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어쩔 수 없이 받다
“그렇다면 그냥 내가 받을게.”
정요는 이번 연말은 유달리 씁쓸하다고 느껴졌다.
“월급도 당연히 내 쪽에서 낼 거고…….”
회인백부는 사정이 좋지 않았고, 서녀인 정요에게는 정미처럼, 그녀를 아껴 시시때때로 실용적이고 여자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물건들을 선물해오는 오라버니도 없었기에, 정말 돈이 들어올 길이 전혀 없었다. 이유 없이 시종 하나를 더 늘리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남들이 본다면 정미는 은혜를 모르는 경향이 있다고 생각할 터였다. 모든 걸 바쳐 그녀에게 잘해준 사람을 자기 범위 밖으로 쫓아내다니.
‘그럼 미안하게도, 앞으론 죽든 말든 신경 쓰지 않을 거야!’
정미는 정요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듯 입을 열었다.
“앞으로 나한테 오는 이 시종의 월급을 둘째 언니에게 넘겨주면 되겠다.”
그러고는 조금 딱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런데 언니, 교용은 여기서 이등 시종이야. 언니가 매월 이등 시종 한 명의 돈을 더 내게 된다면 너무 힘들지 않겠어? 아니면, 이 애를 어린 여종으로 취급해서 그만큼의 월급만 줘도 돼. 걱정하지 마, 둘째 언니를 탓하지 않을 거야. 내가 보낸 선물인데 어떻게 하든 언니 마음이지.”
정요는 가슴이 무너지는 듯하여 입술을 덜덜 떨며 말했다.
“어떻게 그래. 교용이 널 이렇게 오랫동안 돌봐주었는데, 언니가 어떻게 이 아이를 억울하게 할 수 있겠어? 그냥 이등 시종의 월급으로 줄게.”
“언니는 항상 이렇게 내 생각을 해주는구나.”
정미의 입꼬리가 휘었다.
그녀의 입술 색은 선천적으로 다른 사람들보다 붉었고, 지금은 피부도 눈처럼 흰 데다가 입술도 붉었으니, 놀라울 정도로 아름다웠다. 정요는 잠깐 대답하는 것을 잊고 말았다.
정미는 머리를 돌리고 외쳤다.
“환안아, 수선화는 잘 놓았니? 얼른 와서 둘째 아가씨와 교용을 보내드려라.”
“예, 금방 가겠습니다.”
정요는 문밖에까지 나와서야 문득 떠올렸다.
‘일이 조금 이상해. 내가 꽃을 보내고, 정미가 준 시종도 결국 받아왔는데, 정미는 왜 아직도 나를 이렇게 대하는 거지?’
……
휘장의 흔들림이 멈추자, 정미는 그제야 화장대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켜고는 상쾌한 기분으로 침상 위로 올라갔다.
“아혜, 네 ‘미백부’가 정말 좋은 것 같아.”
근 일 년 동안 버틴 끝에야 정미의 인정을 받으니, 아혜는 흥분하여 말했다.
「정말 좋은 것 같아? 얼른 일어나봐, 그럼 날씬해지는 부적도 가르쳐 줄까?」
하얘지고, 날씬해지는 것을 싫어할 여인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가족들이 비명횡사하는 악몽은 정미의 머릿속에 날카로운 칼처럼 박혔기에, 그녀는 조금의 시간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날씬해지는 부적은 배우지 않을래. 아혜, 봐봐, 내 기력이 아주 좋잖아. 이제 태산과 부적을 연습해도 되지 않을까?”
「차근차근히, ‘차근차근’이 뭔지 모르는 거야?」
아혜가 고함치자 정미는 망설였다.
“하지만, 날씬해지는 부적을 먼저 배우는 거와 차근차근히 배우는 게 무슨 상관이 있어? 간단한 태산과 부적부터 배우면 되잖아.”
「날씬해지는 부적, 수신부(瘦身符)를 태산과의 입문 부적으로 여기면 돼.」
정미는 의심스러운 표정을 짓자, 아혜가 이를 악물며 말했다.
「생각해봐, 아이를 낳은 후 몸매가 불어난 여인들, 날씬해지고 싶지 않겠어? 태산과의 부적은 주로 회임 기간과 출산 후의 질병, 그리고 여인들과 관련된 질병들을 치료해. 이 수신부야말로 그중 하나 아니겠어? 어쨌든 이 부의라는 길은 네가 내 말을 잘 듣기만 하면 돼. 난 네가 얼른 이 열세 개의 과목을 다 배웠으면 좋겠는걸?」
정미가 입술을 오므렸다.
“그럼 네 말을 들을게. 우선 수신부부터 배우면 된다는 거지? 하지만 모르는 게 있으면 네게 물을 거야.”
정미는 시작부터 아혜의 말을 곧이곧대로 따르고 싶지 않았다. 만약, 그게 습관이 되면 손해를 보면서도 그것의 말을 듣게 될 테니까.
