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교난-19화 (19/375)

19화. 세상에 둘도 없는 소년

아까 기절하기 전, 정미는 청년 한지의 그 무정한 말들을 들은 후, 이번 생에 지 오라버니에게 감정을 조금이라도 드러내면 벼락을 맞아 죽어도 싸다고 결심했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이성을 잃었고, 이 온화한 목소리를 들으니 그녀의 눈앞에 서 있는 사람은 어릴 때 그녀를 기쁘게 하고, 그녀를 데리고 다니며 놀아주던 어린 오라버니로 여겨질 뿐이었다.

이는 잇달아 공포스러운 광경을 보게 된 이래 가장 좋은 변화였다. 정미는 얼른 눈을 가린 두 손을 놓고 한지를 바라봤다.

하지만 눈앞에는 상냥하게 말하던 그 오라버니가 아닌, 머리와 몸뚱이만 있을 뿐 사지가 없는 반송장이 서 있었다!

“아악!”

정미는 완전히 넋이 나가 한지를 밀고 입구로 달려나갔다. 입구에 다다르기도 전에 치맛자락을 밟고 아래로 곤두박질쳤지만, 멀지 않은 곳에 한평이 있었던 덕분에 단숨에 달려와 그녀를 받아냈다.

“정미…….”

항상 침착하던 한평의 얼굴에 다급함이 드러났다. 두 눈을 꼭 감고 얼굴이 노랗게 질린 정미를 바라보던 한평이 어쩔 줄 몰라 하며 노부인을 바라보았다.

이 모든 것은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노부인은 마침내 정신이 들어 외쳤다.

“태의는 어디 있는가!”

이때, 가냘픈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관(小官), 여기 있습니다.”

모두가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주 태의가 한 손으로는 허리를, 다른 한 손으로는 뒷방의 문틀을 잡고 있는 것이 보였고, 뒤따른 상심과 악사 두 시녀의 안색이 이상한 것도 보였다.

“주 태의, 이게 무슨 일인가?”

노부인은 깜짝 놀랐다.

주 태의는 일그러진 표정으로 이를 부득부득 갈며 말했다.

“소관이 환자의 맥을 짚으려 할 때, 저 아이가 갑자기 일어나 앉더니 소관을 바닥으로 밀치고 밖으로 달려나갔고, 소관은 이 늙은 허리를 삐게 되었습니다.”

“정말 송구스럽구나.”

노부인은 난처한 기색이 만연했다.

“주 태의에게 한 번 더 이 늙은이의 외손녀를 봐 달라 부탁해야겠다.”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시녀들을 훑어봤다.

“얼른 주 태의를 부축하여 앉혀드리지 않고 뭐 하느냐! 평아, 정미를 주 태의 앞으로 데려오거라.”

주 태의는 어두운 얼굴로 또다시 정신을 잃은 정미를 훑어봤고, 우선 피에 젖은 면포를 다시 잘라내 피범벅이 된 손목을 살폈다.

“쓰읍…….”

방 안에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울렸다.

노부인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눈물을 닦으며 외쳤다.

“내 가련한 정미야!”

한지도 정미의 다친 손목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표정을 더욱 굳혔고, 손수건을 움켜쥐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한추화는 이 일의 시초인 한지를 힐끗 노려봤다.

한지는 입술 끝을 오므리며 후회하는 마음을 드러냈다.

“아파…….”

고요한 방 안에 갑자기 정미의 약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두가 급히 고개를 돌려봤지만, 그녀는 그저 눈썹을 찌푸리고 있을 뿐, 눈을 뜨고 있지는 않았고 금세 쥐죽은 듯 기척이 없어졌다.

주 태의는 꼼짝도 않고 재빠르게 상처를 싸맸고, 손가락을 뻗어 다른 손목에 올렸다.

잠시 후, 주 태의가 손을 놓았다.

“주 태의, 어떤가?”

노부인이 긴장하며 묻자, 주 태의가 조금 망설이며 말했다.

