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뭐라고 소개를 해야 할지, 아니, 그 전에 소개를 해도 되긴 할지 가늠할 수 없었던 것이다. 무의식이 뭔가 답을 내놓고는 있는데 섣불리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가 않았다.
“그, 제 동료 직원입니다.”
“이분도 한 번에 이름을 안 알려 주시려나?”
곱게 뻗은 눈썹을 까닥인 여자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반갑습니다. 윤준영이라고 해요.”
깨끗하고 선명한 눈빛은 얼룩 한 점 없이 맑았다. 강하게 부딪치는 듯한 그녀의 시선에 중호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예. 저는 이중호라고 하…….”
이름이 뭔가 익숙하다는 생각과 함께 그의 무의식이 결합했다. 눈을 부릅뜬 그의 시선이 삼두에게로 향했다. 삼두가 슬쩍 눈짓으로 대답했다.
“JBK 파이낸셜 직원들은 자기 이름을 특이하게 소개하더라고요. 이중호라고 하, 씨?”
그제야 생전 처음 들어 보는 삼두의 ‘누님’ 소리를 완벽하게 이해한 중호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는 목을 가다듬으며 힘이 들어간 목소리로 다시 한번 정중하게 말했다.
“이중호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조심스러운 그의 시선에 준영이 씩 웃어 보였다. 그녀는 소파에 완전히 몸을 묻은 채 물었다.
“회의 오래 걸릴까요? 여기서 기다리면 만날 수 있나?”
“끝날 시간이 한참 지나긴 했는데요. 누님, 근데 진짜 무슨 일 있으신 거예요? 제가 뭐 도울 일이라도.”
삼두의 목소리에 걱정이 배어났다. 준영이 어깨를 으쓱였다.
“괜찮아요. 지금은 사실 형님이 너무 보고 싶어서 온 거거든요.”
아, 하고 겸연쩍은 표정으로 삼두가 고개를 돌렸다. 중호도 덩달아 눈을 굴렸다. 제가 아는 그 형님을 향해 하는 말이라고 생각하자 어쩐지 등골에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이건 뭐예요? 이율 계산?”
테이블 위에 놓인 서류를 훑어보며 묻는 준영의 말에 삼두가 목덜미를 긁적였다.
“예. 제가 담당하는 곳인데 할 때마다 자꾸 숫자가 다르게 나와서 정리 중이었습니다.”
콧소리를 낸 준영이 서류를 집어 들었다. 저걸 막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고민하며 손을 움찔거리던 중호는 그녀가 이내 심심풀이 퍼즐을 풀듯 펜으로 슥슥 선을 긋고 숫자를 써 내려가는 것을 보았다.
“3300? 2820이 아니라요?”
그녀의 펜이 마지막으로 적은 숫자를 확인한 중호가 눈을 둥그렇게 떴다.
“2820? 2820이 어떻게 나와요?”
순식간에 세 사람의 머리가 한 곳에 모였다. 준영은 과외라도 하듯 숫자를 풀어 주기 시작했다. 중호의 입술이 점점 벌어졌다. 지난 누적분 계산에서 제가 놓친 게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알아듣는 듯한 중호와 중간부터는 그저 그 자리에 앉아 있을 뿐인 삼두를 번갈아 바라보며 준영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JBK 괜찮은 거 맞죠?”
“아, 원래 이런 일은 따로 담당하는 팀이…….”
말끝을 흐리던 삼두가 갑자기 몸을 벌떡 일으켰다. 막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걸어 나오는 두 사람을 본 것이다. 중호에게 마저 설명을 하고 있던 준영이 고개를 들었다. 범진이었다.
“배웅은 괜찮습니다. 들어가시죠.”
“그럼.”
넥타이만 하지 않았을 뿐 깔끔한 슈트 차림의 남자가 범진에게 인사를 하고 건물을 나간다. 한 올의 흐트러짐도 없이 머리를 빗어 넘긴 범진은 그 뒷모습을 보고 서 있다가 시선을 느낀 듯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시원스레 뻗은 그의 눈매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윤준영! 너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아르바이트?”
