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정미의 필살기
자매가 이연원에 도착하기도 전.
몇 년간 정미의 철천지원수였던, 이복자매 정동(程彤)과 그녀의 어머니 동(董) 이낭(*姨娘: 아버지의 첩)을 그 입구에서 마주쳤다.
정미는 정동 모녀에 대한 미움이 어디서부터 비롯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매번 부딪힐 때마다 이유를 불문하고 아버지가 정미만 꾸짖었기 때문일까, 혹은 매번 정동이 울 때마다 다른 이들이 정미를 쳐다보는 그 눈빛 때문이었을까.
아니, 굳이 이유를 찾을 필요조차 없을지도 몰랐다. 정미가 태어난 후 행방불명되어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아버지가, 오랫동안 과부 신세였던 어머니 앞에 정동 모녀와 함께 나타났을 때, 정미가 그 모녀에게 느낀 감정은 혐오 외에는 없었다.
정미의 아버지, 정(程)씨 집안의 둘째 나리는 4대에 불과한 회인백부(懷仁伯府)의 자손 중 가장 뛰어난 자였다.
그는 어엿한 진사(進士) 출신이었며, 심지어 서길사(庶吉士)로 선출되기까지 해 한림원(翰林院)에 예속되었던 인물이었다.
정미의 고조부가 아무것도 없는 맨발의 의사(*농촌 마을에서 기초 의료 훈련을 받고 근무한 의료 제공자)에서 갑자기 작위를 물려받아 이를 세습하게 되었으니, 정씨 가문에서 정미의 아버지는 그야말로 개천에서 봉황이 나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정씨 가문에는 몇 대째 인재가 없었으며, 글자를 아는 것만으로도 조상의 이름에 먹칠하지 않는 것이라 여길 정도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모난 돌이 정을 맞듯이, 그는 한림원에서 3년 동안 일하고 지방관으로 3년간 임한 후 귀경한 뒤, 득의만면하게도 회임한 부인을 두고 그의 첩과 다시 길을 나서다가 강도를 만나 낭떠러지로 떨어지고 말았다.
부인은 수없이 울다가 결국 그와 같이 나섰던 첩의 시신만 찾아 돌아왔고, 정씨 집안의 둘째 나리는 시신도 남지 않은 이름뿐인 명색(*名色: 실속 없이 그럴듯하게 불리는 허울만 좋은 이름)이 되고 말았다.
그때 찾아온 시신이 바로 둘째 언니, 정요의 생모였다.
그런데 정미가 여덟 살이 되었을 무렵, 죽은 줄만 알았던 둘째 나리가 젊은 여인과 어린아이 둘을 데리고 나타났다. 수재(*秀才: 과거시험 중 첫 관문을 통과한 급제자)인 동 이낭의 아버지가 그를 구해줬는데, 그는 기억을 잃고 몸을 회복하는 동안 동 이낭과 부부가 되었고, 나중에 기억을 되찾자 비로소 집에 돌아오게 됐다는 것이다.
여덟 살의 정미는 자기보다 몇 살 어리지도 않아 보이는 쌍둥이 남매를 보며 꿈이라 믿고 싶었다. 그녀가 망연히 어머니를 바라보면 어머니의 싸늘하고 절망적인 눈빛만 보일 뿐이었다.
이런 우연으로 동 이낭은 정 씨네 둘째 나리의 첩이 되었고, 다른 집의 귀첩(貴妾)보다도 더 귀한 대접을 받았다. 아버지는 어머니께 동 이낭의 아들이자 집안의 셋째 아들인 정희(程曦)를 호적에 올리기를 요구했고, 어머니는 이를 완강히 거절했지만, 딸인 정동만은 어쩔 수 없이 올리게 되었다.
더욱 화가 나는 것은, 아버지가 정동 남매가 집에 있을 때는 동 이낭을 ‘어머니’라 부르는 것까지 허락했다는 것이다!
이 모든 것 하나하나가 자명하게 벌어진 일인데, 어찌 정미의 미움을 사지 않을 수 있겠는가? 몇 년 동안 맞붙다 보니 정미는 정동의 울먹이는 얼굴을 마주칠 때마다 신고 있는 꽃신을 벗어, 그 낯짝에 던져버리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둘째 언니랑 셋째 언니였구나.”
가냘픈 소녀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정미는 눈을 내리깔고 자신의 사슴 가죽 신발을 보며 유감스럽다고 생각했다.
‘지금이 여름이었으면 땀 냄새가 나는 신발을 던져서 속이 시원해졌을 텐데!’
정요는 조심스럽게 정미의 옷자락을 잡아당기고는 먼저 예를 갖춰 인사했다.
“동 이낭.”
