은 물론이고, 집안의 자매들 모두에게 해가 될 테니, 너무 이기적이었다.

하지만 그의 진심 어린 말은 무엇으로 돌아왔는가?

뜻밖에도, 정미는 그의 얼굴에 침을 뱉었던 것이었다!

그다음엔, 아니, 그다음은 없다. 그는 급히 얼굴을 씻으러 갔으니 말이다.

이 이복남매 두 사람은 멀리서 마주보며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정 씨네 둘째 나리는 그제야 냉정함을 되찾고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미야, 어떻느냐? 정말 아무 일 없는 것이냐? 어찌 멍하니 아무 말도 하지 않느냐?”

정미는 눈을 깜빡였다. 그제야 정신이 돌아온 듯 손을 들어 얼굴 반쪽을 가리며 부끄러운 듯이 말했다.

“아버지, 보세요. 정희가 계속 저를 빤히 쳐다봐요. 제가 너무 예뻐져서 그런 걸까요?”

“그게 무슨 말이야!”

셋째 공자 정희는 평소의 고상한 모습을 완전히 벗어던지고 마치 잘 익은 새우처럼 붉어진 얼굴로 고함을 질렀다. 그러고는 이리 보고, 저리 보더니, 어린 남동생을 내팽개치고 휘청이며 달려나갔다.

정미는 둘째 나리가 입을 열기도 전에 선수쳐 말했다.

“아버지, 보세요. 정희가 왜 이렇게 빨리 도망친 걸까요? 설마 제 발 저린 걸까요?”

“여자아이가 아무 말이나 함부로 해선 안 되는 법이다!”

둘째 나리는 늘 무슨 말이든 입 밖으로 내뱉는 정미도 불만스러웠고, 줄곧 자랑스러웠던 아들에게도 불만을 갖고 말았다.

‘정희는 지나치게 점잖은 아이였건만, 어찌 말 한마디에 이렇게 황급히 도망칠 수 있단 말인가?’

정미는 눈썹을 치켜세우며, 담담하게 정동을 훑어봤다.

“들었어? 정동.”

정동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바라보자 정미가 웃었다.

“여자아이가 아무 말이나 함부로 해선 안 된다고 하셨잖아.”

“내가 언제 말을 함부로 했는데?”

정동의 말투는 부드럽고 잔잔했다. 만약 평소 같았다면, 곧바로 큰소리로 정미가 큰 덩치만 믿고 사람을 괴롭힌다고 외쳤겠지만, 지금의 정미는 많이 야위어 예전의 그 큰 덩치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또 정철이 그녀에게 화장을 해준 탓에, 예전과 같은 말투임에도 불구하고 분위기는 무척 달랐다.

정미가 낭랑한 목소리로 침착하게 말했다.

“방금 네가 내게 여우 귀신이 씌었다고 하지 않았어? 이게 말을 함부로 하는 게 아니라면 뭐란 말이야? 아버지마저 네가 말을 함부로 했다고 하셨는데, 인정하지 않다니. 여자아이가 어떻게 이럴 수 있니?”

“너!”

정동은 억울해 눈물을 흘렸다. 흐릿해진 눈으로 둘째 나리를 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버지, 방금 꾸짖으신 것이 설마 저 동이입니까?”

“네가 아니면 누구란 말이야?”

정미가 한발 앞서서 입을 열었다.

“내가 기절했을 때, 현청관의 수석 북명진인께서 오셔서 봐주신 덕에 내가 깨어날 수 있었던 거야. 그런데 너는 그런 나를 보자마자 다른 건 묻지도 않고 여우 귀신이 씌었다고만 하니, 이게 말을 함부로 하는 게 아니면 뭐란 말이야? 아버지, 그렇지요?”

정미는 평소 다른 이들에게 웃어 보이는 걸 좋아하지 않았지만, 이때 눈을 들고 살짝 웃으니, 마치 두 눈에 빛이 넘실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둘째 나리는 눈앞의 소녀가 그의 친딸이 아닌 것 같다는 오묘한 감정을 느꼈다. 하지만 그 눈썹과, 그 눈과, 웃을 때 눈에 드러나는 냉담함은 그의 딸이 틀림없었다.

“아버지, 말씀해보세요. 제 말이 맞지요?”

정미가 계속해서 물었다.

오늘, 정미는 마음이 한쪽으로 치우친 아버지가 정동의 뺨을 내려쳤으면 했다.

