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교난-8화 (8/375)

8화. 정미에게는 좋은 오라버니가 있다

청설림이란, 이름 그대로 설경을 감상하는 곳이겠지만, 위국공부에서 감상하는 것은 눈이 아니라 매화였다.

매년 겨울이 되면 수백 그루의 매화나무에 꽃이 폈고, 백매와 초록 꽃술은 옥처럼 깨끗하고 얼음처럼 맑아 보였다.

바람이 가지를 치면 꽃잎이 우수수 떨어져, 멀리서 보면 그것이 꽃인지 눈인지 구별할 수 없게 되었고, 눈을 감고 향을 맡아야 그것이 매화임을 알 수 있었다. 청설림은 그리하여 붙여진 이름이었다.

<눈을 감고 매화향을 맡으며, 눈이 떨어지는 소리를 듣는다.>

위국공부는 비록 무장(武將) 가문이었지만, 위국공 부인 도 씨는 문학인이었기에 매년 열리는 상매(賞梅) 시회는 늘 떠들썩했으며 갈수록 성황을 이루었다.

정미가 한추화의 손을 잡고 천천히 걸어가자, 드넓게 핀 백매가 눈에 들어왔다. 발아래엔 겹겹이 떨어진 매화 꽃잎들이 눈더미처럼 쌓여 있었고, 신발이 매화향에 물들 것 같아 차마 밟을 수가 없었다.

귓가에 소녀들의 감탄하는 소리가 울렸지만, 정미에겐 익숙한 풍경이라 그저 그 모습이 산만해 보이는 듯한 눈빛이었다. 분명 마음은 저 멀리 가 있는 게 분명했다.

한추화가 살짝 웃으며 손을 뻗어 정미의 눈앞에서 흔들었다.

“정미, 무슨 생각 해?”

정미가 정신을 차리고 눈앞에 미소 짓고 있는 한추화를 보더니, 한 씨 앞에서의 차가운 모습은 숨기고 발끝으로 떨어진 매화를 살짝 걷어찼다. 아이 같은 개구진 웃음이 드러났다.

“어릴 때 지 오라버니가 자주 우리 형제자매들을 데리고 매화 숲에 와서 놀았던 게 생각이 나서. 평(平) 오라버니는 장난기가 심해서, 늘 나를 아무도 없는 곳으로 유인했고 난 항상 길을 잃었었지. 다행히 매번 지 오라버니가 나를 찾아 돌아왔고.”

“그래?”

한추화가 따뜻하게 정미를 바라봤다.

“난 그때 자주 함께 놀지 않아서 몰랐네.”

“응, 게다가 그때 지 오라버니가 몰래 우리를 데리고 간 거였거든. 둘째 외숙모는 엄하시니까, 아무도 언니를 부를 엄두를 못 냈지.”

“만약 불렀으면 바로 갔을 텐데.”

한추화는 꽤나 낙담한듯한 표정이었다.

한추화의 아버지는 위국공 노부인의 둘째 아들이었다. 젊은 나이에 전쟁터에서 죽었지만, 다행히도 당시 아내 류 씨의 배 속에 그의 아이가 있었고, 몇 달 뒤 태어난 유복녀(*遺腹女: 어머니 배 속에서 아버지를 여의고 태어난 딸)에게 추화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한추화는 한씨네 둘째 항렬의 유일한 핏줄이었고, 동시에 위국공부 첫째 손녀였다. 류 씨는 양자를 들여 대를 잇지 않는 대신, 딸이 자라면 사위를 들이기로 했다.

그래서 한추화는 어려서부터 또래 여자아이들보다 학업이 과중했기에, 아무도 그녀에게 놀자고 꼬드기거나 수업을 빼먹자고 할 수 없었다.

한추화가 다른 아이들을 부러워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의 한추화는 벌써 열여덟 살이었고, 그런 감정은 당연히 바람과 함께 날아간 지 오래였다.

