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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난-11화 (11/375)

11화.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

눈앞이 갑자기 밝아지자, 정미는 저절로 감았던 눈을 떴다. 그녀는 앞에 서 있는 사람이 누군지 간파하고는 멍하니 물었다.

“왜 그러세요?”

“왜 그러냐고?”

용흔이 눈썹을 찌푸렸고, 사악함이 묻어나는 웃음을 지었다.

눈앞의 소년은 붉은 입술에 이가 하얬고, 눈썹은 먹으로 그린 것 같았다. 게다가 별처럼 반짝이는 눈이 한 사람을 똑바로 바라보면, 아무리 그가 화를 내고 있더라도 정을 품고 바라보는 것처럼 느껴져, 마주 보는 사람은 저절로 얼굴이 붉어지고 심장이 뛸 지경이었다.

그러나 정미는 마치 마음이 얼음장 같았고, 보통의 소녀들처럼 반응하지 않았다. 그가 사악한 웃음을 짓는 것을 보자 마음속에 경계심이 일어 무의식적으로 뒤로 반걸음 물러섰고, 눈살을 찌푸리며 바라보았다.

“너, 오늘 일부러 이렇게 재수 없게 구는 건가?”

용흔은 남녀유별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기에, 앞으로 다가가 정미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런데 그가 잡은 곳이 하필 팔꿈치를 다친 오른손이라, 정미는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들이닥치는 것을 느꼈고, 모두가 보는 앞이기에 문득 부끄러우면서도 분하고 아파져 와, 이 사람이 어떤 신분인지는 고려치 않은 채 발을 힘껏 짓밟아버렸다.

“쓰읍……!”

용흔은 정미의 간이 이렇게 클 줄은 예상치 못했다. 그는 아파서 손을 놓고는 화가 나 얼굴이 빨개졌다.

“못난 계집, 감히!”

그러나 갑자기 정미의 안색이 창백해지더니, 굵은 눈물방울이 뺨을 타고 떨어졌다. 용흔은 뒤에 하려던 말을 깜빡 잊어버렸다.

그의 기억 속에, 이 못난 계집이 우는 일은 아주 드물었다.

용흔의 기억 속에 이 못난이를 처음 만났을 당시 그녀는 겨우 다섯 살이었고, 하얗고 귀여웠으며, 머리는 짙고 까맸다. 다른 계집애들처럼 양 갈래로 둥글게 묶어 올린 것이 아니라 풀어헤친 것이 꼭 검은 비단 같았다.

어린 시절 그가 참지 못하고 머리를 잡아당기자, 못난 계집은 그를 힘껏 한 입 깨물었고, 화가 난 그는 냄새나는 진흙을 그녀의 머리카락에 묻혔다.

그는 그 못난이가 엄청나게 울고 가서 일러바치리라 생각했으나, 뜻밖에도 그녀는 어디선가 교도(*交刀: 가위)를 찾아와서는 막무가내로 진흙이 묻은 머리카락을 싹둑 잘라버렸다.

결국엔 두 사람은 화해하지 못했고, 그는 매를 맞았으며 못난이는 그녀의 어머니가 회인백부로 데려가 꼬박 반년 동안 외출하지 못했다.

두 사람의 앙심은 그때부터 남은 것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스스로 머리를 잘랐던 그때도 울지는 않았다.

“용흔!”

한지가 걸어오자 어색했던 분위기가 깨졌다.

“정미는 아직 어리니, 그 아이와 논쟁하지마.”

“누가 이 애랑 논쟁했다는 거야!”

정미가 우는 모습을 보아서인지 용흔의 마음이 좀 찝찝해졌고, 평소의 10분의 1만큼의 횡포를 부릴 힘도 없어지고 말았다. 그는 성내며 말했다.

“나는 그저 이 애가 할 일도 없다고 생각했지. 정말이지 못생긴 놈이 더 하다고…….”

여기까지 말하고 용흔은 괜히 조금 찔려서 재빨리 정미를 힐끔 바라보았다.

“내가 원해서 못생긴 건데, 당신과 무슨 상관인가요?”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아픈 곳이 들추어지면,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하듯이 울컥하기 마련이었다. 하물며 정미는 줄곧 착한 성미를 가진 이가 아니었기에, 바로 그의 말을 되받았다.

정미의 말은 단번에 작은 패왕의 성질을 폭발시켰다. 그는 바로 냉소하며 말했다.

“그래, 네가 원한 거라면 다른 사람과는 상관없는 일이지. 그래서 네가 한지를 끝까지 물고 늘어져, 수도의 모든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더라도 신경 쓰지 않았구나! 스스로 넘어지면서도 다치는 게 무서워 급히 정요를 잡아당겨 아래에 깔아버리더니, 이를 보는 사람이 네가 악독하다고 생각할 것이라곤 전혀 생각지 않으니!”