‘저 염치없는 것이 내게서 둘째 오라버니를 뺏으려 하다니!’

“맞다.”

둘째 나리는 이를 악물고 두 글자를 내뱉었다. 그러고는 정동을 보며 말했다.

“동아, 어린아이가 말을 함부로 해선 안 된다. 북명진인께서 어떤 분이시냐. 그분이 친히 네 셋째 언니의 병을 봐주셨는데, 어찌 여우 귀신에게 씌였다는 황당한 말을 할 수 있단 말이냐?”

정동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둘째 나리를 바라봤고, 속눈썹을 매미 날개처럼 잘게 떨었으며, 눈엔 눈물이 맺혀 떨어질락 말락 했다.

그 안쓰러운 모습을 보니 둘째 나리의 마음이 아파져 입을 뻐끔거렸으나, 감히 위로의 말을 건네지 못했다.

그가 어찌 어린 딸을 따라 북명진인의 능력을 의심할 수 있겠는가. 북명진인은 현청관의 수석 진인으로, 이미 이 나라의 국사(*國師: 황제의 스승)의 제자 중 제일이었다!

심지어 국사가 은둔하며 나오지 않는 상황에서, 북명진인은 이미 실질적인 국사나 다름없었다.

예로부터 왕조가 바뀌어도 오직 도교만은 절대 변하지 않는 국교(國敎)였고, 대량(大梁) 왕조가 되자 근 몇 년간 불교가 점점 흥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현청관의 지위는 여전히 흔들리지 않았고, 국사는 모두 현청관 출신이었다. 이 세상의 도법 중 제일이자, 더욱이 부의 중 제일이라 할 수 있었다.

국사는 제왕을 만난다 한들 무릎을 꿇을 필요조차 없었고, 심지어 조정의 모든 문무백관이 한쪽 무릎을 꿇고 예를 갖춰야 했다.

현청관의 이 숭고한 지위에, 만약 그가 북명진인을 의심하는 말이 새어나갔다간 큰 골칫거리가 될 것이 분명했다!

전적으로 의지하는 남편은 말이 없었고, 딸은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으니, 동 이낭은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셋째 아가씨, 너무 많은 생각을 하셨습니다. 동이는 그저 걱정스러운 마음에 그런 것일 뿐입니다…….”

정미는 동 이낭을 쳐다보지도 않고, 불쾌한 표정으로 정동을 쳐다봤다.

“하고 싶은 말이 있다 해도 왜 좋게 말하지 않는 거야? 아무리 눈물은 공짜라 하지만, 이렇게 낭비해서는 안 되지. 너무 저렴해 보이니까! 우리 집안이 부유하진 않지만, 밖에선 어쨌든 백부의 아가씬데, 네 꼴이 이게 뭐니.”

정동은 입을 가리고 어깨를 들썩이며 숨넘어갈 듯이 울었다. 우는 눈으로 사방을 둘러보더니, 친어머니인 동 이낭의 얼굴은 창백하여 기댈 곳이 못 되는 것 같아, 몸을 돌려 둘째 나리 품에 안겨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다.

“미야, 언니가 되어서 동생에게 왜 그렇게 각박하게 말하는 것이냐?”

정미는 턱을 치켜들고 얕보이기 싫은 듯 반문했다.

“정동이 제게 귀신이 씌였다고 말한 것이 걱정이 되어서라는데, 제가 이렇게 옹색하게 굴지 말라고 가르쳐주는 건 각박한 것입니까?”

둘째 나리는 자신이 편애하는 것이 다소 도리에 어긋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헛기침을 하고는 말했다.

“동이를 가르치는 것이라고 해도, 어른이 앞에 있을 땐 너도 아이이지 않느냐. 쓸데없이 마음을 쓰지 말거라.”

정미는 이 ‘아버지’라고 불러야 하는 사내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눈동자에는 조금의 온기도 없었다.

사실 정미도 비위를 맞출 줄 아는 아이였다. 하지만 그녀는 오직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의 비위만 맞추고 싶었기에, 이런 사람의 기분을 맞춰줄 생각은 없었다. 억지로 얻는 사랑은 정미도 전혀 바라지 않았으니 말이다.

