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홍미향도 수완이 좋지만 홍인섭은 그런 홍미향의 친오빠야. 더 지독하면 지독했지, 절대 덜하지 않아. 오늘 마지막으로 넘긴 자료를 공개적으로 풀지, 아니면 조용히 압박해서 쓸어 낼지는 알아서 하겠지. 그래도 당분간은 시끄러울 거야.”
“너는 괜찮은 거야? 홍 이사가 이걸 알면 가만있지 않을 텐데.”
잔뜩 찌푸린 그녀의 미간을 손으로 슬쩍 문지르며 범진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홍 사장 쪽에 자료를 넘긴 스파이를 가만두지 않겠지.”
“그러니까. 그게 너잖아.”
“아닐걸.”
영문을 알 수 없는 그의 말에 준영의 눈썹이 가파르게 치켜 올라갔다. 범진이 희미하게 웃었다.
“말했잖아. 더 지독한 사람이라고.”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범진이 더 이상은 말해 주지 않으리라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한참 만에 준영의 잇새로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내저은 그녀가 눈살을 찌푸린 채 범진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아주 응큼한 남자가 됐어, 권범진. 비밀의 스케일이 다르잖아.”
“사심이 있었으니까.”
“무슨 사심?”
“네가 한경 사람으로 나타나지 않았으면, 그리고 네 휴대폰에서 나승운의 이름을 보지 않았으면.”
범진이 고개를 비딱하게 기울이며 말했다.
“안 맡았을지도 모르지. 아주 귀찮은 일이었거든.”
입을 딱 벌린 준영이 헛숨을 내뱉었다.
“질투 한번 무섭다?”
“그래서 싫어?”
“아니.”
준영이 태연하게 눈을 찡긋거렸다.
“이런 건설적인 질투는 환영이지.”
실소를 흘린 범진이 길게 숨을 들이쉬며 몸을 미끄러뜨렸다. 준영의 어깨에 툭 머리를 기댄 그가 비로소 묵은 긴장을 풀며 눈을 감았다. 부드럽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몇 가지만 더 정리하면 완전히 끝나니까, 그때 여행이라도 가자.”
“나 그럴 여유 없어. 구직 활동 해야지. 곧 백순데.”
눈을 동그랗게 뜬 준영이 그를 비스듬히 내려다보며 말했다. 눈을 감은 범진의 이마에 금세 주름이 파인다. 선이 단정한 그의 입술이 느릿하게 움직였다.
“마음에 둔 회사 있어?”
“아직. 그건 왜 물어봐?”
“작업 들어가서 임원 만들어 놓게.”
무심한 말에 준영의 입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네가 말하면 농담으로 안 들린다고. 그리고 나 그런 거 별로야. 나 못 믿어?”
“어차피 될 거 빨리 되면 좋잖아.”
잘도 중얼거리는 범진의 입술을 꽉 꼬집어 비틀자 그의 손이 곧장 그녀의 손을 낚아챘다. 단단한 손가락이 손가락 사이를 깊이 파고들며 당연한 듯 깍지를 껴 온다. 작게 웃던 준영은 그의 머리에 제 머리를 기댄 채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
그래. 좀 쉬는 것도 좋지. 쉬어 본 적이 없어서 어떻게 쉬어야 할지를 모르겠지만 말이야.
어딜 가서 무얼 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저 이렇게 서로 기대어 있을 수만 있다면.
덩달아 눈을 감는 준영의 입술이 보기 좋게 휘어지고 있었다.
* * *
홍인섭은 분명한 수완가였다. 그가 지휘한 홍미향의 몰락은 순식간에 진행되었다. 눈을 떠 보니 이미 목 끝에 닿아 있는 칼날에 미향은 속수무책이었다.
그는 범진이 쥐여 준 카드를 오픈하지 않았다. 준영이 지나치게 언론 플레이를 잘해 놓은 덕에 주가는 연일 상승세였다. 굳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것보다 조용히 내부에서 정리하는 편이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미향은 제 눈앞에 놓인 증거들과 비행기 표를 보고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네가 징역을 선택한다면 말리지 않겠다만, 오빠이자 한경의 수장으로서 이쪽을 권하고 싶구나. 홍미향 이름 석 자를 불명예스럽게 만드는 것도 돌아가신 아버지께 몹쓸 짓이니.”
