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교난-37화 (37/375)

37화. 누이와 남동생

“미미, 오라버니가 오늘 찾아온 건 네게 알려줄 일이 있기 때문이야. 아버지께서 오늘 아침 집에 도착하셨어.”

“……응, 알았어.”

정 씨네 둘째 나리가 백부로 돌아왔다는 것을 듣고, 정미는 눈꺼풀을 뜨지도 않은 채 담담하게 대답했다.

“아버지께서 네가 아직 몸조리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아시니, 아마도 정리가 된 후 너를 보러 오실 거야.”

정철의 눈빛이 껍질을 벗긴 달걀처럼 뽀얀 정미의 얼굴에 머무르더니,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

“조금 꾸미는 게 어때?”

정미가 턱을 치켜들며 콧방귀를 뀌었다.

“내가 예쁘게 꾸미면서까지 아버지를 맞이해야 해?”

정철이 정미의 머리를 툭 쳤다.

“바보야, 누가 예쁘게 꾸며야 한다고 했어. 네 안색이 너무 좋아 보여서, 만약 며칠 더 쉬고 싶다면 조금 가리라는 뜻이었어.”

정미는 그제야 알아들은 듯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정철을 바라봤다.

“역시 오라버니는 꼼꼼해!”

‘만약 벌써 다 나아버리면 급히 감사 인사를 돌리러 다녀야 할 텐데, 그러면 부적을 배울 시간이 어딨겠어!’

“하지만 나는 화장을 할 줄 모르는걸.”

예전엔 못생긴 얼굴을 예뻐 보이는 쪽으로만 꾸몄기에, 못난 쪽으로 꾸미는 것은 할 줄 몰랐다.

“그 환안이라는 시종에게 시켜봐.”

정미가 고개를 저었다.

“환안은 심부름만 할 줄 아는걸.”

정철은 말문이 막혔다.

“그럼 네 몸종을 하기엔 아무래도 모자란 것 같은데. 다른 두 여종은?”

“심부름을 하는 것도 아주 중요해!”

정미는 급히 환안을 감싸들었다. 최근 주사와 황지는 모두, 환안이 몰래 가져온 것이었다.

‘맞아, 그 이 년 전 오라버니에게 압수당한 《원맹기》도!’

“그 외에는 몇 가지 간식을 만들 줄 아는 화미라는 애가 있어. 다른 애는 청가라고 하는데, 노래를 부를 줄 알아서 내 답답함을 풀어줘.”

정철은 잠시 침묵하다가, 단념한 듯 정미를 화장대 앞으로 데리고 갔다.

“앉아. 오라버니가 해줄게.”

십오 분 후, 정미는 거울 속의 연약하고 아파 보이는 소녀의 모습에, 놀랍다는 듯 말했다.

“오라버니, 역시 오라버니가 할 줄 모르는 것은 없구나!”

정철이 평소보다 오래 머무는 것을 느낀 정미는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입을 열었다.

“오라버니, 우선 가서 일 봐. 계속 나와 있어 주지 않아도 돼.”

둘째 오라버니는 늘 닭보다도 일찍 일어나 한 시진 동안 기본기를 다졌고, 씻고 식사를 한 뒤엔 문을 닫고 공부를 하거나, 고 선생에게로 가거나 했다. 어쩔 땐 친척과 벗들을 만나기도 했다. 이렇게 온종일 바쁘다가 저녁 식사 뒤에는 또 한 시진 동안 꿋꿋이 창술을 연습해야 했건만, 이렇게 틈을 내 정미를 보러 오니 생각해보면 아주 피곤할 듯했다.

정철이 미소를 지었다.

“이 정도는 괜찮아.”

“하지만 오라버니는 내년 봄에 춘시(*春試: 봄에 열리는 시험이란 뜻으로, 회시(会试)를 말함)에 참가해야 하잖아?”

“네가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오라버니는 잘 볼 테니까.”

“그건 그래.”

정미는 당연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라버니의 재능이라면 장원급제도 문제가 아닐 거야.”

정철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미미가 오라버니에 대한 기대가 조금 높구나.”

“높지 않아.”

정미는 오라버니에 대한 자신감이 가득했다.

“아버지는 약관(*弱冠: 남자 나이 20세)이 되기도 전에 진사에 합격하셨고, 서길사에도 합격하셨으니, 오라버니도 전시(殿試)에 일갑(一甲)으로 합격해야 청출어람이라 할 수 있지.”

여동생이 그를 격려하려 ‘청출어람’까지 언급하자, 정철은 낮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 열심히 해서 일갑으로 합격할게. 네가 실망하지 않도록.”

정미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는가 싶더니, 갑자기 무언가 떠올라 급히 손을 내저었다.

“안 돼, 오라버니. 이갑(二甲)으로 합격하는 게 좋겠어.”

“방금 미미가 오라버니에게 청출어람이라 하지 않았어? 왜 벌써 마음이 바뀐 거야?”

