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깨어나다
화서는 입술을 꽉 깨물고 한참을 참았지만, 결국 참지 못하고 한지의 어깨에 주먹을 휘둘렀다.
“이 개자식! 누굴 겁주려고 이런 무책임한 말을 하는 겁니까! 목숨은 목숨으로 갚는다고? 아주 쉽게 말하는군요. 외조모님, 큰외숙모와 이모님까지 괴롭게 할 셈입니까!”
한지는 눈을 감고 몹시 답답한 듯 쉰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대체 내가 어떻게 하면 된단 말이냐?”
한지는 그동안 그날의 상황을 천 번이고 만 번이고 되뇌어왔고, 나중에는 그날 정미가 정요를 넘어트리는 것을 봤을 때, 대체 왜 성질을 참지 못하고 정미를 밀쳤는지 스스로에게 묻곤 했다.
정미가 아무리 제멋대로라고 해도, 결국엔 그저 여자아이일 뿐이었건만.
‘내가 정미와 어찌 다투었단 말인가!’
화서가 고개를 저었다.
“형님, 아직도 모르시는 겁니까. 제가 화난 것은 형님이 정미에게 목숨을 바치려고 한 것이 아니라, 형님이 어떻게 그 아이를 이런 식으로 대할 수 있었던 건지에 대한 문제 때문입니다! 두 사람이 동시에 정요 누님을 잡으려고 하다가 형님이 실수로 정미를 밀쳤다고 하셨지요. 하하, 형님. 솔직히 말해보세요. 정요 누이가 넘어지는 걸 보고는, 정미가 넘어트린 줄 알고 화가 나 정미를 밀친 것 아닙니까?”
한지가 갑자기 눈을 뜨고 화서를 쳐다보았다. 그는 말도 안 된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걸 어찌 알았지?”
화서는 한지를 노려보며 역시 그랬다는 듯 차갑게 웃었다.
“더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까? 다른 이들은 알아내지 못해도, 제겐 일찍이 보였습니다. 형님은 정요 누이의 일이면 이성을 잃는다는 것을요!”
“이게 정요와 무슨 상관이란 말이냐?”
한지가 똑바로 일어서서 말했다.
“화서, 내가 정미와 친하다는 걸 알고 있겠지. 하지만 이 세상은 그저 친하다는 이유로 잘잘못을 넘어갈 순 없다. 맞아, 네 말대로 정미가 정요를 넘어트리는 것을 보고 급한 나머지 정미를 밀치고 정요를 잡은 것이 맞다. 어찌 되었든 간에, 정미를 다치게 한 것은 내 잘못이다. 하지만 정미가 아무 잘못이 없다고는 할 수 없어.”
화서는 눈을 부라렸다.
“정미가 뭘 잘못했다는 겁니까? 정미가 정요 누이를 넘어트린 건 확실해요?”
한지가 이마를 짚었다.
“화서, 괜히 트집 잡지 마라.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봤으니!”
화서는 차갑게 웃었다.
“봤다고요? 눈도 사람을 속일 수 있다는 걸 모르십니까? 만 보 물러서서, 정미가 정말로 정요 누이를 넘어트렸다고 한들 어때요? 형님, 잊지 마세요. 정미야말로 형님의 친사촌 동생이고, 제 친사촌 누이라는 것을요! 정요 누이는 따지자면 저희와 아무 상관없지 않습니까?”
한지는 화서의 말에 얼이 빠진 듯하다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
“이게 무슨 억지란 말이냐? 정요가 서녀 출신이라는 것은 틀림없다. 하지만 고모님이 그 아이의 적모이니, 정요도 우리 친사촌이다! 지금 네 말이 퍼지면 그것이야말로 상도를 어기는 일이야!”
화서가 팔짱을 끼고 차게 웃었다. 그 웃는 얼굴은 보는 이로 하여금 오금이 저리게 했다.
“형님, 제게 그런 도리를 말하지 마세요. 저는 압니다. 정미만이 이모님의 배 속에서 나온 아이고, 저희 어머니와 이모님은 친자매라는 것을요. 그러니 정미가 잘못을 했든 아니든, 그 아이를 억울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여기까지 말한 그는 한지의 눈을 쳐다보았고, 반항심이 더욱 일어선 말을 이었다.
“정요 누이가 좋은 사람인 것은 맞지만, 아무리 좋아도 저와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에요. 정미가 누이에게 해코지했다 해도 저는 정미의 손을 들어줄 겁니다!”
“화서, 네가 이리 감싸주니 정미가 갈수록 제멋대로인 것이다. 이건 정미를 아끼는 게 아니라, 그 아이를 해치게 되는 것이야!”
“해치게 된다고? 그럼 지금 정미를 침상에 눕게 한 사람은 누굽니까?”
한지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의 눈빛이 살짝 어두워졌다. 화서는 앞으로 한 발짝 다가가 목소리를 내리깔고 말했다.