원칙상으로 정요는 첩실에게 예를 갖출 필요는 없었지만, 동 이낭은 그 출신이 다르기에 기꺼이 가벼운 예를 차리되, 친밀함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예의를 벗어나진 않아 아무도 흠을 잡을 수 없을 정도였다.
동 이낭이 웃음을 띠며 말했다.
“둘째 아가씨를 뵙습니다.”
정동은 정요를 볼 때와 정미를 볼 때의 표정이 달랐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둘째 언니가 아침부터 셋째 언니를 도우러 갔구나. 이렇게 마음을 쓰는데, 셋째 언니가 과연 감사히 여길지 모르겠네!”
정동의 도발을 들은 정미가 눈썹을 치켜세우고 차갑게 말했다.
“이 울보야, 다시 함부로 지껄이면 네 입을 갈기갈기 찢어버릴 테니 조심해.”
“누가 함부로 지껄였다는 거야?”
정동의 말투에는 조금의 분노도 담겨있지 않았다. 분명 시비를 걸고 있었지만, 목소리만큼은 아주 부드러웠다. 오히려 정미의 차가운 목소리가 유달리 두드러져, 지나가는 하인들이 몇 번이고 쳐다보며 ‘셋째 아가씨께서 또 넷째 아가씨를 괴롭히시는구나’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정동이 히죽이며 물었다.
“기억 안 나? 올해 초 상매연(赏梅宴) 때, 지 오라버니가 둘째 언니의 매화시를 아주 칭찬했었지. 그때, 셋째 언니는 화가 나 발을 동동 굴렀었잖아. 내가 다 봤어.”
이에 정미가 보기 드물게 뜨끔한 모습을 보였다.
그렇다. 그녀는 가끔 둘째 언니의 재능에 질투가 나 참을 수 없었다. 이는 사촌인 지 오라버니가 둘째 언니를 칭찬하는 기색을 보일 때마다 더욱 그러하곤 했다.
왜냐하면 지 오라버니가 정미에게는 단 한 번도 그런 기색을 보인 적 없었으며, 늦은 밤까지 시 공부를 하다 시집을 안고 잠이 들어 다음날 그녀의 침이 시집을 망가트릴 정도로 그녀도 매일 공부를 했음에도, 그녀는 절묘한 시 한 구절조차 읊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둘째 언니가 말하길, 글은 본디 자연스럽게 지어지는 것이고, 어쩌다 한번 훌륭한 문장이 나오는 것뿐이라 했지만, 정미는 자신에게 그런 영감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게 뭐 어때서? 나랑 둘째 언니가 어려서부터 같이 자라 서로 친한 게 질투 나는 거면, 그냥 그렇다고 말해. 뭐하러 쓸데없는 소릴 하니?”
정미가 정요의 팔짱을 끼고 정동을 흘겨보고는 허리를 꼿꼿이 세워 곁을 지나갔다.
정동은 갑자기 코를 훌쩍이더니 정미를 보고는 말했다. 줄곧 부드러웠던 그녀의 목소리가 마침내 조금 떨리고 있었다.
“오늘따라 자신감 넘친다 했더니, 교천성의 지분을 발랐구나. 안타깝게도 아무리 좋은 지분이라도 셋째 언니가 쓰니, 둘째 오라버니의 성의를 낭비한 거나 다름없네.”
회인백부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생활을 하다가, 최근 몇 년에서야 사정이 조금 나아지기 시작했다. 한 상자에 은 열 냥이나 하는 교천성 지분은 이런 집안의 아가씨들이 쉽게 쓸 만한 것이 아니었다. 깊게 생각할 필요도 없이, 이는 또 둘째 오라버니가 보내준 것이 분명했다.
정동이 정미의 외모를 비하하는 것은 늘상 있는 일이었다. 다만 정미가 머릿속에 울리는 목소리의 모진 말들을 겪은 이후엔, 정동의 공격쯤은 별것도 아니게 됐을 뿐이다. 정미는 화를 내기는커녕 웃으며 말했다.
“둘째 오라버니는 나를 너무나도 아껴서 분을 어떻게 쓰든 전혀 신경 쓰지 않아. 안타깝게도 누구는 아무리 아껴 쓴다고 해도 보내줄 사람이 아무도 없나 보네.”
그러고는 동 이낭을 한 번 훑어보고 방긋 웃었다.
“아, 깜빡했네. 교천성 지분은 네가 자주 쓰는 거였지? 화(花) 이낭이 네게 주잖아.”
정미는 말을 마치고는 정요를 데리고 멀리 떠나갔다. 서로를 마주 본 정동 모녀의 눈에는 분노가 가득했다.
정미의 ‘화(花) 이낭’ 한마디는, 동 이낭의 아픈 곳을 후벼팠다.
