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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난-31화 (31/375)

31화. 동생을 가장 잘 아는 오라버니

교용은 화미와 정철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보고, 방금까지 약을 달이던 사람이 자신이 아닌 것이 후회스러웠다.

“둘째 공자님, 오셔서 아가씨를 보세요. 소인이 보고를 올리겠습니다.”

정철이 눈을 들었다.

“셋째는 혼수상태가 아니었나, 누구에게 보고를 올린다는 게지?”

그는 이 시종의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아 더는 쳐다보지 않고 곧바로 안으로 들어갔다.

평소 반응이 빨랐던 교용은 잠시 멍해지더니 바로 쫓아갔다.

“소인이 길을 안내해드리겠습니다!”

교용은 허리를 씰룩이며 들어서다, 세숫대야를 들고나오던 환안과 마주쳤다.

“환안, 대야를 내게 줘.”

그러곤 손을 뻗으며 덧붙여 불평했다.

“약을 다 달이면 내가 아가씨께 세수를 시켜드린다고 말했잖아. 아가씨는 물이 너무 뜨거운 것을 좋아하지 않으셔.”

환안은 교용의 허리를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아름다운 얼굴을 구겼다.

“교용 언니, 허리에 쥐가 났나요? 세숫대야를 쏟지 않게 조심하세요.”

이 말은 마치 날카로운 검으로 교용의 명치를 찌르는 듯했다. 교용은 정철의 존재도 잊은 채 곧바로 눈썹을 치켜올리며 꾸짖었다.

“환안, 이 망할 계집!”

“소란을 피우려면 나가서 피우거라.”

정철이 곁눈질하며 무덤덤하게 말했다.

분명 무덤덤한 한마디였다. 큰공자처럼 거드름을 피우는 것도, 셋째 공자처럼 몹시 진지한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교용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세숫대야를 들고 머리를 숙인 채 문으로 걸어갔다.

교용은 긴장한 나머지 다시 평소처럼 걷는 것을 잊었고, 오히려 더욱 심하게 허리를 씰룩였다. 손에 무거운 세숫대야를 들고 있는 탓에 발걸음을 내딛자마자 세숫물을 조금 엎지르고 말았고, 밟아 미끄러져 뚝 하는 소리와 함께 허리를 삐끗했다.

환안은 교용이 내던질뻔한 세숫대야를 받으며 한심하다는 듯이 말했다.

“교용 언니, 보세요. 세숫대야를 쏟지 않게 조심하라고 했잖아요. 제가 계속 신경 쓰고 있어서 다행이네요.”

교용은 입술을 덜덜 떨며 화가 나 기절할 뻔했으나, 뒤에 있는 정철이 화낼까 무서워 할 수 없이 허리를 받치고 한 걸음씩 움직였다. 아파서 몸이 떨려왔고, 밖으로 나오자마자 녹초가 되어 움직이지 못했다.

정철은 손을 들어 내실로 들어가는 구슬발을 젖혔고, 야윈 소녀가 조용히 침상에 잠들어있는 것을 보았다. 그 모습이 아무 소리도 없이 무서울 정도로 고요해, 커다란 면이불에 삼켜진 듯했다.

그는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 소녀의 움푹 꺼진 얼굴과 뾰족한 턱을 바라보자니 마음이 아파져 그녀의 손을 잡으며 조용히 읊조렸다.

“미미…….”

그러자 침상 위에 잠든 정미의 속눈썹이 약간 움직였다.

소녀의 얼굴을 계속 바라보고 있던 정철의 눈빛이 굳었고, 손에 더욱 힘을 주며 다시 외쳤다.

“미미!”

작은 부채 같은 속눈썹이 살짝 흔들리더니, 반짝이는 눈물이 눈가로 떨어졌다.

정철은 급히 품에서 반듯하게 접힌 흰 손수건을 꺼내 그녀의 눈물을 살살 닦아주었다. 손수건 끝엔 통통한 잠자리 두 마리가 수놓아져 있어 눈에 띄었다.

“미미, 이 오라비의 목소리가 들리는 거니?”

정철은 가슴이 큰 바위로 막힌듯한 느낌이 들어 부드럽게 말했다.

“미안해. 오라버니가 너무 늦게 왔어.”

그는 말하는 도중 붙잡고 있던 정미의 손이 갑자기 움찔하는 것을 느끼고 눈이 번쩍 뜨였다.

“미미, 오라버니가 약속할게. 이후 다시는 멀리 떠나지 않을 테니, 어서 일어나.”

정미는 이틀 동안 일어나지 못했으나, 사실 의식은 깬 상태였다. 그저 눈을 뜰 힘이 없었던 것뿐이었다. 그리고 지금 정철의 말을 듣자 마음이 급해져 눈꺼풀을 치켜떠 오랫동안 보지 못한 둘째 오라버니를 보고 싶었다.