“그게 무슨 소리예요!”

정미는 마치 엄청난 우스갯소리를 들은 것마냥 눈이 커졌다.

‘내가 언제 둘째 언니를 잡아당겨 아래에 깔리게 했단 말이야?’

대문 앞에서 넘어졌던 그 장면이 머릿속에 점점 떠올랐다.

그때, 당황하고 혼란스러운 와중에 닥치는 대로 뭔갈 잡은 듯한데, 설마…….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둘째 언니가, 사실은 내가 끌어당긴 것이었단 말이야? 아, 맞아. 마차에서 내릴 때, 둘째 언니가 바로 내 뒤에 있었어!’

정미의 얼굴이 점점 창백해지더니 용흔과 날카롭게 맞서던 기세가 사라졌고, 자책하면서도 억울한 마음에 중얼거렸다.

“하지만 고의로 그런 게 아닌걸…….”

하지만 그 말을 들은 용흔은, 분노와 실망감을 느껴 그녀를 심각하게 쳐다보며 말했다.

“어쩌다 이렇게 변해버렸느냐!”

이 말을 한 용흔은 갑자기 그녀와 다투는 것에 흥미가 없어져, 그 매화가지를 아무렇게나 땅에 던지고는 몸을 돌려 자리로 돌아갔다.

어릴 적부터 다퉈왔기에 정미는 그런 용흔의 태도를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한지를 보며 입술을 깨물고 거듭 말했다.

“고의로 그런 게 아니야…….”

한지와 정미는 반 장(丈) 정도 떨어져 있었는데, 그의 웃는 얼굴이 거리 때문인지 조금 옅어 보이는 듯했다.

“정미, 돌아가 앉으렴.”

“지 오라버니…….”

한지는 뒤돌아보지 않고 사람들 중앙에 섰다.

정미와 정요가 대문 앞에서 나란히 넘어진 그 장면은 여기 아가씨들은 보지 못했다. 그러나 방금 용흔의 말을 듣고 모두 낮은 소리로 왈가왈부하기 시작했다.

한추화도 사촌 남동생에게 자초지종을 물었다. 그녀는 한지와 용흔이 다가오자 몸을 일으켜 용흔 앞에 서서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세손, 정미와 정요가 넘어진 일을, 제 눈으로 직접 보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제가 방금 사촌 남동생 세 명에게 물었더니 모두 그저 두 사람이 넘어진 것만 보았다고 합니다. 비록 정미가 당시에 위에 있어 정요처럼 심하게 넘어지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정미가 고의로 정요를 끌어 넘어트린 거라 말할 순 없을 겁니다.”

한추화는 여기까지 말하고는 정미를 한 번 쳐다보았다. 마음속으로 짧게 한숨을 쉬고는 이어서 말했다.

“비록 오늘이 한지의 생일이고, 이런 말을 하는 것이 물을 흐리는 것일 수도 있지만, 다행히도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가 형제자매이며 외부인은 없으니, 충돌과 오해가 생기면 터놓고 이야기하며 분명하게 풀 수 있을 겁니다.”

한추화는 앞으로 몇 걸음 다가가 정미의 손을 잡아당겨 자신의 옆으로 오게 한 후, 용흔을 똑바로 쳐다봤다.

“세손, 방금 모두들 편하게 하라 하셨으니, 오늘 제가 누이의 신분으로서 한마디 하겠습니다. 정미도 어쨌든 계집아이입니다. 확실한 증거도 없다면 세손의 방금 그 말들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세손이 이후 또 그런 말을 할 때에는, 부디 깊이 생각하세요!”

“내가 저 아이를 모함했다는 겁니까?”

용흔이 주먹을 꽉 쥐었다. 한추화가 ‘다른 사람들은 오직 두 사람이 땅에 넘어져 있는 것만 보았고, 정미가 정요를 잡아당긴 것은 보지 못했다.’라고 한 말을 생각하면, 화가 나면서도 난처했다.

용흔은 매번 정미가 나타나면 바로 말다툼할 준비를 했고, 주의력을 곧장 그녀에게 꽂곤 했다. 때문에 당시 분명 그녀가 정요를 끌어당겨 같이 넘어진 것을 똑똑히 보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당연히 이를 다른 사람에게 말할 수 없었다.

바로 이 때문에, 그는 유난히 화가 난 것이다!

정요의 처지에 화가 난 것인지, 정미의 변화에 화가 난 것인지, 소성년식을 지내지도 않은 소년은 아직 너무 어린 탓에 자신의 감정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했다.

용흔이 토라져서는 말했다.

“큰 사촌 누님께서 한지에게 물어보면 되겠지요.”

