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완전 달콤한 디저트. 초콜릿 들어간 걸로.]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던 범진은 메시지를 보고 피식 웃었다. 하여튼 세상 어른스러운 척은 다 하면서 입맛은 애기 입맛이라니까.
“달콤한 디저트라.”
도통 그런 곳에 갈 일도 없고 주변에 그런 것을 좋아하는 사람도 없다 보니 떠오르는 곳이 없다. 언젠가 미팅을 갔다가 본 적이 있는 호텔 베이커리를 겨우 머릿속에서 쥐어짜 낸 범진은 동선을 계산하기 시작했다.
그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림과 동시에 휴대폰이 울렸다. 삼두였다.
“왜.”
- 형님, 지금 사무실이세요?
“퇴근한다. 왜.”
행여나 일이 늘어날까 봐 범진은 걸음을 서둘렀다. 15분 후가 호텔 베이커리 마감 시간이었다. 차를 향해 걸어가는 그의 귓가에 삼두가 빠르게 말했다.
- 블랙리스트 차량 등록 시스템 때문에 지금 경비실에 와 있는데요. 테스트 돌리는 중에 방문 신고를 하지 않은 외부인 차량이 걸렸는데 아는 차 같아서요. 하얀색 벤츠고 차 번호가 3743, 이거 그때 부산에서…….
순간 공기가 흔들렸다. 냉기를 뿜으며 제게 달려드는 기척에 범진은 휴대폰을 귀에서 떼며 몸을 돌렸다. 온 체중을 실은 손을 가까스로 붙잡았지만 아랫배에 뭉근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죽어, 권범진.”
칼날이 비틀린다. 뜨끈한 액체가 손목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휴대폰이 바닥에 나뒹굴기 전 삼두가 무어라 외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죽어 버려.”
산 자의 것과는 다른 음산함이 밴 목소리다. 버티는 그의 힘을 이기려 온몸을 바들바들 떨고 있는 승운의 눈은 이미 현실에 발을 붙이고 있지 않았다. 숨을 뱉을 때마다 복근이 바짝 수축하고 있었다.
“죽어! 이 더러운 새끼. 악마 같은 새끼! 내 눈앞에서 사라지라고! 사라져, 제발!”
그가 더 이상 밀리지 않자 악에 받친 얼굴로 승운이 괴성을 질러 댔다. 팽팽하던 균형이 깨진 찰나를 감지한 범진이 그대로 승운의 머리를 들이받았다.
칼을 놓치고 비틀대는 그의 무릎을 정확히 가격하자 승운이 비명과 함께 앞으로 휘청거린다. 그대로 빙글 몸을 돌린 범진의 다리가 그의 목덜미를 세차게 내리찍었다.
바닥에 쓰러진 승운이 버르적거린다. 어느새 터져 나온 눈물이 그의 뺨을 적시고 있었다. 앞으로 무작정 기어가려던 그는 손을 짓밟히자 비명을 지르려 했지만 코끝에 풍기는 비린내를 맡고는 입을 다물었다. 피에 젖은 칼날이 정확히 그의 눈앞에 있었다.
왜 죽지 않을까.
분명히 제 칼날이 두꺼운 가죽을 찢고 들어가는 감각을 손으로 느꼈다. 게다가 바닥에 후드득 떨어져 있는 붉은 핏물이 제가 무엇을 했는지를 증명하고 있었다.
그런데 왜.
그런데 왜 짓밟힌 것은 내 손인가.
금방이라도 제 눈을 그을 듯이 가로로 날을 세우고 있는 칼에 맺혀 있던 핏방울이 톡, 떨어진다. 겨우 숨만 헐떡이면서도 승운은 그 칼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구둣발에 손가락이 짓이겨지고 있었지만 이를 악무는 수밖에 없었다.
“힘을 더 실었어야지. 각오가 부족했나?”
덤덤한 목소리가 승운의 귓가를 단번에 찌르고 들어왔다. 저절로 몸이 덜덜 떨려 오고 있었다.
“잘 들어, 나승운.”
칼끝이 흔들리는 것에 승운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범진의 목소리는 너무나 태연해서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바닥을 적신 저 피가 제 피가 아닌지 의심될 지경이었다.
