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둘째 오라버니
셋째 나리가 한참을 망설이자 뒤따라온 한 씨가 참지 못하고 물었다.
“셋째 도련님, 정요는 괜찮지요?”
“정요는…… 괜찮습니다.”
“그럼 왜 아직도 깨어나지 못하는 겁니까?”
“그건…….”
셋째 나리는 조금 난감했다. 의료인으로서 환자와 그 친족을 속이는 짓은 하지 말아야 했다. 하지만 정요의 모습에 대해 사실을 말하는 것은 조금 난처했다.
‘이 열몇 살의 아가씨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기절한 척이 재밌는 것인가?’
정요의 진찰을 보러 온 탓에 정미의 진료를 볼 시간을 지체했건만, 하필 정요는 기절한 척을 하고 있다니. 의원인 셋째 나리에게는 별로 유쾌한 일이 아니었기에 담담하게 말했다.
“아마 정요가 어젯밤 잠을 잘 자지 못했나 봅니다.”
이 말에 누워있던 정요의 속눈썹이 떨렸다.
한 씨가 놀라워했다.
“도련님의 말씀은…… 정요가 그저 잠이 들었다는 건가요?”
셋째 나리는 정요를 힐끗 쳐다보더니 입꼬리를 올렸다.
“그렇게 생각하셔도 됩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정요가 푹 쉬게끔 놔두면, 괜찮아질 겁니다. 저는 정미를 보러 가겠습니다.”
그는 내실로 들어갔고, 한 씨도 뒤따라 일어나며 정요를 모시는 시종에게 신신당부했다.
“둘째를 잘 모시거라. 이번 잠은 길지도 모르니, 감기에 들지 않도록 조심하고.”
두 사람이 나가자, 평상 위에 누워있던 정요가 주먹을 꽉 쥐었다. 연분홍색으로 아름답게 다듬은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고, 가슴속에 가득 찬 답답함을 억지로 끊어냈다.
‘기절한 척하는 것도 모자라 내일 아침까지 자야 한다니? 지금은 오시(*午時: 오전 11시부터 오후 1시)도 되지 않았는데!’
내일 아침까지 몇 시진이나 남았단 것을 떠올린 정요는 자신이 정말로 기절한 게 아닌 것이 분했고, 가슴은 쿵 내려앉았다.
‘설마, 숙부님이…… 내가 기절한 척했단 걸 알아보신 건 아니겠지?’
* * *
한편 정미는 기절잠에 빠져 불러도 깨어나지 않았다.
한 씨는 정아를 달래고 있었다.
“정미가 위국공부에 있을 때에도 이렇게 기절하여 깨어나지 않았었습니다. 그렇게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배 속의 황손에게 좋지 않습니다.”
“그럼 그때 정미는 어떻게 깨어났나요?”
정아는 두 눈을 꼭 감은 채 얼굴에 홍조를 띤 동생을 보자 몹시 걱정되어 물었다.
한 씨는 그녀가 지나치게 걱정할까 두려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마마의 외조부님께서, 현청관의 북명진인을 모셔오셨습니다.”
“뭐라고요?”
정아가 크게 놀랐다.
“그럼 이번에도 또 가야 하는 것 아닌가요?”
한 씨는 정미를 한 번 쳐다보고는, 이 못난 녀석은 분명 자신을 괴롭히기 위해 태어난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어떻든 간에 결국엔 그녀의 살붙이였기에, 딸이 죽어가는 것을 두 눈 뜨고 지켜볼 수만은 없었다. 한 씨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먼저 깨어나는지 아닌지 이틀 정도 지켜봅시다. 만약 깨어나지 못하면, 제가 국공부로 돌아가 외조부님께 다시 현청관으로 가달라고 부탁드리겠습니다.”
정아가 고개를 저었다.
“북명진인은 살아있는 신선과도 같은 인물이고, 외조부님께서 이미 한 번 부탁하셨지 않습니까. 다시 찾아갔는데 들어주시지 않아 외조부님께서 상심하실까 걱정돼요.”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저도 지켜볼 수만은 없지 않겠습니까, 이 아이가 이렇게…….”
한 씨는 결국 모성이 북받쳐 올라,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럼 이렇게 하지요. 제가 궁으로 돌아가면, 태자 전하께 청해보겠습니다.”
“그건 안 됩니다.”
한 씨가 단호히 거절했다.
“마마, 마마께서 정미를 아끼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자신을 먼저 돌보셔야지요.”
이때 궁녀 중 하나가 재촉했다.
“태자비마마, 이제 환궁하셔야 합니다.”
정아의 표정이 흔들렸다.
“마마, 너무 오래 궁 밖에 나와계셔선 안 됩니다. 돌아가셔야 합니다.”
이에 맹 노부인이 말을 덧붙였고, 한 씨도 마찬가지로 입을 열었다.
