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홍매나무 아래서 마음을 털어놓다
얼마나 걸었는지 모를 무렵 정미는 정신이 들었고, 그제야 사방이 낯익다는 것을 깨달았다.
청설림에는 수백 그루의 매화나무가 있었는데, 모두 초록 꽃술을 가진 백매였다. 유일하게 한 곳에만, 대체 어떻게 자랐는지 모를 홍매나무 한그루가 있었고, 이는 아주 아름다웠다.
어릴 때, 정미는 청설림에서 이 홍매나무 찾는 것을 가장 좋아했다. 시간이 많이 흘러 홍매나무가 자라 별로 눈에 띄지 않을 때에도 그녀는 이 나무를 늘 찾아낼 수 있었다.
정미는 습관적으로 그곳을 향해 걸어갔고, 수 장(丈)을 걷고 나서야 갑자기 멈추었다. 그녀는 무성한 백매나무 한그루를 사이에 두고, 홍매나무 옆에 서 있는 두 사람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홍매나무는, 백매 무리 사이에서 굳이 자신을 뽐내지 않은 채 그저 조용히 거기에 서 있었으나 절세미인처럼 아름다워 사람들의 눈길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하지만 이때, 매화나무 아래의 소년은 아름다운 옥처럼 빛났고, 소녀는 연꽃처럼 청아했다. 미남미녀 한 쌍이 마주 서니 홍매의 아름다움은 그들에게 빼앗긴 듯했고, 최소한 정미의 눈에는 홍매가 보이지 않고 그 두 사람만 보였다.
눈이 사그라들며 버드나무꽃이 하늘에 휘날리듯 정미의 머리끝과 치맛자락에 떨어졌다.
시녀가 따라와 ‘아가씨’ 세 글자를 입 밖으로 내기도 전에, 매화나무 아래의 두 사람을 보고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고 조심스럽게 정미의 안색을 살폈다.
앞서 스스로를 비웃으며 쓰게 웃기도 하던 아가씨가, 지금은 무표정이었다. 한 쌍의 놀랍도록 검은 눈이 우두커니 앞을 바라보는 모습은 마치 넋이 나가 보였다.
시녀는 차마 이를 눈 뜨고 볼 수 없어, 조용히 발걸음을 옮겨 가랑눈이 정미에게 떨어지지 않도록 우산을 더 높이 들었다.
사방은 고요했고 바람과 눈이 떨어지는 소리, 그리고 매화가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만 들렸다. 홍매나무 아래 소년소녀의 대화가 또렷이 들려왔다.
“정요, 내…… 내 마음을, 넌 알 거야. 나는 그저 넌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고 싶어.”
정요는 고개를 반쯤 숙인 채 정미를 등지고 있었기에 그녀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목소리는 또렷하게 들렸다.
“제가 어떻게 생각할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정요!”
한지는 조금 다급해진 듯 앞으로 한 발짝 다가갔다. 두 사람은 더 가까워졌고, 사방에 아무도 없다고 생각해서인지 목소리는 더 높아졌다.
“이럴 때에도 시치미를 뗄 거니? 넌 알겠지. 소성년식을 치른 후, 내 어머니가 나와 알맞은 여인을 물색하기 시작할 것을!”
정요는 뒤로 반걸음 물러났다.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정미의 예민함 덕분에 간신히 말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지 오라버니께 축하드릴 일이지요. 좋은 배필을 얼른 찾으시기를.”
“정요!”
정미는 한지의 얼굴에 화난 기색이 역력한 것을 똑똑히 보였다. 줄곧 지켜왔던 그녀의 무표정이 일그러지더니 순식간에 의아함이 드러났다.
한지는 갑자기 앞으로 다가가더니 정요의 손을 덥석 잡았다.
정미의 눈길은 두 사람이 맞잡은 손에 가닿았다.
소년의 손은 길고 섬세했으며 뼈마디가 선명했다. 소녀의 손은 뽀얗고 가냘팠으며 마치 뼈가 없는 듯했다. 이렇게 맞잡고 있으니 두 사람은 마치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짝 같았다. 하지만 정미의 눈엔 유달리 거슬려 머릿속에선 저도 모르게 다른 장면을 떠올렸다.
정요는 조심스럽게 소년의 가볍고 얇은 소매를 잡으며 용기를 내어 물었다.
“지 오라버니, 제가 당신에게 시집가서, 우리 두 사람이 계속 외조부님, 외조모님, 그리고 외숙부님, 외숙모님을 모시면 다들 어떻게 생각하실까요?”
소년은 귀신이라도 본 듯 그녀의 손에서 소매를 힘껏 빼내어 차가운 목소리로 한 글자씩 띄어가며 말했다.
“정요, 그런 말은 자중하도록 해!”
이 말에 정미의 정신이 들었고, 두 사람을 보고 당혹스러웠다.
