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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난-28화 (28/375)

28화. 두 눈으로 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많은 발걸음 소리와 곧이어 시종들이 인사를 올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정아는 방에 들어서자마자, 검은 머리칼을 흩트린 채 누워있어 얼굴이 더욱 작아 보이는 듯한 동생을 발견했다.

정미의 예전 모습을 생각하면 정아는 놀랄 수밖에 없었고, 맹 노부인과 한 씨의 손을 놓고 궁녀의 부축을 받아 빠른 걸음으로 다가갔다. ‘정미’라고 한 마디만 뱉었을 뿐인데도 눈시울이 붉어졌다.

“얼른 태자비마마를 의자에 앉혀드리거라.”

맹 노부인은 침상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등받이 장미의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정아가 고개를 돌렸다.

“조모님, 모두 어서 앉으세요. 저는 정미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정아는 말하면서도 맹 노부인에게 드는 마음이 친근함인지 원망인지 알 수 없어 속으로 가벼운 한숨을 쉬었다. 조모님은 정아에게 가장 잘 대해줬으나, 정미에게는 아주 박정했다. 정아에게 장미의자에 앉으라 함은 정미가 그녀에게 병을 옮길까 그런 것이었다. 지금의 정미는 그저 외상을 입은 것이기도 했지만, 외상이 아니더라도 큰언니가 되어서 어떻게 친동생에게 그렇게 대할 수 있겠는가.

“정미, 괜찮아? 아직도 머리가 아프니?”

정아의 진심 어린 물음에 정미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다행히 검은 천으로 가려져 티가 나지 않아 소녀의 작은 자존심을 지킬 수 있었다.

정미가 뒤로 숨으며 말했다.

“큰언니, 너무 가까이 오지 마세요. 오늘 아침 열이 조금 났습니다.”

“어찌 열이 났니?”

정아가 급히 정미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만져 보니 괜찮긴 한데, 생강차는 마셨어? 땀을 좀 내면 괜찮아질 거야.”

“마셨습니다.”

정미는 정아 앞에서 유난히 고분고분했다.

“큰언니, 무슨 일로 오셨어요?”

정아는 정미의 물음에 숨이 막히는 것을 느꼈다. 어린 동생에게, 네가 정신이 나갔다는 소문을 듣고 급히 왔다는 말을 할 순 없었다.

그녀가 빙그레 웃고는 말했다.

“네가 외가에서 다쳤다는 말을 들은 이후로 줄곧 마음에 걸렸단다. 내 두 눈으로 직접 봐야 안심이 될 것 같았어.”

정미의 입꼬리가 올라가 오랜만에 웃음기가 돌았다.

“큰언니, 안심하세요. 별일 아니에요. 그저 너무 오래 누워있었던 탓에 몸에 힘이 없는 것뿐이니, 며칠 지나면 좋아질 거예요.”

정아는 정미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정미의 말투에는 이상이 없었고, 심지어 평소보다 차분한 것을 보고 그제야 안심이 됐다. 헛소문을 퍼트린 사람들에게 깊은 원한을 느꼈다. 그러고는 나중에 정미가 외출을 할 수 있게 되면, 꼭 떠들썩한 연회를 열어 그 주둥이를 함부로 놀리는 자들에게, 우리 집 셋째 동생이 얼마나 멀쩡한지 보여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큰언니, 언제 환궁하세요?”

정아가 정미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정미가 언제 돌아가라고 하면, 그때 돌아갈게.”

“큰언니.”

정미는 저도 모르게 정아의 손을 꽉 잡았다.

“그럼 여기 대추떡을 좀 드셔보시겠어요?”

정아가 순간 묘한 기색을 보였고, 정미는 이어서 미소지으며 말했다.

“제게 화미라는 시종이 있는데, 이전에 주방에서 일한 적이 있어 몇 가지 간식을 만들 줄 압니다. 어젯밤 제가 그 아이에게 오늘 간식을 만들어달라고 분부했었는데, 오늘 아침에 대추떡을 만들었네요. 먹어보니 맛이 괜찮으니, 큰언니도 맛을 좀 보셨으면 해서요.”

정미는 원래 사흘 뒤 궁으로 가, 이 대추떡으로 큰언니의 회임을 알아보려고 했고, 오늘 아침에 시범으로 화미에게 만들어 보라 시켰던 바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대추떡이 만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아 큰언니가 이리로 온 것이다.

어린 동생이 이렇게 말하자 정아는 거절할 수가 없어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 알겠어.”

“태자비마마……!”

뒤의 궁녀가 참지 못하고 외쳤다.

정아는 그녀를 보고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정미와 또래로 보이는 시녀가 대추떡 한 판을 들고 들어왔다. 그 시녀는 용모가 뛰어나게 아름다웠고, 특히 눈썹이 보기 드물게 길고 짙었다. 정아조차 그 긴 눈썹을 빤히 쳐다보았고 웃으며 말했다.

“이 시종은 내가 본 적이 없는 아이네.”