“돌아가세요. 여기에 남아계셔봤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어미의 말을 들으세요. 돌아가신 뒤에도 태자 전하를 귀찮게 하셔선 안 됩니다. 이틀만 기다려봅시다.”
정아는 마지못해 일어났고 마지막으로 여동생을 쳐다봤다. 그녀는 눈시울이 저절로 붉어져 흐느끼며 말했다.
“조모님, 어머니, 정미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꼭 제게 알려주셔야 해요. 제가 돌아가서 가장 뛰어난 태의를 보내겠습니다.”
“국공부에서 마마의 외조모님께서 명의를 모셨지만, 효과가 없었습니다. 정미의 일은 마마께서 너무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한 씨의 말에도, 정아는 꿋꿋이 말을 이었다.
“어머니, 제가 정미에게 마음을 쓸 수 있도록 해주세요. 이 아이는 제가 돌봐준 시간이 많지 않고, 입궁 후에 매번 정미가 저를 보러 왔을 때 저희 두 자매끼리 친밀한 말을 하려고 해도 불편했으니, 큰언니로서 동생을 볼 면목이 없어 그럽니다.”
맹 노부인은 이 태자비가 된 손녀를 가장 좋아했기에, 입을 열었다.
“마마의 말씀대로 하거라. 자매의 정이 깊으니, 이것이야말로 명문가 규수가 가지고 있어야 할 성품이니라. 만약 모두가 정아 같았다면 이렇게 걱정할만한 일도 없었을 텐데…….”
정아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조모님, 정미는 아직 어립니다. 만약 잘못을 저지른다면, 이 손녀를 봐서라도 이 아이에게 화를 내지 말아주세요. 그저 잘 지도해주시길 바랍니다.”
“알겠습니다, 마마. 안심하시고 환궁하십시오. 마마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조모님. 조모님이 저를 가장 아끼시는 것을 잘 압니다.”
입으로는 이런 말을 했지만, 정아는 마음속으로 쓰게 웃고 있었다.
어머니가 억지로 시집왔을 때, 아버지는 어머니를 존중하지 않았고, 성미가 강한 조모님은 더욱 그녀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불쌍한 여동생은, 형제 순서를 매기기도 전에 세상을 떠난 남동생과 함께 친족들에게 푸대접을 받았다.
정아를 가장 아끼는 손녀라고는 하지만, 어찌 모르겠는가. 조모님이 가장 좋아하는 건 정씨 가문의 ‘적장손녀’이지, ‘정아’가 아니라는 것을!
정아가 떠나자 노부인은 잠시도 지체하지 않고 염송당으로 돌아갔다. 다른 이들은 한 씨를 위로하고는 잇따라 흩어졌다.
* * *
정아가 보낸 태의는 정미의 기절에 속수무책이었고, 이틀 뒤 한 씨는 더 이상 앉아있을 수만은 없어 다시 위국공부로 돌아가려고 했지만, 맹 노부인이 허락하지 않았다.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염송당에서 실랑이하던 중, 시종이 보고를 올렸다.
“노부인, 둘째 공자님께서 오셨습니다.”
맹 노부인은 멍해지더니 한 씨를 흘끗 보고는 말했다.
“둘째를 데려오거라.”
얼마 지나지 않아 얇은 면포 문발이 걷혔고, 한 청년이 급히 들어왔다.
그는 스무 살 정도 되어 보였고, 늘씬한 체격이었다. 얼굴에 초췌하고 초조한 기색이 보이는데도 고상한 풍채는 가려지지 않았고, 방에 들어서자마자 한쪽 무릎을 꿇으며 맑은 목소리로 말했다.
“조모님과 어머니를 뵙습니다.”
맹 노부인은 자신의 차남이 죽었다고 생각한 몇 년 동안, 먼 친척으로부터 양자로 들인 이 손자에게 꽤 마음을 썼으나, 이후 차남이 돌아오자 점점 무덤덤해졌다.
하지만 최근 몇 년 동안 손자가 갈수록 출중해졌고, 노국공을 따라 무예를 배우는 것도 모자라 대학자 고 선생의 제자가 되기까지 하니, 손자를 대하는 태도가 다시 다정해졌다.
“어서 일어나거라.”
정철이 일어나자 맹 노부인이 깜짝 놀랐다.
“철아, 고 선생을 따라 유학을 간 것 아니더냐. 어찌 이 모양이 되었어?”
송죽(松竹)처럼 청아한 모습은 사라진 채, 헝클어진 옷에 눈에는 핏발이 선 것을 보자, 맹 노부인은 손자를 알아보지 못 할 뻔했다.
“조모님, 정미가 외가에서 다쳤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지금은 어떻습니까?”
“철이, 네가 그걸 어찌 알았느냐?”