“손목의 상처는 그렇게 중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소관이 맥을 짚어보니, 맥박이 실처럼 가늘고 급해, 크게 놀라신 듯합니다. 이렇게 하지요. 소관이 우선 마음을 안정시키는 약을 지어 올릴 테니, 효과가 있는지 봅시다.”

“그럼 수고스럽겠지만, 부탁하네.”

주 태의가 나가자, 노부인이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지야, 네 사촌 동생이 이렇게 되었으니, 사촌 오라비로서 책임을 피할 수는 없다. 가법으로 널 벌하지 않는 대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마음을 가라앉히고 생각해볼 겸, 가훈을 백 번 써오거라! 그리고 정요는…….”

노부인은 정요를 보고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정요도 집에서 가만히 지내거라. 정미는 우선 국공부에 남고, 깨어나면 돌아가도록 해라.”

“예, 외조모님. 저도 집에서 심경(心經)을 백 번 베껴 쓰며 정미의 복을 기원하겠습니다.”

정요가 흐느끼며 말했다.

* * *

일은 이쯤에서 마무리되는 듯했다. 한 씨는 우선 정요 등 세 사람을 데리고 회인백부로 돌아갔다. 그리고 이 일을 회인백부의 노부인께 설명해 드리고는 다시 국공부로 돌아와 정미의 의식이 회복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정미가 보름 동안이나 깨어나지 않을 줄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하루하루를 오직 탕약으로 버텨나가자 빠르게 야위어가는 것이 육안으로도 보였다. 통통했던 계란형 얼굴에 뾰족한 턱이 생겼고, 피부도 오랫동안 해를 보지 못하니 조금 하얘졌다.

하지만 이젠 아무도 이를 신경 쓰지 않았고, 노부인의 독촉에 태의서의 태의들이 교대로 진료를 왔지만, 여전히 정미를 깨울 방법을 찾지 못하는 상태였다.

* * *

어느 날, 밖에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진홍색 피풍을 입은 소년이 바람처럼 빠르게 달려 들어와 큰 소리로 물었다.

“외조모님, 정미는요?”

이 소년은 살짝 치켜 올라간 눈을 가지고 있었으며, 긴 눈썹은 먹과도 같았고, 얼굴은 옥처럼 희었다. 은은한 빛이 몸 주위를 감싸는 듯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눈부시게 했다.

만약 한지가 야광주처럼 휘황찬란하게 빛나고, 작은 패왕 용흔이 뙤약볕에 불타는 듯하다면, 눈앞 소년의 절묘한 모습은 마치 아름다운 봄을 그린 듯했다. 그 자연스러운 모습은 겨울눈이 막 녹아 졸졸 흐르는 시냇물 같았고, 하늘이 빚은 것 같다는 감탄이 절로 나왔다.

그의 진홍색 피풍 위에는 아직 눈이 가득했고, 귀밑에 늘어뜨린 머리카락은 축축이 젖어 있었다. 그가 문 안으로 들어서자 한기가 감돌았다.

하지만 위국공 노부인은 이를 신경 쓰지 않고 급히 일어나 그를 맞이했다. 노부인은 소년의 차가운 손을 덥석 잡아당기고는 옆에 서 있던 시녀 양신에게 소년이 벗은 피풍을 건넸다. 노부인은 소년을 방 안으로 끌고 가며 꾸짖었다.

“서(舒)야, 연말에야 사람을 보내 너를 데려오라 하지 않더냐? 어찌 벌써 돌아온 게냐?”

소년은 노부인의 앞에서야 냉담함이 풀려 조금 온화해졌고, 아직은 조금 앳된 목소리로 말했다.

“과일을 보낸 제(齊) 아저씨가 정미가 깨어나지 못한다고 말한 걸 듣고 바로 돌아왔어요.”

소년이 정미를 언급하자, 노부인은 깊게 한숨 쉬며 지친 기색을 드러냈다. 그러고는 손수건으로 소년의 젖은 머리카락을 닦아주며 화를 냈다.

