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나는 들어가고, 너는 물러나고
정미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호사(好事)가 어디 있겠는가?
‘특히 나에게 떨어지는 건 함정이 아니라면 다행인 거지.’
생각이 납득되자 정미는 침착해졌고, 입꼬리에는 옅은 웃음기가 돌았다.
그 모습을 본 정철은 가슴이 철렁했다.
“왜 웃어?”
“둘째 오라버니가 내게 해준 이야기 덕에 많은 걸 배워서.”
정철은 몹시 놀라 수려한 얼굴을 순간 일그러트렸다.
‘이런 아름답고 애틋한 이야기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니, 심지어 이야기를 들려준 사람은 나인데, 어떡하지?’
“미미, 오라버니에게 말해봐. 뭘 배웠는데?”
방금 했던 이야기를 되짚던 정철이 힘겹게 물었다.
‘아가씨들이 듣지 말아야 할 말을 술술 뱉었을 리 없다!’
“소꿉친구인 사촌 오라버니에게 사랑을 받으려면, 우선 얼굴이 예뻐야 한다는 걸 알았어.”
정미는 늘 평온하던 둘째 오라버니의 이런 모습을 본 적이 없기에 고의적으로 말했다.
“미미!”
정철은 동생이 이야기에서 관심 가진 부분이 다른 이들과 다르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달았다. 하지만 그는 다른 여자아이에게 이야기를 들려준 적이 없었고, 여자아이들의 의견에 대해서는 더욱이 생각해본 적 없었다. 때문에 지금 어디가 다른지 말하고 싶어도 이유를 말할 수 없었고, 한결같던 총명함과 침착함도 지금 상황엔 쓸모가 없어졌다. 그저 정미의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마음이 쓰려올 뿐이었다.
“미미, 그런 게 아니야. 여인의 외모만 보고 성품은 중요시 여기지 않는 사내는 진정으로 그 여인을 은애하는 게 아냐. 그런 사내는 네가 귀하게 여길 것도 못 되고.”
정미는 알고 있었다. 둘째 오라버니는 지난 연초에, 정미가 지 오라버니에게 거절당한 일을 위로하려는 것이라는 걸. 하지만 지금은 시간이 흘렀고 상황이 변하여 한지의 행동 하나하나가 일찍이 그녀의 마음을 차갑게 식게 만들었기에, 둘째 오라버니의 위로에 상심하지 않았다. 오히려 몹시 따뜻하게 느껴졌다. 정미는 곧바로 손을 뻗어 정철의 팔짱을 끼며 말했다.
“그럼 육랑 같은 사내는 귀하게 여겨도 돼?”
“되지.”
정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육랑은 정혼자를 위해 삼년상을 치르며 사랑하는 마음을 잃지 않는 사내였다.
‘나중에 정미가 그런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다면 내 마음이 놓일 테지.’
“그럼 만약 십사랑에게 아름다운 외모가 없었다면, 육랑이 그만큼 좋아했을까?”
정미는 맑은 눈을 반짝였다. 길고 살짝 치켜 올라간 눈꼬리는 아이티를 벗고 소녀의 총명함이 느껴지게 했다.
정철은 잠시 대답을 하지 못했다.
‘동생은 왜 육랑과 십사랑의 죽어서도 변치 않는 사랑 이야기에 감동하는 게 아니라, 이렇게 현실적인 문제를 고민하는 걸까? 한지 그 망할 놈, 대체 내 동생에게 상처를 얼마나 준 거야? 다음에 만나면 혼을 좀 내줘야겠군!’
둘째 오라버니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정미는 때가 왔음을 느끼고 온순한 고양이처럼 다가갔다.
“오라버니, 오라버니에게 알려주고 싶은 비밀이 하나 있어.”
정철은 오늘 이미 어린 동생에게 많이 놀란 바였기에, 이를 듣자 더욱 복잡한 마음이 들어 억지웃음을 지었다.
