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저 여명일 뿐-86화 (86/86)

<86화>

“걱정하는 사람 마음은 생각도 안 하나? 말을 안 들어요. 어떻게 이렇게 사람 말을 안 듣지? 윤준영은 말을 안 들어. 말을.”

같은 말을 계속 반복하는 걸 보니 정말 취하긴 한 모양이다. 진귀한 광경을 물끄러미 구경하던 준영은 끝도 없이 구시렁거리며 이어지는 토로에 결국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녀의 웃음소리에 범진이 가늘게 눈을 뜨고 고개를 들어 올린다. 준영은 어깨를 으쓱이며 팔짱을 꼈다.

“왜. 우리 엄마한테 말하면 벌떡 일어나서 내 등짝이라도 한 대 때려 줄까 봐?”

“준영아.”

놀랐는지 눈에 힘을 준 범진의 입술이 슬며시 벌어진다. 이마를 가리며 흐트러진 머리칼 아래로 눈가가 발긋하다. 나흘 만에 보는 그의 얼굴은 전보다 조금 더 날렵해져 있었다.

“그래. 말 안 듣기로 유명한 윤준영 여기 왔다.”

“이리 와.”

당연한 듯 범진이 제 무릎을 두드린다. 흥, 하고 코웃음을 치며 준영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거기 앉고 싶은 기분 아닌데? 내내 내 흉만 보는 남편 어디가 예뻐서.”

“빨리.”

제 말은 들리지도 않는지 무릎을 두드리며 재촉하는 범진 때문에 준영은 결국 고개를 내젓고 말았다. 터덜터덜 걸어가 옆으로 몸을 돌려 앉자마자 그의 두 팔이 그녀를 덮치듯 감싸 안았다.

“아, 잠깐, 숨 막혀.”

어깨와 팔을 꽉 조이는 힘에 버둥거렸지만 소용없었다. 완전히 제게 기대기 전까지는 봐주지 않겠다는 듯한 그의 태도에 준영은 온몸에 힘을 빼고 축 늘어졌다. 가슴에 머리를 기대자 술기운에 체온이 오른 범진의 몸이 뜨겁게 느껴진다. 심장이 힘차게 쿵쿵 뛰고 있었다.

그녀의 머리에 입술을 묻은 범진이 숨을 깊숙이 들이쉰다. 준영은 그의 팔꿈치 언저리를 만지작거리며 불퉁하게 말했다.

“나흘 동안 전화도 한 통 안 해 놓고는.”

“너도 안 했잖아.”

“네가 안 하는 이유를 아니까. 고집부린 거지.”

당당하게 대꾸하자 범진이 짧게 한숨을 흘렸다. 더듬더듬 그녀의 손을 찾아 쥐고선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무릎은.”

“다 나았어. 이제 간지러워.”

“어제는 점심 왜 안 먹었어.”

박삼두, 이…….

충실한 권범진의 스파이를 입 속으로 욕하며 준영은 제 손을 잡고 있는 범진의 손끝을 잡아당겼다.

“회의가 2시까지 이어져서. 정 대리가 3시쯤에 회사 근처 샌드위치 가게에서 음식 포장해 가더라는 얘기는 못 들었어?”

흠, 하고 범진이 덤덤하게 긍정한다. 준영은 그가 확인차 물어본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그녀의 남편은 끼니를 거르는 것에 무척 예민했다.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데?”

준영은 침대에 가만히 누워 있는 엄마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녀나 범진이 왔다 가면 어머니 혈색이 좋아진다는 말을 의료진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완전히 믿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출장도 다녀왔고.”

범진이 작게 중얼거렸다.

“네 흉 보기 좋으니까.”

그의 말에 준영은 피식 웃고 말았다. 하긴, 범진이 저에 대한 불만을 달리 어디에 이야기하겠나 싶었다.

“그래. 속 풀릴 때까지 해. 나도 엄마한테 네 욕 하거든.”

“너는 하면 안 되지. 어머님이 날 뭐라고 생각하시겠어? 나야 네가 가끔 고삐 풀린 경주마처럼 날뛰니까 걱정돼서 그러는 거잖아.”

