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교난-27화 (27/375)

27화. 태자비

다음 날 오전.

사람들이 염송당으로 문안 인사를 올리러 갔을 때, 그곳은 한창 소란한 상태였다.

회인백부의 맹 노부인이 어두운 표정으로 한 씨에게 물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냐, 어찌 여기저기서 멀쩡한 정미의 정신이 이상하다는 소문이 돌고 있어!”

한 씨의 가슴이 내려앉았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무슨 말이기는, 네가 사람을 내보내 물어보면 알 수 있을 게다!”

맹 노부인이 어두운 얼굴로 한 씨를 매섭게 흘겨봤다.

“둘째가 돌아오면 둘이서 이야기해 보아라. 딸을 데리고 처가에 다녀오더니, 이렇게 큰 사고를 치고 돌아올 줄이야!”

맹 노부인이 정씨네 둘째 나리를 언급하자 한 씨의 표정이 변했고 양손으로 손수건을 움켜잡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맹 노부인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목소리를 높였다.

“아복(阿福), 아희(阿喜), 비서거에 가서 셋째에게 천을 벗으라 하거라. 이따 내가 그 아이를 데리고 현청관으로 가 향을 피울 테니.”

그 말에 한 씨는 조급해졌다.

“아직 정미 머리의 상처가 다 낫지 않았습니다. 외출하여 머리에 자극을 주어선 안 됩니다!”

맹 노부인은 개의치 않고 대답했다.

“셋째에게 물어보았다. 머리의 상처는 그저 찰과상이라 걱정할 필요 없다고 하더구나. 현청관은 성안에 있는데, 머리에 무슨 자극이 가겠느냐? 어리석게 굴지 말거라. 소문이 계속 등 뒤를 따라다니게 할 셈이냐? 그렇게 되면 시집도 가지 못할 테고, 령운이를 포함한 자매들의 혼사에도 폐를 끼치는 일이 아니겠느냐!”

진령운의 어머니 정방영이 곧바로 수긍했다.

“어머니의 말씀이 맞습니다. 둘째 올케언니, 어머니의 말씀을 듣는 게 좋겠어요. 근 몇 년 동안 백부의 일은 어머님이 모두 온당하게 처리해오셨으니, 덤벙대는 저희보다 훨씬 옳으실 겁니다.”

‘내 딸인 령운이를 말려들게 할 수는 없지!’

정방영이 한 씨를 비꼬자, 한 씨는 화가 나 몰래 이를 악물었다.

“얼른 가지 않고 뭐하느냐!”

맹 노부인이 눈을 치켜뜨고 두 시종을 훑었다.

그러나 한 씨는 아복과 아희가 밖으로 나가는 것을 보고 더는 참을 수 없어 외쳤다.

“멈춰라!”

“뭐하는 짓이냐!”

맹 노부인의 호통에 한 씨가 무릎을 꿇었다. 청석으로 된 바닥은 뼈에 사무치게 차가웠고, 한 씨의 말투는 더욱 단호해졌다.

“어찌 되었든 간에, 정미는 오늘 밖에 나갈 수 없습니다. 이마만 다친 것이 아닙니다. 최근 계속 혼수상태였지 않습니까. 만약 외출했다가 또 소란을 피우면 정말 견딜 수 없을 겁니다!”

“지금 네가 내 말을 거역하는 게냐?”

한 씨가 여전히 무릎을 꿇은 채 말했다.

“며느리가 어찌 시어머니의 말을 거역할 수 있겠습니까. 단지 지금 정미의 상태로는, 정말로 외출할 수 없기에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동안 한 씨는 시어머니에게 한 번도 이렇게 맞서본 적이 없었다. 이는 한 씨의 성정이 약해서가 아니라, 처음 백부에 들어올 당시 남편을 사모하는 마음 때문에 그를 키운 어머니에게 강경하게 대할 수 없었고, 이후 그것이 습관이 되어버렸을 뿐이었다.

하지만 한 씨가 아무리 정미와 사이가 좋지 않더라도, 그녀가 열 달 동안 품은 아이임은 틀림없었다. 정미가 절대 지지 않으려고 하는 것을 미워하고, 아들을 잃게 한 것을 원망했지만, 그 아이가 다치길 바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맹 노부인은 한 입으로 두말하지 않는 사람이었기에, 한 씨의 도발을 받아 줄 리 없었다. 그녀는 곧바로 두 시종에게 소리쳤다.

“얼른 가지 않고 뭐하느냐! 얼른 발걸음을 떼지 않으면 두 다리를 잘라버릴 것이야!”

