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따스함
한지는 침상 앞에서 잠시 침묵한 뒤, 참고 또 참다가 결국 입을 열었다.
“정미, 사실 오라버니가 네게 아직 할 말이 남았어.”
한참 뒤, 정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말?”
선뜻 입을 떼기 어려운 듯, 한지가 가볍게 기침했다. 정미가 슬슬 짜증이 나려고 할 때쯤에야 그는 입을 열었다.
“나는 줄곧 너와 정요의 사이가 좋은 줄만 알았어. 최근에 너희 사이에 어떤 일이 생겼는진 모르겠지만, 나는 알아. 정요는 항상 너를 가장 아꼈다는 걸. 만약 네가 정요에게 무슨 오해가 생긴 거라면, 두 자매가 앉아서 잘 얘기하며 풀면 되는 일이야. 서로 엇갈리지 말고…….”
정미가 벌떡 일어나 앉았다. 너무 급히 일어난 탓에 머리칼이 흩날렸다.
“오라버니, 대체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겠어요. 최근에 둘째 언니랑 나 사이에 무슨 일이 생겼다는 거예요? 우린 아무 일도 없었어요. 무슨 오해를 말하는 거예요!”
이때, 정미는 화가 나면서도 혼란스러움을 느꼈다.
환상 속에서, 어른이 된 그녀는 둘째 언니와 사이가 많이 멀어진 듯했고, 심지어 그녀가 지 오라버니와 결별한 것도 둘째 언니와 관련이 있는 듯 보였다.
비록 환상이긴 했지만, 지금 둘째 언니를 떠올리면 마음속에 약간의 불편함이 솟아올랐다. 하지만 정미는 계속해서 자신에게 되뇌었다. 자신이 본 그 모든 것은 다 가짜라고!
‘어째서 나와 둘째 언니 사이에 정말 무슨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설마, 그 일들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단 말이야?’
여기까지 생각하자, 정미의 안색이 창백해졌고 벌벌 떨기 시작했다.
하필 정미의 표정 변화가 한지의 눈에는 외강내유의 표현으로 보였고, 그는 가볍게 한숨 쉬고는 실망감을 감추지 못한 채 말했다.
“그날, 내가 두 눈으로 봤어.”
“뭘 봤는데요?”
정미는 마음속에 오한이 들어 차갑고 딱딱한 말투로 물었다.
한지는 떨떠름한 말투로 말했다.
“네가 정요를 밀어 넘어트리는 걸 봤어. 그렇지 않았다면 내가 어찌 다급한 나머지 너를 실수로 밀었겠어?”
“오라버니 말은, 제가 둘째 언니를 밀어 넘어트렸다는 거예요?”
정미는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을 똑바로 바라보다가, 문득 떠올렸다.
그날, 정미는 환상 속 어른이 된 한지가 무자비하게 ‘정미, 넌 정말 나를 실망하게 하는구나.’라고 말한 것만 기억했고, 현실의 소년 한지가 정요를 부축한 채 그녀에게 똑같은 말을 한 것은 잊고 있었다!
‘알고 보니 그런 거였구나.’
정미는 한지가 왜 그런 알 수 없는 말을 했는지 문득 깨닫게 되었다. 정미는 둘째 언니가 스스로 넘어진 것이라고만 알고 있었다. 그리고 지 오라버니의 사과는, 그저 정미가 다쳐 정신을 잃은 일에 대한 것일 뿐이라고.
정미가 차갑게 웃었다.
‘아마도 오라버니의 진정한 속마음에선, 내가 벌을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생각할수록 소름이 끼쳤다. 오랫동안 사촌 오라버니에게서 느꼈던 소녀의 마음은 환상과 현실에서 각각 타격을 받았다. 마치 해가 뜨는 바람에, 연약하고 아름다운 얼음꽃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한 방울도 남지 않은 듯했다.
“꺼져!”
그녀는 베개를 아무렇게나 잡아들고 내던졌다.
정미가 던진 베개는 한지의 뺨을 스쳐 지나가 입구로 향했다.
화서는 입구에 서서 눈앞에 떨어진 베개를 붙잡고 의아한 듯 두 사람을 바라봤다.
정미는 화서가 온 줄도 모르고 머리끝까지 화가 나 소리쳤다.
“어서 나가세요. 진절머리가 날 것만 같으니까! 아니, 목소리만 들어도 진절머리가 나요!”
감정이 너무 격렬해진 탓인지, 오랜만에 머릿속 목소리가 울렸다.
「무슨 짓이야! 누가 네 목이라도 졸랐어? 이러다가 또 정신을 잃는다는 걸 몰라?」
마지막 한마디가 정미를 진정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녀는 살짝 헐떡이며 마음속으로 조용히 물었다.
