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놀라서 깨다
“지야!”
위국공 부인 도 씨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한지가 긴 외투를 젖히며 무릎을 꿇었다.
“제가 정미를 다치게 하였습니다. 조모님께서 벌해주십시오!”
그 말에, 자리에 있던 사람들의 표정은 제각기 달라졌다.
노부인의 안색이 약간 어두워지더니, 주위를 한 바퀴 둘러보고는 한지에게 물었다.
“지야, 그럼 할미에게 똑바로 말해보아라. 어쩌다 네 사촌 동생을 다치게 하였느냐?”
한지가 엄숙하게 대답했다.
“제가 실수로 정미를 밀어 넘어트렸고, 공교롭게도 정미의 손목이 마른 가지에 찔려 다치게 되었습니다. 조모님, 가법(家法)으로 이 손자를 벌해주십시오!”
“외조모님, 지 오라버니께 화내지 마시고 저를 탓하세요!”
정요가 갑자기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제가 정미와 홍매나무 아래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눈이 와 길이 미끄러운 탓에 미끄러져 넘어졌습니다. 때마침 지 오라버니께서 오셔서 제가 넘어지는 걸 보시고는 와서 잡아주셨습니다. 정미도 마침 저를 잡아주려 하다가 지 오라버니께서 실수로 정미를 밀치게 되어 정미가 넘어지게 된 것입니다. 결국에는 모두 저 정요의 잘못입니다!”
“이 말이 맞느냐?”
노부인이 낮은 목소리로 한지에게 물었다.
한지가 정요를 힐끔 쳐다보자, 정요는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
한지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정미의 평판을 지키려고 하다니. 정요는 정말로 지나치게 선량하다고 생각했다. 정미가 먼저 잘못하긴 했지만, 지금 다쳐 정신을 잃은 것은 결국엔 그가 경솔한 탓이기도 했기에 정미에게 악독하다는 평판을 지게 할 필요는 없었다.
한지는 이를 꽉 깨물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 일은 결국 제가 경솔한 탓에 일어난 일이고, 정요와는 관계가 없습니다. 게다가 제 생일연회에서 두 사촌 동생에게 사고가 났으니, 모두가 저의 실책입니다. 조모님께서 어떻게 처벌하시든 저는 모두 달게 받겠습니다!”
“외조모님, 저도 벌을 달게 받겠습니다!”
정요는 이마를 땅에 붙이며 진지하고 간절하게 말했다.
두 사람이 나란히 무릎을 꿇고 앞다투어 잘못을 인정하자, 노부인의 안색은 점점 더 좋지 않아졌다. 정미의 안위를 걱정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보물 같은 외손녀가 다쳤는데도 화낼 대상을 찾지 못하는 것에 울화가 치밀었다. 그녀가 아무리 정미를 편애한다고 하더라도, 두 아이들이 무심코 저지른 실수를 엄중히 처벌할 수는 없었다. 더군다나 둘 중 하나는 심지어 그녀가 매우 아끼는 종손(宗孫)이었다.
노부인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방 안은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한 씨가 결국 참지 못하고 말했다.
“어머니, 이 일은 그냥 두시지요. 정미는 원래 촐싹대는 성정인데, 어찌 한지의 탓을 할 수 있겠습니까.”
‘졸릴 때쯤 마침 베개를 건네주는 사람이 있다.’는 옛말처럼, 역시 친딸이 살뜰한 법이었다. 그러나 노부인은 마침내 분출구를 찾은 듯 눈썹을 치켜세우고 화를 내며 꾸짖었다.
“어리석은 것. 딸이 정신을 잃고 일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어미 된 사람이 사건의 경위를 묻기는커녕 딸을 탓하기까지 해!”
노부인은 이 일을 여기서 끝낼 수 있었다. 이유는 정미를 다치게 한 사람이 한지이고, 한지가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라는 전제 때문이었다. 하지만 한지의 어리석은 몇 마디 말에 이를 놓아줄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한다면, 다른 이들에게 정미가 다친 것은 자업자득이라고 알려주는 꼴이 되지 않겠는가?
노부인은 생각할수록 화가 나 한 씨를 매섭게 노려봤다.
‘어미가 된 사람이 이렇게 믿음직스럽지 못한데, 불쌍한 정미를 어쩌면 좋을꼬!’
노부인이 화를 내자, 한 씨 또한 화가 나고 다급해졌다.
‘어머니께서 정말 노망이 나셨나? 어떻게 내가 정미의 성정도 모르겠어? 이 일은 계속 따져봤자 어떻게 해야 할지 정하지 못할 테니, 여기서 그만두는 편이 나아. 그럼 올케언니가 이후 다시는 연초의 그 일을 언급하지 않을 테니까.’
모녀 두 사람은 서로 멀뚱멀뚱 눈만 쳐다보았다.
