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저 여명일 뿐-79화 (79/86)

<79화>

범진이 무덤덤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허, 하고 헛숨을 뱉으며 준영이 입술을 깨물었다.

“나 저쪽 집 아직 정리 안 했는데. 계약 기간도 남았어.”

“천천히 해. 마음이 여기 있으면 된 거니까.”

“나 참. 성질이 급한 건지 아닌 건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그녀는 다시 범진의 가슴팍에 머리를 기댔다. 이 품은 꼭 제 몸에 맞춘 것처럼 안락했다. 따뜻하면서도 든든하고 강한 품.

범진의 손이 다시 그녀의 머리를 찾았다. 토닥이듯 느리게 쓸어 주며 그가 중얼거렸다.

“일이 아닌 뭔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은 한 적이 없었어. 근데 너랑은 하고 싶은 게 참 많다. 그냥, 사소한 것들 말이야.”

“예를 들면? 영화를 보거나, 손잡고 산책을 하거나?”

“날씨 좋은 날 피크닉도. 대신 딸기잼은 적당히.”

반사적으로 엄중해지는 범진의 말투에 준영이 짧게 웃음을 흘렸다. 아, 하고 반짝 고개를 치켜든 그녀가 범진의 어깨를 붙잡은 채 몸을 틀었다.

“자전거도 타자. 여행도 갔으면 좋겠다. 요리는 네가 해. 난 라면이면 돼. 입 안 까다로운 거 알지?”

“가족사진도 찍었으면 좋겠다.”

피식 웃은 범진의 시선이 거실 한쪽 벽으로 향했다.

“저기 걸어 놓으면 좋을 거야.”

그를 따라 텅 빈 벽을 바라보던 준영의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갔다. 아무렇지 않은 대화들인데도 어쩐지 울컥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들썩이는 마음을 가라앉히듯 숨을 깊이 들이쉰 그녀는 가늘게 뜬 눈으로 범진을 흘겨보았다.

“너 혹시 출산 계획까지 세워 놓은 건 아니지?”

“애는 별로라. 제대로 키울 자신도 없고.”

고개를 내저은 그가 턱을 어루만지며 흘리듯 말했다.

“그래도 네가 낳은 아이라면 보고 싶긴 해. 누굴 닮았든 키우기 쉽진 않을 것 같지만.”

“기가 막혀서. 생각이 도대체 어디까지 가 있는 거야?”

“윤준영이.”

자꾸만 제 무릎 위에서 뒤척이는 준영의 손을 잡은 그가 아래로 끌어내리며 속삭였다.

“언제까지 이걸 모른 척할 셈인가, 까지?”

단단해진 그의 몸이 손에 닿는 느낌에 준영은 새침하게 코웃음을 치며 턱을 들었다. 다리를 벌리고 그의 무릎 위에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은 그녀가 가만히 범진을 마주 보았다.

범진과 함께 있으면 늘 미래를 상상하게 된다. 그리고 그 미래는 저 혼자만의 것보다는 항상 밝았다.

말 잘 듣는 강아지처럼 저를 향해 있는 그의 양 뺨을 감싼 채 준영은 짓궂은 얼굴로 웃었다.

“키스만 해 줄 거야.”

“넌 그것만 해.”

눈썹을 느른하게 까닥인 범진은 제게 살며시 입을 맞춰 오는 준영의 등을 끌어안았다. 따뜻하고 포근한 공기가 겹쳐진다. 시원하게 느껴지는 실내 공기 사이로 샤워 가운이 나풀거리며 떨어지고 있었다.

* * *

주주총회는 예정대로 진행되었다. 신임 이사 선임 건이 결의되는 것과 동시에 언론에는 승운과 장세라의 약혼 사실이 발표되었다. 현재 한경을 이끌고 있는 홍인섭 사장과의 관계도 다뤄졌지만 적절히 통제한 덕분에 홍씨 일가의 예민한 구도가 전면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았다.