아복과 아희는 놀라 창백해져서는 급히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무릎을 꿇고 있던 한 씨는 화나고 다급해져, 두 시종이 문밖으로 나가는 것을 빤히 쳐다보다가 좋은 생각이 떠오른 듯 목화신 한 쌍을 벗어서 던졌다.

보통의 여인들과는 달리, 한 씨는 무술을 배운 적이 있기에 조준력이 제법 정확했다. 목화신 두 짝이 휙 날아가자 아복은 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고, 얼굴에 목화신을 맞아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아희는 조금 둔한 탓에 고개를 돌리지 않았고, 목화신에 넓적다리 뒤를 맞고 휘청이며 앞으로 넘어져 아복을 깔아뭉갰다. 나란히 포개진 두 사람이 비명을 질렀다.

맹 노부인은 멍해져서는 떨리는 손으로 한 씨를 가리키며, ‘……너, 너, 너어!’라고 말할 뿐 다른 말은 하지 못했다.

다른 사람들은 어안이 벙벙해져 바닥에 넘어진 두 시종을 쳐다보다가 천천히 한 씨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정말 그 모녀답군. 작년 여름, 셋째 아가씨가 꽃신 한 짝을 넷째 아가씨의 얼굴에 던졌던 성질머리도 분명 제 친모에게 물려받은 것이겠어!’

“네 녀석이 감히!”

마침내 정신이 든 맹 노부인이 탁자를 치며 토항에서 내려오려 했다.

이때 시종 한 명이 빠른 걸음으로 들어와, 바닥의 아복과 아희를 조심스럽게 지나쳐 보고를 올렸다.

“노부인, 태자비께서 오셨습니다.”

태자비 정아는 한 씨의 장녀이자, 회인백부 노부인 맹 씨의 적장손녀였다. 정씨 가문의 4대째 이어진 희망을 짊어지고 태어나자마자 황가에 시집가기로 정해진 손녀였기에, 맹 노부인은 정아를 몹시 아꼈다.

시종의 보고를 듣자마자 맹 노부인은 한 씨를 까맣게 잊고 토항에서 내려와 연거푸 말했다.

“어서 들라 하라!”

맹 노부인은 말하면서 밖으로 나갔고, 방 안의 여인들도 모두 뒤를 따라 태자비를 맞이하러 갔다. 오직 바닥에 무릎 꿇은 한 씨만이 자신의 두 손을 바라보며 멍하니 있었다.

* * *

열여덟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여인 하나가 이미 궁녀의 부축을 받아 걸어들어오고 있었다.

그녀는 금색 봉황과 감의 꼭지가 흩날리고 있는 무늬가 수놓인 정홍색 윗도리를 입고 있었고, 은여우 털로 만든 피풍을 걸치고 있었다. 외모만 보면 정씨 가문의 자매 중 가장 눈에 띄지 않는 얼굴이었으나, 늘씬한 키에 우아한 분위기가 몹시 정답게 보였다.

맹 노부인이 고개 숙여 절을 올렸다.

“태자비마마를 뵙습니다.”

정아가 그런 맹 노부인을 급히 붙잡았다.

“조모님, 어서 일어나세요. 백모님과 다른 분들도 어서 일어나세요.”

모두가 일어나자 정아도 맹 노부인에게 인사를 올렸고, 맹 노부인은 급히 정아의 손을 잡고 토항으로 데리고 갔다.

정아는 그제야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는 한 씨를 발견했고 발걸음을 멈췄다.

“어머니, 이게 무슨…….”

맹 노부인은 손녀에게, 한 씨에 대해 말해 주는 것을 잠시 망설였다.

“오늘 수도에 갑자기 정미에 관한 소문이 돌아, 아침부터 집안에서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정아는 맹 노부인이 평소 한 씨를 미워하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표정에 티를 내지 않은 채 한 씨를 일으켜 세웠다.

“어머니, 어서 일어나세요. 바닥이 차갑습니다. 어머니와 조모님 두 분 다 조급해 마세요. 저도 그 소문을 듣고 마음이 놓이지 않아 정미를 보러 온 거예요.”

말하다가 멈칫한 정아는 한 씨가 다름 아닌 맨발인 모습에 놀란 듯이 빤히 쳐다봤고 주저하며 말했다.

“어머니, 이건…….”

한 씨는 솔직하고 입바른 소리를 잘하는 사람이었지만, 늘 중요한 때에 말문이 막히곤 했다. 그녀는 정아의 물음에 뭐라 대답할지 몰라, 눈으로 던져진 신발을 쫓았다.

이를 본 정아가 양옆에 붙은 궁녀에게 눈치를 줬고, 궁녀들은 바로 신발을 주워왔다.

