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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난-9화 (9/375)

9화. 엄청난 길치, 남 군주

소녀들은 떠들썩한 분위기에 집중되어, 그 누구도 소년들이 다가왔음을 눈치채지 못한 채였다.

진령운은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꼈고, 정요는 묵묵히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정동도 다가와 위로해줬다.

그녀들을 돌보는 것을 담당했던 한추화는 몹시 화가 났고, 어두운 표정으로 어느 소녀에게 말했다.

“셋째야, 어제 머리가 조금 어지럽다 하더니, 내가 보기엔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것 같네. 먼저 방으로 돌아가 쉬는 게 좋겠다.”

그러곤 옆에 서 있던 시녀들에게 이어 말했다.

“너희가 셋째를 데리고 돌아가거라.”

시녀들이 망설임 없이 바로 ‘네.’ 하고 대답하고는 앞으로 나아갔다.

그들은 좌우로 한 명씩 한가(韓家)의 셋째 아가씨를 부축하고는 동시에 말했다.

“셋째 아가씨, 방으로 모시겠습니다.”

한추화가 화를 내면, 한가의 셋째 아가씨는 감히 반항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녀는 그저 억울한 듯 변명했다.

“큰언니, 나는 별말 하지도 않았는걸? 령운이 본인이 실수를 한 건데, 저 욱하는 성정 때문에 조금도 못 견디고 바로 뛰쳐나간 거야!”

옆에 더 어린 넷째 아가씨는 감히 입을 열 엄두조차 내지 못했고, 그저 고개를 격하게 끄덕이며 동감을 표했다.

“말대꾸하지 말거라. 뭐하니, 얼른 셋째를 데리고 가지 않고!”

한추화는 마음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아까 사촌 동생인 정미를 불쌍히 여기긴 했다만, 사실 어느 집에든 각자의 곤란한 사정이 없겠는가!

위국공 노부인은 원래 네 아들과 두 딸이 있었는데, 셋째 아들은 요절했으며, 차남은 젊은 나이에 전쟁터에서 죽어 유복녀 한추화만 남은 채였다.

장녀인 한 씨는 어릴 때 아주 많은 사랑을 받았지만, 시집간 후 부부 사이가 좋지 않았고, 차녀인 한옥주는 괴한에게 능욕을 당해 갓난아이를 버린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장남은 현 위국공 자리에 있었지만, 젊을 때 아버지를 따라 오랫동안 출정을 나간 탓에 혼인이 늦어, 자식은 여태까지 독자(獨子) 한지 하나밖에 없었다.

노부인은 상황이 심상치 않자 겨우 열다섯 된 막내아들을 일찍 장가들였고, 아내로 한눈에 보기에도 아이를 잘 낳을 것 같은 조 씨를 골랐던 바였다.

아직 어린 소년이었던 한가의 막내아들은 어깨가 넓고 허리가 두꺼운 조 씨를 결코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고, 둘의 합방은 늘 어머니의 성화에 못 이겨서 이루어졌다. 결국 얼마 안 가 그는 소실(*小室: 정식 아내 외에 데리고 사는 여자)을 들였고, 그 첩이 낳은 아이가 바로 둘째 아가씨 한추로(韓秋露)였다.

노부인은 자신이 모질게 핍박했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이 일을 보고도 모른 척했다. 조 씨가 연달아 아들 셋을 낳고 나니 한가의 막내아들은 임무를 훌륭히 완수했다 생각했다. 그래서 마음은 걷잡을 수 없이 아름다운 첩에게만 향할 뿐이었다.

셋째 아가씨 한추몽(韓秋梦), 넷째 아가씨 한추정(韓秋静)은 모두 첩실이 낳은 아이였고, 또 시녀에게서 태어난 다섯째 아가씨는 겨우 세 살이었기에 오늘 이 자리에 오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유일한 적녀가 시집을 가게 된다면, 셋째와 넷째는 비록 서녀일지라도 일등공신 위국공부의 아가씨였기에, 나가면 다른 집안의 적녀보다 그 지위가 가볍지 않았다.

노부인은 잇달아 두 딸에게 상처받은 후, 적출의 친손녀와 외손녀를 아낄 힘밖에 남아있지 않았고, 서출인 손녀에게는 모두 냉담하게 대했다.

