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고양이가 될게
정미가 한지에게 고백하고 순식간에 수도의 웃음거리가 되었을 때, 화서는 화가 나 반년이나 그녀를 거들떠보지도 않았고, 겨울이 되자마자 바로 온천마을로 떠났기에, 두 사람이 서로를 안 본 지는 꽤 오래된 바였다.
때문에 지금 침상 위의 생기가 없는 소녀를 보자, 화서는 말로 표현 못 할 정도로 후회스러웠다.
한참을 앉아 있던 화서는 또 손을 뻗어 정미의 손을 잡고 조용히 말했다.
“정미, 네가 살이 빠지니 정말로 나와 조금 닮은 듯해. 예전에 다른 사람이 네가 우리 어머니를 닮았다고 했을 땐 화가 났는데 말이지.”
항상 교만하고 생기발랄했던 정미가 아무런 반응이 없자, 화서는 입술을 깨물다가 천천히 머리를 숙여 그녀의 손에 볼을 문지르며 낮게 말했다.
“얼른 일어나. 지금 일어나면 기꺼이 네 고양이가 되어줄게.”
이 말의 의미는 두 남매만이 아는 것이었다.
화서는 난처한 신세라, 위국공부에선 사촌 도련님이라는 빛나는 자리를 가졌지만, 그의 일상생활은 바깥사람들에게 알려질 만한 것이 되지 못했다.
이런 아이들은 늘 보통의 아이들보다 좀 더 예민했고, 화서는 어려서부터 신분도 모르는 생부를 뼈에 사무치도록 미워했으며, 얼굴도 모르는 어머니를 몹시 그리워했다.
어릴 적, 화서는 사람들이 그의 작은 사촌 누님 정미가 그의 어머니를 닮았다고 말하는 것을 자주 듣곤 했다. 당시엔 정미의 얼굴을 보고 코웃음 쳤지만, 마음속으로는 정미에게 저도 모르게 친근감을 느꼈다. 때문에 국공부를 자주 떠나있던 화서가 정미와 함께 지낸 시간은 많지 않았지만, 마음속에 정미가 차지하는 무게감은 아주 컸다.
어느 해, 한지가 정미에게 흰 고양이를 한 마리 선물한 적이 있었다. 정미는 그 고양이를 매우 아껴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않았는데, 하필 화서는 몸이 약한 탓에 고양이 털에 닿으면 두드러기가 일어나, 그는 할 수 없이 멀리 떨어져 있어야 했다. 그는 이가 갈릴 정도로 화를 냈고 기회를 봐서 그 하얀 고양이를 내다버렸다. 정미는 화가 나 크게 울며 화서가 그녀의 고양이가 되어야만 용서해주리라 엄포를 놨다.
당연하게도 고집이 센 어린 소년은 정미의 고양이가 돼줄 리 없었고, 어린아이들의 다툼은 이틀도 안 걸려 잊혀지기 마련이었다. 이후 이 사촌 남매는 가끔 이 일을 이야기하며 또 다투곤 했다.
“공자님, 아가씨의 몸을 돌릴 시간입니다.”
언제 들어왔는지, 환안이 차분히 말했다.
화서는 화들짝 놀라 급히 자리에 앉았고, 얼굴이 붉은 천보다도 더 붉어졌다. 그는 차가운 눈으로 환안을 쳐다보았지만, 마음속으로는 놀라 두근거리는 가슴을 가라앉히느라 애를 썼다. 그는 방금 했던 말들을 이 시종이 듣지 못했으리라고 자기 자신을 설득하며 겨우 말했다.
“조심하거라.”
“예, 알겠습니다.”
환안은 화서가 자리에 앉아 움직이지 않는 걸 보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공자님, 잠깐 바깥방으로 가서 앉아계시겠습니까? 몸을 돌려드린 뒤 아가씨의 몸을 닦아드려야 합니다.”
“……아.”
화서는 급히 일어나 어색한 표정으로 밖으로 나갔다.
바깥방에 앉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한 씨가 시종을 데리고 들어왔다.
“이모님.”
화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찌 바깥방에 앉아 있니?”
“시종이 정미의 몸을 돌려준다고 하여 나왔습니다.”
이 말을 하면서도 화서는 여전히 어색해했다.
그는 나중에 정미가 깨어나면, 그 시종을 불 지피는 곳으로 내쫓자고 말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다시는 그 시종을 보고 싶지 않으니.
한 씨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뒤에 있던 시종이 든 사발 중 하나를 가리켰다.
“방금 네 생강차도 끓여왔으니, 따뜻할 때 마시렴. 감기에 걸리지 말고. 아프면 고생이니 말이다.”
화서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생강차를 슬쩍 보고는 건네받아 두 손으로 받쳐 들었다.
“감사합니다, 이모님. 정미가 이리 오래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외조모님께 여쭤볼 겨를도 없었네요. 설마 별다른 방법이 없는 거예요?”
한 씨는 이를 듣고 마음속에 걱정을 잠시 품었지만, 전혀 티를 내지 않고 말했다.