“지금부터 가능한 한 멀리 가. 누구의 눈에도 띄지 마. 나는 네가 내 눈앞에서 사라지는 순간부터 네 뒤를 쫓을 거야. 그래서 널 발견하면 어디에 가는지, 뭘 먹는지, 하루 종일 누구와 어울리는지를 지켜볼 거다. 그러다 혹시라도 네가 다른 생각을 하는 것처럼 보이면.”
가로로 얄따랗게 보이던 칼날이 순간 세로로 비틀어졌다. 그의 숨통을 가르듯 범진이 속삭였다.
“그때 이 칼을 돌려줘야겠지.”
흥분으로 쿵쿵대며 뛰던 심장이 일시에 숨을 죽였다. 식은땀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이성을 내팽개치고 있던 머리도 범진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던 것이다.
“그러니 흔적 남기지 말고 죽은 듯 살아. 내가 너무 쉽게 널 찾아내지 못하게 말이야. 내 각오는 부족할 것 같지 않거든.”
쐐기를 박듯 낮게 읊조린 범진이 천천히 그의 손에서 발을 떼고 뒤로 물러섰다. 손가락이 절반쯤은 잘린 것처럼 감각이 없었다.
승운은 비척대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넋이 빠진 눈으로 제 양손을 내려다보았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피가 묻어 있었다.
모든 것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다.
어쩌면 제 영혼마저도.
웃음도 울음도 아닌 짐승의 소리가 악물린 입술 틈으로 새어 나오고 있었다.
“내가 도대체, 뭘 그렇게 잘못한 거야? 내가 뭘. 도대체 뭘.”
“불행에 이유 붙이려 하지 마. 의미 없는 짓이야.”
무심하게 대꾸한 범진이 칼을 까닥였다.
“그러니까 그만 꺼져. 윤준영 앞에서 경찰서 끌려가고 싶지 않으면. 그런 모습으로 기억되고 싶은 건 아니겠지.”
그의 말에 못 박힌 듯 서 있던 발이 후들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 걸음, 한 걸음을 비틀대며 뗄 때마다 무언가가 무너져 간다.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조차 알 수 없을 만큼 이미 무너져 있었다.
공허한 웃음소리가 멀어지는 승운의 그림자를 따라 늘어지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을 가느다란 눈으로 지켜보던 범진이 짧게 한숨을 내쉬며 떨어뜨린 휴대폰을 향해 걸어갔다. 타들어 가는 듯한 통증이 아랫배를 물들이고 있었다.
- 형님! 형님! 제발 대답 좀 하세요! 아, 뭐 해요? 당장 로비랑 주차장 CCTV부터 돌려 보라니까! 어디요? 주차장? 주차장 입구 어느 쪽?
여전히 우렁차게 떠들어 대고 있는 휴대폰을 집어 든 범진이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입 안이 벌써부터 버석하게 말라 가고 있었다. 마른침을 삼킨 그가 중얼거렸다.
“넌 안 끊었을 줄 알았다.”
- 형님!
배를 찔리지 않았어도 고막이 터져 죽을 판이다. 반사적으로 휴대폰에서 귀를 떼어 내자 허리가 비틀리면서 배가 또다시 뜨끈해졌다. 상처를 틀어막은 범진이 천천히 말을 뱉었다.
“병원에 연락하고 넌 주차장으로 내려와. 조용히.”
삼두는 이런 상황을 겪을 만큼 겪었다. 단박에 상황을 파악한 그가 낮게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 어떤 새낍니까? 당장 입구 봉쇄하고 애들부터 풀어서…….
“시끄럽게 하지 마. 그 정도 아니니까.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야.”
- 그게 문제가 아니면 대체 뭐가 문젠데요?
뭐가 문제긴. 초콜릿 디저트를 기다리다 전화를 할 윤준영이 문제지.
이때가 기회다 싶었는지 왕왕대는 삼두의 잔소리를 귓등으로 흘려들으며 범진은 기둥을 찾아 등을 기대고 섰다.
그에게는 두 개의 길이 있었다. 속일 것이냐, 말 것이냐.