아혜는 언짢은 듯 응했고, ‘수신부’의 획을 가르쳐주는 순간 환안이 외쳤다.
“아가씨, 둘째 공자님께서 오셨습니다.”
“그래, 오라버니께 들어오시라 해.”
정미의 목소리가 저절로 밝아졌다.
그동안 매일 찾아온 사람은 총 세 명이었다.
하나는 매일 아침 찾아온 정요였다. 하지만 오늘을 제외하고는, 정미는 아직 잠에서 깨지 않았다는 이유로 문전박대하곤 했다.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은 한 씨였다. 정요와는 반대로, 한 씨는 정미의 점심 휴식시간에만 찾아왔다. 매번 정미가 깨어나면 환안이 ‘부인께서 다녀가셨다.’라고 알려주었지만, 두 사람은 이미 꽤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다. 정미는 이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으며, 오히려 편하다고 느꼈다.
마지막 한 사람은 바로 정철이었다. 그는 매일 찾아와 동생과 잠깐 시간을 보냈고, 이에 정해진 시간은 없었다. 그와 함께하는 시간은 정미의 하루 중 가장 행복하고, 또 가장 기대하게 되는 시간이었다.
위국공부에서 보낸 사람을 포함한 다른 사람들도 있었으나 노부인 쪽에서 막았기에 정미는 알지 못했다.
맹 노부인은 이 손녀에게 정말로 정신병이 있다고 생각했다. 태자비 앞에서 미친 자처럼 행동했으니, 이후에 또 무슨 소란을 피울지 몰랐기에, 사람을 적게 만나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했다.
“미미.”
정철이 병풍을 돌아 들어와 침상의 휘장이 쳐져 있는 것을 보고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아직도 자니?”
“아니, 일어났어.”
정미는 급히 외치고는 침상 휘장 뒤에 숨어 얼굴을 가리며 고뇌했다.
‘기쁜 나머지 오라버니에게 들어오라고는 했지만, 얼굴이 변한 것을 잊어버렸어! 만일 둘째 오라버니가 몰라보면 어쩌지?’
소녀가 휘장 뒤에 숨어서는 나오지 않자, 정철은 걱정이 되어 앞으로 몇 걸음 다가갔다. 그렇다고 너무 가까이 다가가는 것은 좋지 않기에, 친절하게 물었다.
“미미, 왜 그러니? 무슨 일이 있으면 오라버니에게 말해봐.”
한참 뒤, 휘장 안에서 소녀의 불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라버니, 오늘 내가 거울을 봤는데, 평소와 조금 달라졌어…….”
정철이 안심하며 웃었다.
“걱정하지 마, 네가 달라져봤자, 더 예뻐진 거겠지.”
정미는 곧바로 의기양양해져 휘장을 걷으며 침상에서 뛰어내렸다. 경쾌한 발걸음으로 정철 앞으로 다가가서는 그의 옷깃을 붙잡으며 말했다.
“오라버니, 어떻게 알았어?”
‘역시 오라버니가 가장 나를 잘 알아. 나를 보기도 전에 예뻐진 걸 알아채다니!’
정철은 깜짝 놀라며 동생의 백옥같은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는 자신의 모든 냉정함과 침착함이, 이 어린 동생 앞에서는 고삐 풀린 말처럼 그가 제어할 수 없는 방향으로 달려감을 느꼈다.
“오라버니, 어떻게 안 거야?”
정미는 키가 컸지만, 정철보다는 머리 하나만큼 작았다. 이렇게 그의 옷깃을 잡고 고개를 위로 들고 쳐다보자, 너무 급하게 일어난 탓인지 조금 현기증이 나 눈을 가늘게 떴다.
정철은 정미가 쳐다보자 조금 멍해졌다. 그가 어떻게 미리 이를 알아차렸겠는가? 그저 습관적으로 동생을 기쁘게 하려고 했을 뿐인데!
그는 조금 건조한 목에 침을 꿀꺽 넘기고는, 정미를 데리고 침상 곁으로 가 앉히며 타일렀다.
“이렇게 추운 날씨에 수면 신발도 신지 않고 내려오면 어떡해?”
정미는 정철의 앞에서 가장 솔직했고, 오라버니에게 사랑받는 보통의 소녀들과 다름없이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오라버니의 말에 신이 나서 깜빡 잊었어.”
정철은 머리가 아픈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몸을 숙여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폭신한 수면 신발을 주워 동생에게 신겨주며 말했다.
“넌 딱 봐도 열세 살 아가씨인데, 어찌 아직도 아이처럼 덜렁대는 거야. 여인들은 차가운 걸 조심하지 않으면 나중에 고생해.”