펜을 쥔 손을 살랑거리는 준영의 눈이 반짝였다. 범진은 황급히 건물을 나간 남자 쪽을 확인하며 미간을 좁혔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다는 듯 눈웃음을 지은 준영이 소파에 팔을 걸친 채 말했다.
“괜찮으면 시간 좀 내주세요, 권범진 이사님. 할 얘기가 좀 있을 것 같은데.”
눈치챘나.
범진은 입을 꾹 다문 채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그를 보며 빙글거리고 있는 준영의 미소가 짙어지고 있었다.
* * *
범진의 사무실은 생각보다 훨씬 크고 쾌적했다. 방을 채운 몇 안 되는 가구가 전부 무채색이라 다소 황량해 보이는 느낌이 있긴 했지만 말이다.
준영은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책장과 그 안에 빼곡하게 꽂혀 있는 책들을 둘러보며 속으로 놀라고 있었다. 평소 같았다면 이 책장만 가지고도 며칠은 얘기했겠지만 오늘은 더 중요한 용건이 있었다.
“일은 잘 끝났어? 오늘 하루만 한경 주식이 12포인트는 올랐던데.”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간 범진이 책상 위에 펼쳐진 서류를 하나씩 덮으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준영은 그저 눈을 가늘게 뜬 채 그를 응시했다. 책상 정리를 끝낸 범진이 그녀를 흘끗 보며 입을 열었다.
“회사에서 무슨 일 있었어? 전화를 하…….”
“나 그 사람 알아.”
그녀의 말에 범진의 손이 멈칫했다. 끼고 있던 팔짱을 풀며 준영이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재단 행사 때 몇 번 본 적 있어. 이름도, 하는 일도 모르지만 얼굴만은 알아. 항상.”
일부러 한 박자 뜸을 들인 준영이 작게 속삭였다.
“홍인섭 사장 반 발짝 뒤에 서 있었거든.”
범진은 덤덤하게 그녀를 마주 보았다. 그의 표정에는 체념의 빛이 섞여 있기도 했다. 준영이 헛웃음을 흘렸다.
“넌 홍미향 이사를 도와서 한경 지분 매수에 관여하고 있었잖아. 근데 왜 홍인섭 사장 쪽 사람이 여길 드나드는 걸까? 이 일의 배경에 JBK가 있다는 걸 알게 된 홍 사장이 너에게 접촉을 시도한 걸까, 아니면.”
범진의 앞에 선 준영이 손가락으로 그의 가슴을 콕 찌르며 말했다.
“처음부터 네가 잡고 있었던 줄이 홍미향이 아니라 홍인섭이었던 걸까.”
짧게 웃은 범진이 그녀의 손가락을 잡고 그 끝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윤준영 감 좋은 건 알아줘야지.”
“숨기려던 게 이거였어? 양다리? 도대체 언제부터? 홍 사장 쪽에서 접근한 거야? 설마 네가 먼저는 아니지?”
흥분한 준영의 언성이 높아졌다. 범진은 우선 그녀를 소파로 이끌었다.
“네가 알아서 좋을 건 없어. 못 본 척 그냥 있어.”
“몰라서 좋을 것도 없지. 아는 것이 힘이다, 몰라?”
“괜히 나승운이나 홍 이사 쪽에서 널 의심할 수도…….”
“그쪽은 상관없어. 회사 그만둘 거니까.”
“뭐?”
빠르게 말을 주고받던 범진이 미간을 찌푸렸다. 나란히 앉은 준영이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좋아할 줄 알았는데. 삼두 씨는 아주 기뻐하더라고. 그런 거 보면 삼두 씨도 알고 있었던 건가? 와, 그 사람 그렇게 안 봤는데 아주 연기파였네?”
“무슨 일 있었구나, 너. 회사에서.”
가볍게 그녀의 손을 잡고 있던 범진의 손에 힘이 들어간다. 준영은 금세 날을 세우는 그의 표정을 보며 불퉁거렸다.
“나승운이 날 유럽 지사로 발령 냈어. 난 거절했고. 회사에 남을 수 없을 거야.”
