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저 여명일 뿐-78화 (78/86)

<78화>

“……뭐?”

“그땐 손이 매운 것만 닮았다고 생각했는데, 너 눈매나 입매도 닮았어. 어머님이랑.”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우리 엄마를 봤어?”

“응.”

“언제?”

“한경 일 맡고 나서.”

“뭐? 어떻게 알아서? 왜 나한테 말 안 했는데?”

그녀가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처럼 언성을 높이는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백미러를 확인한 범진이 입을 열었다.

“생각이 많을 때라. 조용히 인사나 드릴까 하고. 내가 어머님과는 인연이 좀 있잖아.”

하, 하고 입을 딱 벌린 준영이 비딱하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한경 일 맡은 지가 언젠데 이제 얘기를 해? 와, 정말 감쪽같다. 권범진이 작정하고 속이면 이렇구나? 사람 정말 믿을 수가 없네.”

“한마디만 더 듣고 마저 비꽈.”

범진이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네가 한경을 나와도 어머님이 그 병원에 계시는 데는 문제가 없어. 알아 두라고.”

콧잔등을 잔뜩 찡그린 채 범진을 놀릴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던 준영의 입술이 힘없이 벌어졌다. 멍하니 두어 번 눈을 깜빡거린 그녀가 눈을 반짝 치뜨며 물었다.

“지금 나한테 돈을 빌려주겠다는 얘길 하는 거야?”

“아니. 너 돈 필요해?”

“아니! 돈은 필요하긴 하지만 네 돈은 아니지!”

버럭 외친 준영이 그 기세를 따라 말을 쏟아 냈다.

“그럼 뭐야? 거기 한 달에 병원비만 얼마가 나오는지 알아? 그나마 홍미향 이사의 입김 때문에 재단 지원금 수령 대상으로 선정돼서 겨우 버티는 수준……. 너 혹시 이번 일 맡으면서 그 사람이랑 거래 같은 거 했어? 내가 회사 나가도 엄마는 병원에 계속 있게 해 달라고?”

뾰족한 그녀의 말에 범진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대답을 하지 않으면 제 목을 쥐고 흔들어 대기라도 할 것 같은 준영의 시선에 그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정답은 아니지만 비슷해.”

“정답은 왜 말 안 해 주는데?”

이번엔 굳건하게 입을 다물고 있는 범진을 바라보며 준영이 팔짱을 꼈다. 침묵이 흐른다. 가늘어진 그녀의 눈을 따라 한참 만에 차분하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한테 숨기는 게 또 있구나, 권범진.”

흘끗 그녀를 본 범진이 쓴웃음을 짓는다. 그가 길게 숨을 들이쉬고는 나직하게 말했다.

“숨긴다고 생각하면 어쩔 수 없지만, 일 때문이라고 생각해 주면 고맙겠어.”

그의 말에 미간을 좁힌 준영이 눈을 굴렸다.

정답과 비슷하다고 했으니 제 생각에서 크게 벗어났다는 얘기는 아니다. 한경과 거래를 할 때 비밀 유지 조건 같은 게 있었다면 이해하지 못할 일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괘씸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

시시콜콜한 일들을 전부 말해 줘야 한다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물어봐도 답을 들을 수 없다는 건 답답하고 서운하다. 갈팡질팡하는 스스로의 마음을 비스듬히 들여다보고 있던 준영의 귓가에 범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솔직히 말하면 너를 한경에 두는 게 불안해.”

정적을 깨뜨린 그를 좇아 준영이 눈을 들었다. 범진이 단단한 표정으로 말하고 있었다.

“난 이번 일이 끝나면 한경 소식은 지금만큼은 모르게 될 거고, 나승운도 마음에 걸려. 네가 한경에 반드시 있어야 하는 이유가 어머니뿐이라면, 다른 길도 있다는 걸 알려 주고 싶었어.”

안다. 어떻게 보면 범진은 그녀의 가장 큰 약점을 해결해 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다만 ‘어떻게’ 해결했는지를 모를 뿐.

하지만 언제나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다.

이것은 범진이 저를 위해 해 준 일이라는 것.