따박따박 대꾸하는 범진의 말을 듣고 있던 준영이 허, 하고 미간을 치켜세웠다.

“너 표현이 좀 그렇다?”

“한번 날뛰기 시작하면 사고도 자주 치고.”

“야, 권범진.”

“말을 안 들어, 말을. 도대체가 말을.”

……사람 말 안 듣고 있는 게 지금 어디의 누군데?

어이가 없으면서도 이런 범진의 모습을 보는 게 처음이라 재미있기도 했다. 그의 가슴팍을 밀며 기대고 있던 몸을 떼자 범진이 그녀를 비스듬히 응시했다.

영 못마땅하다는 듯 날카로운 눈을 게슴츠레 뜨고 있었지만 어둡게 반짝이는 눈동자는 그녀를 향한 애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범진은 이내 혀를 차며 낮게 중얼거렸다.

“하여튼 예뻐 가지고.”

제 코를 둔하게 꼬집는 손길에 준영은 목을 움츠렸다.

결국 예뻐 죽을 거면서 괜히 성질은.

흘러나오려는 웃음을 참으며 입술을 깨물고 있는데 몸을 뒤척이던 범진이 재킷 안쪽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뭔데?”

“선물.”

준영은 그가 불쑥 제 눈앞에 내민 것을 받아 들었다. 자그마한 봉투 안에 딱딱한 무언가가 들어 있었다. 얼떨떨한 기분으로 봉투를 뜯어 안에 있는 것을 꺼낸 준영이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그녀의 손바닥에 놓인 것은 별 모양으로 크리스털이 박혀 있는 머리핀이었다.

“내가 해 줄게.”

범진이 머리핀을 집어 든다. 준영은 제 머리칼을 더듬는 그의 손길에 버둥거렸다.

“너 이걸 설마 나 하라고……? 잠깐, 권범진. 아, 머리 뜯어져!”

요령 없는 손길에 머리카락이 당겨지는 느낌이 들어 준영이 고개를 기울였다. 겨우 왼쪽 머리에 고정된 머리핀을 범진이 손으로 톡톡 두드렸다.

무슨 술주정을 이렇게 욕하기 애매하게 하나 싶어 오만상을 찌푸린 채 그를 보던 준영이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범진의 입술이 부드럽게 웃고 있었기 때문이다.

권범진은 대체로 목석같은 데다 인상 자체가 강하고 날카로워서 이렇게 사르르 녹아내리는 솜사탕 같은 표정을 지을 수 있을 줄은 몰랐다.

생각보다 파급력이 강한 미소에 눈만 깜빡이고 있는데 그녀의 뺨을 손등으로 슥 쓸어내리며 범진이 속삭였다.

“예쁘네, 윤준영.”

머리가 이상하게 떠 있는 느낌이 드는 걸 보면 핀이 제대로 꽂혔을 리가 없다. 그래도 어쨌든 권범진이 저런 눈으로 예쁘다고 하면 예쁜 거다. 가슴이 괜스레 벅차오르는 듯한 기분에 준영은 새침하게 눈꼬리를 올렸다.

“더 예쁜 짓 좀 해 봐?”

“어머니 보신다.”

스읍, 하고 아이에게 주의를 주는 듯한 소리를 내며 범진은 입술을 들이미는 그녀의 얼굴을 뒤로 밀었다. 금세 매섭게 눈을 뜬 준영은 다시금 저를 꽉 끌어안는 손길에 온몸으로 저항했다.

“뭐야. 밀어 놓고 어딜 끌어안아? 이거 안 놔?”

“준영아.”

“놓으라고 했다.”

“윤준영.”

가시 돋친 목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를 안은 범진이 여기저기 입을 맞춰 대기 시작했다. 정수리와 귓가, 뺨과 목덜미에 뽀뽀를 퍼부어 대는 것이 간지러웠지만 꽉 조여든 그의 팔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정말이지 기가 막힌 일이 아닐 수 없다. 준영은 황당하다는 듯 애써 얼굴을 구긴 채 뾰족하게 말을 뱉었다.

“야, 권범진. 엄마 본다고 뭐라고 해 놓고 이게 뭐 하는 짓인데?”