‘그게 무슨 뜻이야?’
그 목소리가 차갑게 웃었다.
「별 뜻 없어. 그저 네 정신이 거의 무너지기 직전이니, 화내지 말고 얌전히 있는 게 낫다는 뜻이야.」
정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그 목소리는 바깥의 상황을 유추해 그저 차갑게 비웃으며 말했다.
「알겠다. 또 네 지 오라버니가 널 건드린 거지?」
이 말을 들은 정미는 바로 그 목소리와의 연결을 끊었고, 그 목소리가 허둥거리며 욕하는 소리만 들을 수 있었다.
이때, 화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촌 형님, 정미, 둘이서 뭐 하는 거야?”
이 당황스러운 광경을 화서에게 보이게 되자 한지는 조금 난처했고, 손을 뻗어 보이지도 않는 몸의 먼지를 털며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정미와 담소를 나누고 있었어.”
“담소?”
정미가 고개를 살짝 들고 차갑게 웃었다.
“오라버니, 오늘 이후로 우리가 담소를 나눌 일은 없을 거예요. 오라버니도 다른 이들에게 허튼소리 하지 마세요!”
“정미, 짜증 좀 그만 부리거라.”
아무리 성품이 온화하더라도, 결국엔 일등공신 국공부의 후계자이기에, 그에게도 도련님의 기질이 있었다. 한지는 결국 표정이 어두워져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정미는 그런 그를 아랑곳하지도 않고 목소리를 높였다.
“화서, 왔어?”
“네가 백부로 돌아간다는데 어찌 안 올 수 있겠어.”
화서가 다가와 베개를 아무렇게나 침상 위로 던져 놓고는 정미의 가까이에 앉았다.
“눈에 왜 천을 두르고 있어? 진짜 날 보기 싫은 거야?”
정미의 표정이 살짝 변했다. 그녀는 대답하기가 꺼려지는 듯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화서, 물어볼 게 있어. 내가 그날 둘째 언니를 넘어트리지 않았다고 한다면, 너는 믿을 거야?”
“언제?”
“언제든 간에.”
사실 정미에겐 그날이 언젠지는 전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누가 자신을 믿어주는지였다. 이것을 물어볼 때 그녀의 마음이 불안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심지어 화서도 자신을 믿지 않으면, 다시는 외가에 오지 않겠다고 생각하기까지 했다. 그렇게만 하면, 그녀에게 잘해주던 사람은 그녀의 기억 속 모습으로 남을 수 있을 테니까.
화서는 한지를 흘끗 쳐다보고는 말했다.
“네가 안 했다고 하면 안 한 거지.”
정미가 긴 한숨을 쉬었다. 눈을 가린 천이 축축해졌지만, 목소리에는 드러나지 않았다.
“큰 사촌 오라버니, 들었지요? 다시 한번 말할게요. 그날, 둘째 언니는 제가 넘어트린 게 아니에요. 하지만 오라버니가 믿고 안 믿고는 이제 더 이상 저에게 중요하지 않아요. 전 화서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으니 먼저 나가주세요.”
한지는 난감한 듯이 거기 서 있었다.
지금까지 정미는 항상 그의 편을 들어왔다. 한 번은 화서가 정미를 찰거머리라고 놀리자, 며칠이나 성을 내곤 했고, 결국 그가 중재하고 나서야 두 사람은 화해했다.
하지만 지금, 배제된 사람은 오히려 한지였다.
그러나 이 약간의 질투심은 솟아오른 분노에 아주 빨리 밀려났고, 한지는 정미를 흘끗 쳐다보고는 담담하게 말했다.
“네 뜻이 그렇다면 먼저 가 볼게. 나중에 날을 잡아 백부로 갈 테니, 그때 보자.”
화서가 벌떡 일어났다.
“형님, 제가 배웅해드리겠습니다.”
* * *
두 사촌 형제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나가다 복도에 이르자, 한지가 발걸음을 멈췄다.
“화서, 들어가서 정미를 좀 봐줘. 내가 보기에 정미의 기분이 좀 오락가락한 것 같으니.”
화서가 입을 삐죽댔다.
“형님, 누구든지 억울한 일을 당하면, 특히나 가까웠던 사람에게 억울한 일을 당하게 되면 마음이 이상해지기 마련입니다.”
“네가 이렇게 이성적이지 않게 정미의 편만 드는 게, 과연 정미한테 무슨 이로운 점이 있니?”
화서가 날카롭게 맞섰다.