정철의 말에 정미는, 위국공부의 청설림에 있을 때, 구월이라는 시녀가 눈이 내렸던 그루터기 위에 앉지 못하게 했던 일을 떠올렸다. 당시 정미가 이해가 되지 않아 시녀에게 이유를 물었을 때, 그 시녀는 우물거리며 이율르 말해주지 않았다.
정미가 진지하게 물었다.
“오라버니, 왜 차가운 걸 조심하지 않으면 나중에 고생하는 거야?”
정철은 그 수면 신발을 쥔 채, 맹하게 움직임을 멈췄다.
한참 뒤에야 몸을 일으키며 복잡한 기색으로 물었다.
“미미, 어머니께서……, 네게 이런 이야기를 해주신 적이 없어?”
정미가 고개를 저었다. 그러곤 전혀 개의치 않는 듯 정철의 팔짱을 끼며 말했다.
“오라버니는 뭐든 알고 있잖아? 오라버니가 알려주면 되지.”
동생이 팔짱을 끼자 정철은 순간 경직했다. 방 안에 화로가 뜨거운 탓인지 이마에 땀이 맺히기 시작했고, 난처한 듯이 말했다.
“어쨌든, 차가운 것을 조심하면 돼! 오라버니가……, 오라버니가 어떻게 모든 걸 알겠어!”
그는 동생을 아꼈기에 어떤 고된 일도 대신할 수 있었지만, 이런 일까지 그가 말해줘야 한다니, 이치에 맞지 않았다.
여기까지 생각이 닿자 정철은 서글픈 마음을 느꼈고, 한 씨에게 다른 이들이 알면 안 될 불만을 가지게 됐다.
만약 그가 한 씨의 친아들이었다면 분명 진심으로 어머니를 구슬렸겠지만, 그는 양자였기에 많은 말을 삼켜야 했다.
그저 미미가 안타까울 뿐이었다.
‘곧 있으면 시집갈 나이가 되는데도 이렇게 어린아이처럼 아는 것이 없다니. 부득이하게 동생에게 선정적인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조차 내 머리를 쥐어뜯고 싶을 정도인데, 이런 것까지 알려줘야 하는 건가!’
정철은 순간 오라버니 노릇이 아주 힘들다고 느껴, 힘없이 말했다.
“미미, 모르는 게 있으면 나중에 태자비마마께 여쭤보렴.”
“큰언니는 회임 중이라 폐를 끼칠 순 없어. 난 오라버니 말을 들을래. 오라버니가 이러면 나중에 고생한다고 말했으니, 다시는 하지 않을게.”
정미가 고분고분하게 말했다.
늘 거만하던 소녀가 얌전해지자 마음이 약해진 정철은, 양심에 가책을 느꼈다. 하지만 이 일은 도저히 어쩔 수가 없어 가볍게 헛기침하고는 입을 열었다.
“방금 길에서 둘째 동생을 만났어. 미미가 네 몸종을 그 아이에게 줬다고?”
정미의 눈썹이 치켜 올라가더니 언짢은 듯 물었다.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해?”
“그건 아니지. 그저 시종 한 명일 뿐인걸. 미미가 보내고 싶다는데 뭐 어때. 그저 네 쪽에 사람이 한 명 줄었으니, 시중이 모자랄까 걱정이구나. 만약 그 시종이 싫으면, 백부님께 말해서 바꿔오면 되니까.”
정미가 웃으며 말했다.
“그 아이가 둘째 언니를 꽤나 좋아하는 것 같고, 둘째 언니도 그 아이를 좋아하는 것 같아서, 언니에게 선물한 거야.”
정미는 정철을 당겨 창문 앞으로 데려갔다.
“오라버니, 봐봐. 이 수선화랑 바꾸었어.”
정철은 우스우면서도 마음이 아파져 동생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바보야, 수선화랑 교환하다니 너무 손해 보는 거 아니니?”
‘동생이 이렇게 바보 같은데, 시집가는 걸 어찌 마음 놓고 볼 수 있을까.’
그러나 정미는 눈을 들어 주위를 한 바퀴 둘러보더니, 환안이 문 입구에 서 있는 것을 발견하곤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오라버니, 전혀 손해가 아니야. 오라버니는 모르지. 그 시종은 나보다 둘째 언니를 더 좋아하는 건 둘째치고, 매번 오라버니를 볼 때마다 눈이 반짝였어. 그렇게 철없는 아이인데, 이 수선화가 낫지!”
“쿨럭쿨럭.”
정철의 귀 끝이 빨개지더니 갑자기 기침을 해댔다.
정미가 급히 그의 등을 두드려줬다.
“오라버니, 그렇게 마음 아파하지 않아도 돼. 나는 환안이 시중을 드는 거로 충분해.”
정철은 울고 싶었지만 눈물이 나지 않았다.
이게 마음 아픈 것으로 보이다니. 몸종이 그에게 분수에 맞지 않은 마음을 품은 것을 동생에게 들켰는데, 난처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