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남남 같은 모녀 사이
정미는 그저 한 씨를 바라보며 차분한 눈빛으로 말했다.
“어머니, 왜 그러세요?”
한 씨는 침상에서 일어나 어두운 얼굴로 정미에게 다가오더니, 답답한 마음을 억누르듯 가슴을 들썩였다.
“지금 ‘왜 그러냐’고 묻는 거니?”
한 씨가 딸을 잡아당겨 거울 앞으로 데려갔다.
“네가 네 얼굴을 어떻게 칠했는지 좀 보거라! 아직도 포기를 못 해서 또 내게 망신을 줄 셈이냐?”
“어머니?”
정미의 눈이 커졌다. 어머니의 노여움이 그녀의 화장 때문일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녀의 나이에도 화장을 하지 않는 사람이 있긴 했다. 예를 들어 둘째 언니처럼.
‘맑은 물에서 연꽃이 핀다’는 말처럼, 둘째 언니인 정요는 깨끗한 피부를 가진 타고난 미인이었다. 하지만 대부분 소녀의 얼굴에는 많든 적든 결점이 있기 마련이라, 괜히 비싸기로 유명한 교천성에서 소녀들에게 향분(香粉)을 추천하는 것이 아니었다.
어머니는 늘 그녀에게 냉담했다. 심지어 생일 연회에서 웃음거리가 된 이후로는 꾸짖음까지 더해졌다. 하지만 정미는 분을 바르는 것마저 미움을 사게 될 일이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어린 나이에 뭐가 그리 신경이 쓰여 생일 연회 때 사촌 오라버니에게 허튼소리를 해! 나중에 네 큰외숙모가 나를 보고 뭐라고 했는지 알고는 있느냐? 한 글자 한 글자가 마치 내 따귀를 우렁차게 내리치는 것 같더구나!”
한 씨가 면전에 대고 호되게 꾸짖자, 정미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녀는 목구멍이 말라 입을 벌린 채 저도 모르게 물었다.
“큰외숙모께서 뭐라고 말씀하셨나요?”
정미의 외가는 일등공신의 위국공(衛國公)이었다. 예전에 용(容)씨가 천하를 쟁취했을 때, 그를 따르던 신하는 무수히 많았지만, 일등공신 국공에 봉한 자는 불과 여덟 명이었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작위를 박탈할 자는 박탈했고, 강등할 자는 강등하니 여덟 명 중 두 명만 남게 되었다. 그중 하나가 위국공부(衛國公府)의 한씨 가문이고, 정미의 큰외숙모 도(陶) 씨가 바로 현직 위국공 부인이었다.
정미의 기억 속에 큰외숙모는, 연약한 데다가 한 번도 그녀에게 고함을 친 적이 없었으며, 매번 갈 때마다 따뜻하게 웃으며 돌보아주셨던 분이었다. 정미가 어릴 때에는 그녀의 어머니가 외숙모 같았으면 좋겠고, 조모는 외조모 같았으면 좋겠다고 감히 몰래 생각하곤 했다.
그렇기에 정미는, 큰외숙모가 도대체 무슨 말을 했길래 어머니가 이렇게까지 화가 난 것인지 도무지 상상할 수가 없었다.
“무슨 말을 했는지 물어볼 낯짝이 아직도 있느냐?”
한 씨는 피가 거꾸로 솟는 듯한 느낌에 더욱 화를 냈다.
“감히 사촌 오라버니를 넘봐 신분 상승을 꾀하고, 학업에 지장까지 주다니! 네가 철이라도 들었으면 몰라, 기어코 내 체면을 구기는구나! 그러고는 몇 번이나 더 찾아가서 결국 내가 그런 말까지 듣게 하다니, 감히 한 마디도 못 하겠더구나!”
‘신분 상승이라고?’
정미가 눈을 끔뻑였다. 그제야 어머니가 무슨 말을 하는지 깨달았다.
그녀가 지 오라버니에게 마음을 털어놓은 것이, 다른 사람들 눈에는 신분 상승을 꾀하는 것처럼 보였단 말인가?
하지만 여기까지 생각이 닿자, 정미는 더욱 알 수가 없어졌다.
그녀의 큰언니는 태자비였고, 둘째 오라버니는 그 유명한 고(顧) 선생을 스승으로 모시고 문무를 겸비하여 은사께서 꽤 중히 여기는 제자였다.
게다가 고 선생은 현 황제의 여동생인 덕소(德昭) 장공주의 남편이었다. 정미는 큰언니를 보러 자주 궁에 드나들곤 했는데, 큰언니는 일찍이 황제의 종친 중 경왕을 제외하고, 덕소 장공주가 바로 황제가 가장 중요시하는 사람이라 말해주곤 했다.
고작 열세 살의 정미는, 이러한 조건들을 떠올려봐도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이전에는 더욱이 생각해보지 못한 것이었다.
그녀가 보기엔 외조모도 외조부님도 그녀에게 잘해주셨고, 큰외숙부와 큰외숙모도 온화하게 대해주셨으며, 사촌 오라버니인 지 오라버니 또한 그러했다.