“미미, 사실 모든 아가씨들에겐 자신만의 작은 비밀이 있어.”
정미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라버니 말도 맞아. 그럼 일단 말하지 않을게. 어쨌든 나중이 되면 모두가 알게 될 테니까.”
‘무슨 비밀이기에 모든 사람이 알게 된다는 걸까?’
정철은 걱정이 되어, 손으로 입을 받치곤 가볍게 헛기침 했다.
“그럼 오라버니에게 우선 알려줄래?”
만약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그가 바로 잡을 수라도 있을 터였다.
“나는 시집을 가지 않을 거야. 어때?”
‘뭐라고?’
정철의 손이 떨리더니, 이내 그가 잡고 있던 침상 휘장 한쪽에 달린 향구가 흔들렸다. 십구 년밖에 살지 않았지만, 이렇게 추태를 부린 적은 인생에 있어서 처음이었다.
“미미, 오라버니가 방금 잘 듣지 못했어. 다시 말해줄 수 있을까? 아니, 아니, 다시 말할 필요 없어…….”
그는 이렇게 놀랍고도 두려운 말을 두 번이나 듣고 싶진 않았다.
정미의 입꼬리가 가볍게 올라가더니, 눈은 초승달처럼 휘었다.
“오라버니가 좋아할 줄 알았지. 그래서 오라버니한테 먼저 알려준 거야.”
정철은 관자놀이를 누르며 말했다.
“미미, 언제부터……, 큼, 이렇게 특이한 생각을 한 거니?”
정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답했다.
“최근에 결심했어. 방금 오라버니가 해준 이야기를 들으니 이 결정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됐지. 사내 열에 아홉은 여인의 외모만 보잖아. 오라버니처럼 내가 어떻든 간에 좋아해주는 게 아니라.”
정철은 갑자기 자신이 큰 죄를 지은 것 같다고 느꼈다. 나중에 어머니에게 신발 밑창으로 혼날 것이 두려워져 조용히 숨을 들이쉬었다.
“미미, 그건 좀 달라. 오라버니가 널 좋아하는 건 네가 내 여동생이기 때문이야.”
“하지만 큰언니, 두…… 둘째 언니, 정동, 그리고 정영(程瑩) 모두 오라버니의 동생인걸. 그리고 다들 나보다 예쁘지. 하지만 오라버니는 나에게만 잘해주잖아. 근데 내가 왜 나를 아끼는 오라버니를 떠나 나를 싫어하는 사내에게 시집가겠어?”
정미가 말한 정영은 정씨 가문의 방계혈족 아가씨였다. 정미는 그녀의 아버지를 아홉째 당숙부님이라 불렀다. 정철은 그 아홉째 당숙부님 집안에서 양자로 들인 아들이었다. 정씨 가문의 방계에는 아주 많은 아가씨들이 있었지만, 정미는 오직 정영만을 언급했다.
정영을 떠올리자 정미는 갑자기 미래에 대한 막연함을 느꼈고, 고개를 들어 정철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부탁했다.
“오라버니, 금은이나 장신구는 내게 귀하지 않아. 아름다운 옷도 마찬가지야. 그저…… 고기만 조금 좋아할 뿐이지. 사실 먹여 살리기도 쉬운 사람이야, 난. 만약 나중에 분가를 하게 되면 내가 따라가면 안 될까? 내가 조카에게 이야기를 들려줄 수도 있잖아.”
동생의 사슴 같은 눈망울을 보자 정철은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는 잠깐 침묵했다가 손을 들어 정미의 까맣고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
“걱정하지 마. 네가 원한다면 오라버니가 계속 널 책임질게.”
여동생은 아직 어렸고, 이성에 눈뜨자마자 한지 그 자식에게 상처를 받았으니, 잠시 엉뚱한 생각을 하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오히려 나중에 내가 남고 싶어도 남을 수 없을까 두려울 뿐.’
그럴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떠올리자 정철은 기분이 조금 울적해졌고, 더 이상 어린 동생에게 충고를 하지 않았다.