“네가 하는 건 안 돼.”

그녀의 뺨에 콧등을 비비며 범진이 속삭인다. 준영은 코웃음을 쳤다.

“왜?”

“이걸로 안 끝나니까.”

당연한 듯 튀어나온 대답에 준영의 입술이 아연하게 벌어졌다. 정작 그 말을 한 범진은 더더욱 그녀를 깊이 안으며 아무렇지 않게 계속 입맞춤을 해 대고 있었다.

나 참. 다음부터 고량주를 먹으라고 해야 돼, 말아야 돼?

커다란 강아지가 저를 감싼 채 온몸을 비비적대는 듯한 기분에 준영은 에라 모르겠다, 하며 범진에게 편안하게 몸을 기댔다. 실없는 웃음만이 비실비실 흘러나오고 있었다.

* * *

정신을 깨운 것은 진한 커피 향기였다. 범진은 저도 모르게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공기 중에 흩어져 있는 것은 커피 향기뿐만이 아니었다. 이불에 남아 있는 준영의 향기가 그를 부드럽게 뒤덮고 있었다.

달콤하고 아늑해서 눈을 뜨고 싶지 않았다.

집이었다. 윤준영이 있는 그들의 집.

집이라는 단어가 특별해진 것은 준영을 만난 뒤부터였다. 사실 그에게 형태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것은 조금 더 편리하냐 아니냐의 문제일 뿐, 그저 그곳에 준영이 있으면 그만이었다.

토스트기가 통, 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빵을 뱉어 내는 소리가 들린다. 조금 더 이 안락한 느낌에 파묻혀 있고 싶은 생각도 있었지만 그보다 준영의 실재를 눈으로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눈을 뜬 범진이 가볍게 몸을 일으켰다. 창문을 열어 놓았는지 어디선가 서늘한 바람이 불어 들어오고 있었다. 거실로 나가자 접시에 식빵을 옮겨 두고 막 잼 뚜껑을 열려고 하던 준영과 눈이 마주쳤다.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어?”

물을 컵에 따르며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묻자 눈을 가늘게 뜬 준영이 잼 통을 그에게 내밀었다.

“몰라서 물어?”

원망하는 듯한 말투가 심상치 않다. 물을 입에 문 채 잠자코 기다리자 준영이 입고 있던 티셔츠의 목 부분을 한쪽으로 잡아당겼다.

“밤새 아주 물고 빨고, 사람을 좀 괴롭혀야지. 여기 봐. 잇자국 난 거. 건치라 좋겠다, 권범진? 혹시 뒤통수 아프다면 내가 때린 데야.”

준영은 잠옷으로 그의 티셔츠를 입는 것을 좋아한다. 범진도 환영하는 바였지만 가끔 하의를 따로 입지 않아 하얗게 드러난 다리를 보면 아찔해지곤 했다.

그럴 때마다 제 몸의 반응 속도가 경이로울 지경이다. 지금처럼.

뚜껑을 연 잼을 건네며 뿔이 난 준영을 달래려던 그의 눈이 무언가를 발견했다. 준영은 옆머리를 쓸어 올려 뒤에서 고정하고 있었는데, 고개를 돌린 그녀의 뒤통수에 핀 두 개가 엇갈리게 꽂혀 있는 게 보였던 것이다.

두 핀의 모양새는 비슷했지만 반짝임은 확연히 달랐다. 오래된 것이 분명한 조금 더 큼지막한 핀을 범진은 한눈에 알아보았다.

살면서 처음으로, 제 손으로 샀던 여자 머리핀이었으니까.

“너 그거…….”

간신히 입을 열었지만 목이 잠겼다. 숟가락을 가져와 식빵에 잼을 듬뿍 올려놓던 준영이 “응?” 하고 눈을 들었다.

“아, 별 모양을 이렇게 좋아하는지 몰랐네. 10년이 넘었는데 어쩜 취향이 변하질 않았어. 세트 같지?”

“그걸 어떻게 가지고 있어?”

그날, 준영에게 주려고 찬장에 넣어 놨던 머리핀이었다. 어제 취한 상태로 길을 걷다 비슷한 모양의 머리핀을 보기 전까지는 까맣게 잊고 있었던.