어지러운 머릿속을 털어 내듯 고개를 내저은 준영이 제 뺨을 찰싹 때리듯 감쌌다. 그런 채로 범진을 보며 입술을 비죽였다.

“그 정답, 언젠가는 말해 줄 수 있는 거야?”

불퉁한 말투에 팽팽하게 힘이 들어가 있던 범진의 눈매가 조금 누그러졌다. 그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언젠가는.”

치, 하고 바람 빠진 듯한 소리를 내며 준영이 발을 굴렀다.

“요즘 같은 구직난에 속 편한 소리 하시네. 아, 자기는 임원이다 이거지?”

“윤준영답지 않게 무슨 약한 소릴. 널 안 받아 줄 회사가 어딨어?”

“……JBK 파이낸셜?”

표창처럼 급소를 노리고 날아온 듯한 말에 범진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의 뺨을 손가락으로 콕 찌르며 준영이 웃음을 터뜨렸다.

“생각해 볼게. 어쨌든 지금은 배부르게 먹고 씻고 푹 자고 싶어.”

“그래. 다 왔다.”

범진이 핸들을 꺾으며 천천히 속도를 줄였다. 널찍한 주차장을 가로지르는 차가 매끄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 * *

“준비성이 지나친데.”

부른 배를 안고 따뜻한 물로 샤워를 마친 준영은 문에 걸려 있는 샤워 가운을 발견하고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도톰한 가운을 걸친 뒤 욕실 밖으로 나왔다. 시원한 공기가 그녀를 맞이했다.

사냥감을 찾는 맹수처럼 고개를 내밀고 기웃거리자 소파에 앉아 있는 범진의 반듯한 뒤통수가 보인다. 무릎 위에 노트북을 올려놓고 있는 그에게 다가가며 준영이 물었다.

“집이 너무 좋고 깔끔하네. 더 충격적인 건 여자용 샤워 가운이 있다는 거고.”

그녀의 말에 미간을 좁힌 범진이 노트북을 닫았다.

“내가 너무 섬세했나?”

“노트북 좀 치워 줘. 거기 내 자리잖아.”

손가락질을 하자 범진이 기가 막히다는 듯 헛웃음을 흘린다. 그러면서도 노트북을 옆으로 밀쳐 버리는 그의 무릎에 당당하게 앉자 범진이 그녀의 허리를 자연스럽게 감쌌다.

“어머니 일로 화가 안 풀렸어?”

“무슨 소리야?”

“가운만 입고 있잖아.”

아직 촉촉하게 젖어 있는 그녀의 온기에 범진의 눈이 가늘어졌다.

“괴롭히는 거야, 아니면.”

커다란 손이 그녀의 몸을 굴곡을 따라 느릿하게 쓸어내린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조용히 준영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생각이 바뀐 건가?”

검게 빛나는 그의 눈을 마주하던 준영은 피식 웃으며 범진의 뺨을 가볍게 꼬집었다.

“아쉽지만 전잔데.”

흠, 하고 범진이 눈썹을 들썩였다. 아쉽다는 듯 허리 근처를 맴돌던 그의 손이 얌전히 떨어져 나갔다. 준영은 짧게 한숨을 내쉬며 범진의 가슴팍에 머리를 기댔다.

“이 자리 명당이네. 야경도 잘 보이고.”

“다행이다. 소파 위치만 다섯 번 바꿨어.”

불평처럼 날아온 말에 준영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진짜?”

“내가 사는 집에 네가 온다는 게…….”

덜 마른 준영의 머리를 부드럽게 매만지며 그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믿기지가 않아서.”

준영은 가만히 그의 손에 머리를 맡긴 채 창문 너머로 보이는 풍경을 응시했다. 나직하고 울림이 있는 범진의 목소리를 이렇게 듣는 게 좋았다.

“더 얘기해 봐.”

재촉하듯 머리를 조금 비비자 범진이 낮게 웃었다.

“누군가와 한 공간 안에 있는 게 편안하다고 생각해 본 적 없는데, 넌 그래.”

“그거야 우린 역사가 있잖아. 한집에서 같이 먹고, 넌 자고 난 공부하던.”

