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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난-22화 (22/375)

22화. 사과

“큰누님.”

한지는 매원의 작은 길 맞은편에서 걸어오던 한추화 일행과 마주쳤다.

한추화는 초췌한 한지의 모습을 흘끗 보고 낮게 한숨 쉬고는 인사했다.

“큰동생 왔구나. 우리는 방금 정미의 방에서 나오던 참이야.”

정미의 이름에 한지의 안색이 조금 변했다. 그는 무심결에 주저하며 말했다.

“정미는…… 좀 어때요?”

한추화가 고개를 저으며 탄식했다.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눈을 가린 채 아무도 보려고 하지 않아. 계속 돌아가고 싶다고만 외치고 있어.”

한지의 표정이 굳자, 한추몽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

“큰오라버니, 오라버니가 정미 언니를 보러 가면 바로 좋아질지도 모르지요.”

“추몽아.”

한추화는 사고뭉치 같은 성정의 한추몽에게 경고하듯 말하곤 노려봤다.

한추몽은 입을 삐죽거리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고개를 떨군 채 몰래 한지의 표정을 곁눈질했다.

한지는 평온한 표정으로 돌아와 한추화에게 말했다.

“그럼 저는 이만 정미를 보러 갈게요.”

“그래, 어서 가봐. 너무 오래 있지는 말고. 정미의 정신상태가 그리 온전치 못하니.”

“네.”

한지가 대답하고 안으로 걸어가 입구에 이르자, 안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환안, 환안아, 검은 천은 아직 찾지 못한 거야?”

뒤이어 쿵 하는 큰 소리가 들려왔다.

한지가 급히 들어서자, 정미는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고 그 환안이라 불리는 시종이 길고 긴 검은 천을 들고 뛰어가 급히 묻는 모습이 보였다.

“아가씨, 다치지 않으셨어요? 제가 부축해드릴게요!”

“천은 찾은 거야?”

정미는 두 눈을 꼭 감고 소리를 따라 환안을 붙잡았다.

“찾았습니다, 찾았어요! 아가씨, 보세요!”

환안은 연거푸 말하고는 바삐 검은 천을 정미의 손에 쥐여주었다.

정미는 눈을 감고 있어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그러나 이 시종의 바보 같은 말에 따지기는커녕 고개를 살짝 들어 홀가분한 듯이 웃었다.

“환안, 그럼 어서 내 눈을 가려줘.”

“예.”

환안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 검은 천을 한 번 털고 정미의 눈을 살포시 덮어 빙빙 휘감은 뒤 머리 뒤에서 매듭을 묶고는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아가씨, 소인이 야무지게 잘 감았지요? 조금의 빛도 보이지 않죠?”

“응.”

정미는 엉거주춤하게 서서는 깨어난 이후 처음으로 안심한듯한 표정을 지었다.

환안은 이를 보고 웃음을 참지 못했다.

“아가씨, 소인이 아가씨의 머리 뒤에 나비매듭도 묶어드렸는걸요. 아주 예쁘답니다.”

“그래?”

정미는 반쯤 고개를 들어 환안의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쳐다보았다.

입구에 선 한지는 참지 못하고 눈살을 찌푸렸다.

‘정미의 저 시종은 아무래도 좀 아둔하구나. 전혀 사람을 돌볼 줄 몰라.’

그러고는 더 이상 기다리지 않고 방으로 들어섰다.

익숙한 발걸음 소리가 들리자, 정미의 몸이 갑자기 굳더니 잔뜩 경계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한지는 눈을 가린 정미를 보고 그녀를 놀라게 할까 봐 급히 말했다.

“정미, 나야.”

그렇게 말하며 그는 정미에게로 다가갔다.

“오지 마!”

평온했던 정미의 표정이 바로 일그러지더니, 질겁하는 표정을 지었다.

“왜 그러는 거니? 나야 나, 지 오라버니.”

한지는 정미와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곳에 멈춰 섰고, 정미의 표정은 그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모습으로 딱딱히 굳은 채였다.

적어도 이전에 정미가 그를 볼 때는 한 번도 이런 표정을 지은 적이 없었다.

그는 거기 서서 다가서지도 물러서지도 못한 채, 놀랍도록 수척해진 정미를 보았다. 갑자기 어려서부터 같이 커왔던 이 사촌 동생이 낯선 사람처럼 느껴졌다.

순간적으로 한지의 마음속에 말로 표현 못 할 감정이 요동쳤다. 마음이 편치 않다는 것만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가 어두운 얼굴로 환안에게 말했다.

“네 주인이 이렇게 되었는데, 어찌 혼자서 시중을 들고 있느냐?”

환안은 눈앞의 사람이 여기에서 가장 존귀한 세자임을 깨닫지 못하고 당당하게 대답했다.

“저희 아가씨께서 사람을 보는 것을 두려워하셔서 소인만 여기서 시중을 들도록 허락하셨습니다.”

한지는 눈살을 찌푸리더니 또 앞으로 한 걸음 성큼 다가갔다.