“이제 알겠습니다, 형님. 정요 누이를 연모하는 것이지요?”
한지의 안색이 크게 변하더니 이내 화서를 꾸짖었다.
“어린 녀석이 뭘 안다고!”
“이게 그렇게 복잡한 일입니까? 사실 당신은 정미만도 못한 겁니다!”
한지는 마침내 화가 났다.
“말이 심하구나!”
화서가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형님, 형님의 의견은 개의치 않겠습니다. 하지만 우선 쓴소리부터 하지요. 만약 정미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정요 누이가 어쩌다 넘어졌든 어쨌든 정요 누이가 넘어졌기에 일어난 일이기에, 저는 그 누이를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화서!”
“그만 하세요, 형님. 저는 아직 어리기에 도리고 뭐고 잘 알지 못해요. 그저 좋은지 싫은지만 알지요.”
화서는 한지의 말을 막고 문밖으로 나갔다.
“저는 정미를 보러 가겠습니다. 형님은 계속 가훈을 베껴 쓰고 계시지요.”
진홍색의 그림자가 복도 끝으로 사라지자, 한지는 고개를 돌려 서재를 바라봤다.
입구에서 바람이 불어 들어와 바닥에 어질러진 종이들이 쉴 새 없이 펄럭였다. 그는 조용히 걸어 들어가 몸을 숙여 한 장 한 장 집어 들었다. 그러다 갑자기 바닥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서재를 정리하는 시동(侍童)이 입구에서 조심스럽게 불렀다.
“세자…….”
“나가거라!”
시동은 근심 가득한 눈빛으로 한지의 뒷모습을 보다가 조용히 방문을 닫았다.
* * *
매원으로 돌아간 화서는 그곳에 사람이 늘어난 것을 보고 문 앞에 서 있던 양신에게 물었다.
“외조모님께서 오신 건가?”
양신은 화서의 신세가 난처하지만, 정미와 마찬가지로 노부인이 아끼는 손자임을 알기에 급히 대답했다.
“예, 방금 노국공께서 북명진인을 여기로 모셔오셨습니다. 지금 셋째 사촌 아가씨의 진료를 봐주시려고 합니다.”
화서의 안색이 밝아졌다.
“정말로 진인을 모셔왔단 말이야?”
화서는 물음과 동시에 안으로 들어갔다.
“공자…….”
미경이 그를 붙잡으려 하자, 양신이 미경을 잡아당기며 고개를 살짝 저었다.
화서가 들어가자 응접실에 많은 사람들이 앉아 있거나 선 것이 보였고, 모두 늘 만나오던 집안 어른들이었다. 그중 한 사람만이 아주 큰 도포를 입고 흰 수염을 흩날리며, 선인(仙人)의 풍모와 도사의 골격을 풍긴 채, 찻잔을 들고 차를 마시고 있었고, 뒤에는 머리를 틀어 올린 두 소동(小童)이 있었다. 그가 바로 북명진인임이 틀림없었다.
방 안의 사람들은 모두 북명진인을 둘러싼 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아무도 화서가 온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는 조용한 발걸음으로 모퉁이에 가서 섰다.
“진인, 내 외손녀는 좀 어떻습니까?”
북명진인과 마주 앉은 사람은 노국공이었고, 나이가 육십이 되었지만 기력이 넘쳐 전혀 늙은 티가 나지 않았다.
북명진인은 침착하게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말했다.
“급해 마십시오. 아가씨의 상태는 빈도(*貧道: 승려나 도사가 스스로를 낮추어 말하는 호칭)가 이미 보았습니다. 지나치게 놀란 탓에 혼백이 안정되지 않은 탓이니, 이따 빈도가 부수(*符水: 부적을 태운 물)를 아가씨께 먹인 후 효과를 보도록 하지요.”
“그럼 수고스럽지만 부탁드립니다.”
노국공은 안도의 숨을 돌렸다. 북명진인이 급하지도 여유롭지도 않게 차를 마시는 모습을 보고 재빨리 빼앗아 대신 마셔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북명진인이 찻잔을 내려놓고 일어나며 말했다.
“시작합시다.”
그는 탁자 앞으로 가 소동이 건넨 포대를 받았다. 안에서 노란 종이와 주사(朱砂) 등의 물건들을 꺼내 단숨에 부적 한 장을 써 내려갔고, 맑은 물잔을 들고 있는 다른 소동을 불러 주문을 외웠다. 사람들이 자세히 보기도 전에 부적이 불타오르기 시작했고, 잿가루가 물 위로 떨어졌다.
“이 부적물을 가져가 아가씨께 먹이십시오.”
한 씨가 급히 건네받아 조심히 내실로 가져갔고, 응접실에 남은 사람들은 숨을 죽이고 걱정하며 기다렸다. 오직 북명진인만이 침착하게 눈을 감고 마음을 다스렸다.
