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에필로그
- 그래요. 일단 오늘까지의 회의 내용을 기반으로 보고서를 올려 보겠습니다. 현장 미팅은 다다음 주 중에 가능할까요?
또 독촉이다. 하여튼 사람 숨 돌릴 시간을 안 주지.
콧잔등을 찌푸린 준영은 문득 맞은편에서 저를 보고 있던 임 과장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의 표정에서 분위기가 읽혔는지 임 과장의 무뚝뚝한 입술도 슬쩍 기울어졌다.
“네, 가능합니다.”
- 그럼 그때 뵙겠습니다.
깍듯한 인사를 그저 한숨으로 넘기며 준영은 통화를 끝냈다. 이번엔 뉴욕이었다.
진짜로 내가 이것까지만 해 준다. 이를 악물며 고개를 뒤로 젖혀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자 임 과장이 다가왔다.
“다다음 주 출장인가요?”
“아마도요. 저쪽에서 보고서를 엉망으로 올리지 않는 이상.”
임 과장이 빙그레 웃는다. 상대 회사인 레크먼사는 국내 유통 채널 확대를 위해 한경을 파트너사로 선택하고 먼저 연락을 해 왔다. 적어도 저쪽 잘못으로 일이 잘못될 가능성은 매우 희박할 것이었다. 준영도 이마를 짚으며 피식 웃고 말았다.
한경을 그만두려 했지만 그녀의 사직서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홍인섭 사장이 막았다는 소문에 놀랄 새도 없이 그녀는 사장실로 호출당했다.
여러 행사에서 얼굴은 본 적 있었지만 일대일로 그와 마주해 본 것은 처음이었다. 미향에 비하면 부드러운 인상이었으나 웃고 있어도 어쩐지 긴장을 풀 수 없게 하는 분위기를 풍기는 사람이었다.
‘윤준영입니다.’
‘아, 앉아요.’
준영은 인섭이 저를 소파로 안내하며 빠르게 평가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담담히 그를 마주하자 인섭이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사직서는 내가 반려했습니다. 당찬 성격이니 한경을 나가려는 이유가 소문 때문은 아닐 거고. 부서가 마음에 안 듭니까?’
‘아닙니다.’
성가신 일들이 많았지만 준영은 리스크관리팀의 업무가 적성에 맞는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게다가 이미 미향과 승운의 존재는 한경에서 지워졌다. 애초에 유럽 발령 때문에 그만두려고 했었기 때문에 그 발령이 취소된 것으로 그만둘 이유도 사라진 셈이었다.
‘그럼 계속 애써 줘요. 한경에는 윤 대리 같은 유능한 인재가 필요합니다.’
용건은 그게 다라는 듯 인섭이 웃어 보였다. 일어나려는 그의 기척을 감지한 준영이 입을 열었다.
‘외람되지만 하나 여쭙겠습니다.’
그녀의 말에 인섭이 멈칫하며 시선을 던졌다. 준영은 반듯한 자세로 앉아 말을 꺼냈다.
‘사장님은 불편하지 않으신가요?’
‘내가? 뭐가 말이죠?’
흥미롭다는 듯 인섭이 눈썹을 까닥였다.
‘홍미향 씨의 측근으로 알려져 있는 저를 계속 한경에 두는 것이요.’
소리 없이 인섭의 눈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소파에 느긋하게 몸을 기댄 그가 준영을 바라보았다.
‘나는 미향이를 잘 알지. 그 애가 한국에 돌아오더라도 절대 연락하지 않을 두 사람을 꼽으라면 나와 윤 대리일 겁니다. 자존심이 제 전부인 애니까.’
그 말에는 매우 동감이었다. 준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권 이사에게 안부 전해 줘요.’
일어서서 나가려던 그녀에게 인섭이 말했다. 흘러나오려는 실소를 참으며 준영은 정중한 표정으로 인사를 한 뒤 사장실을 나섰다.
그리고 벌써 반년이 흘렀다.
성 팀장은 홍 사장에게 무슨 언질을 받은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미향이 사라졌기 때문인지 더는 그녀에게 까다롭게 굴지 않았다. 덕분에 준영의 일상은 평화로웠다.
일이 많다는 것만 제외하고는.
“그럼 다음 주까지는 좀 시간이 있겠네요.”
잠시 멍하니 있던 준영은 임 과장의 목소리에 눈을 들었다. 그가 두꺼운 서류철을 가져와 그녀의 책상에 올려놓고 있었다.
“이게 뭔가요?”
“그 왜, 내년 되면 TANDOZ랑 계약 추가 조항 논의하기로 한 거 있잖아요. DDU(관세 미지급 인도) 조건 완화 대신 현지 재고 보관 수수료율을 조정해 달라는.”
“TANDOZ는 성 팀장님 소관 아닌가요? 왜 저한테.”