“네 사촌 누님은 이미 이렇게 되었는데, 네가 돌아와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만약 아픈 손자가 또 한 명 늘면, 그것이 이 할미의 속을 더 썩이는 일 아니겠느냐.”

소년이 입을 가리고 헛기침을 했다.

“제 몸은 항상 이 꼴입니다. 그다지 좋은 편도, 그렇다고 나쁜 편도 아니니 외조모님께선 안심하셔도 돼요. 오히려 정미는 평소에 송아지 마냥 건장하더니, 어찌 병이 난 겁니까? 제 아저씨한테 물으니 모르겠다고 하더군요.”

노부인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어쩌다 넘어졌단다.”

“넘어졌다고요? 정미는 연초부터 머리가 이상해진 것 아닌지요. 고작 넘어진 걸로 정신을 잃다니요?”

소년의 얼굴이 어두워지더니 조금 화난 듯 말했다.

노부인이 참지 못하고 그를 툭 쳤다.

“너 이 녀석, 계속 정미라고 하는구나. 사촌 누님이라 부르지 않고!”

소년이 입을 삐죽였다.

“저보다 한 살도 많지 않은데, 사촌 누님이라 부를 게 뭐 있겠어요! 그럼 저는 우선 정미를 보러 갈게요.”

소년은 말을 마치고 쏜살같이 고개를 돌려 달아났다.

당황한 노부인이 급히 외쳤다.

“양신, 미경, 어서 저 아이에게 옷을 입혀주거라! 감기에 걸리지 않게!”

명령하고는 상심에게 말했다.

“너는 가서 제 씨를 불러오거라.”

* * *

얼마 지나지 않아 약간 허리가 구부정한 사오십대 사내가 들어왔고, 그는 들어서자마자 무릎을 꿇었다.

“노부인을 뵙습니다.”

노부인은 악사를 바라보며 말했다.

“작은 걸상을 가져다드려라.”

제 씨가 조심스럽게 자리에 앉자, 노부인이 그에게 물었다.

“아이에게 무슨 말을 했기에 저 아이가 온천마을에서 바로 돌아왔는가?”

이 말에 제 씨가 놀라서 재빨리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노부인, 소…… 소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공자께서 사촌 아가씨에 대해 여쭈셔서, 사촌 아가씨가 아프다고 말한 것입니다. 다른 것은 전혀 말하지 않았습니다.”

노부인은 한숨 쉬며 손을 내저었다.

“됐다, 물러나거라. 앞으로 저 아이가 걱정할만한 일은 모른다고 핑계를 대고. 아이가 이렇게 제 몸 사리지 않고 돌아오지 않도록!”

제 씨가 물러나자, 노부인은 고개를 돌려 옆의 노파 시종에게 말했다.

“하나하나 모두 내 근심을 더하니, 이 늙은 목숨이 다하겠구나!”

노파 시종이 급히 대답했다.

“노부인, 그런 말 하지 마세요. 모두 저자가 너무 솔직한 탓입니다.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공자께서 셋째 사촌 아가씨와 가장 가까운 것을 분명 알면서도 입을 다물지 못하다니요.”

노부인이 고개를 저었다.

“그가 그렇게 정직하고 무던하기에, 윗사람을 기만하고 아랫사람을 속이지 않는 것이지.”

노부인이 이렇게 말하자 노파 시종은 더 이상 뭐라 말할 수 없어 몇 마디 위로의 말만 건넸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금과 옥처럼 존귀한 노부인은 확실히 만만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방금 그 놀랍도록 아름다운 소년은, 바로 노부인의 차녀, 이전에 수도 제일 미인이었던 한옥주의 아들이었다.

