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교난-26화 (26/375)

26화. 아득한 길

「네가 어리석은 줄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오랫동안 어리석을 줄은 몰랐네. 어쨌든 나를 생각해 냈구나.」

머릿속의 그 목소리가 몹시 비웃었다.

정미는 이 목소리가 긍정하는 듯한 대답을 하자, 다시금 머리를 벽에 들이받아, 이 죽일 놈의 목소리를 내쫓고만 싶었다. 하지만 이 기이한 목소리에게 시달린 지 오래되었기에 금세 그 목소리에 적응했고, 잠깐 생각에 잠긴 뒤 입을 열었다.

“그런 거였구나.”

말을 마친 정미는 바로 차분해져 몸을 돌려 눕고는 더는 그 목소리에 신경 쓰지 않았다.

정미의 행동이 예상을 벗어나자, 그 목소리는 참고 또 참다가 이를 부득부득 갈며 물었다.

「대체 뭐가 그런 거였구나, 라는 거야?」

정미가 조금의 관심도 주지 않자, 목소리는 두 손을 만들어 내서 그녀의 어깨를 잡고 세차게 흔들고만 싶었다.

「말 좀 해봐!」

“흥!”

정미는 하찮다는 듯이 코웃음 쳤다.

“너 같은 요괴의 사악한 마음은 잘 알고 있어. 그러니까 넌 나를 현혹하려는 거잖아. 마치…….”

정미는 예전에 둘째 오라버니가 말해 준 이야기를 떠올렸다.

“마치 ‘귀타장(*鬼打墻: 귀신이 만든 벽)’처럼, 내가 본 그 장면들은 모두 네가 만든 환각이지? 내가 무서워서 네 계획에 따라줄 줄 알고!”

「너!」

그 목소리는 화가 나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멍청한 것은 무섭지 않지만, 멍청하면서도 고집 센 것이야말로 무서운 것이었다.

하얘지고, 아름다워지고, 날씬해진다고 하면 모든 여인들이 무릎을 꿇건만, 이 애는 도대체 여인이 맞긴 한 건가? 아니면 자신이 너무 오래 팔찌 안에서 지낸 탓에, 세상을 알지 못하는 걸까?

정미를 통해 바깥을 보지 못하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었다. 만약…….

그 순간, 정미의 말이 목소리의 중얼거림을 잘라냈다.

“그냥 포기해. 난 절대 넘어가지 않을 거야. 하얘지고, 아름다워지고, 날씬해진다는 말로 날 속이려 하지 마!”

「정말로 하얘지고 아름다워지고 날씬해진다니까!」

그 목소리가 고함쳤다.

정미가 차갑게 웃었다.

“필요 없어, 그런 거. 예전에 나는 물만 마셔도 살찌는 줄 알았는데, 지금은 살이 많이 빠졌어. 노력하기만 하면 이루지 못할 일은 없어. 그러니까 너 같은 꼼수를 쓸 필요도 없다는 거지. 게다가 내가 앞서 맹세를 지키지 못했기 때문에 어쨌든 난 시집은 못 갈 테고, 다른 사람한테 이쁘게 보일 필요도 없어졌으니 쓸모도 없는 거라고!”

그 목소리는 정미에게 패배해, 화가 나 소리쳤다.

「왜 꼭 다른 사람에게 보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지? 예뻐지면 너 자신이 보기에도 좋은 거 아니야? 네 성정은 좀 별로지만, 그래도 특별하다고 생각했는데. 다른 여인들과 다를 바 없이 모든 게 사내를 위해서라고만 생각하는구나!」

정미는 점점 냉정해졌다.

“그렇게 날 자극하려 할 필요 없어. 난 내 얼굴에 익숙한걸. 만약 보기 싫은 얼굴이라면 누굴 놀려먹을 수도 있겠네.”

그 목소리는 화가 나 말문이 막혔고, 한참 후에야 한 글자씩 딱딱하게 말했다.

「만약 네가 본 것들이 미래에 정말로 일어날 일들이라면 어떻게 할래?」

정미의 몸이 멈칫했다.

그 목소리가 이어서 말했다.