불길한 예감에 정색을 하며 딱딱하게 대답하자 임 과장이 주변을 둘러보고는 몸을 낮췄다.
“성 팀장은 아마 내년에 유럽 지사로 갈 모양입니다. 나승운 이사가 원래 계획했었던 자리 말이에요. 그래서 TANDOZ 담당자는 다시 윤 대리가 될 것 같더군요.”
“네? 정말요?”
저도 모르게 준영은 성 팀장의 자리를 흘끗 보았지만 그는 자리에 없었다. 임 과장이 주의를 주듯 쉬, 하고 손가락을 올린다. 미간을 좁힌 준영이 작게 속삭였다.
“근데 그런 소문은 도대체 어디서 들으시는……?”
그녀의 본질적인 의문에 그저 안경을 추켜올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 임 과장이 말했다.
“하여튼 재무팀이랑 같이 다음 주 내로 타당성을 검토해 봐야 합니다. 그래도 한 주 시간이 있어서 다행이네요.”
준영의 입술이 힘없이 벌어졌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제 책상에 폭탄을 두고 떠나려는 임 과장을 향해 외쳤다.
“과장님!”
“나도 참, 발등에 불이 떨어져서 별수가 없네. 수고합시다.”
어색하게 손을 흔들고는 제 자리로 돌아가는 임 과장을 바라보던 준영이 허, 하고 한숨을 내뱉었다. 그녀의 눈이 저절로 서류 더미에 닿았다.
……잘못하면 승진할 것 같은 이 찜찜한 예감은 뭐지.
마뜩잖은 얼굴로 서류를 건성으로 들춰 보던 준영은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에라이, 월요일부터 하자. 오늘은 금요일이고, 지방에 가 있었던 범진과 나흘 만에 재회하는 날이었으니까.
그런데 그렇다고…… 나흘 동안 연락을 한 번도 안 하셨겠다?
눈썹을 바짝 치켜올린 준영은 지나칠 정도로 잠잠한 제 휴대폰을 쏘아보았다.
권범진과 싸웠다.
결혼한 이후로 4개월이 넘도록 서로를 향해 언성 한 번 높인 적 없었다는 사실을 떠올려 보면 이례적인 일이었다.
문제는 범진이 그녀의 안전과 건강에 대해 과할 정도로 신경을 쓴다는 것에 있다, 고 생각한다.
물론 머리로는 이해가 간다. 준영은 다소 충동적이고 위험한 일에도 한번 꽂히면 개의치 않고 뛰어드는 제 습성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어쩌면 리스크관리팀의 업무가 잘 맞는 것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일을 하다 보면 어쩔 수 없는 때도 있기 마련이 아니냔 말이다.
발단은 지난주에 그녀가 옥천에 갔던 것 때문이었다. 대전 지사에서 거래처의 채무불이행에 관련된 신용 리스크 가능성을 제기했기 때문에 준영은 거의 한 달째 조사 중이었다.
그녀는 거래처의 고의성을 증명할 수 있는 증거를 수집하고 있었는데, 그쪽에서 관련 자료를 옥천에 있는 폐업한 공장 창고에 보관하고 있다는 정황을 찾아냈다.
당시 준영은 출장차 대전에 있었고, 자료는 언제든 다른 곳으로 옮겨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달려가지 않을 수 없었다. 빨리 일을 마무리 짓고 싶었기 때문에. 아주 멀진 않았지만 대전까지 수시로 출장을 다니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거기까지는 범진도 이해를 했을지도 모른다. “곧 일을 끝낼 수 있을 것 같아”라는 통화를 마지막으로 준영의 휴대폰이 꺼지지만 않았어도 말이다.
그날 같이 간 직원과 함께 자료를 확인하고 사진을 찍어 본사에 송부한 것까지는 좋았지만 공장에서 나오다가 경비원과 마주치고 말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대전까지는 무사히 돌아왔다. 달리다가 넘어져서 무릎이 깨지긴 했지만.
그렇게 돌아온 준영은 제 숙소 앞에 버티고 서 있는 범진과 마주쳐야 했다. 새벽 2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범진은 그녀의 성격을 안다. 그래서 보통 이런 일이 있을 때 속은 상했을지언정 그녀의 상황을 이해해 주려 노력했다. 그날의 다른 점이라면 준영의 무릎에 피딱지가 앉아 있었다는 점이었을 것이다.
무릎 좀 까진 거 가지고. 자기는 칼도 맞고 왔으면서.
이제는 다 나아서 간질간질한 무릎 언저리를 만지작거리던 준영은 제 휴대폰이 부르르, 몸을 떠는 것을 보고는 눈을 반짝 떴다. 웃음이 절로 새어 나왔다.
“이제야 화가 풀리셨어?”
나흘 동안 내 목소리 한 번을 못 들었으니 그리울 때도 됐지, 권범진.