정철은 자신의 말에 정미가 반응하는 것을 보고는 말했다.

“미미, 네가 일어나면 오라버니가 이야기를 들려줄게. 전에 《원맹기(鴛盟記)》를 듣고 싶다고 했지? 그때 오라버니가 네게 들려주지 않았으니, 일어나면 꼭 들려줄게.”

눈이 뜨이지 않는 정미의 마음이 더욱 급해졌다.

정미는 아주 오랫동안 《원맹기》를 듣고 싶어 했다. 《원맹기》는 병들어 죽은 젊은 여인이 타인의 육신을 빌려 되살아나서, 소꿉친구 정혼자와 혼인하는 이야기였다.

이미 2년 전에 유행한 이야기였지만, 정미는 사람들이 간간이 그 이야기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들은 뒤 둘째 오라버니에게 가서 들려달라고 졸랐다. 그러나 둘째 오라버니는 들어주지 않았다.

그러다 그녀는 차라리 몰래 시종에게 책방으로 가 책을 사오라고 했고, 사 온 후 펼쳐보기도 전에 오라버니에게 들켰다. 그때부터 둘째 오라버니는 그녀에게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았다.

《원맹기》는 정미에게 2년 동안 부탁해도 이룰 수 없는 책이었기에, 정철의 말은 아주 솔깃하게 다가왔다.

급한 마음에 이마에 땀까지 맺힐 지경이었다. 천근 같은 눈꺼풀을 치켜뜨려고 했으나 아무래도 조금 힘이 들었다.

정철은 어린 동생의 애타는 마음이 느껴지는 듯해 손수건으로 그녀의 땀을 닦아주며 또 미끼를 던졌다.

“이번에 스승님을 따라 회성으로 유학을 갔는데, 회성에 원앙내권(*鸳鸯奶卷: 여기서 ‘내권’이란 롤케이크와 비슷하게 생긴 북경 전통 간식을 말함)이라고 하는 것이 있더라. 오라버니가 먹어봤는데, 우유 향이 진하고 새콤달콤해. 너도 분명 좋아할 거야. 아쉽게도 쉽게 상하는 음식이라 가지고 오지는 못했어.”

어떻게 해도 눈을 뜰 수 없는 정미는 이를 듣자 조급하면서도 억울해졌다. 둘째 오라버니는 갈수록 못되게 구는 것만 같았다.

‘내가 눈을 뜨지 못하더라도 들을 수는 있는데, 어찌 《원맹기》를 읽어 주지 않는 거야? 원앙내권이고 뭐고, 쉽게 상한다면 왜 굳이 입 밖으로 꺼내서 내가 못 먹는다는 걸 알려주는 거냐고!’

정미가 답답해하는 와중에 정철이 천천히 말했다.

“그래도 정미가 분명 좋아할 것 같아, 그 원앙내권을 만드는 아주머니를 졸라서 만드는 법을 배워왔지.”

정철은 웃음기 띤 입꼬리로 정미를 바라봤다. 그때 정미의 속눈썹이 떨리더니, 마침내 눈을 떴다.

“미미, 우선 너무 무리해서 눈을 뜨지는 마.”

정철이 급히 손수건으로 정미의 눈을 가리며 따뜻한 목소리로 신신당부했다.

“너무 오랫동안 잠들어있었잖아. 좀 적응이 된 후에 눈을 떠. 시력이 다칠 수도 있어.”

흰 손수건 아래 정미의 눈꺼풀이 가볍게 흔들리는가 싶더니, 눈물이 조용히 흘러내려 손수건을 적셨다.

정미는 가능한 계속 눈을 뜨고 싶지 않았다. 눈을 뜨지 않는다면 둘째 오라버니가 앞으로 어떤 사고를 당하는지 보지 않아도 될 테니.

하지만 그녀가 어찌 눈을 뜨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녀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려는 둘째 오라버니인데, 그녀를 위해서 원앙내권을 만드는 법을 배워온 오라버니인데!

그렇기에, 첫 번째로 할 일은 바로 눈을 뜨고 그를 마주하는 것이었다.

“미미, 왜 우는 거야?”

정철은 평소 잘 울지 않던 어린 동생이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고는 마음이 쓰려왔다.

정미는 입술을 뻐끔대더니 한참 후에야 목소리를 냈다.

“둘째 오라버니, 나 안 울었어. 눈이 조금 아파서 그래.”

정미는 말하며 손을 들어 눈을 가린 손수건을 빼냈고, 속눈썹을 떨며 천천히 눈을 떴다.

눈에 들어온 것은 아름다운 얼굴이었지만, 평소 익숙한 모습보다는 초췌하고 초라해 보였다.