용흔이 한지를 언급하자, 정미는 마음이 또 뜨끔하여 한추화와 맞잡은 손을 저도 모르게 움찔거렸다.

한추화는 위로하듯 그녀의 손등을 토닥이고는 한지에게 물었다.

“한지, 정미가 어떤 사람이니. 어려서부터 같이 컸으니, 네가 나보다 더 잘 이해하고 있겠지. 세손께서 말씀하신 일, 똑똑히 본 게 맞니? 세손께 잘 설명해드리렴.”

한지는 저도 모르게 정미를 쳐다봤고, 그녀가 안절부절못하다 살짝 고개를 들고는 그를 향해 억지로 웃는 모습을 보자 마음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누구보다 정미를 잘 이해하고 있었기에 그는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정미의 고집스럽고 오만한 성정에 만약 이 일이 정말 억울했다면, 벌써 뒷일은 생각지도 않은 채 용흔과 맞섰을 터였다.

‘지금처럼 조용히 큰 사촌 누님 옆에 서서 불안해하진 않겠지. 하물며…….’

한지는 그때를 회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늘처럼 푸른색의 대나무 문발이 걷히고 옅은 남색의 피풍을 걸친 정미의 눈빛이 대문 쪽에 향해있다가 황급히 아래로 뛰어 내려갈 때, 이를 보던 한지의 눈길은 엉겁결에 정미 뒤에 바짝 붙어있는 연한 분홍색 연지를 바른 아름다운 ‘그녀’의 모습에 꽂혔다.

그런데 이윽고 정미가 그 아름다운 여인의 손을 잡아당겨 그녀를 아래에 깔고는, 나란히 땅에 넘어지게 된 것이다!

그때, 그의 마음은 옥죄어졌다. 꼿꼿이 땅에 패대기쳐진 그녀가 얼마나 아프겠는가? 더군다나, 위로는 정미가 누르고 있었으니!

한지는 똑똑히 당시의 심정을 기억했다.

가슴 아픔, 분노……. 그러나 고모님과 많은 사람들이 모인 앞에서, 그는 그저 참는 것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드러내지 말아야 할 감정을 조심스럽게 숨겼고, 다른 사촌들과 다름없는 모습을 보였다.

한지가 침묵하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의 표정이 제각각 달라졌다.

이는 사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모든 사람들에게는 아주 긴 어색함으로 느껴지고 있었다.

정미는 이 참기 어려운 긴 침묵 중에도 입술을 꾹 깨문 채, 기어코 답을 듣겠다는 듯이 한지의 눈만 바라보았다.

‘지 오라버니는 분명 알 거야. 나는 절대 고의로 그런 짓을 하지 않을 거라는걸! 둘째 언니는 나랑 가장 친한 자매임은 물론이고, 만약 그 짜증 나는 정동이었어도 그런 짓은 하지 않았을 거라고!’

이전의 정미였다면 분명 한지가 자신을 두둔해주리라 생각했겠지만, 반년 동안 한지의 냉담함과 소원함을 겪으니, 그다지 확신이 서지 않고 있었다.

때문에 이 열세 살의 아가씨는,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는 앞에서 소꿉친구이자 좋아하는 사람 앞으로 밀쳐져 긴장하고 불안해했다. 그저 판결과도 같은 그의 대답을 기다릴 뿐이었다.

한지가 따뜻한 눈빛으로 정요를 바라보았다. 애석하면서도 안타까웠다.

사촌 동생 정요의 성정은 지나치게 선량했다. 분명 정미가 그녀를 해친 것인데도 그저 정미 생각만 하니.

“지 오라버니, 한 마디라도 해주세요…….”

정요는 정미보다 키가 작았다. 그녀는 살짝 고개를 들고 재촉했고, 눈빛에는 간절함이 가득했다.

한지의 마음이 여려졌다.

그는 기억했다. 처음에 그와 친한 사람은 오직 고모님이 낳은 정미밖에 없었고, 서녀 출신인 정요에게는 줄곧 냉담했다. 그러다 어느 날, 정미가 물에 빠졌고, 그가 서둘러 도착했을 때에는 정미보다 두 살밖에 많지 않은 정요가 정미의 손을 꼭 붙잡고 있었다. 그녀는 그가 정미를 구해 올라올 때까지 버티고 나서야 탈진해서 기절했다.

그는 그 작은 소녀가 기절하기 전 했던 말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그녀는 ‘정미는 내가 가장 아끼는 여동생이고, 어쨌든 다치는 건 동생이 아니라 나이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한지는 저절로 그녀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정요는 점점 얼굴에 광채가 피어 많은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는데, 그 사람들 중 그도 포함되었다.

정요가 부탁한 이상, 그는 당연히 거절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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