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한 씨의 응어리
혼인 후, 둘째 나리는 한 씨에게 계속 미적지근한 태도를 보였다. 몇 년 후 한 씨는 그가 강도를 만나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곁엔 태어나자마자 태자비가 된 장녀 정아가 있으니, 한 씨와 전(前) 가주 모두 배 속에 있는 아이가 아들로 태어나 계속 대를 이을 수 있길 바랐다.
한 씨는 아이를 낳는 데 꼬박 이틀이나 걸려, 거의 죽다 살아났다. 쌍둥이를 낳았으나 먼저 태어난 남자아이는 무게가 세 근(*약 1.8kg)도 되지 않아 삼 일을 채 살지 못하고 죽고 말았다.
그러나 여자아이의 무게는 여섯 근(*약 3.6kg)이나 되었고, 젖을 빠는 힘이 여느 다른 아기들보다 셌다.
어의의 말로는, 어머니의 배 속에 있을 때 여자아이가 제 오라버니의 영양분을 다 빼앗아가 이런 일이 생긴 것이라고 했다. 더욱 안타까운 점은, 한 씨는 이번 난산으로 인해 더 이상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이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 후 한 씨가 가주(家主)가 되어 정씨 가문의 방계 친족 중 남자아이 하나를 양자로 들여 한 씨 이름에 올렸고, 한 씨는 차녀인 정미에겐 그다지 다정하게 대하지 않았다.
그리고 몇 년 후 둘째 나리가 동 이낭과 아이들을 데리고 나타났고, 동 이낭은 이후 또 아들을 하나 더 낳았다. 두 딸과 양아들 하나뿐인 한 씨는 차녀에게 더욱 차가워질 뿐이었다.
* * *
계 할멈은 두 모녀의 관계가 멀어진 이유를 여기까지 떠올리다가, 상란이 깜짝 놀라 소리치는 것을 듣고 얼른 정신을 차렸다.
“아! 아가씨의 얼굴이 부었어요.”
“뭐하러 그리 깜짝 놀라니!”
계 할멈이 상란을 흘겨보았다. 그러고는 빨갛게 부어오른 정미의 왼쪽 뺨을 보고 급히 위로했다.
“아가씨, 걱정하지 마세요. 좀 이따가 이 늙은이가 분을 발라 가려드리면 티 나지 않을 겁니다.”
위국공부에 가는 것이야말로 정미가 가장 좋아하는 일이었건만, 얼굴 때문에 가지 못하게 된다면 두 모녀의 관계는 더욱 나빠질 것이 분명했다.
여태까지 잠자코 있던 정미가 갑자기 눈을 떴다.
“분은 바르지 않을 거야!”
눈에 들어간 구정물을 씻어내자 빨갛게 충혈된 눈이 드러났고, 눈썹을 치켜세우고 노려보니, 그 모습은 전혀 어린 아가씨의 기세로 보이지 않았다. 나이가 많은 계 할멈조차 저도 모르게 한발 물러서서 겸연쩍게 웃었다.
“아가씨, 용모가 단정해야 외출을 할 수 있지요.”
“그럼 안 나갈래.”
정미는 거울 속의 자신을 바라보았다. 분을 씻어내자 드러난 까맣고 거친 피부와 부어오른 왼쪽 뺨, 그리고 여드름 몇 개까지, 정말 눈 뜨고 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녀는 걸상에 앉아 얼룩진 가죽 신발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아가씨, 고집부리지 마세요. 다른 아가씨들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정미는 입을 꾹 다물고 계 할멈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계 할멈, 고집부리는 게 아니라 정말로 가고 싶지 않아졌어. 미안하지만 어머……,”
‘어머니’ 세 글자가 그녀의 입안에 맴돌자 씁쓸함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정미는 괴로운 느낌을 겨우 억누르고는 말했다.
“……어머니께 전해줘.”
정미의 고집스러운 모습에 계 할멈은 고개를 젓고는 한 씨에게 보고하러 갔다. 남겨진 상란은 어색한 분위기에 급히 웃으며 말했다.
“아가씨, 잠깐만 기다리세요. 소인이 가서 삶은 계란을 가져와 볼에 문질러드리겠습니다.”
시종들이 떠나자 단화(団華)가 수놓인 강황색 문발이 살짝 흔들렸고, 정미는 그제야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어깨를 들썩이며 소리 없이 울기 시작했다.
* * *
계 할멈이 한 씨에게로 돌아가 보니, 정요가 한 씨에게 기대어 재롱을 피우는 모습이 보였다. 한 씨의 얼굴에 약간의 웃음기가 도는 듯했다. 그녀는 계 할멈의 인기척을 느끼고는 그쪽을 쳐다보았다.
