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악담으로 중상하면 유월의 더위도 춥게 느껴진다
한편 정미는 한 그루터기 옆에 잠시 멈춰선 채였다. 뒤에서 우산을 들어주던 시녀는 조금 의아했다.
‘그루터기가 뭐가 재밌다고 보고 계시는 거지?’
호기심에 찬 시녀는 차마 그 의아함을 드러내지는 못하고 그저 몰래 저린 손목을 주물렀다.
“눈이 많이 그쳤어. 이 매화나무 아래에 서 있으면 눈에 맞지도 않으니, 더 이상 우산을 들고 있지 않아도 돼. 성가시잖아.”
정미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시녀는 조금 놀라더니 급히 말했다.
“아가씨, 들고 있는 게 좋겠어요. 감기에 걸리지 않도록 조심하셔야 하니까요.”
정미가 인상을 찌푸렸다.
“안 걸려. 우산이 있으니 갑갑해서 그래. 내가 시키는 대로 하렴.”
그러자 시녀는 더 말대꾸할 엄두를 내지 못했고, 알았노라 대답한 뒤 우산을 접고 뒤쪽에 물러섰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한지의 생일연회 때, 청설루에 들어가 시중을 들 수 있는 시녀들은 모두 따로 선별된 출중한 자들이었다. 그녀가 그중에서 1, 2등을 다퉜다고 할 수는 없지만,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 여종들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런 사촌 아가씨께서 눈썹을 찌푸린다고 그녀가 저도 모르게 따르게 된다니. 정말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손목이 가벼워지는 것을 느끼자 시녀는 몰래 정미를 훑어봤다. 갑자기 조금 통통한 그 뒷모습이 귀여워 보였다.
그러나 이때, 또 다른 익숙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익숙한 발소리가 들리는 순간, 정미는 자신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역시 지 오라버니가 나를 찾으러 왔어. 나는 알고 있었다고. 지 오라버니는 절대 나를 남처럼 대하지 않는다는 걸. 나를 오해한 걸 알고 사과하러 온 거겠지? 흥. 방금 그렇게 차갑게 대한 탓에, 앞으로 다시는 오라버니와 잘 지내지 않고 모르는 사람처럼 대할 거라 맹세했거늘!’
정미는 그때의 슬픔과 절망을 떠올리면 아직도 마음이 억울했다. 그녀는 한지를 보고 싶은 마음을 끊어내려 마음속으로 악을 쓰며, 만약 다시 한지를 쳐다본다면 평생 못난이로 살고 평생 시집가지 않겠노라 다짐했던 바 있었다.
정미는 백매나무 아래에 서서 마음속으로 갈등했다.
이 시기의 아이들은 대부분 맹세 따위를 잘 믿는 편이었고, 정미도 예외는 아니었다. 특히 최근 반년 동안 귀신인지 요괴인지 모를 것이 그녀에게 들러붙은 탓에, 소녀는 귀신 같은 것을 더욱 굳게 믿게 되었다.
‘하지만 이 사람은 지 오라버니인 걸. 만약 내가 평생 오라버니를 쳐다보지 않으면, 오라버니도 슬퍼하겠지?’
정미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결국 결정했다.
‘만약 좀 이따 오라버니가 말을 잘해서 나를 기쁘게 한다면, 마지못해 용서해야겠다.’
시집을 가지 않는 것은…… 사실 별거 아니었다. 자신은 못생겼고, 사내들은 외모를 중시하는 사람이 많으니, 미래의 부군도 당연히 자신을 좋아하지 않을 거라 여겼기 때문이다. 만약 자신의 아버지처럼 첩과 서자들을 더 총애하고, 자신은 그들을 이기지도 못할 거라면, 분명 화가나 죽을 것이 분명했다!
정미는 갑자기 시집을 가지 않는 게 괜찮은 생각이라고 느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내게 냉담하긴 하지만, 둘째 오라버니가 있잖아. 나중에 둘째 오라버니가 돌아오면 물어봐야겠다. 나중에 부인이 생겨도 나를 내버리지 않을 거냐고.’
정미는 그때 둘째 오라버니인 정철이 오직 그녀만을 여동생으로 여긴다고 한 말을 떠올리면,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녀를 신경 쓰지 않고 거들떠보지 않는다고 해도 그만은 계속 그녀를 아껴줄 거라 확신할 수 있었다.
“……정미.”
뒤에서 변성기 시기 소년의 특유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별로 듣기 좋은 소리는 아니었지만, 정미는 그 목소리가 들려오자 미소를 거둘 수 없었다.
그녀가 고개를 돌리지 않자, 한지는 저절로 눈살을 찌푸렸다.