일촉즉발의 분위기 속에서 계속 잠자코 있던 한평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조모님, 저희가 도착했을 때, 시녀 한 명이 그곳에 있었습니다. 주인이 다쳤으니 시녀는 그 책임을 피할 수 없을 터. 제가 보기엔 그 시녀를 벌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맞습니다. 그 시녀는 그때 아주 멀리 서 있었습니다. 만약 옆에 서 있었다면 정미가 다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용흔이 맞장구쳤다.
조용히 옆에 서 있던 한추화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순박하고 정직한 줄 알았던 한평에게 이렇게 영리한 면모가 있었다니. 그녀가 너무 늦게 알아차린 듯했다.
한평이 그 시녀를 벌해야 한다고 한 말은 사실, 세 명의 당사자 외에 그 시녀가 가장 이 일의 경위를 잘 아는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노부인에게 은밀히 돌려 말한 것이었다. 만약 솔직히 말했다면, 틀림없이 도 씨의 심기를 건드릴 것이고, 한지에게도 마음에 응어리가 생겨 형제의 정에 금이 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노부인이 한평의 말을 듣고 고개를 돌려 명령했다.
“양신(良辰)아, 그 시녀를 데려오거라.”
위국공 노부인에게는 네 명의 일 등급 시녀가 있었는데, 각각 양신, 미경(美景), 상심(賞心), 악사(樂事)였다.
양신은 그중 가장 세심한 시녀였고, 바로 ‘예.’ 하고 대답한 후 미경에게 눈짓했다.
잠시 후 양옆으로 그 시녀를 끌고 들어왔고, 그 시녀가 쿵 하고 무릎을 꿇자, 각각 한쪽으로 두 걸음 물러섰다. 수많은 돌발 상황에 대응하기 적절한 거리였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노부인이 눈썹을 찌푸리며 덜덜 떨고 있는 시녀를 훑어보았다.
“소인…… 소인의 이름은 구월(九月)입니다.”
“구월아, 말해보아라. 그때 정미가 어쩌다 다치게 된 것이냐?”
“소인은…….”
구월은 무의식적으로 한지를 힐끗 쳐다보고는 우물쭈물하며 말을 잇지 못했다.
위국공 부인 도 씨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구월, 노부인께서 여쭈시는 말에 잘 대답하기만 하면 된다. 무서워할 필요 없어. 사실만 말하면 되니.”
도 씨는 평소 몸이 약해, 피부가 희고 입술은 옅었으며 목소리도 가냘팠다. 하지만 구월은 도 씨의 말을 듣자 안색이 더 나빠졌고, 한참 후에야 마침내 입을 뗐다.
“소인…… 소인은 당시에 두 아가씨께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을 보았고, 방해가 되지 않게끔 멀리 서서 피해드렸습니다. 무언가 소리가 들렸을 땐 셋째 사촌 아가씨께선 이미 바닥에 쓰러져 계셨습니다…….”
시녀 구월이 보지 못했다고 하니, 계속 추궁하는 것도 좋지 않을 듯해 증 씨가 급히 말했다.
“의모(義母)님, 뜻밖의 사고인 만큼 이 정도에서 끝내지요. 아이들이 놀라 얼굴이 창백해진 것 좀 보세요. 아이들은 모두 장난기가 심하지 않습니까. 저도 차마 의모님께 말하지 못했지만, 흔이도 남이의 머리를 깬 적이 있는걸요.”
“어머니!”
가만히 있다가 한 대 맞은 용흔이 눈을 희번덕거렸다.
증 씨는 아들에게 사과하는듯한 눈빛을 보내다가 갑자기 멍해졌다.
“맞다, 남이는 어디 있느냐?”
용흔은 증 씨의 질문에 멍한 표정으로 이리저리 둘러보더니, 갑자기 머리를 쳤다.
“아뿔싸, 청설림에서 길을 찾고 있을 겁니다!”
증 씨는 입을 뻐끔거리다 고함쳤다.
“얼른 가서 여동생을 찾아오지 않고 뭐하는 것이냐!”
법도 하늘도 업신여기던 작은 패왕은 주눅이 들어 길을 잃은 여동생을 찾으러 갔다. 그는 밖으로 달려나가면서 비분하며 생각했다.
‘어찌 용남(容嵐)의 머리를 깬 것을 탓할 수 있나! 매번 그 아이가 길을 잃으면, 먼저 야단맞는 건 항상 나인데!’
아들이 사라지는 것을 보던 증 씨는 입을 꾹 다물더니, 이내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의모님, 보세요. 아이들은 모두 골치 아픕니다. 지금은 정미의 상태를 살펴보는 것이 더 중요해요.”