……속이면 속기는 할까.
날카로운 준영의 눈매를 떠올리고 쓴웃음을 짓는 범진의 잇새로 뜨거운 한숨이 흘러나왔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주차장 문을 힘껏 열어젖힌 삼두가 그를 향해 날쌔게 달려오고 있었다.
* * *
연락을 받고 병원으로 달려온 준영은 의외로 침착했다. 너무 침착해서 범진과 삼두가 오히려 그녀의 눈치를 볼 정도였다.
복부의 상처보다 칼날을 직접적으로 막아 낸 왼쪽 손바닥의 상처가 더 깊었지만 다행히 회복하는 데 문제는 없다고 했다.
소식을 듣고 한걸음에 달려왔다가 준영과 처음으로 마주친 상춘은 중상은 아니라는 말에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그러고는 비로소 느긋하게 준영에게 인사를 건넸다.
“이야기는 많이 들었는데 결국 이렇게 인사를 하게 되는군요. 강상춘이오. 범진이 삼촌쯤으로 생각해 주면 좋겠군.”
“윤준영입니다.”
급하게 나왔는지 그녀는 범진의 것으로 보이는 티셔츠를 헐렁하게 걸치고 있었지만 인사하는 태도는 조금도 흐트러져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빈틈없어 보이는 저 눈 때문일 것이리라.
꽤 오래전부터 사진이나 서류로 보고를 받아 왔지만 이렇게 실물을 마주하자 훨씬 인상이 강렬하게 와닿았다. 상춘이 고개를 주억이며 말을 걸었다.
“많이 놀랐을 텐데 좀 앉아서 쉬어요. 그래도 별일 아니라니 다행이군.”
“별일이 아니라고요?”
건조한 말투로 대꾸하며 준영이 그를 바라보았다. 알 수 없는 압박감에 상춘은 입맛을 다셔야 했다.
“JBK 파이낸셜 회장님이시죠? 회사 일과 관련된 건가요?”
“아, 글쎄요.”
사실은 삼두가 연락했을 때 이미 자초지종을 캐물은 상춘이었다. 범진의 안전 문제에 예민한 그로서는 당연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범인이 한경의 나승운이고, 무슨 이유에서인지 범진이 CCTV 자료를 삭제하라고 지시했다는 말을 들었다.
그것은 보복할 의사가 없다는 뜻이다. 범진이 무슨 계획을 갖고 있든, 적어도 법적으로는.
그래서 상춘은 말을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나승운과의 일이라면 준영이 관련 없을 리가 없기 때문에.
하지만 준영은 만사에 아, 그렇구나, 하고 넘어가는 법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가 말끝을 흐리는 것을 대번에 눈치챈 그녀의 눈매가 예민하게 세워졌다.
“JBK는 그런 곳인가요? 이사가 칼에 찔렸는데 목숨에 지장이 없다는 이유로 별일 아니구나, 하고 넘어가는? 경찰에 신고는요? 회사에서 일어난 일이라면 CCTV 확보도 쉬울 텐데요. 신고를 안 하는 이유는 짐작이 가는 곳이 있기 때문인가요? 자체적으로 해결하려고?”
쉴 새 없이 쏟아붓는 말에 정신이 없기도 했지만, 더 놀라운 것은 그게 아주 틀린 말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상춘은 진즉에 기가 질려 멀리서 모른 척 등을 보이고 있는 삼두와 중호를 곁눈질하고는 혀를 찼다.
“윤준영 씨.”
상춘은 웃음기를 지운 얼굴로 준영을 가만히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저놈 걱정을 하는 게 당신만은 아니오. 나나 삼두한테도 범진이는 가족이지.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겉으로 표현하는 게 다가 아니라는 것만은 알아줬으면 좋겠군.”
준영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그를 똑똑히 마주 보았다. 어지간히 눈빛이 강한 상춘이었지만 준영은 그걸 피할 생각이 없었다. 진의를 파악하려는 듯 그의 주름진 눈매를 물끄러미 들여다보던 준영이 차분히 내뱉었다.
“명심하죠. 하지만 숨기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라는 것도 알아주셨으면 좋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