한옥주가 괴한에게 끌려가 능욕을 당하고, 아들을 낳은 후 목을 매 죽은 뒤부터 지금까지, 누구도 소년의 친아버지가 누군지 알지 못했다. 노국공은 친히 외손자에게 화서(和舒)라는 이름을 지어, 그가 정답고 순조롭게 자라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노국공과 노부인이 아무리 그를 아끼더라도, 이 난처한 신분은 다른 이들의 경시하는 눈빛을 막아낼 수 없었다.

게다가 화서는 조산아였기에 어려서부터 몸이 좋지 않았고, 특히 추위를 잘 타 겨울이 되면 매번 크게 아팠다. 때문에 매년 날이 추워지면 위국공부의 교외에 있는 온천마을에 가 요양을 했고, 춘절이 되어서야 데리고 돌아와 다 같이 모이곤 했다.

그가 이리 급히 돌아온 것을 보니, 또 크게 아플지도 몰랐다. 노부인이 근심하는 것도 당연했다.

“오늘 노국공께서 현청관(玄淸觀)의 수석 진인(眞人)을 모시러 가셨는데, 와서 정미를 봐주실지 모르겠구나.”

“노부인, 안심하세요. 노국공께서 남에게 부탁하시는 일이 드무니, 말씀하시면 들어주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겁니다.”

노파 시종이 달래며 말했다.

그러자 노부인은 입을 다물고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 * *

노부인이 걱정한 소년 화서는 이미 매원에 도착했고, 그곳에 들어서자마자 정미의 시녀 환안을 밀고 문발을 걷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화서니?”

침상 앞에 앉아서 따뜻한 수건으로 정미의 이마를 닦던 한 씨는 늘 차갑게 대했던 차녀를 돌보는 모습을 보이는 게 어색한 듯 급히 손을 치우며 문을 바라보았다.

“네가 어찌 돌아왔어?”

화서는 성큼성큼 다가와 침상에 누워있는 정미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대답했다.

“이모님, 정미가 아프다는 말을 듣고 보러 왔어요.”

“이 녀석, 제 몸이나 잘 돌볼 것이지. 이리 급히 돌아올 게 뭐 있니?”

그러자 화서가 눈썹을 치켜올리며 한 씨를 쳐다봤다.

“이모님, 정미가 이 꼴이 되었는데 제가 어찌 급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한 씨는 원래 가장 예쁨을 받던 딸이었으나, 고집을 부려 회인백부로 시집간 후 모녀지간의 사이가 나빠졌다. 하필 여동생 한옥주는 갈수록 용모가 아름다워져 모두가 칭찬하니, 부모님은 자신에 대한 사랑을 저 멀리 밀어냈다. 그 덕에 그녀는 어린 마음에 여동생에게 약간의 질투심을 가지곤 했다. 이후 한옥주가 죽자, 그녀는 양심의 가책을 느껴 여동생과 판박이인 조카에게 항상 불편한 마음이 들었고, 늘 피해 다니곤 했다.

때문에 한 씨는 벌떡 일어나서 말했다.

“마침 약이 다 달여졌는지 보러 갈 참이었다. 네가 그렇게 네 사촌 누님을 염려하니, 이 아이 옆에 앉아 있으렴.”

화서는 이를 바랐다는 듯 급히 대답했다.

“그럼 이모님, 얼른 가보세요.”

한 씨가 나가자, 화서는 침상 위의 두 눈을 질끈 감아 속눈썹이 길고 가늘어 보이는 소녀를 내려다봤다. 그는 손을 뻗어 그녀의 마른 얼굴에 얹으며 중얼댔다.

“물만 마셔도 살찌던 네가 이리 야위었다니.”

안타깝게도 침상 위의 소녀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화서가 그녀의 뺨을 쓰다듬는 탓에, 귀밑의 검은 머리칼이 소년의 손가락 위로 미끄러져 간지럽힐 뿐이었다.

기나긴 침묵 후, 화서가 다시금 작게 말했다.

“이럴 줄 알았다면, 그때 너에게 아무 말 하지 않고 바로 온천마을에 가지는 않았을 텐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