같은 사람인데 어떻게 이렇게 다를 수 있을까? 지 오라버니는 엄격하게 그녀에게 ‘자중하도록 해.’ 하고 꾸짖으면서도 정요 언니의 손을 꼭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정미는 모든 감정을 잊고 호기심만을 떠올렸다.
‘정요 언니는 과연 지 오라버니에게 자중하라는 말을 할까, 하지 않을까?’
정요는 손을 빼려 몇 차례 발버둥 쳤으나 빠져나가지 못했고, 한지는 오히려 더 세게 잡아드는 바람에 두 사람 사이는 더 가까워졌다. 정요는 발버둥 쳐도 빠져나가지 못하는 것을 보고는 화를 냈다.
“지 오라버니, 손을 놓으세요!”
“아니, 오늘 네가 피하기만 하고 대답하지 않으면, 절대 손을 놓지 않을 거야.”
정요는 이 말을 듣고 꼼짝도 하지 않았다.
정미의 눈이 갑자기 커지더니, 머릿속에 한 가지 기괴한 생각을 떠올렸다.
‘이럴 수도 있었구나. 지 오라버니가 꾸짖었을 때, 나도 꼭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면 결과가 어땠을까?’
정요의 목소리가 울렸다.
“지 오라버니, 이럴 필요가 있나요?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저희는 이루어질 수 없어요! 제게 수도 제일 재녀라는 명성이 있더라도, 막상 혼담 얘기가 나올 때에는 모두가 기억합니다. 제가 그저 비천한 출신의 서녀라는 것을 말이에요!”
“서녀가 어때서?”
그의 말에 정요가 씁쓸하게 웃었다.
“서녀가 어떤지는, 조금 더 보시면 알게 되실 겁니다. 지 오라버니, 당신은 일등공신 국공 집안의 세자입니다. 위국공, 노부인, 그리고 오라버니 어머니께서 어찌 서녀를 아내로 맞이하는 것을 동의하겠어요? 설마 저를 첩으로 들이시려는 건 아니겠지요? 저 정요가 비록 비천한 출신이라 하더라도, 절대 첩이 되진 않을 겁니다!”
“허튼소리 하지 마. 내가 어찌 너를 그리 욕보이게 하겠느냐!”
한지는 다급해진 듯했으나, 정요는 연신 침착하려 했다.
“지 오라버니, 오라버니의 마음에 몹시 감사드립니다. 다만 우리는 이루어질 수 없으니, 앞으로 저를 건드리지 말아주세요. 저는 몹시 조심스럽습니다. 평소에 속마음을 털어놓지도, 일을 함부로 그르치지도 못하며 이런 날까지 오기 쉽지 않았어요. 당신이 잠시 감정을 억제하지 못한 것으로 제가 쌓아온 일들을 망치고 싶지 않습니다!”
“정요, 네가 쉽게 지내고 있지 않다는 거 잘 안다. 고모님은 성미가 급하고, 철 형님의 눈엔 정미 한 사람만 있고, 정미도…… 그 아이의 성정도 고집이 세고 제멋대로이니, 그동안 네가 줄곧 양보하고 감싸주며 당연히 많이 억울했을 테지. 그렇기 때문에 나는 더 이상 네가 그렇게 힘들어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 없어. 너를 평생 보살펴 주고 싶고, 네게 가장 좋은 것만 주고 싶다. 네겐 그럴 자격이 있어!”
한지는 말하며 감정이 격해져 손을 뻗어 정요를 당겨 품에 안았다.
그의 목소리는 점점 낮아졌지만, 한 글자 한 글자 천둥처럼 정미의 귀에 박혔다.
“하물며 어머니께서도 예전에 이렇게 말한 적 있다. 성정과 천성으로 따지면 정미가 너를 따라잡을 수 없다고. 어머니께서도 너를 좋아하고 계실 거야. 조모님께선 연세가 많으신 탓에 가끔 아이처럼 화를 내실 때도 있지만, 잘 달래드리면 될 거다. 조모님께선 정미를 특히 아끼셔서, 손자며느리의 출신은 오히려 다른 집의 조모님들처럼 중요하게 여기지 않으셔. 조모님께서도 너의 성품을 오래 보다 보면 분명 좋아하실 거고.
나무가 크면 바람도 강하듯이, 우리 국공 집안은 이미 다른 사람의 시기와 공격을 많이 받기 때문에 고귀한 출신의 세자 부인을 들여서 굳이 금상첨화 할 필요 없어. 내가 이따 고모님께 부탁해볼게. 너를 적녀로 올리고, 네 재덕겸비한 명성을 더하면, 어른들이 이 혼사를 허락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 아닐 거야.”
그러자 정요가 갑자기 흐느꼈다.
“지 오라버니, 제발 그런 말씀 마세요. 오라버니의 말에 괜히 욕심을 부려 다른 사람과 제 자신을 해치고 싶지 않습니다.”
