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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난-25화 (25/375)

25화. 칼바람과 서리가 몰아치다

한 씨는 급히 내실로 들어섰다. 정미는 반쯤 일어나 앉아 양손으로 무릎을 껴안고 벽에 기대어, 이마에는 흰색 면포를 한 바퀴 두르고 있었고, 검은 천으로 눈을 가리고 있었다. 그 모습이 참으로 우스꽝스러우면서도 불쌍해 보였다.

한 씨는 화가 나고 어이가 없으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아려오는 것을 느꼈다.

“미야.”

정미는 한 씨가 그녀를 부르는 것을 듣고, 보통 딸이 어머니를 봤을 때의 정겨움을 느끼기는커녕 뒤로 계속 물러나며 외쳤다.

“어머니, 천을 풀고 싶지 않아요! 숙부님, 숙부님, 어디 계세요!”

정씨네 셋째 나리가 이를 듣고 급히 들어왔다.

“미야, 왜 그러느냐? 머리가 아픈 것이야?”

정미는 더듬거리며 정씨네 셋째 나리가 건넨 손을 붙잡고, 간구하는 어조로 애원했다.

“숙부님, 어머니께 말씀해 주세요. 저는 천을 풀고 싶지 않아요. 천을 풀면 머리가 아프고 마음이 어지러워져요!”

“알겠다. 숙부가 네 어머니와 말해 보마. 미야, 너는 진정하거라. 그렇지 않으면 또 머리에서 피가 날 게야.”

셋째 나리가 한 씨를 바라보았다.

“둘째 형수님…….”

한 씨는 난처하면서도 마음이 상해 깊게 한숨 쉬며 말했다.

“좋다. 어미가 천을 풀지 않겠다고 약속하마.”

“정말요? 백부로 돌아간 이후에도 풀지 않을 거죠?”

“풀지 않으마.”

“아버지가 보고 뭐라고 하셔도 풀지 않을 거죠? 조모님이 말해도요?”

정미가 연신 캐물었다.

“그래, 알았다니까. 네 셋째 숙부가, 네 몸이 괜찮아진 후에 풀면 된다고 했단다.”

한 씨는 갈수록 정미가 정상적이지 않은 것 같다고 느꼈고, 마음이 답답해져 오는 것을 꾹 참으며 말했다.

정미는 그제야 진정한 듯 서먹하면서도 예의 바르게 말했다.

“어머니께 감사드립니다.”

잠시 휴식을 취한 그들은, 셋째 나리의 호위 아래 모두 회인백부로 돌아갔다.

* * *

백부는 일찍이 소식을 전해 들은 바였다. 정미를 방에서 편히 쉬게 한 후 한 씨는 회인백부 노부인 맹(孟) 씨를 뵈러 갔다.

“정미를 잘 쉬게 하였느냐? 좀 어떻더냐?”

맹 노부인은 젊은 시절엔 몸고생을 많이 했고, 노년에는 마음고생을 많이 해 비슷한 연배보다 몇 살이나 더 나이 들어 보였다. 얼굴에 겹겹이 쌓인 주름과 팔자주름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별로 어울리고 싶지 않다고 느끼게 만들 정도였다.

“괜찮습니다. 편히 쉬도록 했어요.”

“그럼 됐다.”

맹 노부인은 축 처진 눈으로 말을 마치더니, 갑자기 화제를 바꿨다.

“듣자 하니, 남안왕께서 마차를 빌려주셨다고?”

“예, 정미가 마차에서 떨어졌을 때, 마침 남안왕께서 지나가고 계셨습니다.”

맹 노부인은 눈을 살짝 감고 손목에 두른 염주를 만지작거리며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말했다.

“그렇다면, 내일 아침 일찍 사례를 좀 보내드려야겠다. 우리 백부가 버릇없게 보이지 않도록 말이야.”

“예, 알겠습니다.”

평생 엄숙했던 시어머니 앞에서는, 한 씨의 난폭한 성미가 저절로 수그러들었다.