“오늘 아침 네 외조부님께서 수석 진인을 모셔 네 사촌 누님을 봐달라 하기 위해 현청관으로 가셨는데, 모셔올 수 있을지는 모르겠구나.”
세간의 의술에는 두 계통이 있었는데, 하나는 가장 흔히 알려진 맥을 짚어 약을 달여 병을 고치는 의원이었고, 다른 하나는 머나먼 옛날부터 계승해온 부의(符醫)였다.
부의란, 주사(*朱砂: 경련·발작을 진정시키는 데 쓰는 수은으로 이루어진 황화 광물로 붉은색임)로 부적을 그리고, 부적을 물에 태운 뒤, 환자에게 그 부적물을 마시게 해 다양한 병을 치료하는 것이었다. 따지자면 정미의 고조부도 이 계통에 속했다.
하지만 오늘날엔 많은 무당이 부의라는 간판을 내걸고 사람들을 속였기에, 백성들은 아프면 보통 의원을 찾아가곤 했다. 하지만 어린아이가 깜짝 놀라 넋이 나가는 등의 기괴한 일이 생기면 여전히 부의를 찾아가는 일이 잦았다.
세상 사람들은 진정으로 능력이 있는 부의는 모두 도교(道敎) 출신이며, 현청관이 가장 훌륭한 명성을 지녔다 인정하곤 했다.
현청관은 대량(大梁)의 국사(國師)를 역임하는 사람이 지내는 곳으로, 용맥(*龍脈: 풍수설에서 산의 기세와 기복)을 지키는 책무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의 국사는 아주 오랫동안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수석 제자 북명진인(北冥眞人)이 실질적인 관주(觀主)가 되었다.
북명진인이라는 이름은, 화서 같은 소년들은 모두 들어본 것이었다. 그의 안색이 갑자기 변했고, 손에 들고 있던 생강차를 엎지른 것도 잊은 채 울먹이며 말했다.
“정미의 상태가, 현청관의 수석 진인을 모셔와야 할 정도란 말이에요?”
한 씨는 눈을 내리깔고 한숨을 쉬고는 뒤에 있는 시종에게 말했다.
“먼저 탕약을 방으로 들여보내거라.”
“이모님, 정미가 도대체 어쩌다 이렇게 된 겁니까? 단지 넘어졌기 때문일 리가 없잖습니까!”
한 씨가 쓴웃음을 지었다.
“넘어지고 난 뒤부터 이렇게 된 거란다.”
그녀는 원래 딸을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었으나, 지난 보름 동안 정미가 고독하게 침상에 누워 나날이 여위어가며 생사도 알 수 없는 것을 보고는 마음속이 혼란스러워졌다.
그러나 이를 마주할 때마다 한 씨는 사흘밖에 살지 못하고 떠난 아들이 떠올랐다. 그녀는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갓난 고양이보다 여위고 작은 아들이 그녀의 품에서 영원히 눈을 감고, 눈을 감을 때에도 그녀의 젖을 약하게 물고 있던 그 모습을.
정미가 그녀의 배 속에서 영양분을 그리 많이 빼앗아 가지 않았다면, 아들은 그 정도로 허약하게 태어나 이 세상을 구경할 겨를도 없이 떠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정미의 덩치가 그리 크지 않았다면, 그녀가 이틀 밤 동안 난산해 이후 다신 아이를 갖지 못하고, 은애하는 사람이 가난한 재녀와 알콩달콩 애정을 나누며 아들을 낳고 또 낳는 모습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이를 싸늘한 눈으로 외면하며 침묵 속에서 점점 시들어갔다.
그동안 한 씨는 때때로 치밀어 오르는 정미에 대한 미안함과, 쌓이고 쌓인 원망 때문에 미칠 듯했고, 마찬가지로 많이 수척해졌다.
그런 한 씨에게 더욱 상처가 되는 것은 그녀가 모든 걸 포기하고 시집간 남편이란 사내가 그동안 한 번도 정미를 찾아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가 찾아오지 않은 이유는, 동 이낭 부친의 기일이 다가오기 때문이었다. 당시 삼 년에 한 번씩 가서 제사를 지내기로 정하였기에, 은혜를 보답하려는 정씨 가문의 둘째 나리가 은애하는 첩과 아끼는 아이들을 데리고 춘절 전에 서둘러 생명의 은인에게 제사를 지내러 갔다.
한 씨의 안색이 흐려지는 것을 본 화서는 마음이 더욱 안 좋아져 이를 악물고 말했다.
“이모님, 그럼 제게 알려주세요. 정미가 어쩌다 넘어진 거예요?”
한 씨는 조카의 성정이 꽤 남다른 것을 알고 있었기에, 일을 크게 벌이고 싶지 않아 곧바로 말했다.
“한지의 생일연회 때 눈이 내려 길이 미끄러워 부주의하다 넘어졌다.”
화서는 이를 듣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 씨가 방으로 들어가 정미에게 약을 먹이고, 환안이 정미의 몸을 닦은 대야를 들고 나올 때쯤, 그는 환안을 복도로 불러내 상황을 자세히 물어보았다.