한지는 정요를 진지하게 바라보다가,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
“정요, 네 뜻을 알았어. 잠깐 기다리고 있으렴. 내가 다 해결해줄 테니.”
열여섯 남짓의 소년은 가장 충동적인 시기를 겪는 법이지만, 한지는 그 중 침착하고 진중한 편이었다. 좋아하는 사람의 마음을 알았다고 생각해 그는 바로 정요를 놓아주었고, 입꼬리에 미소를 머금고 몸을 돌려 성큼성큼 떠나갔다.
십여 년을 들어 몹시 익숙한 발소리가 점점 멀어졌고, 땅에 눈이 쌓인 탓에 소리는 금방 잦아들었다.
정미는 홍매나무 아래서 생각에 잠긴 듯한 정요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나무인형에 생명을 불어넣은 듯, 우산을 든 시녀를 밀어내고 회오리바람처럼 정요 앞으로 달려갔다.
* * *
“정미니?”
정요가 놀라서 앞에 나타난 정미를 바라봤다.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스치더니 절박하게 말했다.
“내 말을 들어줘!”
“……좋아.”
정미는 입술을 깨물고 살짝 떨리는 손을 제어하며 힘들게 이 말을 토해냈다.
정요는 눈을 깜빡이며 잠시 멍해졌다.
‘어찌 상황이 상상한 것과 다른 거지? 원래대로라면 정미가 미친 듯이 듣지 않겠다며 고개를 돌려 달아나야 하지 않나?’
“언니, 나 듣고 있어.”
정미는 빠르고 가볍게 말한 후 코를 훌쩍였다. 정요는 더 이상 지체했다가 정미의 울음이 터지기라도 할까 무서웠다. 그녀는 이미 충분히 난처했고, 정미를 울려 더 난처해지고 싶지도 않았다.
정요는 정신을 차리고 입술을 꾹 깨물었다가 말했다.
“정미, 네가 본 건 그렇고 그런 상황이 아니야. 나는 지 오라버니에게 남녀의 감정이 없어. 나는 그저 오라버니를 오라버니로 볼 뿐이야…….”
정미는 갑자기 조금 우습게 느껴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지 오라버니가 내게 나를 그저 여동생으로만 본다고 말했고, 지금은 정요 언니가 내게 자기는 지 오라버니를 그저 오라버니로 볼뿐이라고 말하네. 하지만 두 사람이 한 이 말들은, 모두 내가 듣고 싶은 말이 아니야!’
“둘째 언니.”
정미가 조용히 부르며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내가 묻고 싶은 건 그게 아니야.”
정미의 말투는 부드럽고 진지했다. 평소의 직설적인 모습과는 완전히 달랐다.
그런 정미의 모습에 정요도 저절로 신중해졌고 말투에 조심스러움과 경계심을 숨겼다.
“뭘 묻고 싶니? 내가 아는 거라면 꼭 너에게 말해줄게.”
정미는 바삐 고개를 숙여 차오른 눈물을 몰아냈다. 내리깔린 목소리는 무척 작았지만, 정요에겐 또렷이 들렸다.
“둘째 언니, 왜 항상 이렇게 착해? 내가 원한다면 무조건 대답할 수 있어?”
여기까지 말하자 그녀가 멈칫했다. 정요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몸을 떨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정미는 이를 악물고 이어서 말했다.
“그래서, 내가 교만하고 제멋대로에 포악하기까지 해서, 언니가 억울해진 일이 많았어?”
한지의 말들은 한 글자 한 글자가 마치 칼처럼 꽂혔고, 정미는 이번 생에 그 말들을 절대 잊지 못할 것이라 예감했다.
“아니, 그런 적 없어!”
정요가 급히 말했다. 정미의 어깨 위에 올라간 손에 힘이 들어갔다.
정미는 조금 아프게 느껴졌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정요를 똑바로 쳐다봤다.
“그럼 둘째 언니가 알려줘. 내가 교만하고, 짜증 나는 아이야?”
정미의 수정같이 맑은 눈동자를 보자, 오랫동안 반석과 같이 견고했던 정요의 마음이 갑자기 잠깐 흔들렸다.
‘만약 내가 회인백부의 서녀로 태어나지 않았다면, 경쟁할 필요도 빼앗을 필요도 없이, 고귀한 출신과 빛나는 외가가 있었다면, 나와 정미는 진실한 친구가 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녀는 욕설과 책문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었지만, 정미의 질문이 한지와 전혀 관계없는 것일 줄은 생각지 못했다. 정미가 신경 쓰는 일은 항상 다른 여자아이들이 코웃음 치는 일이었고, 다른 여자아이들이 신경 쓰는 일은 정미가 오히려 마음에 두지 않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정요는 순간 소름이 돋았다.
‘그렇다고 해서 외모가 변변치 못한 정미가, 평판이 형편없는 정미가, 아무도 그녀를 아끼지 않는 것을 앞으로도 영원히 신경 쓰지 않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