“형님이 이렇게 이유 불문하고 질책하는 것은 정미에게 이로운 일입니까? 형님이 정미를 억울하게 하고 있으면서, 그 아이를 위한다는 명분을 쓸 수는 없지 않나요? 이것도 정미이기에 그저 기분이 오락가락하는 정도지, 저였다면 미쳐서 사람을 해쳤을지도 모릅니다.”
한지는 화서의 말을 듣고 화가나 관자놀이의 핏줄이 설 정도로 화를 냈다.
“그날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화서가 급히 손을 내저었다.
“어쨌든 제가 아까 한 말 그대로입니다. 저는 사람을 눈보다는 마음으로 봅니다! 정미가 어떤 성정입니까. 정요 누이를 넘어트리고 인정을 하지 않는다고요? 솔직히 말해서, 정요 누이는 그저 서녀일 뿐이에요. 다른 집에선 적녀가 따귀를 때리든 말든 상관없는 일 아닙니까?”
“화서! 나는 네가 냉철한 사람인 줄 알았다. 그런데 다른 이들과 별다른 바 없이 말끝마다 출신을 논하는구나! 네 말대로라면, 너는 무슨 자격으로 정요를 뭐라 할 수 있지?”
화서의 눈이 천천히 커다래졌고, 이내 한지를 똑바로 쳐다보며 몇 걸음 뒤로 물러나서는 차갑게 웃었다.
“형님, 속마음을 드러내셨군요. 그럼 지켜보겠습니다. 형님과 정요 누이가 과연 결실을 맺을 수 있을지요!”
“그건 화서 네가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한지의 마음속에 솟아오른 후회는 화서가 정요를 언급할 때의 말투 속 악의로 인해 짓눌렸고, 화서를 한 번 쳐다보고는 소매를 뿌리치고 떠났다.
화서는 잠시 묵묵히 서 있다가, 마음이 좀 가라앉자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 * *
“왜 이렇게 오래 걸렸어?”
화서는 대답하지 않고 조용히 정미 곁으로 가 앉았다.
“화서?”
정미가 의아해하며 손을 뻗어 더듬었다.
화서는 그녀의 손을 잡고, 방금 한지와 다투던 힘을 잃고 지친 듯이 말했다.
“멀쩡하기만 하구만, 누구더러 눈뜬장님 취급해!”
정미는 화서의 감정 변화를 기민하게 눈치챘다.
“오라버니랑 싸웠어?”
“아니, 형님과 내가 싸울 게 뭐 있어. 형님은 존귀하신 세자님이고, 나는 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르는 망나니인걸.”
“화서.”
정미는 화서를 부르며 마침내 그의 머리를 찾았고, 정수리를 두 번 정도 두드렸다.
“네 아버지가 누군지가 뭐가 중요해. 너희 어머니가 내 이모님이란 사실이면 됐지. 그렇게 재수 없는 소리 마. 그런 말을 들으면 내 기분이 별로니까.”
이 말을 들은 화서의 마음은 조금 따뜻해졌고, 얼굴을 반쯤 가린 정미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누가 정미더러 못난 계집이라 했던가. 그녀는 분명 예쁜 아이인데.
‘그 사람들이야말로 눈뜬장님인 거지.’
“……정미.”
“응?”
“할 말이 있으면 말로 해 줄래? 내 머리는 그만 만지고.”
화서의 머리를 쓰다듬던 손이 멈칫하더니, 갑자기 빠르게 그의 머리카락을 헝클었다.
화서는 아직 열세 살이 되지 않아, 동계(*童髻: 머리카락을 양쪽으로 갈라 틀어 올려묶은 머리)를 틀어 올린 머리였는데, 이렇게 헝클어트리니 틀어 올린 한 쌍의 머리가 복슬복슬해져 꽤나 우스꽝스러운 꼴이 됐다. 화서는 화가 나 꾸짖었다.
“그만 좀 해!”
정미도 성이 난 듯 손을 내렸다.
“너도 네가 한 말에 책임을 지지 않는구나. 분명 내가 깨어나면 내 고양이가 되겠다고 했으면서.”
소년이 벌떡 일어났다. 그는 귀 끝까지 얼굴이 빨개져 말을 더듬으며 말했다.
“네, 네가 그걸 어떻게…….”
“그날 네가 날 보러 왔을 때 했던 말 아니야?”
당연하단 듯 말하는 정미를 보고 소년은 허둥거렸다.
“네가 잘못 들은 거야. 나, 나는 먼저 가 볼게. 외조모님께서 약을 먹으라고 하셨어!”
그가 바람처럼 떠나가자,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의 정미만 남았다. 하지만 한지 때문에 엉망이 된 기분이 조금 홀가분해진 듯했다.
“환안, 따뜻한 물을 한잔 내오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