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순간 날카로운 공기를 깨뜨리며 노크 소리가 울렸다.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승운의 비서였다. 찻잔을 올린 트롤리를 밀고 있는 그녀를 보자마자 승운이 눈썹을 곧추세웠다.
“나가.”
“네? 이사님께서 차를 가져오라고…….”
그녀는 갑자기 벌떡 일어나 제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오는 승운을 보며 입을 다물었다. 그녀에게 바짝 다가선 승운이 나직하게 속삭이듯 말했다.
“명심해요, 이 비서. 앞으로 내가 두 번 말하게 하지 말아요. 어떤 일이든.”
준영에게는 그의 뒷모습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창백하게 굳어진 비서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승운의 표정을 짐작할 수 있었다.
비서가 서둘러 밖으로 나가고 나자 한결 싸늘해진 침묵이 내려앉았다. 깊이 숨을 들이쉬고 몸을 돌린 승운은 준영을 곧게 쳐다보며 다가왔다.
“잊었어? 네 손으로 언론에 뿌렸잖아. 난 명인일보 장세라와 약혼했어. 곧 결혼도 하겠지. 유럽에서 지내려는 건 세라를 위해서이기도 해. 파리를 좋아하니까. 도대체 네가 무슨 오해를 하고 있는지 모르겠군.”
헛웃음을 흘리며 승운은 다시 자리에 털썩 앉았다. 준영은 말없이 그의 손등에 퍼렇게 솟아 있는 핏줄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목소리가 담담하게 흘러나왔다.
“제가 거절하려는 건 이사님이 장세라 씨를 두고 저에게 다른 마음을 품을 거라는 생각을 해서가 아닙니다.”
감정이 없는 듯한 말투에 승운의 뺨이 파르르 떨렸다. 준영은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입술을 움직였다.
“그날, 자기 감정만 앞세워서 제 손목을 강제로 잡아끌던 모습 때문에 그러는 거예요. 그동안 쌓아 왔던 저와의 모든 관계를 내팽개치는 데 주저함이 없었죠. 저는 그 행동을 명백한 위협으로 느꼈고, 때마침 다른 사람이 오지 않았으면 어땠을까를 상상하면 지금도 편하게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준영아, 그건……!”
붙잡으려는 듯 승운이 손을 뻗자마자 준영은 망설임 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는 제 목소리가 떨리지 않기를 바라며 말을 뱉었다.
“그래서 거절하는 겁니다. 공사 구분을 못 해서가 아니라, 제 안전을 위해서요. 저는 한 공간에서 이사님과 함께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럼.”
돌아서는 순간에도 준영은 승운이 갑자기 제 손목을 끌어당기거나 무언가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잔뜩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승운은 몸을 움직이지는 않았다. 그저 입을 열었다.
“어머니는 이제 아무래도 좋은 거야?”
문 앞까지 걸어가던 준영이 걸음을 멈췄다. 심장이 덜컹거리며 툭 떨어지는 것 같았다.
“한경 덕에 숨 쉬고 있는 네 어머니 말이야, 준영아.”
아이를 달래듯 승운이 나른하게 말했다.
“이제 지긋지긋해졌어?”
굳게 닫힌 문을 응시하며 준영은 주먹을 말아 쥐었다. 손톱이 살을 파고든다. 입술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세상에 하나뿐인 가족이잖아. 건강 상태도 좋으시고. 남자 하나 때문에 이대로 보내 버리면 넌 더더욱 앞으로 편하게 잠들지 못할 거야.”
한 걸음씩 다가오며 승운이 나긋이 말한다. 그녀가 움직이지 못하도록 그림자에 못이라도 박고 있는 것 같았다. 등 뒤에 선 그가 속삭였다.
“할 수 있겠어? 네 손으로 어머니 호흡기를 떼어야 할 텐데. 아니면 범진이한테 가서 매달릴 생각이야? 아무 쓸모도 없이 허공에 날리는 꼴이 되는 돈을 기꺼이 내 주겠대? 언제까지? 무슨 대가로? 그놈이 못 하겠다고 하면. 아하, 그때 가서 못 이기는 척 어머니를 외면할 계산속인가?”