그녀는 다른 소녀들보다 통통한 정미의 얼굴을 보고는, 참을 수 없어 손을 뻗어 꼬집으려고 했다. 그러나 손을 반쯤 뻗었을 때 안색이 살짝 변했다.

“정미, 네 얼굴이…….”

그녀는 잠시 멈칫하더니, 정미가 창피할까 봐 부드럽게 돌려 말했다.

“어디 부딪친 거야?”

“아니야. 입구에서 정요 언니랑 넘어져서, 팔꿈치만 좀 부딪쳤는데…….”

정미는 무의식적으로 뺨을 만지다가, 그제야 한추화가 정말 묻고 싶은 게 뭔지 깨닫고는 입술을 깨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추화는 이를 보고 눈치챈 듯 낮게 한숨 쉬고는 정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시간 날 때 자주 와서 언니랑 놀자. 내 둘째 동생은 얼굴을 잘 보이지 않고, 셋째와 넷째는 나이가 어리니, 나랑 같이 말동무해 줄 사람이 없어.”

그러고는 웃었다.

“너랑 정요가 사이가 아주 좋아 늘 붙어 다니는 걸 알아. 하지만 내가 보니까 정요가 얌전한 성정인 바람에, 옆에 있는 우리 바보 아가씨가 더 촐싹대는 것처럼 보이는 것 같아.”

“정요 언니와는 상관없이, 난 항상 이래왔는걸. 어떻게 하면 예쁨받는지 모르겠어.”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한다고 인정하는 것은 언제고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정미는 무의식적으로 입을 꾹 다물었다가, 또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눈에 보석조각을 담은 듯 빛을 냈다.

비록 수수한 옷을 입고 있음에도 정미의 얼굴이 바람에 말린 백매처럼 새하얘져, 이 순간만큼은 아주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줄곧 침착했던 한추화조차도 이 모습을 보곤 멍해지며 마음속으로 탄식하곤 정미의 아름다운 눈매를 아쉬워했다.

정미는 한추화가 안타까워하는 것도 모르고 열심히 이어 말했다.

“하지만 둘째 오라버니가 그랬는데, 사람의 품격은 가르침을 통해 얻을 수 있지만, 성질은 타고나는 거라 했어. 어떤 성정이든 장점이 있기 마련이고, 주변 사람들을 위해 자기 성질을 숨기면 삶이 힘들어질 거래. 난 그저 내 할 일을 하고 떳떳하기만 하면 돼.”

“철(澈) 오라버니가 말 잘했네. 오라버니가 너에게 정말 마음을 많이 쓰셨구나. 앞으로 모르는 게 있을 때 나에게 물어볼 시간이 없으면, 철 오라버니한테 물어보렴.”

정미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당연하지. 둘째 오라버니는 가장 좋은 오라버니야. 오라버니는 뭐든 다 알거든. 가소롭게도 정동은 늘 오라버니를 뺏어가려고 해! 걔는 몰라. 오라버니가 오 년 전에 말했거든. 나만이 오라버니의 동생이고 누구도 대신할 수 없다고 말이야.”

오 년 전이라면, 정미의 아버지가 동 이낭과 쌍둥이 남매와 함께 나타났을 때였다.

정미는 득의양양해져 싱글벙글하며 더는 아무런 걱정 없는 사람처럼 기뻐했다.

한추화는 저절로 감정이 북받쳐 오르는 것을 느꼈다. 사촌 동생의 이 단순한 성정을, 진정으로 사람을 볼 줄 아는 자의 눈이라면 어떻게 좋지 않게 보일 수 있겠는가?

그녀는 갑자기 장난기가 돋아 물었다.

“그럼 정아 언니와 정요는?”

정미가 그 물음을 듣고 잠시 멍해지자, 한추화는 피식 웃었다.

“네가 방금 철 오라버니는 너만 동생으로 생각한다며.”

정미는 순간 말문이 막혀 입을 벙끗거리고는 자신 없이 말했다.