대략 차 한잔을 마실 정도의 시간이 지나자, 내실에서 소리가 들렸다.
“아가씨께서 깨어나셨습니다!”
이 말은 천둥처럼 방 안의 긴장과 침묵을 깨부수었다. 노부인은 급히 일어나 내실로 들어갔다.
위국공 부인 도 씨도 이를 보고 바삐 따라갔다.
노국공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고, 북명진인에게 연거푸 감사를 표했다.
북명진인이 일어나 말했다.
“아가씨께서 깨어나셨으니, 빈도는 이만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노국공이 급히 만류하자, 북명진인이 말했다.
“마침 성상(聖上)께서 빈도에게 입궁하라 전하셨으니, 더 이상 남아있을 수 없습니다.”
두 사람이 이야기하고 있던 도중에, 갑자기 내실에서 여자아이의 고함이 들려왔다.
“오지 마!”
곧이어 잔이 땅으로 떨어져 산산조각이 나는 소리가 들려왔다.
“진인, 이게 무슨…….”
“빈도가 가보겠습니다.”
북명진인이 내실로 들어서자, 줄곧 혼수상태에 빠져 있던 정미가 반쯤 일어서 양손으로 눈을 가리고 연신 뒤로 물러나다가, 맨 구석의 침상 모퉁이까지 물러나 몸을 웅크린 채 벌벌 떨고 있는 것이 보였다.
“진인, 어서 보십시오. 우리 외손녀가 깨어난 후 눈을 뜨자마자 바로 이렇게 되었습니다. 눈을 가린 채 절대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합니다.”
노부인이 애타게 말했다.
북명진인이 앞으로 몇 걸음 다가가 잠깐 살펴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이건, 아마 아가씨께서 충격을 받은 후의 증상이라, 부수(符水)로 치료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 어찌해야 합니까?”
노부인이 캐물었다.
“때맞춰 마음을 안정시키고 다스리는 탕약을 복용하고, 며칠 몸조리를 잘하면 됩니다.”
북명진인의 말에 노부인과 사람들은 조금 안심할 수 있었고, 이 고인(高人)을 공손히 내보냈다.
화서는 슬그머니 들어와 침상 머리맡에 서서 묵묵히 정미를 보다가 조용히 말했다.
“……정미.”
눈을 가리고 있던 정미의 손이 잠시 멈칫하더니, 한참 뒤에야 주저하며 물었다.
“화서니?”
화서가 아름답게 웃는 얼굴로 앞으로 한 걸음 다가갔다.
“나야.”
가까이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리자 정미는 비명을 질렀다.
“다가오지 마!”
화서는 멈춰서서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왜 그러는 거야?”
정미는 흠칫 놀라더니 낮게 울먹였다.
“어쨌든, 다가오지 마.”
“그래. 다가가지 않을게. 대신 손을 내리고 나를 봐야 하지 않겠어? 우리 정말 오랜만에 만나는 거잖아.”
“아니, 아니, 안 볼 거야. 아무도 보지 않을 거야! 어머니, 어머니…….”
정미는 감정이 북받쳐 목놓아 한 씨를 불렀다.
노부인을 따라 북명진인을 배웅하러 갔던 한 씨가 급히 달려 들어왔고, 정미의 미친듯한 모습에 한숨을 쉬고 다가가 말했다.
“미야, 어미는 여기 있다.”
정미는 두 눈을 꼭 가린 채 마찬가지로 한 씨를 쳐다보지 못했다.
“어머니, 저를 데리고 회인백부로 돌아가 주세요. 돌아가고 싶어요.”
뒤따라 들어온 노부인은 이 말을 듣고 마음 한구석이 시려오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빠른 발걸음으로 다가가 정미를 끌어안았다.
“미야, 할미가 싫어진 것이냐?”
익숙한 품과 목소리에, 정미의 눈에서 눈물이 빗방울처럼 떨어졌다. 그녀는 노부인의 품에 파묻혀서 울며 말했다.
“아니에요. 외조모님, 그저 너무 무서워서…….”
노부인이 한 씨를 쳐다보자, 한 씨가 입을 열었다.
“어머니, 곧 있으면 새해잖아요. 어차피 정미를 데려가야 해요. 나중에 정미가 좀 나으면 다시 데리고 와 인사드릴게요.”
노부인은 정미를 꼭 껴안은 채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도 씨는 이를 보고 이어서 설득했다.
“노부인, 정미가 여기 국공부에서 충격을 받고 이제 막 깨어났으니, 이곳을 두려워하는 것도 불가피할 거예요. 만약 백부로 돌아가 몸조리를 하면 회복에 더 도움이 될지도 모릅니다.”
노부인은 그제야 긴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위국공부의 사람들은 정미가 깨어나 오후에 회인백부로 돌아가야 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모두 급히 병문안을 왔다. 한지도 근래 처음으로 서재를 나와 매원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