맹 노부인의 표정이 굳었다.
맹 노부인은 둘째 아들의 적장자 신분을 가진 손자에게 복잡한 감정이 들었다. 그는 하루가 멀다 하고 출중해져만 갔기 때문이다.
예법상으로는 정당하게 양자로 들인 손자이기에 모두가 인정해야 마땅했지만, 차남은 그녀가 가장 아끼는 아들이었기에 나중에 차남의 모든 것을 이 손자에게 우선 물려줘야 했고, 차남의 두 친아들은 뒤로 밀려날 것을 생각하니 맹 노부인은 말할 수 없는 답답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기에 이 손자에게 무의식적으로 대비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유학을 가 있던 사람이 정미가 위국공부에서 다쳤다는 것을 알다니, 정말 신기한 일이었다.
맹 노부인은 묘한 표정 변화를 정철에게 감출 수 없었고, 정철은 눈꺼풀을 반쯤 감은 채 눈에 어렴풋이 담긴 비웃음을 가렸다. 그는 피곤한 목소리로 말했다.
“도중에 도씨 가문의 형제를 우연히 만나 들었습니다.”
“도씨 형제라고? 철이 네 백모님네 집안이 아니더냐…….”
맹 노부인은 아랫사람들을 잘 기억하지 못했고, 바로 한 씨를 쳐다보았다.
“네, 맞습니다. 제 큰올케언니의 친정조카입니다. 약연이 수도에 더는 머물 수 없어 회성(荟城)으로 갔다고 얼마 전 올케언니께 들었습니다.”
아까 정철이 들어왔을 때, 한 씨는 은근히 마음이 놓이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친자식은 아니었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며 정이 들었고, 일도 잘했기에 이 혼란한 상황에 걱정을 나눌 사람이 생겼다고 생각했다.
맹 노부인이 문득 깨달았다.
“그 애가 수도에 온 것은, 고 선생의 제자가 되기 위함이 맞느냐?”
“맞습니다. 아쉽게도 약연이 수도에 왔을 때 마침 고 선생이 철이를 데리고 회성에 가셨습니다.”
맹 노부인은 정철을 흘끗 쳐다보더니 그제야 웃음을 지었다.
“그래서 도중에 마주친 것이로구나.”
정철은 맹 노부인이 말을 마칠 때까지 꾹 참고 기다리다가 물었다.
“조모님, 어머니, 그럼 정미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상태는 어떤지요?”
정철이 또 정미를 언급하자 맹 노부인의 기분이 상했고, 대답하기 귀찮다는 듯 한 씨를 은근히 흘겨봤다.
한 씨가 입을 열었다.
“정미는 비서거에 있다. 아직도…… 깨어나지 못했지.”
정철이 놀라며 소리를 질렀다.
“어머니, 정미가 아직도 깨어나지 못했다는 겁니까? 벌써 이십여 일이 지났습니다!”
“그게 아니다.”
한 씨가 해명했다.
“괜찮아졌었는데, 이틀 전 태자비마마께서 오셔서 다 같이 정미를 보러 갔을 때, 정미가 어쩌다가 충격을 받았는지 또 기절하고 말았구나.”
“조모님, 어머니, 그럼 먼저 정미를 보러 가겠습니다!”
“철아!”
한 씨가 정철을 붙잡았다.
“먼저 옷은 갈아입고 가야지.”
“정미부터 보고 나서 갈아입겠습니다.”
정철은 급히 비서거로 향했다.
* * *
정철이 비서거에 도착해 문으로 들어서자마자 은은한 약 냄새가 풍겨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의 발걸음이 더욱 빨라졌다.
교용은 어두운 얼굴로 복도에 서 있었다. 환안은 방 안에서 아가씨를 모시고 있었다. 그 덕에 자신은 여종 화미가 약을 달이는 것을 볼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머릿속으로 환안 모양의 인형을 자수 바늘로 힘껏 찌르는 상상을 하던 중이었다.
그런데 푸른 도포를 입은 사내가 멀리서 대뜸 다가오는 것을 보자, 아침 햇살 아래에서 산골짜기에 졸졸 흐르는 맑은 샘물처럼 마음속의 번뇌가 모두 씻겨 내려가는 듯했다.
교용의 눈이 번쩍 떠지더니 허리를 흔들며 그를 맞이하러 다가갔다.
“둘째 공자님.”
정철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허리를 씰룩이는 시종에게 거리를 두며 지나쳐갔다. 그러다 발걸음이 약을 달이는 곳에 멈추더니 흑갈색의 탕약을 쳐다보며 약을 달이고 있던 화미에게 물었다.
“셋째에게 먹이는 약인가?”
“그렇습니다.”
불에 부채질하던 화미는 그가 둘째 공자임을 알아보고 급히 일어나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