“내가 침상으로 부축해줄게. 바닥이 차가워…….”

“싫어요!”

한지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정미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녀는 한 손으로 주변을 더듬으며 침상 기둥을 붙잡고 한 손으로는 환안을 잡았다.

“환안, 날 부축해서 올려줘.”

“예.”

환안이 허리를 굽혀 정미를 부축했다.

한지는 차가운 얼굴로 환안을 밀고 손을 뻗어 정미를 안아 올렸다.

정미는 겁에 질려 주먹을 휘두르고 발길질을 하며 소리 질렀다.

“놔! 이거 놔!”

한지는 그녀의 발악에 개의치 않고 더 세게 안았고, 곧바로 침상 위에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옆쪽에 앉아 물었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내가 널 다치게 한 걸 원망하여 날 때리든, 욕하든, 마음대로 해도 돼! 하지만 이렇게 정신이 나가서는 무슨 꼴이란 말이냐!”

“정신이 나갔다고?”

정미는 동작을 멈추고 중얼대며 반문했다.

“설마 아니라는 거야? 깨어난 이후로 눈을 가리고 아무도 보려고 하지 않고, 지금은 다가오지조차 못하게 하니, 정신이 나간 게 아니면 뭐란 말이야? 정미, 네가 이러면 다른 사람들은 둘째 치고, 조모님 조부님의 억장이 무너지지 않겠어?”

“외조모님, 외조부님…….”

정미는 한지의 말에 자극을 받은 듯 조용해졌다.

한지가 조용히 한숨 쉬고 손을 뻗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오라버니가 네 천을 풀어줄게.”

“싫어!”

정미가 손을 내저으며 한지의 손목을 퍽 하고 쳤다.

정미는 살이 많이 빠진 상태였기에, 손목에 찼던 팔찌 또한 느슨해져 있었다. 한지는 팔찌와 부딪치자 묘하고 서늘한 기운을 느꼈다.

그가 무거운 눈빛으로 그 독특한 무늬의 팔찌를 빤히 쳐다봤다.

정미는 한지의 표정이 보이지 않았지만, 예전에는 가까이 가기만 해도 더없이 좋았던 이 사람이, 지금은 사갈(*蛇蝎: 뱀과 전갈. 남을 해치거나 심한 혐오감을 주는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처럼 무섭게 느껴져 얼른 도망치고 싶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도망가지 못하고 그저 뒤로 몸을 뺄 수밖에 없었다.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마음을 가라앉힌 정미가 입을 열었다.

“오라버니, 저는 이 천을 풀고 싶지 않아요.”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을, 그녀가 어찌 떼어내겠는가. 하지만 그저 눈을 마주치기만 해도 끔찍한 모습을 보게 되는데, 그런 참상과 진실을 보고도 아직까지 미치지 않은 것이야말로 기적 아니겠는가?

혹은, 한지의 말이 정말 맞을지도 몰랐다.

‘나는 이미 미쳤고, 미쳤기 때문에 그런 무서운 광경이 보이는 게 아닐까?’

정미의 마음속에 기대감이 솟아올랐다.

“오라버니, 방금 내가 미쳤다고 했어요?”

정말 그런 거라면, 그녀가 본 게 모두 가짜라는 얘기가 되는 거였다. 그녀가 좋아하는 사람이든, 아니면 미워하는 사람이든, 모두가 멀쩡하게 살아있다는 뜻이었다.

정미의 말투에 기대감이 분명히 묻어나자, 한지는 마음속으로 깜짝 놀랐다. 더는 그녀를 함부로 자극할 엄두가 나지 않아, 그는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잡고 진지하게 말했다.

“허튼 생각 하지 마. 넌 지금 이렇게 멀쩡하잖아.”

“……네.”

정미는 반쯤 고개를 숙인 채, 실망감을 숨길 수 없어 손을 뺐다.

한지는 이를 보고 조금 불안해져 부드럽게 말했다.

“내가 잘못했어. 그때 널 밀쳐서는 안 됐는데……. 나를 용서해줄래?”

정미는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한참 후에야 입을 오므리며 작게 말했다.

“아니,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그녀가 어찌 용서할 수 있겠는가?

그 악몽 속에서, 지 오라버니가 ‘무엇을 근거로 내가 너처럼 사갈 같은 부인을 좋아할 거라 생각하는 거지?’ 라고 말했는데.

또, ‘널 건드리지 않은 건, 내가 지금까지 한 결정 중 가장 옳은 결정이다!’ 라고도 말하지 않았던가.

정미는 지금까지도 여전히 ‘건드리지 않았다.’의 자세한 의미를 이해하진 못했지만, 한지가 이런 말을 쏟아낼 때 뼛속에서부터 표출해내는 경시와 다행스러움이 마치 독침처럼 그녀의 마음속을 깊게 찔렀다. 영원히 잊을 수 없을 터였다.

그리고 그 이혼서. 그가 말한 ‘한 쌍의 원수와도 같다.’는 말은 정미가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 것이었다.