정아는 신발을 건네받고 천천히 구부려 앉아 직접 한 씨에게 신을 신겨 주며 가볍게 불평했다.

“어머니께서 매우 애가 타시나 봅니다. 저도 정미가 지금 어찌 되었는지 걱정돼 도무지 마음이 놓이지 않네요. 어서 저를 데리고 가주세요.”

정아의 말에 방 안에 보이지 않던 어색함이 녹아내렸다. 한 손으로는 한 씨를, 다른 한 손으로는 맹 노부인을 붙든 정아는, 다 함께 비서거로 향했다.

* * *

정미는 지난 밤 늦게 잠이 들어 깨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녀는 세수하고 양치를 한 뒤 겨우 아침을 먹고는, 침상 머리맡에 기대 넋을 놓고 있었다.

눈치가 빠른 교용이 총애를 회복하고자 다가와 말했다.

“아가씨, 소인이 책을 읽어드릴까요?”

정미는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책을 읽어드릴까요? 《명녀열전(名女列傳)》어떠세요?”

교용은 이전에 둘째 아가씨의 서재에 빽빽이 꽂혀 있던 서책들을 떠올리고는 떠보는 듯이 물었다.

정미는 면 이불을 위로 끌어올리며 내키지 않는 듯이 대답했다.

“《명녀열전》은 무슨, 둘째 오라버니가 몇 년 전 내게 준 《이지취담(異志趣談)》을 가져와. 아, 어디 있는지 알지?”

교용이 바삐 고개를 끄덕였다.

“압니다.”

비서거의 누가 모르겠는가. 아가씨는 둘째 공자님께서 보낸 선물이라 하면 그것이 귀한 것이든 아니든 보물처럼 여겼기에, 몇 년 전 선물한 《이지취담》이라면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심지어 세 살 때 선물 받은 딸랑이마저 아직도 상자 한 켠에 보관하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교용이 한 뼘 정도 크기의 서책을 들고 와 침상 옆 걸상에 앉아 한 자 한 자씩 읽어내렸다.

“예전에 남란(南蘭)이라는 이름을 가진 작은 나라가 있었는데, 그 나라의 여인들은 사내 못지않게 귀했다. 그 이유는 여인들만이 고술(*蠱術: 상대방의 상징물이나 대체물에 위해를 가하여 저주하는 주술의 일종)을 쓸 수 있기 때문이었다…….”

정미는 두 눈을 감은 채로도 줄줄 외울 수도 있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갑자기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둘째 오라버니는 정미에게 이야기 들려주는 것을 가장 좋아해, 재미있는 책을 찾아 모아서 정미에게 들려주곤 했다. 하지만 작년부터는 정미가 다 컸으니, 이런 책은 이제 멀리해야 한단 핑계를 대며 더 이상 책을 읽어 주지 않았다.

하지만 둘째 오라버니가 어찌 알겠는가. 정미의 몸엔 이미 요괴가 달라붙어 있었고, 만약 오라버니가 그런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았었다면 진작에 놀라 죽었으리란 것을.

더 무서운 것은, 만약 큰언니가 정말로 회임했다면 앞으론 그 목소리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정미는 영리하고 민첩한 편이 아니었기에, 사람들을 웃게 하거나 사랑받는 법을 몰랐다. 하지만 만약 그 머릿속 목소리의 말에 따르면 미래에 아주 무서운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것만은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정미는 그저 하늘 아래 공짜로 얻는 것은 없다고 믿었다. 이 정보를 통해 절호의 기회를 잡지 못한다고 해도 말이다.

친부모도 자식들에게 공평하지 않은데, 요괴인지 귀신인지 모를 그것은 어떠하겠는가.

‘그나저나 둘째 오라버니는 왜 아직도 돌아오지 않는 걸까?’

정미는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둘째 오라버니가 더욱 그리워졌다.

“아가씨, 태자비마마와 노부인, 부인들께서 모두 오셨습니다.”

그때, 여종 청가(聽歌)가 달려 들어와 보고했다.

“태자비?”

정미는 교용이 책을 읽어 주던 것도 잊어버린 채 몸을 돌려 내려가려고 했다.

그러자 환안이 급히 막아섰다.

“아가씨, 누워 계세요. 어젯밤 외출하신 뒤로도 잘 주무시지 못하셨고, 오늘 아침에도 열이 조금 있었는걸요.”

정미는 만약 큰언니가 정말로 회임 중이라면, 그녀에게 병을 옮겨선 안 된다고 생각해 다시 누워서 이불을 꼭 뒤집어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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