“그럼 됐다. 너도 이만 가 보거라. 만약 정미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사람을 보내서 전하도록 하여라.”

한 씨가 잠깐 망설이다가 말했다.

“셋째 도련님께서 황 태의를 모셔 오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맹 노부인이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은 시간이 이미 늦었다. 정미에게 큰 문제가 없으니, 내일 아침에 모셔 오도록 하지.”

한 씨는 고개를 끄덕여 대답하고 이연원으로 돌아갔다.

* * *

한 씨가 이연원으로 돌아갔을 때, 그녀는 셋째 부인 풍(馮) 씨가 객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다.

두 사람이 막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하자, 여종 상란이 들어와 보고했다.

“부인, 큰부인께서 다섯째 아가씨와 함께 셋째 아가씨를 보러 오셨습니다.”

그 말에 한 씨와 풍 씨가 마중을 나갔고, 모두 함께 정미의 거처로 가던 와중, 뭔가를 들고 고개를 숙인 채 나오던 정요와 부딪혔다.

“어머니, 백모님, 셋째 숙모님을 뵙습니다.”

정요는 한 씨 일행을 마주하고는 의외라는 듯한 표정으로 무릎을 꿇고 예를 갖췄다.

“정미를 보러 온 거니?”

큰부인 유(廖) 씨가 부드럽게 물었다.

“예, 정미의 부상에 마음이 놓이지 않아 보러 왔습니다.”

한 씨의 눈길이 정요의 손에 들린 물건에 가닿았다.

“요야, 네 손에 든 것이 뭐니?”

정요는 그 물건을 한 씨 앞으로 들어 올리며 공손하게 대답했다.

“정미가 하루빨리 쾌차하길 바라며 주는 선물입니다.”

사람들 모두가 그 물건을 쳐다봤고, 뒤늦게 옻칠을 한 나무쟁반임을 알아챘다. 위로는 푸른 비단이 평평하게 덮여 있어, 안에 든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다섯째 아가씨 정옥(程玉)이 웃으며 말했다.

“둘째 언니, 선물은 셋째 언니에게 이미 줬으면서, 우리에게 빈 쟁반을 보여서 뭐해?”

정요가 미소지으며 답했다.

“아니야, 정미가 쉬고 있어서 아직 만나지 못했어. 내일 다시 와서 직접 선물하려고 해.”

“그래?”

정옥의 동그랗고 큰 눈이 빙글 돌아 유달리 생기 가득해 보였다.

“그럼 더욱 궁금해지네. 선물이 뭐기에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거야?”

그녀는 말하면서 손을 뻗어, 그 푸른 비단을 걷어 내려고 하며 해죽 웃었다.

“한번 보자.”

“옥아.”

큰부인 유 씨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정옥을 흘끗 노려봤다.

“어머니, 그저 호기심일 뿐이에요.”

정옥은 장난스레 혀를 내밀었다가 선물의 정체를 확인하고는 대뜸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녀가 손을 뻗어 쟁반 위의 푸른 비단을 치워내자, 최고급 비단이 폭포처럼 펼쳐진 것이다. 담청색 비단이 석양에 비치자 몽환적인 빛깔을 냈다. 비단에 새겨진 셀 수 없이 많은 ‘福(복)’글자는 형태가 제각각이었지만, 어지러워 보이지 않았고, 글자의 뒷면에는 각기 다른 모습의 박쥐가 그려져 있었다!

“세상에, 어떻게 수놓은 거야?”

정옥은 깜짝 놀란 표정으로 수놓은 비단을 쓰다듬으며 중얼댔다.

놀란 것은 나이가 어린 정옥만이 아니었다. 한 씨와 다른 부인들도 크게 놀랐다.

이렇게 조예가 깊은 양면자수는 길거리에서뿐만 아니라 명문가의 애장품에서도 쉽게 보기 힘든 것으로, 천금으로도 구하지 못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요야, 그동안 밖으로 한 발짝도 나오지 않더니, 이걸 수놓고 있었던 거니?”