정미는 늘 이렇게 어린아이 같았다. 어떤 일이든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였다. 사람을 좋아하는 것도, 싫어하는 것도, 항상 이렇게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솔직하게 행동했고, 그녀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 불편함과 난감함을 주는 것은 생각지 않곤 했다.
한지는 아까 그가 정미를 오해한 것을 떠올리고는 낮게 한숨 쉬었다. 시녀에게 멀리 떨어져서 기다리라는 눈치를 준 뒤, 정미의 앞으로 가 다시 불렀다.
“정미.”
그녀의 생일연회 이후로 두 사람이 이렇게 가까이 있었던 적은 없었다. 정미는 열이 나는 것처럼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 같아 급히 고개를 돌리며 어색하게 말했다.
“큰 사촌 오라버니가 여기는 어쩐 일이에요?”
“큰 사촌 오라버니? 지 오라버니가 아니라?”
한지가 고개를 저었다.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두 사람의 사이가 틀어지면 정미는 늘 이렇게 그를 부르곤 했다.
‘정말 아직 어린 게 맞구나.’
정미가 가볍게 콧방귀를 뀌었다.
“함부로 부르지 못하겠어요. 다른 사람이 내 마음이 사갈(*蛇蠍: 뱀과 전갈. 남을 해치거나 심한 혐오감을 주는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같다고 오해할까 봐.”
“정미!”
한지의 어세가 강해졌다. 자신도 모르게 습관적으로 부드러움과 친숙함이 드러났다.
“아까는 내가 잘못했어. 오라버니가 네게 사과할게. 그만 화내렴.”
정미는 한지가 이런 말투로 자신에게 말하는 것을 오랫동안 듣지 못해왔다. 순간적으로 승낙할 뻔했으나, 급히 입술을 세게 깨물고서야 참을 수 있었다. 그녀가 시큰둥하게 물었다.
“그럼 아까 어찌 나를 그렇게 생각한 건데요?”
한지가 성질을 참으며 해명했다.
“내가 잘못 봤어.”
“설령 잘못 봤다고 해도, 나를 그렇게 생각해선 안 되죠.”
정미가 고개를 들어 그를 마주 봤다. 그녀의 치켜 올라간 눈은 맑고 생기가 넘쳤지만, 안타깝게도 둥글고 큰 눈의 그런 아름다운 자태는 없었다. 살짝 치켜올라간 눈꼬리는 늘 사람에게 교만하고 제멋대로인 인상을 주고는 했다.
한지는 결국 눈살을 찌푸렸다.
아까 대청에 있을 때였다면 정미는 지금 한지 표정의 미묘한 변화를 눈치챘을지도 모르겠으나, 지금 눈앞의 사람이 그녀가 가장 익숙한 모습으로 돌아왔기에 마음속이 기쁨으로 가득 차 이를 놓치고 말았다. 정미는 그에게 억울함을 털어놓았다.
“다른 사람은 그렇게 생각할 수 있어도, 지 오라버니는 그러면 안 되죠! 오라버니는 분명히 알잖아요. 내가 절대 그럴 리 없다는 걸! 하물며 정요 언니한테!”
정미는 아직 몰랐다. 이 세상의 일들, 특히 소녀의 마음은, 어떠한 소년도 잘 알지 못한다는 것을. 만약 한지가 여태까진 잘 알고 있었다고 한들, 미래에까지 잘 알아낼 수 있을는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하물며 그는 정미를 마음에 둔 적도 없었으니 말이다.
한지는 조금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정미가 정요를 언급하지 않았다면, 한지는 이렇게 빨리 참을성이 없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따뜻하고 너그러운 정요를 떠올린 후 눈앞의 고집스럽고 까칠한 정미를 보면, 그는 도저히 여기에 시간을 더 허비하고 싶지 않았다.
오늘은 그의 소성년식이었고, 밤에는 어머니가 그를 위해 고르고 또 고른 시녀가 방에서 기다리며 그에게 진정한 사내가 되는 법을 가르쳐줄 터였다.
하지만 그는 아직 정요에게 말하지 못했다. 그의 모든 것을 그녀와 함께 겪고 싶다고. 그 사이에 어떤 쓸데없는 경험도 겪고 싶지 않다고. 만약 그녀만 동의한다면, 그는 기꺼이 기다릴 수 있다고 말이다.
“정미, 오라버니에게 이렇게 대하는 건 불공평해. 사과했는데도 나에겐 여전히 화를 내면서, 어찌 용흔에게는 화내지 않는 거야?”
한지는 분위기를 너무 경직시키고 싶지 않아 농담하듯 말했다.