적모인 조 씨는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호방한 성정의 부군은 아직 젊어 최소 20년은 더 즐길 수 있었고, 서자와 서녀를 얼마나 더 만들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이미 세 아들을 곁에 둔 그녀는 서녀들의 존재를 무시했고, 그들에게 신경을 쓰기에도 귀찮았다. 그래서 두 아가씨의 성정이 조금 골치 아픈 것이었다.

한추화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더는 셋째 한추몽을 쳐다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 진령운에게 사과했다.

“령운아, 용서하렴. 모두 내가 대접이 부족한 탓에 이런 일이 일어났……”

이때 정요가 급히 그녀의 말을 끊었다.

“추화 언니는 너무 겸손하세요. 다 제가 경솔한 탓입니다. 동생들을 데리고 나왔으면 언니인 제가 잘 돌봐야 했는데,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은 몰랐어요.”

이 소란을 지켜보던 남 군주가 도심이에게 귓속말했다.

“내가 말했지. 한씨와 정씨 두 집안은 큰 사촌 언니랑 정요만 쓸만하고, 다른 사람들은…….”

그녀는 반쯤 말하다 끊고, 고개를 살짝 절레절레 흔들며 웃는 얼굴로 말했다.

“그러니 내가 너랑만 친하게 지내는 거야.”

잠자코 있던 정미는 끝내 보다못해 벌떡 일어났다.

겨우 열세 살이었지만, 훤칠한 키의 소녀가 갑자기 일어나니 모두의 시선이 꽂혔다.

옆 사람이 뭔갈 묻기도 전에 정미는 주위를 둘러보더니, 앞에 쭈그려있는 두 시종에게 말했다.

“일어나서 들거라. 난 앉아서 손 씻는 게 익숙하지 않아.”

두 시종이 눈을 마주치더니, 급히 일어났다.

정미는 향기가 넘쳐흐르는 유리 대야에 손을 뻗어 씻었고, 다른 시종이 건네주는 부드러운 수건을 받아 닦은 후, 바로 수건을 대야 안에 내던졌다.

물보라가 일고, 새하얀 수건이 조금씩 물에 잠기며, 아름다운 장미꽃잎이 빙글빙글 떠돌다 점점 수건에 달라붙었다. 색다른 아름다움이었다.

이 행동은 무례하고 거칠었지만, 정미가 모든 걸 내려다 보는듯한 분위기를 자아냈고, 지금 사람들 앞에 선 그녀가 부모에게 총애를 잃고 ‘작을 미(微)’라는 이름을 가진 아가씨가 아니라, 제멋대로 굴 권력을 가진 금지옥엽(*金枝玉葉: 금으로 된 가지와 옥과 같은 잎. 고귀하거나 귀한 자식을 가리키는 말)처럼 보이게 했다.

모두가 묵묵히 쳐다보는 것을 본 정미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녀는 시큰둥한 듯하면서도 조롱하듯, 아직 여자아이의 티가 나는 옥구슬 같은 목소리로 우렁차게 말했다.

“단순히 손을 씻는 것뿐인데, 맞고 틀리고가 어딨어? 누구는 당연한 듯이 놀리고, 누구는 부끄럽고 분해서는 얼굴을 가려 도망가고, 결국 큰 사촌 언니와 둘째 언니가 난처하게 되었잖아! 게다가 만약 틀린 거라고 해도, 령운이가 잘못한 건 아니지.”

“그게 무슨 뜻이야?”

한추몽이 멍해져서는 물었다.

모두가 의아한 기색이었다. 때마침 도착해 이 소란을 지켜보던 소년들조차도 서로를 바라봤다. 원래는 이리로 다가오려고 했으나, 이때 저도 모르게 멈춰 섰다.

“너도 이 집 사람 중 한 명이잖아? 손님이 옆에 놓인 맑은 물이 무슨 용도인지 몰라 오해가 생겼는데, 집안사람으로서 미안해하기는커녕 웃음거리로 삼으니, 내가 보기엔 이것이야말로 창피한 일이란 말이야. 자기가 어떤 자리에 있는지도 모르고! 창피해야 할 사람은 창피해하지 않고, 창피하지 않아야 할 사람이 자책하여 주변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니, 이상한 일 아니겠어?”