만약 지 오라버니에게 시집을 가게 되면, 정미는 늘 그녀에게 잘해주면서도 그녀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쭉 함께 있는 것이 가능해질 터였다.
이런 게 ‘신분 상승’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멍한 표정을 짓는 정미를 보고, 한 씨는 화를 주체하지 못해 딸의 손목을 잡아당겨 경대를 가리켰다.
“이 못된 녀석아, 입술을 바르고 분칠을 해 사촌 오라버니에게 더 추근댈 셈이냐? 네년은 체면이고 뭐고 필요 없더라도 어미인 나는 그럴 수 없으니, 어서 가서 씻어내고 오거라!”
한 씨 역시 키가 훤칠했으며, 위국공부에는 무술이 대대로 전해졌기에 그녀도 어렸을 때 권법을 배운 적이 있었다. 이렇게 격노한 상황에는 손에 힘이 더욱 들어갔고, 때문에 손목을 붙잡혔을 때, 정미는 참을 수 없는 고통을 느꼈다. 게다가 손목의 팔찌가 경대 모서리에 부딪히자, 고통에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정요가 쿵 하고 무릎을 꿇더니, 정미를 대신해 머리를 조아리며 빌었다.
“어머니, 제발 화를 거두어주세요. 모두 제 잘못입니다. 제가 셋째에게 화장을 해주었습니다. 혼내시려면 저를 혼내세요!”
그녀는 바닥에 엎드려 이마를 쿵쿵 부딪쳤다. 정미가 발악하며 소리쳤다.
“어머니, 둘째 언니와는 상관없어요. 제가 스스로 한 짓입니다!”
“정미, 어머니께 말대답하지 마!”
정요는 이마가 퍼렇게 멍든 채 고개를 들고 정미의 치맛자락을 당겼다. 그리고 사방을 둘러보더니 입술을 살짝 깨물고는 용기를 내 한 씨에게 말했다.
“어머니, 저와 셋째가 철이 없어 어머니의 화를 북돋웠습니다. 어머니께서 꾸짖으시는 건 당연합니다. 다만…… 시종을 좀 물려주세요.”
한 씨의 손이 멈칫했다.
정미는 그제야 평소에 항상 어머니 곁에서 시중을 드는 여종 둘과 노파 시종이 방 안에 있다는 걸 깨달았다.
정미의 얼굴이 갑자기 붉어졌다. 지금 그녀는 그날 지 오라버니에게 고백한 후, 그 망할 녀석들이 나타났을 때만큼 난처한 심정이었다.
정미는 결국 참지 못하고 대들었다.
“제게 체면이 필요 없는 게 아니라 어머니께서 잊으신 듯합니다. 그날은 화조절이었어요. 어머니께서도 지난날 화조절 때 아버지께 반해서…….”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정미의 뺨에 우렁찬 따귀가 내리꽂혔고 그녀를 포함한 방 안의 사람들 모두가 멍해지고 말았다.
두 모녀는 줄곧 소원한 관계였지만, 한 씨가 손찌검을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게다가 한 씨는 딸을 때려 순간 스친 미안함은 이내 뒤로 미뤄둔 채, 화가 나서 몸을 벌벌 떨며 소리쳤다.
“시종을 내보내서 뭐 하려고? 누구도 나갈 수 없다. 잘못을 저질러놓고 어디 체면을 챙기느냐! 설란(雪蘭), 상란(霜蘭), 물을 길어 와 정미의 얼굴을 씻기거라!”
설란과 상란은 한 씨의 곁에 붙어 다니는 여종으로, 한 씨의 말을 듣자마자 서로 눈을 마주치고는 바삐 나갔다.
잠시 후 둘은 작은 방에서 나왔고, 한 사람은 세숫대야를, 한 사람은 수건을 받쳐든 채 나타났다.
두 사람이 다가와 설란이 수건을 물에 적시려고 하는 순간, 한 씨가 그 수건을 낚아채 물을 적셔 정미의 얼굴에 대고 문질렀다.
정미는 방금 얻어맞은 얼굴이 몹시 화끈거리던 참이었다. 거기에다 뜨겁게 적신 수건이 갑자기 닿자 발버둥 치며 피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한 씨는 더욱 힘을 주며 화를 냈다.
“감히 피해? 이 가짜 얼굴이 아쉬운가 보지, 응?”
얼굴의 분이 물에 섞이며 눈에 들어가자, 정미는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눈이 따가워 눈물이 주룩주룩 흘렀고, 분과 섞여 입으로 흘러 들어갔다. 달콤하면서도 씁쓸한 맛이 느껴져 역겨웠다.
정미는 눈을 꼭 감고 생각했다.
‘이번 생에 다시는 연지 가루를 만지지 않을 테야!’
“부인, 아가씨의 눈에 물이 들어간 것 같습니다. 많이 따가우실 텐데, 아무래도 제가 씻겨드리는 게 좋겠어요.”
방 안에 계속 서 있던 노파 시종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한 씨는 저도 모르게 멈칫했고, 정요는 이때를 틈타 빌었다.
“맞아요, 어머니. 좀 이따 위국공부에 가야 하잖아요. 만약 외조모님께서 셋째의 이런 꼴을 보면 분명 걱정하실 거예요.”