그의 앞에선 거리낌 없는 아이처럼 구는 동생을 보며 정철은 꽤나 즐거워져, 일부러 그녀를 놀렸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말이 이제야 생각났어. 이야기 속에 장원급제한 사람들은 늘 공주랑 결혼하더라고. 근데 지금의 공주들은……, 모두 오라버니와 어울리지 않아.”

정미는 만나봤던 몇 명의 공주를 떠올렸다.

“대공주(大公主)는 오라버니보다 나이가 많고, ‘면수(*面首: 귀부인들의 노리개 노릇을 하던 준수한 남자)’라고 하는 이상한 걸 키우고 있대. 그게 무슨 동물인진 모르겠는데,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보아 좋은 건 아닌 것 같아. 둘째 공주는 이미 부마(*駙馬: 공주의 남편을 일컬음)가 있고, 셋째 공주, 넷째 공주는 나를 볼 때마다 이런 눈을 한단 말이야.”

정미는 눈을 비스듬히 흘기는 모습을 보여주고는 이어서 말했다.

“다섯째 공주는 아직 말하는 걸 본 적이 없어. 다른 공주들은 아주 어려 보이던걸. 오라버니, 내가 나중에 그 공주들 중 하나에게 ‘둘째 올케언니’라고 부를 걸 생각하니, 왠지 마음이 편치 않아. 그러니까 시험을 너무 잘 보면 안 돼. 알겠지?”

정철은 이미 정미의 다른 말은 들리지 않았다. 오직 ‘면수’ 두 글자에 정신이 팔려있었다.

고작 열세 살밖에 되지 않은 동생이 ‘면수’ 같은 존재를 알다니, 오라버니로서 정말 견딜 수가 없었다!

“오라버니, 왜 아무 말도 없어?”

정미가 의심스러운 듯 정철을 살폈다.

정철은 오라버니로서, 미리 정미를 관리해야 나중에 걱정을 덜 수 있겠다고 생각하여 진지하게 말했다.

“미미, 넌 여자아이잖아. 오라버니의 그런 일들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 새어나가면 웃음거리가 될 거야. 특히, 큼큼, 특히 그 ‘면수’ 같은 것들은 듣고 넘기면 돼. 앞으로 다시는 입에 올리지 마.”

“응.”

오라버니의 꾸중에, 정미는 재잘거림을 멈추고 맥이 풀려 대답했다.

정철은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

“미미, 어디서 그 면수라는 단어를 들었어?”

만약 그 사람들이 함부로 혀를 놀려 동생의 귀를 더럽힌 거라면, 그가 몰래 손봐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여기까지 생각이 닿자 정철의 얼굴엔 웃음기가 사라졌고, 눈에는 새벽달 같은 서늘함만이 남았다.

정미는 늘 오라버니에게 무언갈 숨긴 적이 없었기에, 잠시 떠올려보다가 말했다.

“전에 둘째 언니랑 같이 큰언니를 보러 궁에 들어갔을 때, 나중에 태자 전하께서 오셔서 둘째 언니와 시문을 이야기하셨어. 나는 별로 듣고 싶지 않아서 몰래 나가서 놀다가 궁녀 두 명이 귓속말하는 걸 들은 거야. 대공주가 면수를 키운다고 했고, 또 대공주가 시회를 열어 둘째 오라버니를 초대했는데 오라버니가 가지 않아서 큰언니에게 성질을 부렸다고 했어.”

정미가 말을 다 하기도 전에, 정철은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급히 말했다.

“해야 할 일이 생각나서, 먼저 가볼게.”

이어 그는 눈 깜짝할 새 문밖으로 사라졌다.

정미는 성이 나 입을 삐죽였다. 정철이 그녀의 말을 다 듣기도 전에 떠난 것에 조금 화가 났지만, 생각해보면 내일도 자신을 보러 올 테니, 오라버니에게 화를 내는 것은 내키지 않았다.

그녀는 손목의 특이한 무늬의 팔찌를 만지작댔다. 이 팔찌도 그날 동궁에서 주운 것이었는데, 오라버니에게 말하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다행히 정미는 지금 매우 바빠서, 정철이 떠난 것에 대한 실망은 잠깐에 그쳤다.

* * *

정미는 다시 침상 휘장 안으로 돌아가 수신부를 배웠다.

그러나 오늘은 공부에 집중을 하지 못할 운명이었는지, 삼십 분 후 여종인 청가가 둘째 나리와 사람들이 왔다고 알렸다.

공부에 대한 흥미가 한창이던 정미는 방해를 받자 조금 불쾌했고, 냉담하게 말했다.

“들어오시라 해. 환안아, 휘장을 걷고 나를 앉혀주렴.”

환안이 휘장을 걷고 정미를 앉힌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둘째 나리가 애첩과 아이들을 데리고 들어왔다.

정미는 차분한 눈빛으로 그들을 쳐다봤다.