한 씨는 온화한 표정이었지만, 이 서녀보다 두 살밖에 어리지 않은 차녀 정미를 떠올리자, 저도 모르게 마음속으로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둘째 언니, 정말 대단하다. 어떻게 한 거야?”

정요가 한 씨의 질문에 대답하기도 전에, 정옥이 다가와서는 정요의 손을 잡아당기며 경탄했다.

“언니의 손은 내가 본 사람 중에 가장 재주가 좋은 것 같아.”

그녀는 여기까지 말하고 잠시 멈칫하더니, 정요의 손가락 안쪽에 촘촘한 바늘 자국을 보곤 깜짝 놀라 소리쳤다.

“아, 다 이걸 수놓다가 이렇게 된 거야?”

정요가 손을 빼며 미소지었다.

“네 생각만큼 그렇게 대단하지 않아. 이 천복도(千福圖)를 수놓다가 정말 앞이 캄캄해져서 곤란했어.”

큰부인 유 씨가 칭찬했다.

“둘째 동서, 제가 보기에 정요처럼 출중한 아가씨는, 수도 어디를 가도 몇 명 없을 겁니다!”

정요가 급히 입을 열었다.

“백모님, 과찬이십니다. 제가 어디 백모님의 말씀만큼 뛰어나겠어요. 만약 뛰어난 부분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 또한 제 어머니께서 제게 가르쳐 주신걸요.”

유 씨는 이를 듣고 더 크게 칭찬하더니, 고개를 돌려 한 씨에게 말했다.

“둘째 동서, 딸을 정말 잘 키우셨습니다.”

유 씨의 말에 한 씨는, 앞서 느꼈던 씁쓸한 기분이 풀려 그저 고개를 끄덕거렸다. 친딸 정미는 비록 좋은 인재가 아니었지만, 어쨌든 정요도 한 씨가 곁에 두고 키운 딸이었기에 마찬가지로 그녀의 체면이 섰다.

정요는 웃음기를 띤 한 씨의 얼굴을 흘끔 쳐다보고는 입꼬리를 조금 올렸다.

“백모님, 어머니, 셋째 숙모님,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정요의 뒷모습이 문밖으로 사라지자 유 씨가 말했다.

“둘째 동서, 정미가 이미 잠들었다고 하니, 우리도 더 오래 머물지 않겠습니다. 잠깐 들어가 조용히 얼굴만 보고 나오지요.”

* * *

한 씨가 사람들을 데리고 정미의 침실로 들어서자, 정미가 침상 위에 앉아 멍하니 있는 것이 보였다.

“셋째 언니, 안 자고 있었어? 방금 둘째 언니가 이 방을 나오며 셋째 언니가 쉬고 있었다고 했는데.”

정옥이 다가가 다짜고짜 정미의 손을 잡아당기며 싱글벙글 웃었다.

“언닌 모르지? 둘째 언니가 언니한테 선물하려는 천복도가 얼마나 예쁜지. 게다가 귀한 양면자수였는 걸. 한 면엔 수많은 福(복)자가 있고, 다른 한 면엔 각양각색의 박쥐가 수놓아져 있었어.”

“그래.”

정미가 냉담하게 대답했다.

“셋째 언니, 왜 그래?”

정옥이 정미를 살펴보았다.

“맞다. 왜 천으로 눈을 가리고 있어? 다쳤어?”

열 살밖에 되지 않은 정옥은 늦둥이였다. 큰부인 유 씨가 장남을 낳은 뒤 10년이 지난 후에야 태어나 어려서부터 애지중지하며 응석받이로 키웠으니, 세상 물정 모르고 천진난만한 면을 가진 것이다. 정미는 이 사촌 동생과 사이가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정옥이 정요에 대한 칭찬을 쏟자, 정미는 알 수 없는 짜증이 강렬하게 일었고, 무성의하게 대답했다.

“눈이 멀어서.”

“아!”

정옥이 잔뜩 겁을 먹고 멍하니 유 씨를 쳐다봤다.

“어머니, 셋째 언니의 눈이 멀어버렸나요? 그럼 어떡해요?”