앞서 말했듯이, 동 이낭의 아버지는 수재였기에, 동 이낭의 학문 수준은 말할 것도 없었다. 게다가 아름다운 마음씨까지 갖추어 정 씨네 둘째 나리와 서로 시를 읊으며 옆에서 짝이 되어주니, 참으로 화목하고 보기 좋은 한 쌍이었다.
둘째 나리는 바로 동 이낭처럼 다정다감한 재능있는 여인을 좋아했다.
동 이낭의 유일한 단점이라면 안타깝게도 이름이 ‘춘화(春花)’라는 촌스러운 이름이라는 점이었다.
예전엔 산골 고향의 이웃들이 유일한 수재인 동 이낭의 아버지를 매우 존경하여, 이 수재의 외동딸에게도 사람들이 양갓집 규수를 부르는 방식을 따라 ‘동가네 아가씨’라고 부르곤 했다.
그런데 동 이낭이 회인백부로 들어가자, 줄줄이 무릎을 꿇은 시종 중 맨 앞의 시종이 그녀를 ‘화 이낭’이라고 불렀다. 그녀가 이를 듣고 둘째 나리 품에 안겨 울음을 터트리니, 그는 불처럼 화내며 그 시종을 빨래방으로 내쫓았다. 이때부터 백부 안에서는 정미만이 가끔 ‘화 이낭’이라는 말을 입에 담곤 했다.
정동은 정미가 떠나는 뒷모습을 노려보며 손수건을 쥐어뜯었다.
그녀는 둘째 오라버니가 어째서 정미에게만 잘해주는 건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자신에게 차갑게 대하는 거라면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둘째 오라버니는 그저 방계혈족에서 온 양자일 뿐이고, 그가 백부에 들어왔을 땐 아버지가 계시지 않았기에 둘째 항렬인 그가 대를 이을 수 있었던 것인데, 어째서 정미와 남매의 정이 그렇게도 깊은 걸까?
남에게 예쁨을 받아야 한다면, 둘째 언니가 정미보다 훨씬 낫지 않는가?
만약 정미가 적녀라서 그런 것이라면, 정동이 여기 온 뒤 2년간은 큰언니 정아(程雅)가 아직 시집가지 않았을 때인데, 그때 둘째 오라버니는 나이가 비슷한 큰언니에게도 정미만큼 잘해주지는 않았다.
정동은 생각할수록 기분이 상해 마음이 쓰라려 오는 것을 느꼈다.
집안의 셋째 도련님인 정동의 쌍둥이 남동생은 그녀보다 반주향(*半柱香: 향이 절반 정도 타는 시간으로, 약 15분)정도 늦게 태어났을 뿐인데, 어려서부터 고지식하고 재미도 없을뿐더러, 정동에게 좋은 오라버니가 생길 뻔한 기회조차 앗아가 버렸다.
둘째 오라버니와 셋째 도련님은 적자가 아니라 작위를 물려받을 수도 없는데, 이렇게 서로 적대할 필요가 있단 말인가? 항상 그녀가 둘째 오라버니에게 호의를 베풀어도 오라버니는 늘 시큰둥하니, 정동은 화가 날 수밖에 없었다.
“정동, 우리도 어서 가자꾸나.”
동 이낭이 평정심을 되찾고 딸의 어깨를 토닥였다.
* * *
이연원의 입구가 보이자, 정요가 한숨 쉬며 말했다.
“정미, 아까 왜 동 이낭의 아픈 곳을 건드렸어? 아버지가 아시면 또 널 꾸짖으실 거야.”
아버지 얘기를 꺼내자 정미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고 우물댔다.
“나도 너무 화가 나서 그렇게 말한 거야.”
“나도 알아. 하지만 입버릇을 조심해야 해. 또 구설수에 오를 수도 있으니까.”
정미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안심해 언니, 자주 입에 담지 않을 거야.”
‘만약 너무 자주 말해서 동 이낭이 익숙해지면 어떡하라고?’
두 자매는 이연원에 도착해 손을 잡고 들어가 함께 입을 열었다.
“어머니를 뵙습니다.”
그러자 침상에 앉아있던 한(韓) 씨가 고개를 들었고, 정미의 하얗게 분칠한 얼굴을 보고는 안색을 굳혔다.
한 씨는 손끝의 찻잔을 들어 내던졌다.
흰 바탕에 붉은 매화가 그려진 도자기 잔이 정미의 발끝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고, 찻물이 그녀의 치맛자락을 적셔 자국이 선명히 남았다.
정요의 얼굴빛이 하얗게 질렸다.
“정미, 괜찮아? 안 데였어?”
정미가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그냥 따뜻한 물이었어.”
열세 살의 정미는 마치 어린 연꽃이 한쪽 봉오리만 피워낸 듯, 얼굴에 아직 어린 티가 남아있는 소녀였지만, 갑자기 날아온 찻잔과 어머니의 노여움에도 유난히 담담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