* * *
정철이 떠난 후, 정미는 시종을 부르지 않고 휘장을 치고는 그녀만의 좁은 세상으로 숨어들었다.
정미는 오라버니 앞에서의 장난기는 이미 온데간데없이 냉정한 말투로 말했다.
“아혜, 나와.”
한참 뒤에야 그 목소리가 울렸다.
「어때, 내 말이 검증됐어?」
“응.”
정미는 간결하게 대답하고는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
결국 아혜가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럼 나를 따라 부수(*符水: 부적을 태운 물)를 만드는 법을 배울 테야?」
“응.”
아혜가 성을 냈다.
「멍청아, 이게 묘기를 가르쳐달라고 부탁하는 사람의 태도니?」
정미의 목소리가 더욱 냉담해졌다.
“난 줄곧 네가 나보고 배워달라고 부탁하는 줄 알았는데? 어쨌든, 지금은 네가 나에게 뭔갈 가르쳐주는 걸 허락할게.”
둘째 오라버니가 말한 적 있었다. 원하는 게 있을수록 너무 간절해 보여서는 안 된다고. 그렇지않으면 상대방이 자신을 무시하고 몰아세워서, 가지고 놀고 말 거라고.
‘오라버니, 내가 잘했는진 모르겠지만, 이번엔 미미가 오라버니를 지켜줄게!’
아혜는 화가나 이를 갈았다.
「가르치는 걸 허락한다고? 멍청아, 도대체 아는 거야, 모르는 거야? 지금은 네가 나에게 부탁하는 거라고, 알겠어?」
“몰라.”
「모른다고?」
아혜의 목소리가 갑자기 높아졌다.
「그럼 난 안 가르칠래. 넌 두 눈 똑바로 뜨고 그 악몽들이 현실이 되는 걸 지켜봐. 때가 되면 어떻게 부탁을 해야 할지 알게 될 테니!」
정미가 아무 답도 하지 않자 아혜는 무자비하게 말을 이었다.
「아, 맞다. 깜빡했네. 네가 본 그 비명횡사한 사람들 중에 가장 먼저 죽는 게 네 둘째 오라버니야.」
정미는 놀라고 아픈 마음을 억지로 누른 채, 아무렇지 않은 듯 침상 머리맡의 궤짝에서 홍옥이 박혀있는 비수를 꺼냈다.
“내 손에 든 거 보이지, 작년에 둘째 오라버니가 선물해준 거야.”
정미는 이 요괴가 바깥의 상황은 볼 수 없지만, 정미가 접촉한 물건은 정미가 원한다면 그것이 볼 수 있다는 걸 알아냈다.
「하하, 네 둘째 오라버니는 정말 네게 잘해주는구나.」
아혜가 음흉하게 말했다.
정미는 차갑게 웃으며 비수를 쥐었다.
“당연하지. 그러니까 너는 내가 둘째 오라버니의 사고를 보게 할 수 없을 거야. 그날이 오면, 내가 먼저 황천길에서 오라버니를 기다리고 있을 테니.”
「천진한 것, 너는 죽으면 혼백이 남아있다고 생각하니?」
“아니라면 넌 뭔데?”
아혜는 말문이 막혔다.
정미는 아혜의 약점을 잡은 것을 알아채고 이어서 공격했다.
“예전엔 죽으면 가까운 이들과 다시는 만나지 못할까 봐 몹시 무서웠는데, 너를 알고 난 뒤론 더 이상 무섭지 않아. 어쨌든 늦든 빠르든 다시 만나게 될 거니까. 그런데 그때가 되면 너는 어디 있을지 모르겠네?”