「네 어머니, 외조모님, 사촌 형제자매들까지. 너는 그 사람들이 참혹하게 죽는 걸 그저 바라보기만 하며 아무것도 하지 않을 거야?」

‘외조모님!’

정미의 가슴이 조여왔다.

환상 속에서 정미는 지 오라버니에게 버림받았으나, 그들의 혼사는 외조모님이 임종 때 남긴 유언이었다.

‘만약…… 만약 이 요괴의 말이 정말이라면, 그럼 외조모님은 몇 년 안에…….’

정미는 더 이상 상상할 수가 없었고, 이 요괴가 자신을 꾀어내려 하는 말이라고 자기 자신을 설득했다. 하지만 가까운 친척과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 지경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자, 만분의 일의 가능성이라 해도 무척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마음이 동요한 정미가 단호하게 말했다.

“요괴야, 날 그만 놀려.”

약삭빠른 그 목소리는 정미의 말을 듣자마자, 그녀가 조금 흔들렸다는 것을 알아챘고 그대로 몰아붙이며 말했다.

「이렇게 하자. 네가 그 일들이 정말로 일어날 걸 믿지 못하고, 내가 널 현혹하는 거라고 생각한다면, 내가 지금 말하는 일이 정말 일어나는지 한번 지켜보는 거야.」

‘흥, 나쁜 계집, 나중에 울며 빌 때 내가 널 어떻게 애먹이는지 보여주마. 오랫동안 쌓인 울분을 다 쏟아 낼 테니!’

“말해 봐.”

정미는 어쩐지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지금이 섣달이지. 네 큰언니는 이미 회임한 지 한 달이 되었어. 하지만 석 달이 지나지 않아 아직 바깥에는 알리지 않고 있지. 네가 잠자코 기다리면 내가 말한 게 사실인지 아닌지 알 수 있을 거다.」

“바로 어머니께 여쭈러 가겠어!”

정미가 일어나 앉아 크게 외쳤다.

“환안, 들어와. 나를 침상에서 내려줘!”

「멍청아, 지금은 네 어머니조차 이를 알지 못해. 네가 지금 뜬금없이 물으러 가면 다른 사람들이 너를 요괴 취급하지 않겠어?」

“요괴는 너겠지!”

그 목소리는 화가 나 이를 갈았다.

「깜빡했는데, 더 이상 나를 요괴라 부르지 마! 어린 꼬맹이 주제에 왜 이렇게 못된 거야! 아무리 내 정체를 모른다고 해도, 어찌 늘 나쁜 쪽으로만 생각하는 거니? 선녀 언니라고 부를 수도 있잖아!」

정미는 이를 듣고 차갑게 말했다.

“요괴가 또 헛소리를 하는구나.”

이때, 환안이 급히 들어와 정미를 부축하며 신발을 신겨 주었다.

“아가씨, 조심하세요.”

정미는 요즘 가면 갈수록 이 말솜씨 없는 시녀에게 의지하게 되었다. 만약 방으로 들어온 게 교용이었다면 분명 ‘왜 침상에서 내려오려 하십니까?’ 같은 쓸데없는 말을 했을 텐데, 지금 정미의 상태로는 그런 말을 들어봤자 짜증만 났을 터였다.

그 목소리는 누가 들어온 것을 알아채지 못했고, 피를 토하듯 소리쳤다.

「아혜(阿慧)라고 불러!」

정미는 더 이상 그 목소리를 상대하지 않고, 환안의 손을 잡고 말했다.

“어머니를 뵈러 가자.”

환안은 별말 없이 병풍 위의 여우털 외투를 정미에게 걸쳐줬다.

“아가씨, 바깥은 춥고 길이 미끄러워요. 소인이 가서 등을 가져오겠습니다.”

겨울은 해가 짧았기에, 하늘은 이미 어두웠다. 정미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넌 나를 부축하고, 교용을 불러 등을 들라고 해.”

곧 교용이 불려왔고, 정미가 한 씨에게로 간다고 하는 것을 듣자마자 크게 놀랐다.

“아가씨, 시간이 너무 늦었어요. 몸도 편치 않으신데…….”

