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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난-1화 (1/375)

1화. 봄바람

날이 채 밝기도 전이었지만, 소녀의 규방(閨房)에는 등불이 켜져 있었다.

정미(程微)는 낡은 경대(*鏡臺: 거울을 달아 세운 화장대) 앞에 앉아, 금박 장미꽃 문양이 새겨진 서양경(西洋鏡) 속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거울에 비친 소녀는 겨우 열서너 살쯤 되어 보였다. 그녀는 파랗게 그린 먼 산 같은 눈썹을 가졌으며, 눈썹 아래에는 눈꼬리가 살짝 올라간 눈이 있었다. 커다란 눈동자는 까맣고 빛났으며, 얼굴은 계란처럼 갸름했다. 누가 봐도 풋풋한 아가씨의 얼굴이었다.

다만 까맣고 거친 피부, 이마와 볼에 난 여드름, 턱에 남은 여드름 자국 때문에, 사람들은 소녀를 한 번 보고 나면 눈길을 거두곤 했다.

그러나 정미는 거울 속을 몇 번이고 바라보았다. 그리고 붉은 칠을 한 모란꽃 상자를 열어, 작은 글씨로 ‘교천성(巧天成)’이라 새겨진 지분(*脂粉: 연지와 백분)을 꺼내 조심스럽게 얼굴에 발랐다.

그때, 날카로운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분칠하지 마. 내가 말했잖아. 태어날 때부터 못생긴 얼굴은 갈아엎어야지, 화장으로 한 겹 한 겹 덮어봤자 무슨 소용이 있니?」

정미는 잠시 손을 멈춘 후, 무표정으로 옆의 시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환안(歡颜), 나 어때?”

‘환안’이라고 불린 그 시녀는 아름다운 처녀였지만 눈치가 없었다. 그녀는 정미의 얼굴을 유심히 살펴보고는 말했다.

“너무 하얘요. 어제 아가씨가 제게 주신 찐빵 같아요!”

정미의 입꼬리가 굳어지자 반대편에 있던 시녀가 급히 말했다.

“아가씨, 저 헛소리는 듣지 마세요. 이 교천성 지분을 바르시니 얼굴이 마치 맑은 연못에 핀 옥련(玉蓮) 같습니다. 사촌 공자께서 보시면 분명 좋아하실 거예요.”

정미의 입꼬리가 들썩였다. 곧 지(止) 오라버니를 만날 생각에 그녀의 얼굴에 기쁜 기색이 떠올랐다. 정미가 턱을 살짝 치켜들며 말했다.

“허튼소리 하지 마. 이게 지 오라버니와 무슨 상관이야?”

그러면서도 정미는 하얀 손수건을 꺼내 얼굴에 바른 분을 닦아내었다.

정미는 원래 두 시녀 중 입에 꿀 바른 말을 잘하는 교용(巧容)을 더 마음에 들어했다.

그러나 최근 반년 동안 머릿속에서 울리는 그 ‘목소리’가 갈수록 매몰차졌고, 그런 와중에 환안의 눈치 없는 말들을 들으니 그다지 우울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솔직함이 오히려 더욱 믿음직스럽게 느껴져 마음이 바뀌어버리고 말았다.

정미의 행동을 본 교용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그녀는 환안을 매섭게 한 번 흘겨보고는 약삭빠르게 말했다.

“환안이 말을 잘못한 겁니다. 우리 아가씨는 어느 누가 보아도 예쁘시지요.”

그때, 그 ‘목소리’가 또 머릿속에 울렸다.

「어디 한번 더 닦아봐. 네 얼굴에 가득한 여드름 자국이 또 드러날걸? 내가 말했잖아. 네가 내 말을 듣고 피를 좀 묻히면 이깟 여드름 자국은 물론이고, 이 검은 얼굴도, 사발 구멍만 한 흉터도, 다 갓 태어난 것처럼 깨끗해질 수 있다니까?」

평온하던 정미의 눈에 두려움이 내비치더니, 일순간 차갑게 소리쳤다.

“닥쳐!”

그러자 교용은 잠시 멍해졌다가 재빨리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었다.

“소인이 말실수를 했습니다…….”

이에 정미는 피곤하다는 듯이 손을 내저었다.

“너희 모두 나가보렴.”

두 시녀가 물러나자, 정미는 그제야 이를 악물고 허공에 나지막이 말했다.

“다시는 그런 허튼소리 하지 마. 나는 이제 다 컸어. 너 같은 망령이 하는 감언이설에 속아 넘어가지 않는다고.”

그러나 정미의 목소리는 아직 어린 티가 나 그다지 위협적이지 않았다. 머릿속의 목소리가 비아냥거렸다.

「하하, 사실 흔들렸구나? 그래서 이렇게 내 말 듣기를 겁내는 거지?」

정미는 입을 다물고 생각했다.