두 눈을 가리고 있었기에 정미는 정옥의 표정을 볼 수 없었지만, 말투에 묻어난 관심과 걱정은 느낄 수 있었다. 정미는 갑자기 조금 후회가 되어 그저 농담이었다 알려주려고 한 순간, 한 씨가 꾸짖었다.

“미야, 마가 끼었니? 하는 말마다 헛소리구나! 네 사촌 동생에게까지 미친 사람처럼 행동하다니!”

그 말을 들은 정미의 마음은 너무나도 싸늘해졌고, 후회를 더불어 모든 감정이 멈춰버린 듯했다. 그녀는 마치 혼이 빠진 나무인형처럼 한 씨에게 조금의 표정도 지어 보이지 않았다.

한 씨도 마찬가지로 꾸짖은 것을 조금 후회하고 있었다.

얼음이 하루아침에 모두 꽁꽁 얼어붙지 않는 것처럼, 수년 동안 정미에게 느껴왔던 부정적인 감정과 원한은 천천히 한 씨의 마음을 압박하며 꾹 눌러버리곤 했다.

그러나 종종 화를 내지 말아야 할 때에 저도 모르게 터트려버린 후 후회스럽게 만들어 버리곤 했고, 고개 숙이지 않는 정미를 보면 더욱 화가 났다.

무표정한 정미를 보자 한 씨는 또다시 몹시 화가 났다.

“그리고 방금은 무슨 일이란 말이니? 네 둘째 언니가 선물을 가지고 왔는데 사람을 보지도 않고 또 무슨 고집을 피우는 게야? 설마 너, 나를 괴롭히려고 태어난 건 아니겠지?”

“둘째 형님!”

한 씨의 말이 점점 심해지자, 셋째 부인 풍 씨가 참지 못하고 외쳤다.

유 씨도 이를 말렸다.

“둘째 동서, 아직 아픈 아이지 않습니까.”

정미는 가슴이 싸늘해진 덕에 아주 평온하게 물었다.

“그럼 어머니께선 어찌 그때 저를 변소에 버리지 않으셨습니까? 사실 어머니께선 그때 살아남은 게 제가 아니라, 오라버니였길 늘 바라셨지요?”

“무슨 말을 하는 게냐!”

“백모님, 셋째 숙모님, 그리고 옥아, 저를 보러 와주셔서 대단히 감사드립니다. 얼굴을 뵈었으니, 저는 이만 쉬고 싶습니다. 피곤하네요.”

정미는 말을 마치고 침상에 누웠다.

“정미!”

“나가세요!”

정미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녀는 하늘이 빙빙 도는듯한 현기증도 잊은 채, 침상의 기둥에 머리를 들이받았다.

“제가 죽어야 벗어날 수 있는 거지요. 그렇지요!”

정미와 멀지 않은 곳에 있던 셋째 부인 풍 씨가 정미를 덥석 붙잡았다.

“미야, 진정하거라!”

“모두 나가세요. 나가란 말입니다! 환안, 손님들을 보내드리거라!”

그러자 환안이 달려왔다.

“부인, 제가 아가씨를 돌보겠습니다. 물러나 주세요.”

“둘째 형님, 우선 나갑시다. 더 이상 정미를 자극하지 말아요.”

풍 씨는 정미가 미친 듯 절망하는 모습을 보자 마음속에 참을 수 없는 두려움이 들어, 유 씨와 함께 한 씨를 끌고 나갔다.

* * *

사람들이 모두 나가자 정미는 환안에게도 물러나라고 명령했고, 깜깜한 어둠 속에 혼자만 남겨졌다. 그제야 맥이 빠진 채로 침상에 기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왜, 왜 나에게만 그런 것이 보여서는, 이렇게 사람 같지도 않은 모습으로 변하게 만드는 거야!”

말을 마친 정미는 어떤 생각이 떠오른 듯, 갑자기 똑바로 앉아 성난 목소리로 말했다.

“너 나와. 이제 알겠어. 다 네가 한 짓이지? 그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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