인섭이 비행기 표를 눈으로 가리키며 하는 말에 미향은 떨리는 손을 움켜쥐어야 했다. 무의미하지만 당연한 질문이 튀어나왔다.
“이것들을 도대체 어떻게…….”
“미향아.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충고하마. 아버지는 늘 사람은 오래 쓸수록 조심해야 한다고 하셨지. 모든 것이 당연해지는 순간을 경계해야 한다고. 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내게 상처를 입힐 수 있겠니. 가까울수록 사람은 작은 것에 상처받고, 보이지 않게 쌓여 가는 것들이 결국 눈덩이가 되어 돌아오는 법이다.”
인섭의 말은 믿을 수 없는 사실을 가리키고 있었다. 반박할 말조차 찾지 못하고 입술만 달싹이는 그녀에게 인섭은 최후통첩을 날렸다.
“사흘 뒤 새벽 출국이다. 이날 나가지 않으면 승운이부터 소환될 거다. 기후 좋고 살 만한 곳을 찾아. 부사장이 골프를 좋아하니 조금 일찍 은퇴했다고 생각하고 노후를 즐기렴. 너도 손주 볼 나이가 됐잖니.”
반격을 준비하기에는 주어진 시간이 지나치게 짧았고, 인섭이 쥔 증거가 너무 확실했다. 그녀를 재촉하듯 다음 날 회사에서는 긴급 이사회와 임시 주주총회가 열렸고, 새로운 이사가 선출되었다. 인섭은 이미 모든 패를 세워 놓은 뒤 공을 굴려 도미노를 시작한 것이었다.
그의 주도면밀한 점은 명인일보 측에 간략하게나마 상황을 전달해 주었다는 것이다. 이 일을 대대적으로 오픈하면 당신 측에도 피해가 갈 테니 혹시 파혼을 하더라도 최대한 한경에 피해가 가지 않게끔 언론 보도에 주의를 기울여 달라는 의미였다.
하루아침.
인섭의 냉정한 칼날이 휘둘러진 것은 그야말로 하루아침의 일이었다.
그날 어머니의 부름에 본가로 돌아온 승운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믿을 수가 없어 꿈처럼 느껴질 지경이었다. 그는 더 이상 한경의 경영기획팀장이 아니었다. 이사도 아니었고, 명인일보의 사위도 아니었다.
그는 이제 아무것도 아니었다. 아무것도.
“이해가 안 가서 그래요. 도대체 그 모든 자료를 사장님이, 외삼촌이 어떻게 갖고 있느냔 말이에요!”
“네 엄마가 헛짓을 한 거다. 사람이 만족을 모르고 그렇게 날뛰더니. 사장님이 어떤 사람인데 겁도 없이…….”
“납작 엎드려 떨어지는 콩고물만 주워 먹는 것에 익숙해진 패배자에게 그런 소리 듣고 싶지 않아. 그리고 조용히 해요. 생각 좀 하게.”
“나가면 집은 따로 구합시다. 굳이 같이 있어야 할 이유도 없지 않소.”
승운의 아버지 나현식은 지친 얼굴로 고개를 내저으며 집을 나갔다. 애초에 집에 들어오는 일이 드문 사람이었다.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으나 미향은 제대로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승운은 광분해서 언성을 계속 높이고 있었다.
“말도 안 돼. 이건 말도 안 된다고요! 도대체 내가 왜……. 도대체 누구예요? 도대체 누구! 아. 그 자식 짓이구나. 이거 그 새끼 짓이지. 권범진!”
“뭐?”
“처음부터 이러려고 엄마한테 접근한 거야. 처음부터! 날 망하게 하려고! 다 빼앗아 갈 작정이었지. 그 새끼는 옛날부터 나한테 열등감이 있었을 테니까. 자기가 못 가진 걸 난 다 가지고 있으니까! 그래서 지금 나한테 복수하는 거야. 준영이 하나로 모자라서 아예 다 가져가 버릴 셈인 거야. 엄마가 그 얕은수에 넘어간 거라고. 엄마가! 멍청하게!”