금세 풀어진 얼굴로 휴대폰을 들어 올린 준영이 눈살을 찌푸렸다. 기대하던 이름은 아니었지만 아주 관련이 없는 이름도 아니었다.
“네.”
- 누님. 저기, 일 끝나셨습니까?
삼두의 걸걸한 목소리에 준영은 입술을 비죽였다.
“안 끝났습니다.”
- 아, 예에…….
그녀의 깍듯한 말투만큼 삼두가 무서워하는 것도 없었다. 우물쭈물하고 있는 기색이 고스란히 느껴져 준영은 한숨을 내쉬었다.
“왜요. 범진 씨한테 무슨 일 있어요?”
- 예.
“뭐라고요?”
곧장 돌아오는 대답에 준영의 목소리가 조금 커졌다. 삼두가 겸연쩍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 지금 좀, 아니, 많이 취하셨습니다.
의외의 말이 아닐 수 없다. 멍하니 눈을 깜빡이던 준영의 미간에 주름이 파였다.
“무슨 말이에요. 위스키를 병으로 마셔도 멀쩡한 사람인데.”
- 그게, 오늘은 고량주를 드셨습니다.
범진은 소주를 얼마나 먹든 취하지 않았지만 고량주는 예전부터 약했다고 들었다. 준영은 그를 만난 이후로 취한 모습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고량주? 권범진한테 고량주를 권하는 사람이 있었단 말이에요?”
- 리샤오민이라고, 형님이 서화그룹 쪽에서 소개받은 중국에서 온 투자 전문가인데요. 일 얘기를 할 때 술부터 먹고 시작하는 타입인데 하필 고량주를 좋아해서…….
허, 하고 혀를 찬 준영은 한 손으로 가방에 짐을 밀어 넣기 시작했다.
“그래서 지금 어딘데요? 집에 가는 중이에요?”
- 아니요. 저는 지금 한경 앞에 있습니다.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우리 사무실 앞이라고?
컴퓨터를 막 끄던 준영이 눈을 깜빡였다. 그녀의 미간에 의구심이 스쳐 지나갔다.
“……혹시 삼두 씨, 지난 나흘 동안 나한테 붙어 있었던 거 아니죠?”
삼두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목에 사레가 걸린 듯한 기침만 두어 번 했을 뿐이었다. 준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몇 시에 출근하고 몇 시에 퇴근하고 몇 시에 점심 먹었는지 다 보고했을 테지. 잘도 나흘간 연락도 없이 참는다 했다.
“지금 내려가요.”
실소를 뱉은 준영은 임 과장에게 인사를 하고는 사무실을 나섰다. 챙겨 나온 코트를 걸치는 그녀의 뺨이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 * *
내가 진짜 믿을 수가 없어서.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준영은 옆에 선 삼두를 돌아보았다. 주차장 사건 이후로 전보다 덩치를 조금 더 키운 그는 거의 커다란 바윗덩어리처럼 보일 지경이었지만 준영의 매서운 눈초리에 금세 어깨를 움츠렸다.
“얼마나 됐어요?”
“한 시간 좀 넘었습니다.”
삼두가 쭈뼛거리며 대답한다. 약자를 괴롭히는 취미는 없으니 이쯤 하자 싶어 준영은 목에 두르고 있던 머플러를 풀었다. 병원 안의 공기는 충분히 따뜻했다.
“내가 데리고 나갈게요.”
“차에 가 있겠습니다.”
꾸벅 고개를 숙인 삼두가 복도를 지나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준영은 목을 길게 빼며 문에 난 창문으로 병실 안쪽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수면등이 켜져 있는 1인실 안에는 엄마가 누워 있었고, 침대 옆에 있는 소파에는 시커먼 옷을 입은 범진이 침대를 보고 앉아 있었다.
통가죽과 원목으로 된 무거운 3인용 소파는 원래 한쪽 벽에 붙어 있는 것이었다. 저걸 도대체 어떻게 침대 앞으로 끌고 왔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기우뚱, 한쪽 무릎에 팔꿈치를 댄 채 비딱하게 앉아 있는 범진은 눈을 감고 있는 것 같았다. 자고 있나 싶었지만 뭐라고 말을 하는지 입술이 조금씩 달싹이는 게 보였다.
준영은 소리 내지 않게 조심하며 병실 문을 옆으로 밀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나직하게 웅얼거리는 듯한 범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영이가 말을 안 들어요, 어머니. 말을, 안 들어요. 제 말은, 하나도 안 들어요.”
잠꼬대라도 하는 것처럼 발음이 다소 뭉개져 있다. 예기치 못한 말이라 하마터면 헛웃음을 흘릴 뻔한 준영이 입술을 콱 깨물었다. 그녀는 소리를 죽인 채 한 발씩 범진에게 다가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