준영은 짧게 숨을 토해 냈다. 가슴속에 수치심과 함께 색깔이 분명한 분노가 거칠게 넘실대고 있었다.
저와 제 어머니의 관계를 입에 담을 수 있는 사람은 저 외에는 아무도 없다. 누구도 그 사이에 오갔던 그 수많은 감정들을 보지도, 겪지도 않았으니까.
엄마를 미워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고작 잠들어 있는 그 편안한 얼굴을 보기 위해 악착같이 회사에 매달려 일을 하는 자신이 어이가 없기도 했다. 그저 살아서 존재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도대체 뭐라고.
하물며 저조차도 정확히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을, 누구도 대놓고 이용할 수는 없다. 그래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나승운.”
느릿하게 돌아선 준영은 승운을 똑똑히 마주 보았다.
“넌 한 번도 날 친구로 생각한 적이 없어. 갖고 싶은 대상일 뿐이었지. 예전에도, 지금도.”
“준영아, 나는…….”
한숨을 쉬는 승운을 가로막듯 그녀는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뱉었다.
“넌 이미 충분히 가지고 있잖아. 네 손안에 있는 걸 봐. 남의 손만 보지 말고. 안 그러면 평생 불행할 거야.”
반듯하게 뻗어 있던 승운의 미간이 찌푸려진다. 그 지긋지긋한 얼굴을 바라보며 준영이 또렷하게 말했다.
“앞으로 다신 보지 말자.”
서글서글하고 늘 꿈꾸는 왕자님 같던 다갈색 눈동자가 어둡게 무너져 내린다. 그 눈을 뒤로한 채 준영은 몸을 돌렸다. 승운이 무어라 말을 하는 듯한 소리가 들렸지만 이제는 어떤 말도 그녀에게 닿지 못했다.
13
“아니, 그러니까, 여기서 300을 더하고, 저기서는 27프로를 빼면 되니까, 2600이 나오는 게 맞잖아.”
“여기서 왜 27프로를 빼. 저쪽에서 빼야지. 2820.”
“왜?”
중호는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옛날 업체에 있을 때 혼자서 이자 계산 다 맡았다더니 거기가 왜 망했는지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삼두는 많은 장점이 있었지만 숫자 계산만큼은 아니었다.
“넌 앞으로 이런 일은 다른 애한테 맡겨. 네 머리 믿지 말고.”
“이걸 어떻게 다른 애한테 맡겨? 나 아니면 네 선에서 해결해야지.”
대부분의 투자 사업과 여신 관리 업무는 이미 전문 파트로 넘어갔으나 오래전부터 이어진 개인 사채 건에 관해서는 아직까지 그들이 담당해야 하는 부분이 있었다. 따로 사무실이 없는 두 사람은 널찍한 건물 로비에 앉아 머리를 싸매고 있는 중이었다.
“대가리 잘도 무사하다. 형님이 가만두는 게 놀라울 뿐이네.”
“네 대가리나 걱정해. 회장님은?”
“K 증권 본부장이랑 다방에서 미팅 중.”
그들이 다방이라 칭하는 곳은 JBK 파이낸셜 건물 안쪽에 있는 작은 카페였다. 당연히 그곳에서 일하는 모든 직원은 JBK 소속이었기 때문에 상춘의 경호를 맡고 있는 중호도 잠시 삼두의 옆에서 숨을 돌릴 수 있는 것이었다.
물론 이럴 바에야 차라리 장승처럼 카페 문 앞에 서 있는 게 나을 뻔했지만 말이다.
“부산 다녀온 건 어떻게 됐어?”
“뭘.”
눈썹을 꿈틀거린 삼두가 갑자기 헛기침을 내뱉으며 시선을 피했다. 중호는 혀를 끌끌 찼다.
“말 겁나 아끼네. 야, 궁금해 미치겠다고. 다른 사람도 아니고 형님한테 애인이 생겼다는데 너 같으면 안 궁금하겠어? 회장님도 입만 열면 그 얘긴데.”