정미가 짜증을 참지 못하고 말했다.

“네가 하지 않겠다면, 화미(畵眉)를 부를게.”

그녀는 잠시도 더 기다릴 수 없었고, 반드시 조금이라도 더 빨리 그 요괴가 한 말이 사실인지 확인해야 했기에 시녀 한 명과 실랑이할 틈이 없었다.

교용은 놀라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으나, 속으로는 짜증이 치미는 것을 느꼈다.

정미의 곁에는 오직 2등급 시종 두 명과 여종 둘만 있었고, 정미는 교용과 환안 두 사람 중 교용과 더 가깝게 지냈다. 하지만 언제부턴지 모르게 환안이 그 자리를 대신했고, 만약 지금 여종 화미를 불러온다면, 앞으로 교용이 설 자리가 없어질지도 몰랐다.

“소인이 바로 가서 등을 들고 오겠습니다.”

정미는 그제야 화가 가라앉은 듯 분부했다.

“호박등을 드는 것을 잊지 말고.”

“알겠습니다.”

교용이 몰래 입을 삐죽거렸다. 바보가 아니라면, 정미가 가장 아끼는 등이 둘째 공자께서 선물한 그 호박등이라는 것을 모를 리 없었다.

찬 바람이 쌀쌀하게 불어왔고, 쌓인 눈은 아직 녹지 않고 있었다. 눈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이 추위는 뼛속까지 파고드는 듯 날카로웠고, 허약해진 몸은 외투를 입어도 허전하게 느껴졌다. 정미는 무의식적으로 어깨를 움츠렸고, 사슴가죽 장화가 땅을 밟을 때 내는 오도독 소리를 들으며, 펼쳐진 길이 아득하다는 생각에 슬픔을 느꼈다.

한 발짝 한 발짝씩 발걸음을 내디딘 정미는, 곧 이연원에 도착했다.

* * *

한 씨는 등불 아래에서 신발 밑창을 바느질하고 있었다. 그녀는 새하얀 천을 잘라 한 겹 또 한 겹씩 깔았다. 바늘자리는 균일하고 촘촘했다.

“부인, 좀 쉬세요. 눈 아프시겠어요.”

설란이 권했으나, 한 씨는 고개도 들지 않고 말했다.

“조금만 더 하면 된다. 내일 신발 볼을 잘라내면 면 신발 한 켤레가 되겠구나. 집에서 면 신발을 신으면 그 가죽신발보다 훨씬 편할 게야.”

한 씨가 설란에게 신발 밑창을 건넸다.

“설란, 어때 보이니?”

설란이 급히 대답했다.

“부인께서 만드신 밑창이니 보기만 해도 아주 좋습니다.”

한 씨가 다시 가져가며 말했다.

“넌 어려서 모르겠지만, 내 어머니는 다른 건 못해도 신발만은 아주 잘 만드셨어. 특히 여기 밑창을 단단하게 하지 않으면 신기에 불편하지. 내 아버지는 몇십 년 동안 어머니가 만든 신발만을 신으셨단다. 그해 내가 출가하기 전, 일부러 어머니를 찾아가 신발 만드는 법을 배웠는데, 이렇게 제법 잘 만들게 될 줄은 몰랐구나.”

“어쩐지 부인께서 만드신 신발은 다른 것보다 특별히 더 빳빳해 보였어요.”

설란은 칭찬을 마친 뒤, 몸을 돌려 등갓을 옮기고 초에 불을 붙였다.

이때 상란이 문발을 걷으며 들어왔다.

“부인, 셋째 아가씨께서 오셨습니다.”

한 씨의 손이 멈칫하는가 싶더니, 바늘 끝이 손가락 안쪽을 찔렀다. 곧바로 따끔한 통증과 함께 핏방울이 맺혔다. 그녀는 급히 신발 밑창을 치우고 고개를 숙여 손가락을 입에 머금고는 말했다.

“들어오라 하렴. 설란, 우선 이것을 치우거라.”

“예.”