“부인, 셋째 아가씨께선 기력이 없어 집에 남아 있고 싶다고 하십니다…….”
한 씨의 표정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그럴 줄 알았다. 또 고집을 부리는구나. 가기 싫으면 가지 말라지, 마음대로 하라고 하여라!”
정요가 급히 일어나 한 씨의 팔을 잡아당기며 부드럽게 말했다.
“어머니, 셋째가 아직 어려 어리광을 부리나 봅니다. 그 아이도 속으로는 가고 싶을 거예요. 오늘 억울한 마음에 나가지도 못하면 더욱 괴로워할 텐데, 그럼 어머니께서도 마음 아프시지 않겠어요? 제가 가서 한번 달래주면 될 거예요.”
“그 아이가 잘못한 것인데 뭐가 억울하다는 거니?”
한 씨는 눈썹을 치켜세우고는 더는 말을 잇지 않았다. 이는 정요의 말을 묵인한 셈이었다.
정요는 그 모습을 보고는 정미를 찾아 나섰다.
한 씨는 한숨을 쉬며 계 할멈에게 말했다.
“정아와는 비교할 것도 없고, 그 녀석이 정요의 반만큼이라도 철이 들었으면 좋을 텐데.”
“큰아가씨께선 정숙하시고, 둘째 아가씨께선 우아하시며, 셋째 아가씨께선 솔직하시니, 세 아가씨 모두 좋은 분이십니다.”
계 할멈이 다독이니, 한 씨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말했다.
“애써 위로할 필요 없다. 이미 마음을 굳혔어. 이번에 돌아오면 궁에 가 정아와 이야기해, 경력 있는 유모를 하나 골라서 그 못된 놈의 성질머리를 잡아 다시는 웃음거리를 만들지 않게끔 해봐야겠다. 내 체면만 구겨진다면 다행이지, 만약 정아까지 말려들게 하면 절대 용서할 수 없을 것이야!”
장녀 정아는 태자비이기에 품격을 지켜야 했고, 그것이 매우 힘들다는 것은 어미인 한 씨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한 씨는 말을 마치고 고개를 돌려 맞은편에 서 있는 설란에게 말했다.
“동 이낭에게 들라 하거라.”
* * *
오랫동안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동 이낭이 옷자락을 바스락거리며 들어왔다. 그녀는 사뿐히 한 씨에게 인사한 후, 슬며시 옆에 있는 넷째 딸 정동을 잡아당겼다.
이를 내려다보던 한 씨는 정동의 기분이 좋지 않음을 벌써 눈치챘으나, 동 이낭의 능청스러운 태도에 콧방귀를 뀌고 눈을 부라렸다.
계 할멈은 한 씨의 사나운 입꼬리를 보고는 얼른 달려가 한 씨를 흔들어 정신 차리게 해주고 싶었다.
‘부인, 그저 현명하고 선량한 정실인 척이라도 하시면 어디가 덧납니까? 나중에 주인어른께서 이 모녀가 억울한 일을 당했다는 걸 알게 되시면, 저는 또 부인의 안색을 살피며 눈치 봐야 한단 말입니다!’
계 할멈은 한 씨의 옆에 바싹 붙어서 슬며시 그녀를 건드렸다. 한 씨는 마지못해 말했다.
“일어나거라.”
“부인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동 이낭이 천천히 일어섰다.
한 씨는 동 이낭의 이런 모습이 꼴 보기 싫어 정색하며 설란에게 말했다.
“가서 둘째와 셋째에게 채비를 마쳤는지 물어보거라. 시간이 늦었다.”
그때 마침 문발이 걷혔고, 정미와 정요가 손을 잡고 들어왔다.
정미는 옷을 새로 갈아입은 채였고, 얼굴에 분을 바르지 않았지만 피부가 검어 붓기가 그리 티 나지 않았다. 그저 얼굴이 조금 통통해 보일 뿐이었다.
만약 그녀 혼자만 두고 본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그리 예쁘지 않은 아가씨라고만 생각했겠지만, 하필이면 같은 민낯이지만 오히려 더욱 청초한 정요 옆에 서 있으니 비교가 더욱 극심하게 되었다.
한 씨는 딸을 흘깃 쳐다봤다. 정미의 꼴이 보면 볼수록 한 대 얻어맞고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간 요괴의 얼굴 같아서, 갑자기 조금 전 자신의 행동이 후회스러워졌다. 그러나 스스로 체면을 구길 순 없었기에 답답한 마음을 억누르고 일어나 소매를 흔들었다.