정미는 그가 정동의 유약한 모습에 속아 정미가 그녀를 구박한다고 생각해, 계속 정동 곁에 있는 것이라 생각했었다. 동시에 정미는 아버지가 너무 둔해 그런 것이라며 스스로를 설득시켰고, 흔히 말하는 부녀의 정에 조금의 기대를 가진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 해부터 정미는 깨달았다. 아버지의 마음은 진작 한쪽으로 기울었고, 그 마음은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그는 정동이 잘못을 하지 않을 거라 여기는 것이 아니었다. 정동이 잘못을 저지르더라도 그녀와 대립하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

정미는 갑자기 흥미를 잃어 더 이상 아버지와 말을 잇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침상 머리맡 병풍에 비스듬히 기대어 눈을 감고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아버지, 머리가 아파요.”

둘째 나리의 안색이 좋지 않아졌다. 하지만 딸아이가 이렇게까지 말하니 아버지로서 할 수 있는 말이 없었고,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푹 쉬거라. 새해 전날엔 다 같이 모여 식사를 해야 하니.”

“알겠습니다.”

둘째 나리는 냉담한 표정의 딸을 싸늘한 눈으로 쳐다봤다.

자세히 보니, 얼굴이 그렇게 많이 변하지는 않았다. 그저 살이 빠지고, 하얘졌을 뿐인데, 환골탈태한듯한 변화로 보인 것이다. 하지만 딸의 이 성정은 예전보다 더욱 차분해진 듯했다.

‘설마 예뻐지면, 마음도 편안히 먹게 되는 것이란 말인가?’

둘째 나리는 어렴풋이 불길한 예감이 들어, 걱정 가득한 얼굴로 동 이낭에게 말했다.

“가지.”

들어온 이후로 정미에게 철저히 무시당하던 동 이낭은 무너질 것만 같은 가슴을 붙잡고 고개를 끄덕였다.

둘째 나리는 정동을 데리고 나갔고 동 이낭이 그 뒤따르며, 세 식구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방을 나갔다.

비서거 밖으로 나가자, 동 이낭이 그제야 깜짝 놀라 소리쳤다.

“나리, 양이는요?”

둘째 나리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사색에 잠겼고, 정동이 흐느꼈다.

“분명 셋째 언니 쪽에 두고 온 게 틀림없어요!”

* * *

비서거 안, 정미는 구석에 앉아 접시를 들고 원앙내권을 한입 가득 먹고 있는 뚱보 아이를 보며,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정미는 동 이낭네 자식들을 뼈에 사무치도록 혐오했지만, 다섯 살밖에 되지 않은 뚱보 아이 정양은 그녀에게 별로 존재감이 없었다. 혐오감도 호감도 없는 관계였다.

그녀는 원래 착한 성미가 아니었기에, 이 아이가 원수의 아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이상, 아이라는 이유만으로 따뜻하고 선량하게 대하기는 싫었다.

정미는 이 뚱보가 끊임없이 원앙내권을 입안으로 욱여넣는 것과, 접시가 거의 비어가는 것을 보았다. 이 간식이 둘째 오라버니가 직접 만든 것이라 생각하니 가슴이 아파 무너질 것만 같았다. 그녀는 동 이낭네가 어째서 이 뚱보를 남겨두고 갔는지는 더 이상 생각지 않은 채, 벌떡 일어나 정양의 곁으로 가 쪼그려 앉았다.

뚱보는 머리 위쪽에서 그림자가 지자 저절로 고개를 들었고, 입가에 부스러기를 묻힌 채 멍하니 불렀다.

“셋째 누님?”

“양아, 간식이 맛있니?”

“맛있어.”

뚱보가 연거푸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맛있지. 이건 둘째 오라버니가 내게 선물한 거야. 양이가 먹고 싶으면, 네 셋째 형에게 선물해달라고 해.”

정미는 그렇게 말하면서 접시를 뺏으려 했다.

뚱보는 쟁반을 힘껏 잡으며 말했다.

“나 아직 다 안 먹었어. 그리고 셋째 형님이 이런 걸 선물할 리 없어!”

정미가 미간을 찌푸렸다.

“왜 선물할 리 없어? 생각해봐, 둘째 오라버니가 이걸 내게 줬잖아. 그러니까 네 셋째 형님도 분명 네게 줄 거야.”

뚱보가 말에 휩쓸린 틈을 타, 정미는 손에 살짝 힘을 주어 재빠르게 접시를 빼앗았고, 몸을 일으켜 돌아가다가 갑자기 치마가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고개를 숙이자, 그 뚱보가 양손으로 그녀의 치마를 꽉 붙들며 그녀의 허벅지에 매달려 있는 것이 보였다!

“이거 놔!”

정미는 비명을 지르고 싶은 충동을 억지로 참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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