설란은 밑창을 건네받고 칸막이 방으로 들어가, 깨끗한 화리나무 상자 중 하나를 열었다. 안은 새 헝겊신으로 잔뜩 차 있었다.

설란이 한숨을 내쉬었다. 부인은 매년 이 헝겊신을 만드시면서, 한 번도 선물하지 않으니 참으로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 * *

한편, 방에 들어선 정미는 방 안의 훈기를 느꼈지만, 몸은 아직도 춥게 느껴졌다. 환안이 외투를 벗겨주자, 정미는 한 씨의 앞으로 다가가 무덤덤하게 말했다.

“어머니를 뵙습니다.”

한 씨는 토항(*土炕: 잠자리 아래 불을 때는 중국식 난방)에 앉아 야윈 정미의 뺨에 띤 홍조와 모자에 가려지지 않은 앞머리가 축축한 것을 보고는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두 눈을 가린 검은 천을 바라보며 물었다.

“이 시간에 어쩐 일이니?”

정미는 한 번도 한 씨에게 부드럽게 아양을 떨 수 있으리란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기에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어머니, 큰언니가 보고 싶어요.”

한 씨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궁에 들어가고 싶다고?”

“예.”

정미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안 된다. 네 몸이 다 낫지 않았는데 어떻게 외출할 수 있겠니? 네 자신이 괜찮다고 하더라도 귀한 분들 눈엔 미워 보일 수 있는 것이다. 미야, 이제 열세 살이 되었지 않니. 어린아이처럼 생각나는 대로 행동해선 안 된다.”

한 씨가 단호하게 거절했다.

정미는 한 씨와 반 장 정도의 거리에 서서, 조금도 더 다가가지 않은 채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하지만 큰언니가 보고 싶어요.”

정미는 연분홍색 옷을 입고 있었고, 새하얀 여우털이 달린 푸른 피풍을 두르고 있어, 무덤덤한 채로 거기 서있자니 마치 한 폭의 수묵화 같았다. 한 씨는 입은 옷에 마치 파묻혀 있는 것마냥 수척해진 딸을 보고는 조금 전 정미가 발광하던 모습을 떠올렸다. 결국 마음이 약해져서는 입을 열었다.

“이렇게 하자. 내일 아침 내가 상소를 올려, 네 언니가 나올 수 있는지 여쭤보마.”

한 씨의 말투가 갑자기 엄격해졌다.

“만약 네 언니가 나오지 못한다고 하면, 더 이상 불만을 품지는 말거라. 네가 다친 이후로 네 큰언니가 몇 번이고 백부로 물건을 보내고 있는 건, 모두 널 위해서란다. 다만 지금 그 아이는 우리와 신분이 달라 나오고 싶다고 해도 쉬운 일이 아니야.”

정미는 아직 어렸지만, 회임 초기 삼 개월 동안 유산이 쉽게 된다는 상식쯤은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한 씨의 말을 듣고 그녀는 급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상소를 올리지 않으셔도 돼요. 제가 다 나으면 직접 궁에 가 언니를 만날게요. 저…… 저는 사흘이면 나을 거예요.”

한 씨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사흘? 사흘이면 그 천을 벗을 수 있니?”

“벗을 수 있습니다!”

한 씨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그렇게 해 보렴.”

이후, 두 모녀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어머니, 그럼 저는 먼저 비서거(飛絮居)로 돌아가겠습니다.”

한 씨는 아픈 손가락을 어루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곧 있으면 더 추워질 테니 어서 돌아가 보아라.”

정미는 조용히 이연원에서 물러나 거처로 돌아왔다. 환안, 교용 두 사람이 세수를 시켜 주고, 발을 씻겨 준 뒤에야 정미는 침상에 누울 수 있었다.

방 안엔 희미한 촛불만이 남아 있었지만, 정미는 이를 느끼지 못했다. 그저 사흘 뒤, 아무리 무섭다고 하더라도 이 천을 벗어야겠다는 생각에 마음이 불안해 잠에 들지 못했다. 오래도록 뒤척거리던 정미는 밖에서 숙직하며 잠을 자던 교용의 욕설 섞인 잠꼬대를 들으며 점점 잠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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