회의실에서 주주총회를 모니터링하며 언론사와의 모든 연락을 담당하고 있던 준영은 일이 끝나자마자 그대로 흐물흐물 의자 위로 미끄러져 내렸다. 긴장이 완전히 풀리자 그제야 피로가 몰려왔던 것이다.

이제야 깨달았다. 이건 권범진을 탓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제 의지의 문제였다.

아니야. 그렇다고 권범진한테 잘못이 없다고는 할 수 없지. 어제는 유독 사람을 아주 설탕물에 담그려고 작정이라도 한 것처럼……!

“수고했어요, 윤 대리.”

“고생하셨습니다.”

테이블 맞은편에 앉아 있던 임 과장이 손을 까닥이는 것을 본 준영이 얼른 허리를 반듯하게 세우고 앉았다. 하지만 서로 눈 밑이 퀭한 상태라 이내 마주 웃고 말았다.

“어쨌든 이렇게 또 한 건이 끝났네. 급하게 뭉친 것치고는 괜찮은 팀워크였죠?”

“많이 배웠습니다.”

준영의 깍듯한 대답에 임 과장은 느긋한 얼굴로 손을 저었다.

“일 처리가 확실해서 속이 시원하더군요. 나처럼 느림보 같은 사람한테는 좋은 자극이었어요.”

“신중하신 거죠.”

“혹시 그…….”

무어라 말을 꺼내려던 임 과장에 앞서 준영의 휴대폰이 깜빡였다. 왜 저 이름은 항상 다른 사람들과 함께 보게 되는지 모를 일이다. 어색하게 웃은 그녀는 휴대폰을 덮어 놓았다.

“수고했다고 말하려고 전화했나 봐요. 공치사에 아낌이 없는 타입이라.”

“그렇군요.”

“안 받아도 되니까 말씀하세요.”

“아닙니다. 다음에 하죠. 이 답답한 회의실부터 나갑시다.”

일어서는 그를 따라 준영도 자리를 정리하고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자리에서 노트북을 챙기던 임 과장이 잠시 멈칫했다. 사내 메일을 수신하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다시 마주쳤다.

“다음 일거리가 아니기만을 바랍시다.”

“전 적어도 제 자리에서 읽어 볼래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걸어가던 준영은 엉거주춤한 자세로 메일을 열어 본 임 과장의 시선이 서서히 제게로 꽂히는 것을 보았다. 눈을 깜빡이자 그가 애매한 표정을 지으며 안경을 밀어 올렸다.

“왜요? 설마 정말로 다음 일거리인가요?”

그에게 다가가자 노트북 화면을 돌려 준다. 메일을 확인한 준영의 미간이 천천히 구겨졌다. 날아온 메일은 인사 공지로, 그녀의 유럽 지사 해외 발령을 알려 주고 있었다.

“……프로젝트 매니저?”

보직을 확인한 준영은 저도 모르게 헛웃음과 함께 되뇌었다. 말하자면 승진이다. 그것도 어마어마한.

그녀가 맡아 본 일은 TANDOZ 건밖에 없었지만, 그 일은 유럽 시장 내의 유통 채널을 열기 위한 포문에 불과했다. 현재 한경은 유럽을 겨냥한 좀 더 큰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문제는 저는 매니저를 맡을 만한 수준의 경력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유럽 지사의 프로젝트 매니저는 결정에 대한 자유가 있지만 그만큼 큰 책임과 의무가 따른다. 고작 경력 5, 6년 차가 담당할 일이 아니었다.

“신사업을 진행하기 위한 욕받이가 필요한 걸까요? 어떻게 저를 저 자리에 보낼 생각을 하죠?”

“나승운 팀장, 아니, 나승운 이사가 그쪽 일에 관심이 많다고 들었어요.”

임 과장이 옅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냥 소문일지도 몰라서 말 안 했는데, 아예 유럽 지사를 맡을 생각도 하고 있다더군요.”

“네?”