정 씨네 둘째 나리가 적녀인 정미에게 냉담한 태도로 대한다는 것은 집안사람들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아버지에게도 어머니에게도 사랑받지 못하는 셋째 아가씨에 대해 사람들은 얕보기도 했고, 동정하기도 했다. 하지만 사실은 정미가 오히려 아버지에게 옅은 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녀는 태어났을 때부터 아버지를 보지 못했는데, 여덟 살 때 갑자기 ‘아버지’라고 불러야 하는 사내가 나타났고, 그 사내는 한 번도 그녀를 아끼고 사랑해주지 않았다. 오히려 그 전엔 어머니와의 소원함만 견디면 됐건만, 그때 이후론 아버지의 꾸짖음까지 견뎌야 했던 것이었다.

정미는 다른 집안의 딸들이 아버지에게 가지는 감정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어쨌든 그녀에게 정 씨네 둘째 나리는 그저 어쩔 수 없이 ‘아버지’라 불러야 하는 낯선 사람일 뿐이었다.

정미는 아버지가 나중에 불행을 맞을 것에 대해 마음의 준비를 했기에 곧바로 쳐다보았고, 멍해졌다.

그녀가 멍해진 이유는 무언가가 보여서가 아니라,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서였다!

정미는 뒤쪽으로 눈길을 옮겼고, 아버지 뒤에 반걸음 정도 떨어져 있는 동 이낭과 그녀의 팔짱을 낀 정동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정동의 쌍둥이 남동생이자 집안의 셋째 공자인 정희가 보였으며, 정희는 다섯 살 된 넷째 공자 정양(程揚)의 손을 잡고 있었다.

‘다섯 식구가 손을 잡고 나란히 들어오니, 누가 보면 시장 구경을 온 줄 알겠어.’

정미는 속으로 욕을 하며 다시 아버지의 얼굴을 바라봤다.

‘왜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

정 씨네 둘째 나리는 돌아오자마자 맹 노부인이 딸의 정신이 이상해 하마터면 태자비에게 실례를 할 뻔했다 한 말을 듣고, 마음속에 불만과 걱정을 품고 정미를 보러 온 바였다. 하지만 들어오자마자 보인 것은 까맣고 통통한 딸이 아닌 그림 같은 눈썹과 눈을 가진, 입은 옷도 버거워 보일 정도로 야윈 아름다운 소녀였다. 나리의 안색이 변하더니 자신도 모르게 말했다.

“옥주?”

정미는 눈을 굴리더니 입을 열었다.

“왜 제게 이모님의 이름을 부르십니까?”

둘째 나리는 그제야 정신이 들어 깜짝 놀라 물었다.

“미야, 네, 네 모습이 어찌 이리 변했느냐?”

그는 말하면서 성큼성큼 다가와, 반신반의하며 정미를 살펴봤다.

둘째 나리 뒤에 있던 동 이낭 모녀도 귀신을 본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정동은 몹시 놀란 표정으로 그 맑고 아리따운 소녀를 바라봤다. 동 이낭에게 끼고 있던 팔짱이 서서히 풀리는 것도 깨닫지 못한 채, 치마를 들고 종종걸음으로 다가와 입을 가리며 말했다.

“셋째 언니, 어, 어떻게 갑자기 얼굴이 바뀐 거야?”

말하면서 고개를 들어 둘째 나리를 바라보더니, 곧바로 눈물을 흘렸다.

“아버지, 셋째 언니에게 귀신이 씌인 것 같아요. 제가 예전에 읽은 이야기가 있는데, 그 이야기 속에선 한 평범한 외모의 부잣집 아가씨가 아름다워지기 위해서 매일 선녀에게 공양하고, 정말로 점점 예뻐지고서야 그 선녀는 사실 여우 같은 귀신이었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 아가씨가 예뻐질 수 있었던 것은, 그 여우 같은 귀신이 아가씨의 몸속으로 들어갔기 때문이었다구요!”

그녀는 말하면서 무서운 듯 정미를 쳐다봤고, 둘째 나리의 옷깃을 가냘프게 잡아당겼다.

“아버지, 셋째 언니를 구해주세요!”

정미는 침상 머리맡에 기대 냉담하게 정동의 눈물 연기를 바라보며, 욕설을 퍼붓고 싶은 것을 참았다.

‘저 파렴치한 것, 또 내 뒤에서 몰래 《이지취담(異志趣談)》을 봤구나! 둘째 오라버니가 선물한 물건이라면 모두 건드리고 싶어 하는 걸 내가 모를 줄 알고!’

정미의 눈길이 정희에게로 향했고, 입꼬리는 살짝 씰룩였다.

그것도 어찌 보면 당연했다. 둘째 오라버니는 어찌나 다정한지, 선물한 연지는 이 나이 때의 여자아이들에게 잘 맞는 것이었고, 책은 재밌는 것으로만 주고, 심지어 고작 등불을 선물할 때에도 호박 모양으로 주곤 했다. 하지만 정동의 이 멍청한 남동생들은, 기분을 건드리지만 않으면 다행인 정도였다.

정미는 늘 기억하고 있었다. 연초의 그 일이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정희가 그녀의 방으로 와 그녀를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고, 답답한 분위기가 방 안을 가득 메우곤 했다. 정희는 그녀에게 수치심도 모른다고 했고, 자결해서 가족의 명예를 지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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