이 말에 정미는 더욱 억울해져서 엉겁결에 입을 잘못 놀리고 말았다.
“그와 오라버니가 어떻게 같아요? 저는…….”
말을 절반쯤 하고서야 떠올렸다. 그녀는 이 말을 이전에 한 적이 있었고, 이후 모든 사람의 비웃음과 한 사람의 냉대로 돌아왔다는걸. 그녀는 두 번이나 같은 말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도 놀라듯이, 한지는 무의식적으로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반 장쯤의 거리만큼 떨어지고는 차갑게 말했다.
“사실 이 말을 줄곧 네게 하고 싶었어. 그런데 마땅한 기회가 없었지…….”
“무슨 말이요?”
정미가 둔한 사람이긴 했지만, 한지의 태도가 변한 것은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마치 얼마 전의 태도로 돌아간 것 같았고, 심지어 그보다 더 차가워진 듯했다.
“정미, 나는…… 항상 너를 동생으로만 봐왔어. 추몽이랑 동생들을 대하는 것처럼…….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우리는 항상 사이가 좋았지. 혹시 이게 너에게 오해를 산 거라면, 오라버니가 여기서 네게 사과할게.”
정미의 눈이 갑자기 커졌다. 가슴속 가장 연약한 부분이 칼에 맞은 듯 아파져 와 한 글자도 입 밖으로 뱉을 수가 없었다.
한 여자아이에게, 심지어 어릴 때부터 같이 놀았던 사촌 동생에게 이렇게 난감한 말을 하게 되어 한지도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뒤의 말을 이어서 쏟아냈다.
“정미, 네 마음이 괴로운 걸 알지만, 이번 일로 오래 앓느니 짧게 충격받는 게 나을 거야. 너를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 앞으로도 우리가 예전처럼 그렇게 지냈으면 좋겠어. 만약…… 만약 네가 당분간 그렇게 하지 못하겠다면, 우선은 만나는 횟수를 줄이자. 너는 아직 어려서 진짜 좋아하는 것이 뭔지 몰라. 시간이 지나면 어쨌든 내려놓게 될 거야.”
말을 마치고 한지는 차마 정미의 눈을 보지 못한 채 몸을 돌려 떠났다. 정미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잡으려고 했지만, 끝내 아무것도 잡지 못했다.
그녀는 한지의 자취가 보이지 않을 때가 돼서야 마침내 중얼댔다.
“……이렇게 사과하는 게 어디 있어?”
‘오라버니가 내게 누명을 씌우고, 나를 오해했다가, 진상이 밝혀졌으니 그저 이를 사과하기를 계속 기다렸을 뿐인 건데. 오라버니는 왜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일로 사과를 하는 거야?’
오라버니의 마음을 알아차린 그 순간, 정미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더는 생각하지 않았다. 끈질기게 애걸복걸하는 건 그녀도 원치 않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정미는 그저 두 사람의 관계가 처음처럼 회복되길 바랄 뿐이었다.
하지만 처음으로 돌아가자고 말한 것도 오라버니였고, 처음처럼 돌아가지 못한 것도 오라버니였다!
정미는 말없이 손수건을 꺼내 그루터기 위의 눈을 털어내고는 앉았다. 그녀는 스스로를 비웃으며 생각했다. 맹세를 어기고도 기쁘지 않으니, 정말로 큰 손해를 입었다고.
멀리 있던 시녀가 급히 달려왔다.
“사촌 아가씨, 그 그루터기는 너무 차갑습니다. 앉으시면 안 돼요.”
“내가 눈을 쓸어냈어.”
“아이고, 그래도 안 되지요. 여자아이는 찬 바람을 쐬면 안 됩니다.”
“어째서?”
여자아이들이 알아야 하는 일은, 정미의 나이쯤 되면 어머니 된 사람이 자세히 알려줘야 했다. 하지만 정미 모녀는 관계가 소원했고, 원래 정미에게 유모가 있긴 했지만 나중에 내쫓아졌기에, 지금까지도 그녀는 이런 일에 어리숙했다.
“어쨌든 안 됩니다. 여자아이가 찬 바람을 쐬면, 나중에 병이 나 고생할 수 있어요.”
시녀의 얼굴이 붉어졌다. 자세히 설명하기가 민망해 그저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정미는 한지의 말들에 마음이 아파서 시녀와 더 실랑이할 힘이 없었다. 그녀는 시녀의 얼굴에 정말로 걱정이 묻어나는 것을 보고 말없이 일어나 그저 발길이 닿는 대로 천천히 걸었다.
시녀가 이를 보고 조용히 뒤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