“큰언니께서 오랫동안 출궁하시지 않았잖아요.”

정미의 말투에 씁쓸함이 묻어나는가 싶었으나, 곧 화제를 바꾸며 말했다.

“큰언니, 얼른 드셔보세요. 맛이 꽤 괜찮습니다.”

화미는 쟁반을 정아 앞으로 받들었고, 궁녀 한 명이 다가가 은침으로 독을 확인했다. 침의 색이 변하지 않자 궁녀는 손수건을 받쳐 작은 조각을 떼어 먹어보았다. 일각(*약 15분) 정도의 시간이 지나자, 그제야 대추떡 조각을 정아에게 바쳤다.

“태자비마마, 드셔도 됩니다.”

정아가 미안한 듯 말했다.

“미야, 궁 안에 규율이 많아서 그래. 너무 언짢아 마렴.”

그녀는 말을 마친 후 대추떡을 한입 물었다. 진한 우유 향이 입안을 가득 채우자 속이 울렁거려 결국 머리를 돌리고 헛구역질을 했다.

“태자비마마!”

방 안 사람들의 안색이 변했다.

뒤이어, 노부인이 흥분한 기색으로 말했다.

“혹, 혹시 회임하신 겁니까?”

정아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 씨도 몹시 흥분했다.

“정말 회임하셨습니까? 천지신명께 감사하나이다! 어찌 진작에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정아는 수줍은 듯 기뻐하며 조용히 말했다.

“이제 한 달 정도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석 달은 되어야 알릴 수 있지요.”

“경하드리옵니다!”

방 안에 축하의 소리가 울려퍼졌다.

기쁘고 떠들썩한 분위기 가운데 정미만이 미소 띤 입꼬리를 굳히며 마음이 철렁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그 목소리……, 그 목소리가 말한 게 진짜였어!’

정미의 등이 순식간에 식은땀으로 흠뻑 젖었다. 섣달 날씨에 윗옷이 축축하게 젖자 특히나 더 불편했고, 마치 얼음구멍에 빠져 기어 나올 수 없는 느낌을 받았다.

떠들썩한 방 안에 가득 찬 기쁨과 정미 사이에 보이지 않는 벽이 생긴 듯했다. 정미는 눈이 보이지 않아, 귀에 들리는 그 축하의 말소리들이 짜증나는 벌레가 웽웽대는 것 같다 느꼈고, 머리는 깨질 듯 아파 왔다.

하지만 아무도 정미의 이상함을 눈치채지 못했고 모두 황손을 회임한 태자비를 둘러싼 채 끊임없이 질문해대고 있었다.

이 경사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여종 청가가 입구에서 보고를 올렸다.

“둘째 아가씨께서 오셨습니다.”

정아가 맹 노부인을 쳐다봤다.

“둘째 정요인가요? 오랜만에 보는군요.”

노부인은 기분이 몹시 좋아 청가에게 말했다.

“들라 하라.”

얼마 지나지 않아 담황색 옷을 입은 정요가 걸어들어왔다. 그녀의 우아한 용모에 귀에 꽂은 하얀 진주 귀걸이가 더욱 온화하고 고상해 보였으며, 이렇게 느린 걸음으로 들어오니 바깥의 한기는커녕 봄바람을 불어들인 듯했다.

“태자비마마와 조모님을 뵙습니다.”

정아가 급히 그녀를 일으켜 세우며 아래위로 한 번 훑어보고는 칭찬했다.

“오랫동안 둘째를 보지 못했는데, 풍채가 점점 출중해지는 듯하구나.”

정아는 어릴 적 이 이복동생에게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때는 정아에게 예비 태자비라는 칭호가 있었기에 온종일 각종 기예를 배우느라 바빴고, 아니면 가사를 관리하곤 했다. 그러다 가끔 쉬는 시간이 생기면 태어나자마자 어머니에게 냉대를 받는 친여동생에게 관심을 가지곤 했다.

이후 그녀가 동궁(*东宫: 태자가 거주하는 궁)에 간 뒤로, 정미는 자주 그녀를 보러 궁에 들어왔고, 십중팔구 둘째 정요도 데리고 오곤 했다. 이때부터 점점 이 온화하고 우아하며 재주 있는 이복동생에 대한 인상이 깊어지기 시작했다.

정요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큰언니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니, 제가 감히 마마 앞에 설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그러고 보니, 방금 조모님의 거처 쪽에선 왜 동생을 보지 못했지?”

정아는 그제야 염송당에 있을 때 정요를 보지 못했음을 떠올렸다.

정요가 눈꺼풀을 살짝 내리깔았다.

“최근 계속 방에서 경전을 베껴 쓰고 있었고, 조모님께서 인자하시게도 ‘마음을 가라앉히는 것으로 진심을 보여라.’라고 말씀해 주시며 제 문안 인사를 면해주셨습니다. 정미가 돌아온 이후 제 마음이 놓이지 않아, 정미의 얼굴을 봐야 안심이 될 것 같았으나, 어제 정미가 일찍 잠든 탓에 오늘 다시 오게 되었습니다.”