“둘째 오라버니, 얼굴이 왜…….”

정미는 손을 들어 핏발선 정철의 눈을 쓰다듬으려 했지만, 반쯤 들었을 때 손이 굳어버렸다.

익숙한 규방은 갑자기 산림의 흙길로 변했고, 얼굴을 가린 사람들이 활과 화살, 그리고 날카로운 칼을 들고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죽음이 다가오는 공포에, 마차에서 추락한 정미는 숨이 막혀오는 것을 느꼈다. 무의식적으로 그녀는 자신을 부축한 사람을 더 세게 끌어안았다.

“둘째 오라버니, 저들은 누구야?”

그러자 복면을 쓴 사람들 중 체격이 우람한 사내가 크게 웃었다.

“아가씨, 말했잖아. 우리는 강도라니까!”

“강도?”

정미는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맑고 깨끗한 경치에, 천지가 태평한 황제의 나라인데, 어찌 이런 강도가 있을 수 있겠어?’

또 다른 사람들이 바짝 다가오며 낄낄거렸다.

“그래. 이 산도, 이 길도 내 것이니, 지나가려면 두 분께서 성의를 좀 보여야겠어.”

정미는 두려운 마음에 정철과 더욱 가까이 붙었고, 그 사람들이 손에 쥔 활과 칼을 노려보며 용기 있게 말했다.

“그저 은전 아니겠느냐. 너희에게 주면 그만이다. 나와 오라버니를 보내주거라!”

정철은 위로하듯 정미를 토닥였고, 강도의 우두머리를 차갑게 쳐다보며 말했다.

“어떻게 하고 싶은가? 만약 내 동생을 해치지 않는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모두 들어주겠다.”

“동생을 아끼는 형님이로구만! 하지만 우리 형제들이 요즘 돈이 모자란 건 아니라서 말이야. 그저 이불을 덥힐 여인이 모자라서 그렇지. 이렇게 하지. 네 동생을 여기 남기면, 네가 성의를 보였다고 치고 지나가게 해주지.”

체격이 큰 사내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흰빛이 번쩍하는가 싶더니, 사내의 가슴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환안, 미미를 호위하며 가거라!”

정철이 소리쳤다. 손에 든 은색 창은 교룡(蛟龍) 같았고, 맞은편에서 날아오는 화살을 곧장 격추시켰다.

키가 많이 자라 늘씬하게 성장한 환안이 정미를 잡아당겼다.

“아가씨, 어서 저를 따라오세요!”

“안 갈 거야, 둘째 오라버니를 혼자 놔두고 갈 수는 없어!”

정미는 발버둥 치며 환안을 밀쳐냈다.

하지만 환안은 그대로 몸을 낮춰, 통통한 몸매의 정미를 어깨에 들쳐메고는 급히 달렸다.

정철은 환안이 정미를 데리고 달려가는 것을 보곤, 즉시 손을 놓고 눈앞의 사람과 맞섰다.

잠시 후 뒤에서 비명소리가 들려와 고개를 돌리자, 십여 장 뒤에 언제 솟아났는지 모를 강도들이 있었다. 정미는 바닥에 떨어져 있었고, 환안은 여러 발의 화살을 맞은 채 똑바로 서 있었다.

정철과 몇 명이 정미의 근처로 달려가 그녀를 품에 안았고, 앞뒤에서 점점 다가오는 복면강도들을 보고는 천천히 한쪽으로 물러섰다.

그러나 그 강도들은 참을성이 없었다. 그중 한 사람이 크게 외치자 모두가 활을 들었고, 화살은 빗발처럼 쏟아졌다.

정철은 한 손으로 정미를 안으며 한 손으로는 은창을 휘둘렀다. 화살이 눈앞에서 쉴 새 없이 떨어졌다.

정미는 이미 놀라서 넋이 나간 상태였다. 그 순간 갑자기 큰 외침이 들려왔다.

“미미, 어서 말에 올라타!”

그녀의 몸이 붕 떠올라 말 위로 끌어 올려졌다. 뒤에 올라탄 정철이 휘파람을 크게 불자, 말은 발굽을 치켜들고 나는 듯이 달려갔다. 그러다 말은 두 앞다리에 기운이 빠졌는지 바닥으로 쓰러졌고, 두 사람은 나가떨어졌다.

정미는 정철의 품에 안긴 채 한참을 굴러떨어졌다.

“……둘째 오라버니.”

어지러운 정미는 풀밭에 누워 한참 뒤에야 목소리를 낼 수 있었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두려움에 정미의 가슴이 조여왔다.

“둘째 오라버니……!”

고요한 가운데 바람에 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와 말이 헐떡이는 소리만 들려왔다. 정미는 둘째 오라버니가 그녀를 너무 꽉 안고 있어 빠져나오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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