“내가 말한 것도 아닌데 뭐.”

하지만 둘째 오라버니의 그 말들이 떠오르자,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아졌고 동시에 조금 부끄러워졌다.

진령운은 항상 그녀에게 횡포를 부렸지만, 가끔은 맞는 말도 했다.

한추화는 이를 보고 더는 놀리지 않고 손을 뻗어 가리켰다.

“도착했네.”

눈앞엔 소박하고 아담한 2층 목조 건물이 하나 있었고, 긴 복도가 그 건물과 이어진 채였다. 복도에는 동그랗거나 네모난 돌탁자가 자리했고, 탁자 위에는 달빛 같은 비단이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위에는 다양한 간식과 견과류가 가득 놓여있었다.

돌의자의 크기는 제각각이어서 들쭉날쭉한 것이 오히려 운치 있었고, 의자에는 도톰하고 화려한 방석이 깔린 채였다. 탁자끼리 서로 반 장(丈) 정도씩 떨어진 모습이었다.

복도 기둥 옆에는 시녀가 서서 명령을 기다렸고, 또 화로에 숯을 넣어 관리할 하녀도 따로였다.

이 장면을 보자 진령운의 눈에 선망이 스쳤다. 그녀는 백부에 얹혀살고 있었지만, 백부는 다른 자매들처럼 두 몸종과 어린 여종을 붙여 주어 같은 대우를 해주었다.

하지만 이렇게 밖으로 나오니, 부귀하고 궁궐 같은 위국공부는 비교할 것도 없이, 그녀의 집안은 다른 양갓집의 규모에도 미치지 못한 것이었다.

여기까지 생각하자, 그녀는 저도 모르게 정미를 슬며시 노려봤다.

어머니 말이 맞았다. 둘째 나리네 모녀보다 미운 사람은 없었다.

정아(*정미의 큰언니)는 어머니를 잘 만난 것도 모자라, 시집갈 때 집안의 재산도 다 써버렸다. 그녀의 조모는 태자비의 혼수가 너무 초라하면 안 된다고 했고, 어차피 정아가 잘되면 집안도 이익을 보는 것이라 말했다.

하지만 그녀가 태자비가 된 이후 몇 년 동안, 집안이 그 덕을 본 적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태자비의 체면을 세워 주기 위해 매년 은전을 보내야 해 집안은 갈수록 어려워질 뿐이었다. 이에 진령운 그녀까지 말려들어 빠듯하게 지내야 했던 것이다.

진령운이 속으로 화를 내고 있을 때, 마침 한추화의 목소리가 울렸다.

“이렇게 오래 걸었으니, 너희들 지쳤겠다. 여기서 쉬고, 손 씻고 다과를 먹자.”

한추화의 말에 진령운은 무의식적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때마침 옆에는 꽃이 조각된 나무 탁자와, 그 위에는 청화(靑花) 도자기 대야가 놓여있었다. 대야 안에는 맑은 물이 담긴 채였고, 탁자 옆에는 분홍색 옷을 입은 시종이 쭈그려 앉아 불집게로 화로 안에 숯을 넣는 중이었다.

그녀는 그 분홍색 옷의 시종이 불집게를 잡았던 손으로 대야와 수건을 들어 시중을 들 거라 생각하니, 조금 더러울 것이라 판단했다. 그래서 곧장 대야로 손을 뻗어 스스로 손을 씻어 내고 대야에 반쯤 걸쳐진 부드러운 수건으로 물기를 닦았다.

손을 반쯤 닦았을 때, 진령운은 분위기가 조금 이상한 것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사람들 모두가 제각기 다른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진령운은 옆에 있는 정동에게 묻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

정동은 난처한 표정으로 우물쭈물했다.

진령운은 더욱 당혹스러워져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까 정미를 몰래 비웃던 두 소녀가 같이 웃었다.

한추화가 두 소녀를 경고하듯 노려보더니 진령운에게는 봄바람처럼 따뜻하게 웃으며 말했다.