말을 하는 도중, 갑자기 무거운 물건이 잇달아 땅에 떨어지는 소리가 나더니, 산발이 된 머리를 한 정미가 뒷방에서 달려나왔다.
그녀는 놀라면서도 두려운 표정으로 노부인 품에 안겨 눈물을 뚝뚝 흘렸다.
“외조모님, 살아계셔서, 살아계셔서, 정말 다행이에요…….”
노부인을 꼭 안고 목놓아 울며 우물우물 내뱉은 정미의 말에, 방 안의 사람들이 모두 크게 놀랐다. 한 씨는 화가 나서 정미를 끌어내며 날카롭게 꾸짖었다.
“정미, 미친 거니? 또 헛소리를 하면 내가 네 입을 꿰매버릴 것이다!”
한 씨가 정미를 끌어내자, 정미는 머리가 어지럽고 눈이 침침해지는 것을 느꼈다. 비틀거리며 겨우 서서는 반쯤 뜬 눈으로 한 씨를 쳐다보다, 무의식적으로 세 글자를 내뱉었다.
“어머니…….”
눈앞의 한 씨는 타마계(*墮馬髻: 머리를 한쪽으로 비스듬하게 땋은 머리)를 하고 있었고, 귀밑에는 찻잔만 한 분홍색 동백꽃을 꽂고 있었다.
이 꽃은 난붕(*暖棚: 겨울철 뜰에 설치하는 추위막이 덮개)에서 난 것이었다. 회인백부에는 생계가 빠듯한 탓에 난붕이 없었고, 때문에 한 씨는 이른 아침에 거리에서 꽃을 사 왔는데, 이 한 송이가 은 두 냥이나 했다.
누런빛을 띤 갈색에 암홍색으로 동백꽃 수를 놓은 상의를 입은 한 씨의 모습은, 이 싱싱한 동백꽃을 꽂은 덕에 얼굴이 보름달처럼 더욱 화사해 보였다.
하지만 정미의 눈에는 그렇지 않았다. 타마계 머리가 사방으로 풀어헤쳐진 긴 산발머리가 되어, 바람을 따라 흔들리는 불꽃이 빠르게 온 얼굴의 머리카락을 삼키고 있었다. 한 씨는 활활 타오르는 불길 속에 있었고, 한 쌍의 눈은 뚫어지게 어떤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타오르는 불 때문에 흉악하고 고통스러운 표정이었지만, 미친 듯한 큰 웃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어머니!”
정미는 놀라 혼비백산했고, 모녀지간의 응어리를 까맣게 잊고 손을 뻗어 한 씨를 잡아당겼다.
그녀의 왼쪽 손목은 한 씨에게 붙잡혔고, 면포로 싸맨 오른쪽 손목은 힘을 주자 바로 선혈이 흘러 새하얀 면포를 물들였다.
심한 고통이 느껴지더니 눈앞의 광경이 갑자기 또 변했다. 한 씨가 몹시 화를 내고 있었고, 동백꽃은 더없이 아리따워 보이기만 했다.
정미가 아파서 소리치자, 한 씨는 깜짝 놀라 저도 모르게 손을 놓았다.
정미는 이 변화무쌍한 광경에 괴로워서 정신이 붕괴되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손목의 고통도 잊은 채 달려나가다 한추화의 품에 부딪혔다.
“정미, 정미야, 진정해. 뛰지 말고……. 손목에 또 피가 나잖아.”
한추화가 정미를 붙잡고 가볍게 그녀의 등을 두드리며 달랬다.
익숙하고 친근한 목소리가 들리자, 정미는 조금이나마 안정할 수 있었고 목숨을 구할 지푸라기라도 잡은 듯 눈을 떴다.
그러나 ‘언니’라는 소리를 내뱉기도 전에, 안타까운 표정을 짓던 한추화가 갑자기 단호한 표정으로 변하더니, 고개를 숙여 한 방향으로 빠르게 달려나가다가 대청의 앞 기둥에 부딪쳤다. 마치 온 땅에 만개한 동백꽃처럼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한추화는 피바다에 그대로 쓰러졌고, 새하얀 이마에는 피 구멍이 생겨났다. 선혈이 빠른 속도로 그녀의 얼굴을 뒤덮었다.
정미는 이 자극적인 장면을 견디지 못하고 손으로 눈을 가린 채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으며 부르짖었다.
“진짜가 아냐, 진짜가 아니야!”
방 안의 사람들 모두는 그녀의 실성한 모습에 얼어버렸다. 무릎을 꿇고 있던 한지는 평소 교만하면서도 그와 붙어 다니기를 좋아했던 어린 사촌 동생이 이렇게 변한 것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가서 정미의 어깨를 눌렀다. 온화한 목소리는 어릴 적 화가 난 정미를 달랠 때와 같았다.
“정미, 이러지 마. 손에서 피가 흐르고 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