이 악귀는 아주 사악한 게 틀림없었다. 여드름 자국을 없애는 방법도, 피부를 하얗고 보드랍게 하는 방법도, 심지어 속눈썹을 길게 하는 방법까지 이 녀석이 전부 알고 있다고 하니, 어느 소녀가 이를 듣고 흔들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다행히도 그녀는 예전에 둘째 오라버니에게 책을 읽어달라고 하는 것을 좋아했고, 요괴가 사람을 홀려 결국 사람의 생명을 앗아갔더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기에 그 목소리에 속아 넘어가지 않았다.

정미가 꿈쩍도 하지 않자, 목소리가 한층 더 매몰차게 말했다.

「쯧쯧, 네가 이런 모습이니까 네 사촌 오라버니가 널 거절한 거야!」

“헛소리, 지 오라버니는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는 사람이 아니야!”

정미는 정말로 화가 나기 시작했다.

외조모 댁엔 사촌 언니들이 많았다. 하지만 외가에 가면 지 오라버니가 늘 그녀의 손을 잡고 데리고 다니며 꽃구경을 시켜줬고, 간식을 함께 먹었으며, 심지어 나무에 올라 개미들이 이사를 하는 모습까지 함께 구경했던 기억이 있었기에, 사촌 언니들보다 오라버니가 훨씬 좋았다.

그녀가 조금 자란 뒤에는 오라버니가 더 이상 그녀의 손을 잡아주지 않았지만, 여전히 그녀에게 상냥하고 친절했다.

정미는 예전엔 자신의 외모로 인해 괴로워하곤 했다. 하지만 그녀가 좋아하고 그녀를 좋아하는 사람, 예를 들어 지 오라버니 같은 사람은 결코 외모를 이유로 그녀를 내친 적이 없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자, 이 괴로움은 점점 잊혀져가고 있었다.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는 자가 아니라면, 네가 날이 밝기도 전에 분을 바른 건 무엇 때문이지?」

이 말에 정미의 얼굴에 난처한 기색이 스쳤지만, 이내 태연스레 말했다.

“오라버니는 신경 쓰지 않지만, 나는 오라버니에게 더 예쁘게 보이고 싶기 때문이지.”

정미는 그 목소리가 다시 울리기 전에 이어서 말했다.

“어쨌든 난 너에게 홀려 피를 묻히니 뭐니 하는 거짓말에 넘어가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일찌감치 체념하고 더는 귀찮게 하지 마!”

그러자 그 목소리는 갑자기 조용해졌고, 문밖에서 교용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가씨, 둘째 아가씨께서 오셨습니다.”

정미의 표정이 금세 풀렸다.

“어서 들어오시라 하렴.”

일어서서 두 걸음도 채 걷지 않았는데, 열대여섯 살쯤 되어 보이는 소녀가 병풍 뒤에서 익숙한 듯 돌아 들어왔다.

그녀는 한창 예쁠 나이의 아가씨였다. 청초하고 단정했으며, 몸매도 적당했고, 동작 하나하나에 교양이 드러났다. 입술은 늘 미소를 짓고 있어 친절한 느낌을 주었다.

정미의 마음속에 한 가지 생각이 스쳤다.

‘어쩐지 사람들이 둘째 언니가 나보다 더 적녀(嫡女) 같다고 수군대더니, 외모와 성정은 절대 언니를 따라잡을 수 없을 거야.’

소녀는 웃으며 말문을 열었다.

“도와줄까 하고 와봤는데, 셋째가 화장을 이렇게 잘할 줄은 몰랐네.”

그러고는 경대 위에 열려 있는 지분 상자를 보고 웃었다.

“어쩐지 셋째가 오늘 안색이 유난히 좋더라니, 교천성 지분을 사용했구나. 이것도 둘째 오라버니께서 주신 게 맞지? 궁에 들어가 태자비가 된 큰언니는 빼고, 오라버니께선 남은 세 자매 중 너만 아끼니, 나와 넷째 마음이 항상 쓰라릴 수밖에.”

이렇게 말하면서도 그녀의 얼굴에 웃음기가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은 이 말이 그저 농담임을 뜻했고, 그들이 허물없는 자매 사이라는 것을 증명해줬다.

정미는 급히 둘째 오라버니 편을 들었다.

“오라버니는 편애하는 게 아니라, 이건 내 생일날 내가 훌쩍이며 우는 바람에 위로할 겸 몇 개 보내준 거야. 여기 새것도 하나 있으니까, 언니도 가져가서 써.”

생일 얘기를 꺼내자 정미의 기분이 조금 가라앉고 말았다. 정미는 손을 뻗어 상자에서 새 지분을 꺼내 건넸다. 둘째 오라버니가 준 것이라 조금 아쉽긴 했지만, 둘째 언니에게 주는 것이기에 그 마음을 애써 누르기로 했다.

따지고 보면 첫째 언니와 정미가 친자매이고 사이도 그리 나쁘지 않았지만, 나이 차가 컸던 탓에 어려서부터 정미와 같이 어울렸던 자매는 그녀보다 두 살 많고, 어려서 생모를 잃은 둘째 언니 정요(程瑶)였다.