하루 또 하루 깨어나지 못한 나날 속에서, 정미가 아무것도 모른 채로 지내왔던 건 아니었다. 그녀는 가끔씩 주변 사람들의 말소리를 들었고, 그녀의 얼굴을 씻겨주고, 몸을 닦아주고, 안마를 해주던 손길도 모두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정신이 흐릿해질 때쯤이면 기절하기 직전 봤던 환상이 다시금 떠올랐고, 결국 그녀는 그때 한지가 한 말을 한 글자도 틀리지 않고 외워낼 수 있었다.

‘한 쌍의 원수와도 같다.’

한지가 그 말을 하는 것을 떠올리는 순간, 정미는 치가 떨리도록 화가 났다.

그 모든 게 환상임은 틀림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예전처럼 지 오라버니를 계속 좋아한다면, 어느 날 정말로 그 말을 듣게 될지도 모르는 것 아니겠는가?

‘그럴 기회조차 주고 싶지 않아!’

정미는 고개를 들고 더욱 단호하게 말했다.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그녀가 두 눈을 가리고 있었기에, 한지는 그 한 쌍의 똘망하고 깨끗한 눈이 어떤 감정을 담고 있는지 볼 수 없었다. 하지만 이 말은 한지의 예상을 크게 벗어난 것이었다.

정미는 어려서부터 다른 자매들보다 고집이 셌다. 하지만 두 사람이 말다툼을 할 때에는, 그가 먼저 잘못을 인정하기만 하면 정미는 늘 곧바로 기쁜 웃음을 지어 보이곤 했다. 이렇게 차갑게 그를 용서하지 않을 거라 말하는 건 처음이었다.

한지는 정미가 지금 아이 같은 고집을 부린다고 생각해, 어이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손을 뻗어 그녀의 어깨 위에 얹었다.

“정미, 그쯤 해…….”

“만지지 마!”

정미는 인두에 닿은 듯 갑자기 몸을 뒤로 빼, 한지의 손을 뿌리쳤다.

“정미?”

정미는 평정심을 되찾았다가, 환상 속에서 한지가 한 말을 떠올리자 저도 모르게 화를 냈다.

“오라버니, 할 말이 있으면 그냥 하세요. 함부로 나를 만지지 마시고요!”

‘분명 어려서부터 늘 잡았던 손임을 알면서도 이런 말을 하다니, 정말 괘씸하구나! 살짝 건드리는 것도 못 하게 해?’

아직 남녀지간의 일도 잘 모르는 정미가 이렇게 생각한다니, 한지는 부끄럽고 화가 나 얼굴이 붉어졌다.

소성년식 후에 뜻밖의 사고가 연이어 벌어졌고, 일찍이 정요를 기다리기로 결심했기 때문에, 한지도 아직 남녀의 정을 모르는 소년이었다. 하지만 소성년식 이전에 도 씨가 이미 사람을 시켜 이런 것을 가르쳤기에, 그가 아무것도 모르는 것만은 아니었다.

지금 정미가 이렇게 정색하며 그에게 경고하자, 원래 자연스러웠던 행동도 다른 의미가 된 것으로 느껴져 대뜸 어색했다.

한지가 급히 일어나며 말했다.

“아직도 화난 걸 알아. 나중에 몸이 다 나으면 때리든, 욕하든, 오라버니는 네 말을 따를게. 하지만 백부로 돌아간 후에는 다신 네가 하고 싶은 대로 굴어선 안 돼. 약도 제때 먹고, 밥도 제때 먹어야 해. 널 신경 쓰는 사람들에게 또 걱정을 안겨줘선 안 되잖니.”

한지의 따뜻하고 부드러운 말을 듣자, 정미의 마음속에 잔잔한 감동이 일었다.

한지는 13년이라는 시간 동안,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던 사람이었다. 마음속에 깊게 자리 잡은 그 흔적을 지우려고 한다니, 이 나이의 어린 소녀에게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정미는 다른 여자아이들보다 강인한 소녀였기에, 조용히 입술을 깨물며 얼른 그 감동을 쫓아냈다. 그러고는 차갑게 말했다.

“일깨워줘서 정말 고마워요, 사촌 오라버니. 모두 알아들었어요.”

“정말 다 알아들었어?”

한지가 유심히 정미를 살펴봤다. 아무래도 이 사촌 동생은 깨어난 이후로 조금 이상했다. 그러나 그녀가 천으로 눈을 가리고 있었기에, 살이 빠져 손바닥만 해진 얼굴만 보고는 아무런 실마리도 얻어낼 수 없었다.

“제가 사람 말을 못 알아듣는 것도 아니고!”

정미는 짜증을 참을 수 없어 침상에 누웠다.

“조금 쉬고 싶어요. 오라버니, 별일 없으면 가서 일 보세요.”

정미는 정말 알 수 없었다. 언제부턴지 모르게 어디든 자신을 데리고 가서 놀아주었던 오라버니와 마주할 때마다 의심과 부정만이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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