계속 큰부인 옆에 기대어 있던 다섯째 정옥이, 정신이 번쩍 든 듯 흥분한 말투로 말했다.

“둘째 언니, 어제 그 선물을 또 가지고 온 거야?”

정옥은 일찍이 정미가 미쳤다는 소문을 들었던 바였고, 어제 정미가 머리로 침상을 들이받은 장면은 꽤나 공포스러웠다. 때문에 비서거에 온 뒤로 마음이 불안하여 계속 유 씨의 뒤에서 꼭 숨어 있었다. 하지만 어린아이들은 무슨 일이든 잘 잊었기에, 어제 본 그 환상적인 자수가 떠오르자 흥분하여 태자비인 정아 옆으로 달려와 재잘대며 손짓으로 이를 흉내 냈다.

“큰언니는 모르시지요? 어제 둘째 언니가 셋째 언니에게 주려고 했던 선물이 정말 예뻤어요.”

그리 말하면서 정요를 재촉했다.

“둘째 언니, 어서 열어서 큰언니께 보여드려.”

“옥아…….”

정요는 쑥스러운 듯했다.

정옥은 어린아이의 성정이라 참을성이 없었고, 이를 보고 얼른 정요 손에서 천복도를 뺏어 웃으며 정아에게 펼쳐 보였다.

바로 이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갑자기 들려왔다.

“큰언니.”

그 목소리는 정옥만큼 명랑하진 않았지만, 맑고 서늘한 목소리 사이에 이루 말할 수 없는 공포와 절망이 담겨있었고, 듣는 이로 하여금 저절로 그 목소리의 주인을 찾아내게끔 만들었다.

어린 동생의 몸을 신경 쓰고 있던 정아가 가장 먼저 고개를 돌려 정미의 안색이 갑자기 변하는 것을 보았다.

“미야, 왜 그러니?”

정미의 안색이 창백해지고, 면포가 덮이지 않은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해진 것이 보였다.

정아의 가슴이 내려앉았다.

‘설마 셋째가 정말로 그 소문처럼 이상해진 걸까?’

여기까지 생각하자, 마음이 점점 괴로워져 손을 뻗어 정미의 손을 붙잡았고, 아주 차가운 기운을 느껴졌다.

“할 말이 있으면 이 큰언니에게 하렴.”

“큰언니.”

정미가 혀끝을 은근히 깨물자 옅은 비린 맛이 났다. 그녀는 끝없는 공포감을 애써 누른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언…… 언니가 내 천을 풀어줄래요?”

“천?”

정아는 망설였다. 비서거에 오는 길에 한 씨가 몰래 그녀에게 ‘정미가 깨어난 이후로 검은 천으로 제 눈을 가려 죽어도 풀려고 하지 않는다. 누가 풀라고 하면 성질을 부린다.’고 귀띔했었기 때문이었다.

정미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네, 제 눈에 두른 검은 천 말이에요. 큰언니가 도와줄 수 있나요?”

“……좋아.”

정미가 천을 풀려고 하자 정아는 좋은 징조라고 생각해 저절로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정미에게 가까이 다가가 양손을 뻗어, 조심스럽게 정미의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고, 천천히 천을 풀어냈다.

천을 풀어내자 정미는 눈꺼풀에 강한 빛을 느껴, 도망치고 싶단 충동이 들었으나 억지로 참아냈다.

정미에겐 더 이상 물러날 여지가 없었고, 어쨌든…… 어쨌든 큰언니가 어떤 모습인지 보고 싶었다.

‘큰언니는 분명 평생 무사할 거야. 평생 무사할 거야…….’

정미는 속으로 되뇌며 한참 동안 눈을 뜨지 않았다.

“정미?”

“큰언니, 우선 제게서 조금 떨어져 줄 수 있나요? 조모님 옆에 앉아 계세요.”

정아는 정미의 말을 따라 맹 노부인의 곁으로 갔다.

“미야, 앉았어.”

정미는 숨을 깊게 들이쉬며 마음속으로 밀려오는 끊임없는 공포에 맞섰다. 조용히 정아의 무사를 빌었지만, 앞서 본 잔혹한 광경은 이미 마음속에 깊은 그림자를 남겼고, 무의식적으로 다시 한번 그 광경을 볼 준비를 하게 되었다.

조금 더 기다린 후, 정미는 드디어 용기를 내 눈을 떴다.

오랫동안 빛을 보지 못한 탓에 눈이 조금 아팠고, 한참 눈을 가늘게 뜬 후에야 천천히 뜰 수 있었다. 그러고는 몹시 불안해하며 정아를 쳐다보았다.

금색으로 수놓인 홍색 윗옷을 입은 정아의 외모는 평범했지만, 웃음 띤 입꼬리와 눈에 담긴 애정은 이미 정미에게 익숙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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