어깨를 타고 내려온 범진의 손을 만지작거리던 준영이 아, 하고 고개를 들었다.

“복층 집을 구해 보는 것도 좋겠다. 그때처럼 넌 2층을 쓰고, 난 1층에 있고. 그 집 생각날 것 같아.”

“안 돼, 그건.”

생각 외로 단박에 흘러나온 거절에 그녀는 허리를 곧추세운 채 범진을 보며 물었다.

“왜 안 돼?”

“그때처럼 침대에 누워서 책상 앞에 앉아 있는 네 뒷모습을 바라만 보라고? 누굴 말려 죽이려고. 지금 간격이 딱 좋아, 난.”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던 범진이 짐짓 불만스레 한쪽 눈썹을 올린다. 허, 하고 고개를 내저은 준영이 투덜거렸다.

“괴롭힌다고 뭐라고 할 때는 언제고. 우리 권범진 씨 머릿속에는 언제부터 그런 생각밖에 없었나?”

“네가 하필 비에 쫄딱 젖은 채 나타났을 때부터.”

낮게 눈을 내리깐 범진이 태연하게 대꾸한다. 그의 시선이 닿은 입술의 온도가 달라지는 것 같아 준영은 짐짓 미간을 엄하게 찌푸렸다.

“분위기 몰아가지 마. 오늘 안 한다고 했어.”

“그거야 두고 보면 알 일이지.”

“두고 보고 자시고 넌 정도를 몰라서 오늘은 안 하…….”

“같이 살자, 준영아.”

그녀의 손을 들어 올려 가볍게 입을 맞추며 범진이 속삭였다.

“앞으로도 계속.”

비웃으며 무어라 잔소리를 하려던 준영은 범진의 진지한 눈에 입을 열지 못했다. 그는 조용히 준영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내가 옆에 없는 게 어색해졌으면 좋겠어. 혼자 있는 것보다, 나랑 같이 있는 게 더 좋다고 생각했으면 좋겠고. 내가 그렇듯이.”

침묵이 부드러운 날개처럼 가라앉는다. 저를 똑바로 보고 있는 범진과 시선을 맞추던 준영이 슬쩍 눈썹을 들썩였다.

“청혼처럼 들린다?”

“맞게 들었네.”

순순히 긍정하는 범진의 태연함에 준영은 헛웃음을 흘렸다.

“넌 어떻게 된 게 뺄 때는 언제고 매번 이렇게 극단적이야? 이제 겨우 집에 처음 발 디뎠더니 뭐? 청호온?”

“시작하면 그만 못 둘 거라고 했잖아. 사실상 이런 결과는 내가 네 집에 갔을 때 결정된 거나 다름없지.”

덤덤하게 대꾸하며 범진이 그녀의 손을 고쳐 쥐었다. 따뜻하게 감싸 오는 그 손의 온도를 느끼며 준영이 입술을 비죽였다.

“결혼 같은 거 관심 없을 줄 알았는데.”

“없었지. 할 필요가 없으니까. 옆에 누굴 둘 생각도 없었고.”

“지금은?”

“……내가 옆에 있고 싶어.”

손을 들어 올린 범진은 준영의 뺨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매서운 느낌을 풍기는 그의 눈매가 지금만큼은 한없이 유연하게 누그러져 있었다. 그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혼자 두고 싶지 않아. 앞으로 닥쳐올 어떤 순간에도.”

제 입술을 가만히 눌렀다 떨어지는 그의 손을 준영은 꼭 붙잡았다. 가슴이 자꾸만 간질거리고 심장이 뛰어 댄다. 실없는 웃음이 새어 나올 것만 같아 그녀는 애써 입꼬리에 힘을 주었다.

“내가 하기 싫다고 하면 어떡할 건데?”

“결혼을 미루는 건 상관없어. 서류상의 문제니까. 이 집에서 나랑 살면서, 앞으로도 계속 같이 살아갈 만한 놈인지 아닌지 알아 가면 돼.”

“여기서 나간다는 전제는 아예 없는 것처럼 들리네.”

“응. 없어. 네가 날 허락한 그 순간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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