미향은 이성을 잃고 악에 받쳐 소리를 지르는 승운의 뺨을 세게 내리쳤다. 그녀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승운은 가끔 지나치게 흥분할 때가 있었지만 그래도 그녀에게는 항상 어느 정도의 선을 지켰다. 하지만 지금 그의 눈에는 그녀의 존재가 전혀 비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정신 차려, 나승운. 어디 엄마 앞에서 큰소리를 내!”
고개가 꺾인 채로 승운은 잠시 침묵했다. 머릿속이 어지러워 터져 버릴 지경이었다. 미향은 침착하려 애썼지만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누가 친 덫에 빠진 것인지, 누구인지 어떻게 알아내야 할지, 또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늘 우아하게 결정을 내리던 그녀였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우아할 수가 없었다.
“권 이사가 열등감 때문에 이런 일을 벌였다고? 하지만 홍 사장이 말한 뉘앙스는…….”
가까운 사람인데. 아주 가까운 사람.
저주처럼 그 말에 사로잡힌 기분이었다. 그의 말이 지목하는 사람은 두 명이다. 몇 년째 그녀의 자산을 관리하고 있는 한 팀장, 그리고…….
“김 실장에게 전화 좀 해 봐야겠다. 전화를 해 봐야겠어.”
한 팀장에게는 그럴 이유가 없다. 제가 이런 식으로 무너져서 그에게 득이 될 일이 뭐가 있겠는가? 야단을 많이 치긴 했지만 그만큼의 보수도 주었다. 무엇보다 장녀가 내년에 유학을 갈 예정이라 그는 지금 생활에 어떤 변화도 일어나길 바라지 않을 것이었다.
하지만 김 실장은.
늘 그렇듯 충실했지만 제가 만들어 놓은 그 틈이 점차 벌어지는 것은 느끼고 있었다. 특히 재정 관리를 계속 한 팀장에게 맡기는 것을 신경 쓰는 눈치였지만, 그렇다고 이런 일을 벌일 정도인가? 그렇게나 오랜 세월을 함께했는데?
만약 둘 중에 한 명이라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아니, 지금 상황에 어떻게 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긴 한가?
휴대폰을 찾으려 비틀거리는 그녀의 귓가에 나직한 목소리가 울렸다.
“고작 이 정도였으면서.”
승운의 목소리는 늪 밑바닥의 진흙을 뚫고 나온 것처럼 축축하고 음울했다. 뒤를 돌아보자 처음 보는 눈을 하고 있는 아들이 서 있었다.
핏발이 선 눈은 분명히 그녀를 향해 있었지만 어디를 보고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승운의 입술이 뻣뻣하게 움직였다.
“고작 이 정도밖에 안 되면서 나한테 그랬던 거였어?”
“승운아.”
“뭐든 다 할 수 있는 것처럼? 내 생각이나 말 따위는 재고해 볼 가치도 없는 것처럼?”
“스…….”
“나 같은 건 감히 당신 하는 일을 이해조차 할 수 없는 것처럼! 그렇게 날 아무것도 모르는 등신으로 만들었어!”
고함을 지르는 승운의 벌건 눈에서 눈물이 터져 나왔다. 그대로 생각이 멈춰 버린 것 같아 미향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입술만 달싹였다.
그녀를 노려보며 거칠게 숨을 몰아쉬던 승운이 갑작스레 웃음을 터뜨렸다. 손톱으로 칠판을 긁는 것 같은 불쾌감을 자아내는 웃음이었다. 이윽고 바닥에 끌리는 듯한 목소리가 그의 비틀린 잇새로 흘러나왔다.
“당신이 바라는 건 처음부터 끝까지 한경뿐이었어. 가족도, 아들도 당신에겐 아무 의미가 없었던 거지.”
승운은 눈을 치켜뜨고 있는 미향을 가만히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이제 그 손에 뭐가 남을지, 좀 봐요.”
아들의 이름도 부르지 못한 채 미향은 그대로 뒤돌아서 집을 나가는 승운의 뒷모습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싸늘하게 가라앉은 허공 속에서 그녀를 둘러싸고 있던 강고한 성벽이 붕괴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