다소 조잡하게 만들어진 것이었지만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그 핀을 꽂은 준영의 모습을 어떻게 해서든 꼭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때 혹시나 네가 무슨 메모라도 남기지 않았을까 해서 그 집을 이 잡듯이 뒤졌거든. 라면 봉지 뒤에서 나오더라.”

식빵 위에 잼을 한 숟갈 더 바르며 준영이 말을 이었다.

“근데 네가 이런 걸 샀을 것 같지는 않고, 전에 그 집에 살던 사람이 놓고 간 걸 수도 있잖아? 난 라면 찬장에는 손을 대 본 적이 없으니까. 그래도 네가 샀을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가능성 때문에 두고 올 순 없었어. 한 번도 해 본 적은 없었지만.”

그녀의 말에 범진은 벅차오르는 숨을 내뱉었다. 순식간에 그날의 감정, 그 집의 풍경이 눈앞에서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손가락에 묻은 잼을 혀로 할짝이며 준영이 어깨를 으쓱였다.

“어제 네가 준 머리핀을 보고 확신했지. 권범진이 두고 간 게 맞았구나.”

어째서 너는 이렇게 모든 것이 나를 위한 것처럼 느껴질까.

생김새, 말투, 성격과 몸짓, 거기다 스쳐 지나가는 우연조차도.

그러니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온몸과 마음으로.

“윤준영.”

“잠깐. 너 눈이 왜 그래? 오지 마. 해가 중천에 뜬 시간이야. 배도 안 고파? 해장은?”

토스트를 막 한 입 베어 물려던 준영이 얼른 빵을 내려놓고는 뒷걸음질을 친다. 사냥감을 쫓듯 어슬렁어슬렁 그녀를 향해 걸어가며 범진이 덤덤하게 말했다.

“내가 지금 고픈 건 너밖에 없는데.”

“……얘 아주 못 쓰겠네. 너 다음부터 고량주 먹지 마. 주사가 너무 이상해. 으앗!”

어설프게 따돌려 보려다가 단번에 범진의 손에 붙잡힌 준영이 짧게 비명을 질렀다. 그녀를 가볍게 들어 안은 범진이 침실로 들어섰다. 침대에 내려놓자 버둥거리는 준영의 티셔츠가 위로 말려 올라갔다.

정말이지 윤준영은 제가 어떻게 보이는지를 전혀 모르는 게 분명했다. 납작한 배와 심플한 디자인의 팬티 아래로 쭉 뻗은 다리를 손으로 쓰다듬자 준영이 눈꼬리를 치켜올렸다.

“난 지금 배가 고파. 토스트 아직 한 입도 못 먹었다고!”

“도저히 못 참을 만큼?”

두 팔 아래 그녀를 가둔 채 범진은 조용히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이미 그의 몸은 열이 오를 대로 올라 있었다. 천천히 하반신으로 그녀의 다리를 누르며 범진이 은근하게 속삭였다.

“응? 준영아.”

준영의 커다란 눈동자가 흔들린다. 저런 새침한 표정이 나온다는 것은 반쯤 허락했다는 뜻과 같았다.

범진은 그녀의 뺨을 어루만졌다. 부드럽고 매끄러운 감각에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보고 싶었어. 나흘 동안 내내.”

사실은 언제나 그렇다. 눈앞에 있는 지금 이 순간마저도.

저를 그대로 집어삼킬 것처럼 곧게 향해 있는 시선에 준영이 입술을 비죽였다. 마침내 그녀는 옅은 한숨과 함께 손을 들어 범진의 목덜미를 감았다.

“알아. 근데 너 머리핀 고르는 취향은 좀 바꾸……, 으응.”

입술과 입술이 겹쳐진다. 나른한 한숨 소리가 새어 나오고, 몇 안 되는 옷가지가 바닥으로 나풀대며 떨어졌다.

열린 창문 틈으로 차디찬 겨울바람이 불어 들어오고 있었지만, 이미 뜨겁게 달아오른 침실 안에는 달콤한 열기만 가득할 뿐이었다.

그저 여명일 뿐 |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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