범진은 말없이 그녀를 응시했다. 가만히 기다려 주는 그의 태도에 준영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어깨를 늘어뜨렸다.
“사실은 그래서 왔던 거야. 난 한경을 떠나야겠는데 엄마가 마음에 걸리고, 네가 괜찮을 거라고 하긴 했지만 ‘어떻게’ 괜찮을지를 알고 싶었거든.”
적어도 기대기 전에 네가 어떤 부담을 지고 있는지는 알아야 하니까.
담담한 그녀의 말투에 범진이 그녀의 손등을 어루만졌다. 준영은 코웃음을 치듯 한쪽 눈썹을 치켜세운 채 그를 흘겨보았다.
“근데 우리 엄마 병원에 계속 있게 해 줄 사람이 홍미향이 아니라 홍인섭 사장이었을 줄은 몰랐네?”
정답이라고 말하는 대신 범진은 고개를 짧게 끄덕였다. 준영은 허리를 반듯하게 세운 채 그의 손을 꼭 붙잡았다.
“이제 말해, 권범진. 회사 그만둘 결심 섰으니까. 언제부터야? 어떻게 된 거고.”
이럴 때의 준영을 막는 건 아무 의미가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안다. 그녀의 눈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던 범진이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홍인섭이 먼저였어.”
“뭐?”
“이성철 이사가 건강이 안 좋아지면서 주총이 열릴 걸 알았으니까. 그걸 기회로 당연히 홍미향이 나승운을 이사 자리에 올리려고 할 걸 예상했지. 그러기 위해 지분을 늘릴 것도.”
“……눈속임을 도와줄 투자 회사를 찾을 것도 알았겠고?”
범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우리가 DH 건설 쪽 일을 하고 있었거든. 그쪽 회장 사모가 홍미향 이사와 가깝게 지내는 사이였고. 그걸 계산하고 우리한테 먼저 손을 내민 거였지.”
자연스럽게 미향이 JBK 파이낸셜의 존재를 알 수 있도록.
하, 하고 헛숨을 내뱉은 준영은 홍인섭의 얼굴을 떠올려 보았다. 보통이 넘는 미향을 수십 년 동안 견제할 수 있었던 것은 과연 운 때문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우리도 손을 잡는다면 현재 경영권을 쥐고 있는 쪽이 나을 거라고 판단했어. 홍미향 이사는 확실히 재산을 불리는 능력은 있지만 그건 회사 운영과는 다른 얘기니까. 지금의 한경을 만들어 온 것은 홍인섭 사장이고, 그 사람이 사장으로 있는 한경에 우리는 투자를 하기로 했어. 어정쩡하게 나승운 같은 놈이 물려받기에는 아까운 회사니까.”
간결한 설명에 고개를 주억이던 준영이 미간을 좁혔다.
“그럼 지분을 매수하기 전에 막았어야 했던 거 아니야? 이미 나승운이 이사가 됐잖아.”
범진은 눈을 낮게 내리깔았다. 그의 목소리가 느릿하게 흘러나왔다.
“이번에 홍 사장은 홍미향의 뿌리를 아예 뽑아 버릴 생각이야. 다시는 경영권에 도전할 꿈도 꾸지 못하도록.”
음산한 선고와도 같게 들리는 그의 말에 준영의 눈이 서서히 부풀었다.
“내가 작업한 건 홍미향을 대신한 지분 매수뿐만이 아니야.”
그녀를 조용히 응시하며 범진이 말을 이었다.
“홍미향이 불법 거래를 지시하고, 그 거래를 위한 차명 계좌를 운영했다는 증거를 확보한 거지. 재단에서 지원하고 있는 유학생들의 명의로 만들어진 계좌 180개와 갤러리를 통해 불법으로 자금을 마련한 증거를.”
정적이 흘렀다. 놀란 준영의 입술이 서서히 벌어지고 있었다.
“그래서 오늘까지 아무 일이 없었구나. 불법 자금을 통한 지분 매수가 끝나고, 나승운이 이사가 된 다음에 터뜨리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