환안은 정직한 사람이었기에, 정미가 다쳤던 상황을 정확하게 모두 털어놓았다. 화서는 이를 듣고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양신과 미경 두 시종이 힘들게 그를 쫓아가는 것도 신경 쓰지 않은 채 한지의 거처로 급히 향했다.
* * *
한지는 서재에 틀어박혀 힘겹게 가훈을 베껴 쓰느라 거의 보름 동안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위국공 노부인이 한지에게 가훈을 백 번 베껴 쓰라고 벌했을 때, 아랫사람들은 역시 한 핏줄을 이은 장손이라 노부인이 처벌을 아낀다고 생각했다. 무장가문인 위국공부의 가훈은 겉치레용으로, 고작 몇 장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누가 모르겠는가?
하지만 뜻밖에도 노부인이, 그녀의 친여동생 시가의 가훈을 빌려 온 것이다!
노부인의 친가는 단(段)씨 집안이었고, 한 어머니 아래서 태어난 그녀의 친여동생은 회성(薈城)의 사(謝)씨 집안으로 시집을 갔다.
사씨 가문은 수백 년 동안 이어져 온 명문가였기에, 가훈 한 권이 어떤 두께였는지는 가히 짐작할 수 있을 터였다.
사씨 가문은 한결같이 검소하고 조용한 집안이었는데, 최근 몇 년간 그 장남이 수도의 관리가 되었기에 아들을 따라 수도로 들어오게 되었다. 자매는 자주 왕래했고, 위국공부의 이 거칠고 상스러운 가풍은 일찍이 여동생에게 비웃음을 사곤 했다. 때문에 가훈을 빌리고자 한다는 것을 들은 여동생은 이를 직접 가져다주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다.
한지는 책상 앞에 단정히 앉아 있었고, 양옆에 쌓인 종이들은 머리 꼭대기보다 높았다. 그가 붓을 내려놓고 가볍게 눈을 문지른 순간, 서재 문 쪽에서 우당탕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진홍색 옷을 입은 누군가가 급히 들어왔다.
위국공부에서 한지는 적장자의 신분이었기에, 성정이 사리에 어그러지지 않고 부드러운 편이었다. 한평과 한흘 두 형제도 말이 많은 편이 아니었고, 오직 한우만 조금 활발한 편이었으나, 그마저도 유별나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이 눈에 띄는 진홍색의 인물이 누군지는 금방 알 수 있었다.
“화서.”
한지가 일어나 그를 맞이하러 가려 할 때, 화서는 이미 눈앞에 와있었고 한지의 멱살을 덥석 잡아 뒤로 눌렀다.
한지는 뒷걸음질 쳤고, 등이 책상에 부딪히자 요란한 소리와 함께 산처럼 쌓여있던 종이와 붓이 땅에 떨어졌다. 먹물이 사방으로 튀어, 가훈을 가지런히 베껴 쓴 종이들을 난잡하게 물들였다.
한지는 머리가 아파 와 입을 꾹 다물고는 화서의 손을 잡고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화서, 왜 이러는 거야? 할 말이 있으면 좋게 말해.”
“좋게 말하라고 하셨습니까?”
화서의 날카로운 눈매가 치켜 올라갔고, 눈에는 광기가 스쳐 마치 고삐 풀린 말처럼 보였다.
“큰 사촌 형님, 묻겠습니다. 펄펄 뛰며 날아다니던 정미가 어쩌다 저렇게 된 겁니까?”
그의 물음에 한지는 표정이 굳어 찍소리도 하지 못했다.
이를 본 화서는 더욱 화가 나, 한지의 멱살을 잡은 손에 더 힘을 주었다.
“대답하시지요, 형님. 어찌 입을 다무십니까?”
한지는 눈을 내리깔며 화서를 힘껏 뿌리쳤고 말없이 옆의 의자에 앉았다.
그 모습을 본 화서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잠시도 참지 못하고 다시 추궁했다.
“형님, 정미가 저렇게 산송장처럼 침상에 누워 생사를 알 수 없는데도, 설마 조금도 괴롭지 않은 겁니까?”
그 말은 그동안 한지의 마음속에 쌓여왔던 울분에 불을 지폈다. 그는 벌떡 일어나 평소의 온화하고 침착한 모습을 벗어던진 채 주먹을 꽉 쥐었다.
“내가 괴롭지 않다고? 괴로움을 꼭 얼굴에 드러내고, 모두가 알게끔 드러내야 하는 건가? 정미가 이렇게 된 이후로, 내가 어찌 지내왔는지 네가 아느냐? 화서, 네가 내게 따질 필요 없는 일이다. 정미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내가 함께하면 되니까!”
“함께한다니, 형님이 어떻게 함께 해줄 수 있다는 겁니까?”
놀랄 만한 한지의 발언에 화서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한지는 오히려 차분해져서는 차갑게 말했다.
“목숨은 목숨으로 갚으면 된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