정요가 위국공부에 가야 한다고 말하자, 한 씨는 가라앉던 화가 도로 솟구쳐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러나 정미의 꼴사나운 얼굴에 아픔을 참는 기색이 역력한 것을 보고는, 손에 힘을 풀고 노파에게 명령했다.
“계(桂) 할멈과 너희, 정미를 데리고 난각(*煖閣: 화로가 있는 누각)에 가 씻기거라.”
“예.”
계 할멈이 정미를 부축해 난각으로 향하자 정요도 급히 뒤따르려 했으나, 한 씨가 소리쳤다.
“정요, 너는 여기 남아라. 네게 당부할 말이 있다.”
정미가 문턱을 지나자 계 할멈이 말했다.
“아가씨, 발밑을 조심하세요.”
정미는 아파서 차마 눈도 뜨지 못하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계 할멈은 이를 보고 마음 아파 한숨을 내쉬었다.
‘친모녀가 이렇게까지 갈라서는 일은 많지 않거늘…….’
계 할멈은 고개를 돌려 한 씨를 바라보았다. 한 씨는 담담한 표정으로 뭔갈 말하고 있었고, 정요는 공손히 서서 예의 바르게 연신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쯧쯧, 모르는 사람이 보면 둘째 아가씨야말로 부인의 친딸인 줄 알겠구나.’
마음속에 이러한 생각이 스친 뒤, 초라한 모습의 정미를 보니 어쩐지 동정심이 일었다. 계 할멈은 정미를 부축하며 앞으로 나아가면서 이 모녀의 관계가 이렇게 냉랭해진 연유를 떠올려보았다.
* * *
위국공부의 노부인에겐 두 딸이 있었고, 그중 장녀가 바로 정미의 어머니 한 씨였다.
한 씨는 어려서부터 부형(父兄)을 따라 무술을 익혀 시원시원한 성정을 가진 자였다. 그리고 열다섯 살이 되던 그해 화조절 날 정씨 가문의 둘째 나리와 우연히 마주쳤고, 첫눈에 반해 그에게 고백했다.
아름다운 처녀가 적극적으로 먼저 고백을 하는데, 마음이 없었다 한들 조금도 흔들리지 않을 사내가 있겠는가? 그러나 공교롭게도 그는 며칠 뒤 회시(*會試: 과거시험 중 하나로, 시험 중 거의 막바지 단계)에 참가해야 했기에, 다른 이들과 학문을 교류하러 나온 바였다.
아름다울 앞날을 생각하니, 그에겐 아무리 아리따운 처녀라도 필요가 없어서 깔끔하게 거절했다. 다만 너무 깔끔하게 거절한 탓에, 시원시원한 성정의 한씨 아가씨는 부끄럽고 분한 나머지 그 자리에서 허리춤의 채찍을 풀어 내리치고 말았다.
그리 세게 내리친 것은 아니었지만, 둘째 나리에게는 그것이 거칠고 포악한 인상으로 다가왔다.
소녀의 마음이란 정말 알 수 없었다. 한 씨는 조심히 채찍을 피하며 차갑게 떠나던 그의 모습을 떠올리니, 그 채찍질이 자신에게 꽂힌 듯 아픔을 느꼈고, 집에 돌아오자마자 그녀의 어머니께 이 일에 대해 말했다.
한 씨에게는 네 명의 오라버니가 있었는데, 그중 셋째 오라버니는 돌도 안 돼 요절했다. 그러고는 바로 그녀가 태어났으니, 한 씨의 부모가 얼마나 그녀를 응석받이로 키웠는지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
위국공부의 노부인은 회인백부의 입장이 난처하리라 생각했지만, 그들의 귀한 딸이 좋아하는 것을 어찌하겠는가. 수소문한 결과 그 나리가 약관(*弱冠: 20세)의 나이가 되기도 전에 향시(*鄕試: 과거시험 중 하나로 이에 합격하면 회시會試를 치를 수 있음)에 급제했다는 것을 알고는 더욱 기뻐하며, 급히 가장 유명한 중매인을 불러 도움을 구했다.
하지만 회인백부 측이 완곡하게 거절했고, 노부인은 이에 분노했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우리 딸이, 예로부터 양갓집 가문 중 별종으로 여겨졌던 회인백부에게 거절당하다니, 이 얼마나 어이없는 일인지! 회인백부의 사람들 모두가 보는 눈이 없는 것이 틀림없었다. 이렇게 안목이 좁은 집안에 어찌 자신의 소중한 딸을 시집보낼 수 있겠는가!
노부인의 태도가 빠르게 변하자, 한 씨는 적응이 되지 않았다. 이에 충동적으로 궁에 들어가 벗인 풍(馮) 황후에게 울며 하소연하다 황제와 마주쳤다.
……그렇게 회시 합격자 명단이 붙던 그 날, 줄곧 손님들을 문전 박대하던 회인백부가 사람들 앞에서 진급 소식을 알리려고 도착했을 때, 황제로부터 둘째 나리와 한 씨의 혼인을 명하는 성지가 바로 뒤따라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