정미는 말을 마친 후 자리에 앉고는, 애초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듯 옆에 있는 대추떡을 들고 먹기 시작했다.

진령운은 정미를 처음 본 사람처럼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그녀가 눈썹을 찌푸리고 불쾌한 표정으로 떡 안의 대추를 골라내 옆으로 던져버리는 것을 보고는 저도 모르게 눈을 희번덕거렸다.

‘그래, 그 얄미운 정미가 맞구나. 대추떡을 먹으면서 대추는 안 먹다니. 저 아이를 제외하면 아무도 저런 멍청한 짓을 하진 않을 거야!’

한추몽은 잠시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러다 문득 수치심이 분노로 변해, 아무렇게나 말을 내뱉었다.

“정말 웃겨 죽겠네. 대체 뭘 보고 창피해야 할 사람이 창피해하지 않았다는 거야? 그럼 정미 언니는, 큰오라버니한테 치근덕거려서 오라버니께 미운털이 박힌 걸 온 세상이 다 아는데, 창피한 줄도 모르고!”

정미의 왼손은 대추떡을 들고 있었고, 오른손은 아까 다친 팔꿈치 때문에 들면 아주 아파서 그저 늘어뜨린 채였다. 그녀는 한추몽의 말을 듣고는 날카로운 눈매를 가늘게 뜨며 태연히 말했다.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인데?”

늘 그렇듯이, 망신거리가 된 사람이라도 본인이 전혀 개의치 않는다면, 그와 논쟁하던 사람은 그저 노려보기만 할 수밖에 없었다.

한추몽은 말문이 막혀 무슨 말로 되받아쳐야 할지 떠올리지 못했고, 한추화가 보내는 경고의 눈빛에 성을 내며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자신이 방으로 돌아가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깨닫고는 기분이 조금 좋아졌다.

분위기가 활기를 되찾자, 아가씨들은 모두 좋아하는 간식을 먹으며 담소를 나누기 시작했다.

진령운은 앉아서 생각하고 또 생각하다가, 결국 정미에게 나지막이 말했다.

“네가 오늘 내 편을 들어줬다고 해서, 내가 고마워할 거라 생각 마.”

정미는 그녀를 흘겨보더니 차갑게 웃었다.

“누가 네가 고마워하는 걸 바란 줄 알아? 너도 그저 집안에서나 제멋대로 굴 수 있는 아이일 뿐인걸.”

그녀는 말을 마치고는 눈썹을 찌푸리더니, 반쯤 먹은 대추떡을 내려놓고 몸을 일으켜 떠났다.

이 소란을 지켜보던 남 군주는 간식에 별로 흥미가 없었다. 그녀는 은젓가락 한 쌍을 들고 따분한 듯 눈앞의 간식을 헤집다가 오른쪽에 있는 도심이를 건드리며 말했다.

“내가 갑자기 느낀 건데, 사람은 겉모습만 봐선 안 되는 것 같아.”

옆 사람이 대답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남 군주는 신경 쓰지 않고 말을 이었다.

“정씨네 셋째가 말을 독하게 하고 낯짝도 두껍고 난폭하긴 하지만…… 가끔은, 좀 재밌어.”

“고마워요.”

정미는 남 군주 옆 돌탁자에서 침착하게 연밥 간식을 집어 들고는,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그 모습을 보고 남 군주가 멍하니 중얼댔다.

“……심이는?”

왼쪽에서 도심이의 황당하다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여기 있어요!”

‘이 방향감각도 없는 단짝을 어찌하면 좋을까!’

아무리 군주(郡主)처럼 존귀한 신분이라 한들, 남이 옳은지 그른지 얘기하던 것을 딱 걸렸을 때면 민망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남 군주는 뜨거운 볼을 가리고 밖을 쳐다보았고, 저도 모르게 멍해지고 말았다.

“큰오라버니?”

매화나무 옆에 서 있는 자색 옷의 소년이 친여동생에게 발견되자, 눈썹을 치켜뜨고는 발을 들어 이쪽으로 걸어왔다. 몇 명의 소년이 이를 보고는 급히 따라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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