“내가 말하는 걸 깜빡했다. 그 물은 다 식은 물이야. 령운이를 푸대접해버렸네.”

그러고는 곁에 서 있는 시녀들에게 말했다.

“얼른 가서 물을 바꿔오지 않고 뭐하니.”

시녀들은 모두 눈살을 찌푸린 채 대야를 들고 줄지어갔다. 그중 조금 어려 보이는 시녀 한 명이 조금 이상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시녀들이 아직 긴 복도 끝에 이어진 목조 건물에 들어가지도 않았건만, 다른 시녀들이 그 안에서 줄지어 나왔다.

시녀들은 발소리도 없이 아주 재빠르게 아가씨들 앞에 도착해 두 사람이 한 조를 이루었다. 한 사람은 유리 대야를, 다른 한 사람은 새하얗고 보드라운 수건을 받들었다. 모두 아가씨들 앞에 쭈그려 앉아 일제히 말했다.

“아가씨, 손 씻으세요.”

유리 대야에 담긴 물은 맑고 투명했으며 그 위에는 장미꽃잎이 떠 있었고, 은은한 향기가 전해졌다.

만약 다른 향이었다면 진령운은 몰랐겠지만, 이 달콤한 향은 그녀가 아주 잘 아는 향이었다.

모친이 그녀를 백부로 데리고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하루는 오라버니가 문안하러 왔었고, 그녀에게 향로(香露) 한 병을 선물한 적이 있었다. 그녀는 흥이나 가져가서 사촌 언니들과 그것을 나눴지만, 질투가 난 정미는 고의로 그것을 깨부쉈다.

더 화가 나는 점은, 정미는 결코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중에는 심지어 옅은 주황색의 향로 한 병을 꺼내 그녀에게 자랑하듯 뽐냈다. 그것은 교천성의 당귤(*오렌지) 향로라며, 철 오라버니가 보내주신 거라고, 진령운의 향로를 탐낼 필요가 없다고 했다.

지금 나는 이 옅은 달콤한 향은, 바로 그 당귤향이었다.

진령운의 얼굴이 빠르게 붉어졌다.

이쯤 되니 그녀는 모든 게 이해되었다. 앞서 한추화가 물이 식었다며 다시 갈아오라고 한 것은 분명 그녀의 체면을 세워주려고 한 말일 테고, 앞에 놓인 물이 바로 아가씨들이 손 씻을 때 쓰는 물인 것이다.

그녀의 얼굴이 하얘지고 빨개지기를 반복하다가, 그윽한 향기가 퍼지는 유리 대야를 노려보며 어디 구멍이 있으면 숨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이때 물소리가 나더니, 소녀의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됐다, 얼른 치우거라. 이런 날씨엔 물이 금방 식어 누군가 오해하여 잘못 쓸 수 있으니.”

진령운이 벌떡 일어났고, 그 얼굴은 피가 떨어질 듯 붉어졌다. 그녀는 방금 말을 한 소녀를 잠시 매섭게 노려보더니, 더는 참을 수 없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정동은 진령운과 친하게 지내왔으니 이를 보고 일어나 쫓아가고 싶었지만, 어찌 더 불쌍해 보일 것 같아, 쫓아갈 듯 자리에서 잠시 일어났다가 이마를 짚으며 ‘어휴’ 하는 소리와 함께 다시 돌의자에 힘없이 털썩 주저앉을 뿐이었다.

정요는 진령운을 덥석 잡아 세운 뒤, 그녀의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달랬다.

“령운아, 얼른 뚝 그쳐. 별일도 아니고, 누구나 실수는 하는 법이야. 네 이런 모습을 지 오라버니가 보게 되면 더 속상해하실걸.”

정요의 말은 이치에 맞으면서도 자상하고 세심했다.

어느새 긴 복도 반대편의 매화나무 옆에는 여러 명의 소년들이 서 있었고,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이를 지켜보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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