“가자.”
그녀는 동 이낭의 옆을 성큼성큼 지나가며 눈길조차 주지 않았지만, 동 이낭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정동에게 위로의 눈빛을 보내고는, 그녀의 네 살배기 아들을 달래러 사뿐히 처소로 돌아갔다.
* * *
한 씨는 세 딸과 함께 염송당(念松堂)에 문안을 드리지 않은 채 지나쳐 바로 수화문(垂花門)으로 향했으나, 문안을 드리지 않는 것을 그 누구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여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회인백부의 노부인은 젊은 시절 과로하여 편두통을 앓아 밤에는 숙면을 취하지 못했고, 아침에 가장 깊게 잠들어있기에 이를 방해하는 것을 매우 싫어했다. 때문에 회인백부의 규율은 다른 집안과는 달리, 집안 어른들에게 문안을 드릴 때는 저녁이 된 지 한 시진이 지나야만 했다.
오늘 한 씨가 위국공부에 가는 이유는 조카의 생일 연회에 참가하기 위함이었다.
대량(大梁)에선 남자아이들은 관례에 따라 스무 살에 가관(*加冠: 관례를 행하고 머리를 틀어 올리는 일)을 하지만, 대부분의 부유한 집안에서는 열여섯 살 생일 때 아들에게 세상 물정을 잘 아는 하녀이자 첩인 통방(通房)을 곁에 붙여주었다.
그 때문에 열여섯 생일을 소(小)성년식이라 불렀으며, 심지어 이를 중요히 여기는 편이었다. 이때 대부분 가까운 친척과 벗을 초대했기에, 한 씨는 고모 된 사람으로서 당연히 일찍 가야 했고, 그래서 어제 미리 노부인에게 인사를 드렸다.
일행이 수화문 앞에 이르자, 장밋빛 조끼를 입은 시녀가 황급히 쫓아왔다.
“둘째 부인, 잠시만 기다리세요.”
한 씨는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 곧 쫓아온 시녀가 시누이인 정방영(程芳英)의 시종임을 알아보고는 표정을 굳혔다.
“무슨 일이냐?”
“둘째 부인, 저희 아가씨의 몸이 다 나았습니다. 저희 부인께서 아가씨께 둘째 부인을 따라가 견문을 넓히라 하셨으니,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그 시녀는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고 인사하며 말했다.
회인백부에는 총 세 집이 있었는데, 셋째 나리는 서자였고, 큰나리는 작위를 물려받았지만 그 재능은 평범하여, 집안의 위아래 사람들 모두 진정한 기둥은 둘째 나리라 여겼다.
하지만 둘째 나리는 정원(*正院: 집 중앙의 뜰)으로 내려오는 일이 드물었고, 그저 연교거에서 지내는 여인들에게만 신경을 쓸 뿐이었다.
둘째 부인인 한 씨의 친정은 명성이 자자한 위국공 집안이었는데, 이런 취급을 받아도 친모와 사이가 좋지 않은지, 한 번도 그녀가 친정에 돌아가 하소연하는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또한 한 씨의 장녀는 태자비였지만, 황태자가 태자비에게 냉담한 것은 모두가 알고 있었다. 지금은 백 년 전 황제의 명령이 걸림돌이 되어 어쩔 수 없이 태자비 자리를 차지하고는 있었으나, 나중에 태자가 황제로 즉위하면 황후의 자리를 그녀에게 내어줄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
이런 이유로 이 시녀를 포함해 집안 대부분의 사람들은 출신이 고귀한 둘째 부인도 그저 종이호랑이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어제는 열이 난다고 하지 않았나?”
시녀는 태연스레 답했다.
“어젯밤에 셋째 나리께서 주신 생강차를 드시고 오늘 괜찮아지셨습니다.”
한 씨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는 시누이인 정방영과 줄곧 사이가 좋지 않았다. 하지만 굳이 어린 아가씨를 난처하게 만들 생각은 없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마차에서 기다릴 테니 령운(灵芸)에게 서두르라고 하여라.”
정방영이 시집간 진(陈)씨 가문은 수도 근교의 대부호였으며, 선조 중 경관(京官) 출신도 있었지만, 지금은 출세한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집안의 기반이 두터워 중간 정도는 되는 편이었다.
허나 어찌 된 일인지 2년 전 정방영이 진씨 가문과 이혼한 후, 딸을 데리고 친정에 돌아왔고, 아들은 그 집에 남겨 두었다.
시녀가 말한 그 ‘아가씨’가 바로 진령운(陈灵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