처음에는 정미도 다른 사람들처럼 유혹에 흔들리고 탐욕스러워했기에, 아혜는 그녀를 삼킬 수 있을 거라 자신했다. 다만 하필 최근 일 년간 정미의 고집이 세진 탓에, 그녀는 득실을 따지지 못하고 자기가 맞다고 생각하는 길로만 가곤 했다. 아혜는 정말 이 멍청하고 끝까지 거만한 소녀가, 가족들과 같이 죽을지언정 절대 굴복하지 않을 거라는 것을 깨달았다. 한참을 답답해하던 아혜는 결국 한발 물러나며 힘없이 말했다.
「그럼 이렇게 하자. 내일부터 나한테 배우는 거로!」
“그래.”
정미는 가까스로 해낸 일에 마음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 * *
「부의(符醫)라고 들어봤어?」
다음 날, 정미는 불안한 마음을 안고 아혜의 수업을 경청했다. 아혜는 첫마디로 이 문제를 냈다.
정미는 당연히 부의를 들어본 적 있었다. 회인백부가 바로 부의로부터 시작된 가문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조부는 부수(*符水: 부적을 태운 물)로 병을 치료하는 방법을 전수하지 않았다. 백 년 동안 이어진 제생당은 지금 수도의 많은 의관 중 어중간한 위치에 있었고, 예전 고조부가 부의의 신분으로 황태자를 살려 명의들을 굴복시킨 그 품격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는 정씨 가문의 사람들 마음속에 가장 한스러운 일이었다.
이렇게 오랫동안 요괴의 유혹을 뿌리쳐왔는데, 이 요괴가 가르치는 것이 뜻밖에도 자기 가문을 일으킨 능력이었다니. 정미의 기분이 묘해졌다.
정미가 망설이자 아혜가 거리낌 없이 말했다.
「설마 지금 부의가 이 정도로 몰락한 건 아니겠지? 그래도 상관없어. 내가 네게 들려주면 되니까. 부의는 의술의 학파 중 하나로, 예로부터 있던 것이야……. 내가 네게 가르쳐주려는 부법(符法)은 도가에서 내려오는 것보다 더욱 복잡한 것이지. 대방맥과(大方脈科), 제풍과(諸風科), 태산과(胎産科), 소아과(小兒科)…… 등 총 열세 과로 나뉘어있으며, 한 과당 백 가지 이상의 부적이 있어, 모든 질병을 포용할 수 있지…….」
부의의 세계는 넓고도 신비하여, 정미는 점점 빠져들기 시작했다.
「세상 사람들이 아는 부적이란, 황지(黃紙)를 매개체로 하여 주사(*朱砂: 경련·발작을 진정시키는 데 쓰는 수은으로 이루어진 황화 광물)로 부적을 그리는 것이지. 하지만 내가 네게 가르쳐줄 것은 그것과 달라. 주사와 황지로 부적을 만드는 건 그저 기초이고, 네가 주사로 공중에 부적을 그리고 공기를 불어 넣어 물에 넣을 수 있을 때, 비로소 조금이라도 성공한 거야.」
정미는 이해할 수 없었다.
“공중에 부적을 그리고 공기를 불어 넣어 물에 넣는다고? 그게 어떻게 가능해?”
아혜가 차갑게 비웃었다.
「네가 불가능하다고 느끼는 까닭은, 네가 무지하기 때문이지! 참, 공중에 부적을 그리려면 주사에 네 피 한 방울이 필요해. 기억해둬, 나중이 되면 평범한 질병들은 무시하면 돼. 몹시 급하거나, 죽을병이거나, 기이하거나, 잡스럽거나, 이 네 가지 상황에서만 나서. 그렇지 않으면 너무 자주 피를 쓰게 되어 요절하게 될 테니.」
정미의 가슴이 철렁했다. 그녀가 어려서부터 들어온 이야기 속에선 피와 관련된 일은 대부분 나쁜 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별다른 선택지가 없기에 아혜의 말을 따르며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여기까지 생각하자, 정미의 마음속에 의심이 생겨났다. 그녀는 원래 이 요괴가 자신의 몸을 차지하려는 줄 알고 있었건만, 지금 이 요괴가 호의적으로 주의를 주고 있으니, 정말 알 수 없는 일이란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