“나는 몰라. 아무것도 몰라. 묻지 마라.”
“뭐 부끄러운 얘기도 아닌데 그렇게까지 입을 다물어. 형님이 입단속 시켰냐? 나도 회장님께 들어서 조금은 알아. 형님이랑 고등학교 때부터 알던 사이라며. 이름이 뭐였더라. 윤, 지영? 정연?”
기억을 더듬어 가던 중호는 문득 시선을 어딘가에 둔 채 눈만 끔벅이고 있는 삼두를 발견하곤 미간을 찌푸렸다.
“왜. 뭘 그렇게 놀라.”
“……내가 지금 헛거를 보고 있나?”
“뭔데 그래. 연예인이라도 들어왔어? 난 요즘 차강은이 좋던데.”
삼두의 눈길을 따라 고개를 돌린 중호의 눈에 막 건물 안으로 들어선 여자가 들어왔다.
깔끔한 파스텔 톤 블라우스에 기하학적인 패턴이 들어간 스커트를 입은 그녀는 또각또각 걸어와 로비 한가운데에 잠시 멈춰 섰다. 리셉션 데스크 위에 걸린 층별 안내표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독특한 분위기의 미인이다. 하나로 딱 떨어지게 묶은 머리 스타일이나 단정하면서도 또렷한 이목구비가 쉽게 접근하기 힘든 분위기를 풍겼다. 자세가 워낙에 꼿꼿하고 눈매가 날카로워 오히려 보는 사람을 위축되게 만들고 있었다.
일단 돈 빌리러 온 사람은 아니고. 회사에 투자를 제안하기 위해 온 사람도 아닌 것 같고.
다른 건물로 착각했나?
“누님!”
중호의 생각을 와장창 부순 것은 벌떡 일어난 삼두였다. 서늘한 느낌을 풍기는 말간 얼굴이 이쪽을 돌아보았다.
“삼두 씨?”
눈을 둥글게 뜬 여자가 입꼬리를 끌어 올린다. 봄꽃이 만개한 듯한 화사함과 짓궂은 아이 같은 경쾌함이 뒤엉킨 미소였다.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던 중호는 이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오는 여자의 행동에 엉거주춤하게 일어섰다.
“여, 여, 여긴 어쩐 일로……. 혹시 형님과 약속하셨습니까? 아닌데. 형님은 지금 미팅 중…….”
“그냥 들이닥쳤어요. 내가 지금 안 그래 보여도 폭발하기 직전이라. 회의 중이에요? 삼두 씨는 여기서 뭐 하고?”
“저는 잠깐 월세 계산을 좀……. 근데 누님, 여기 오셔도 괜찮을까요?”
보통의 여자들은, 특히 젊은 여자들은 삼두와 눈만 마주쳐도 피하기 일쑤였다. 그런데 여자는 태연하게 다가와 삼두의 옆에 털썩 앉았다. 오히려 삼두가 그 넓은 어깨를 바싹 움츠리고 있었다.
“왜요. 돈 빌릴 거 아니면 오면 안 돼요?”
미소가 사라진 그녀의 얼굴은 한겨울이 무색할 정도로 냉랭해 보였다. 중호는 고양이 앞의 쥐처럼 입술만 달싹이고 있는 삼두를 넋 놓고 쳐다보았다. 정말로 놀라운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뾰족하게 눈꼬리를 치켜올리고 있던 여자는 이내 짧게 한숨을 내쉬며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미안해요. 지금 좀 예민해서. 진짜로 돈을 빌려야 할 수도 있고.”
“예? 무슨 문제 생기셨어요?”
“문제라면 문제죠. 회사를 나와야 하게 생겼으니까.”
“정말요?”
삼두의 목소리가 커짐과 동시에 여자의 고운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왜 좋아해요?”
“제, 제가 그랬습니까?”
“그리고 아까부터 저만 뚫어져라 보고 있는 저분은 누구고?”
여자와 정통으로 눈이 마주친 중호는 어색한 표정으로 삼두를 곁눈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