“임원이 되면 주주들에게 그만큼의 성과를 보여 줘야 하니까요. 규모가 크기도 하고, 새로 채널을 뚫는 일이니 적어도 몇 년은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성과와 상관없이 다들 지켜볼 겁니다. 부담은 되지만 가능성도 큰 일이니 마다할 이유가 없겠죠.”

준영의 입술이 힘없이 벌어졌다.

설마.

그럴 생각으로 날 유럽 지사로 발령 낸 건 아니겠지.

장세라와 약혼 발표까지 한 이 마당에……?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끼쳤다. 제 손목을 우악스럽게 붙잡던 그의 표정이 눈앞을 스치고 있었다. 미간을 찌푸리던 준영은 순간 울리는 벨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회의실 내 전화가 울리고 있었다.

제 눈치를 살피는 임 과장에게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준영이 수화기를 들었다. 낭랑한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 윤준영 대리님?

“네. 윤준영입니다.”

- 나승운 이사님 호출입니다.

서늘하게 굳어지는 그녀의 표정에 임 과장이 낮게 한숨을 내쉰다. 회의실 안을 가득 채운 공기가 순식간에 바닥까지 가라앉고 있었다.

* * *

새로 단장된 이사실은 전과는 다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최연소 이사를 맞이한 만큼 신경을 많이 썼으리라. 안으로 들어서자 창밖을 바라보고 있던 승운이 고개를 돌렸다.

“앉아요.”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깍듯한 존대에 준영도 고개를 숙이고는 소파에 앉았다. 비서에게 차를 주문하는 승운의 태도는 자연스러웠다. 단정한 네이비 톤의 슈트를 입고 있는 그의 얼굴은 전보다 훨씬 말라 날카로운 느낌을 풍기고 있었다.

“인사 발표는 봤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갑작스럽다고 생각했겠죠. 미리 언질을 주려고 했는데 통화가 잘 되지 않아서.”

그런 용건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준영은 반듯하게 앉아 그를 응시했다.

“이사님께서 저를 추천했다고 들었습니다. 적임자라고 생각하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느릿하게 걸어와 그녀의 맞은편에 앉은 승운의 입술이 비스듬히 기울었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 그렇게나 흥분했던 사람과 동일 인물이라는 걸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정중하고 침착한 표정이었다.

넥타이 매듭을 조금 잡아당긴 승운이 입을 열었다.

“옆에서 봐 왔기 때문에 윤준영 대리가 어떤 사람인지 압니다. 얼마나 노력하는지, 얼마나 많은 일을 해냈는지, 얼마나 과소평가받고 있는지.”

준영은 그를 주의 깊게 바라보았다. 이렇게 거리를 두고 얘길 하는 이유가 그날 폭력적으로 굴었던 것에 대한 반성인지 알아보고 싶었던 것이다. 승운은 그녀를 차분하게 마주하며 덧붙였다.

“새로운 길을 개척해야 하는 상황에서 나한테 필요한 사람은 더 경험이 많고 더 많은 걸 아는 사람이 아니에요. TANDOZ 건을 진행했으니 현지 상황도 잘 알고, 추진력도 있고, 역량이 뛰어난 직원을 추천한 것뿐입니다. 인사팀에서도 윤 대리의 능력을 인정했으니 받아들여 준 것이겠죠.”

“이사님이 직접 유럽 지사를 맡게 된다는 소문이 있던데요.”

준영의 말에 승운의 쭉 뻗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러나 그는 이내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사실입니다. 이사로서의 능력을 선보일 수 있는 기회가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준영의 입가에도 희미한 미소가 흘렀다. 잠시의 침묵 끝에 그녀는 눈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죄송하지만 저는 이 일을 맡지 못할 것 같습니다. 이유는 이사님이 더 잘 아시리라 생각하고요.”

그녀와 시선이 부딪친 승운의 눈동자가 크게 떨렸다. 웃음기가 가신 얼굴이 기묘하게 일그러진다. 주먹을 천천히 말아 쥔 그가 딱딱하게 입을 열었다.

“공과 사를 구분할 줄 알아야지, 윤 대리. 내 감정은 이 인사와는 상관이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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