“난 평소에 이런 거 안 써.”

정요는 정미의 손을 붙잡고는 위로하듯 토닥였다.

“그날은 공교롭게도 그 작은 패왕과 그 무리가 대화를 엿듣고는 모든 사람이 듣게끔 떠들어대서 그렇지, 아니었음 지 오라버니도 네게 그렇게 차갑게 대하지 않았을 거야.”

정미는 눈을 떨구고는 중얼거렸다.

“글쎄.”

그녀의 생일날, 정미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어려서부터 친하게 지낸 지 오라버니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은 적이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경왕부(景王府)의 작은 패왕과 몇몇 벗들이 한쪽에 숨어 이를 몰래 듣고 있었고, 그들은 이 일을 퍼트려 정미를 웃음거리로 만들고 만 것이다.

정미는 지금까지도, 지 오라버니가 어두운 얼굴을 한 채 ‘자중하도록 해.’라고 말했을 때의 그 표정을 잊을 수가 없었다. 이후로도 몇 차례 마주쳤지만, 오라버니는 그녀에게 차갑게 대하며 피하기만 했기에, 정미는 말을 걸 기회조차 없었다.

오늘은 지 오라버니의 열여섯 번째 생일이니, 그는 더 이상 정미를 피하지 못할 터였다. 정미는 단지 그가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어 부끄러운 마음에 자신을 거들떠보지도 않는 것인지 묻고 싶을 뿐이었다.

정미의 마음속에 억울함이 솟구쳤다.

‘모두가 잊은 걸까? 내 생일인 2월 초이튿날은 1년에 한 번 있는 화조절(花朝節)이라는 걸!’

이날은 남녀가 용기를 내 마음에 둔 사람에게 고백하는 날이었고, 그들은 서로 좋아하기만 했을 뿐이었으니, 서로의 선을 넘지만 않는다면 전혀 웃음거리가 될 일이 아니었다.

‘지 오라버니에게 이를 말하면, 오라버니는 더 이상 나에게 차갑게 대하지 않겠지?’

설령 그가 정미에게 아무 감정이 없더라도, 그녀의 어릴 때 꿈처럼 영원히 외가에 살 수 없더라도, 그녀는 여전히 그의 사촌 동생 아니겠는가.

지 오라버니와 예전처럼 잘 지낼 생각에 정미는 조금 침착해졌다. 그녀는 비록 정요와 사이가 좋더라도 언니에게 자신의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는 않았기에, 고개를 들고 말했다.

“이제 갈까?”

그러자 교용이 웃으며 물었다.

“아가씨, 오늘은 어떤 것을 입으시겠어요?”

정미는 무의식중에 정요에게 묻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

둘째 언니 정요는 평범한 옷이라도 잘 조합하여 멋을 내는 걸 아주 잘했다. 게다가 정요의 외모는 말할 필요도 없었고, 재주와 머리는 타고났으며, 정미가 아무리 밤에 등불을 켜고 열심히 공부해도 정요의 아름다운 옥장(*玉章: 아름다운 시문)을 따라잡을 수 없었다.

정미는 가끔 참을 수 없이 질투가 났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녀 자신에겐 자랑할만한 재주가 없으니, 정요가 바로 정미의 자랑거리인 셈이기도 했다.

정미의 큰언니는 어질고 착한 태자비이며, 둘째 언니는 수도에 제일가는 재녀(*才女: 재주가 있는 여인)이니, 어느 집 여동생이 이런 복을 타고나겠는가?

‘특히 연교거(莲皎居)에 사는 그 얄미운 울보와는 비교도 할 수 없지!’

정요는 교용이 올린 몇 벌의 피풍(披风)을 훑어보더니, 그중 한 벌을 가리켰다.

“이 옅은 남색 비단이 괜찮네. 정미의 청초함이 돋보일 거야.”

정요는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며 웃었다.

“내가 슬쩍 봤는데, 지 오라버니께선 수수하게 입는 걸 좋아하시더라.”

정미는 꽃이 수놓인 다홍색 피풍을 슬쩍 흘겨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 옅은 남색을 입자.”

그녀는 사실 다홍색을 무척 좋아했는데, 몇 년 전 둘째 언니가 피부색이 어두운 사람이 붉은 옷을 입으면 더욱 까매 보인다는 이야기를 들었기에, 그때부터 붉은색 옷은 잘 입지 않게 되었다.

복장을 갖춘 뒤, 정요는 정미의 손을 잡고 이연원(怡然苑)으로 향했다.

정미는 훤칠한 키에 풍만한 몸매를 가졌는데, 옅은 남색의 피풍을 두르니 그 모습이 더욱 두드러졌다. 뒷모습만 보면 겨우 열세 살밖에 되지 않은 그녀가 늘씬한 몸매의 정요보다도 더 언니 같아 보였다.

입꼬리를 삐쭉대던 교용은 환안이 조용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걸 눈치채고는 매섭게 그녀를 한 번 쏘아본 뒤 얼른 쫓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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