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미향은 늙었고 저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미향은 아들인 승운을 통해서 한경에 계속 그녀의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다. 언제 대체될지 모르는 저와는 다르게.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승운이 이 모양이라는 것이다.
아랫사람과는 거래를 할 필요가 없다. 그들에게 필요한 건 제안이 아니라 지시다. 목줄을 쥐는 법조차 모르니 위계를 세울 수 있을 리가.
“그럼 내 요구는 언제 들어줄 거지?”
승운의 목소리에 김 실장은 희미하게 눈으로 웃으며 입을 열었다.
“세세한 동선을 파악하고 기회를 만드는 데는 시간이 걸립니다. 도련님이 번듯하게 이사 자리에 오르고 별일 없이 장세라 씨와 결혼을 하게 되면, 디데이를 잡아 보죠.”
헛웃음을 흘리며 승운이 고개를 내젓는다. 정말로 모든 것은 한경과 미향을 위해서라고 생각하니 나오는 웃음일 것이다.
어째서 누군가의 충성이 영원할 거라고 생각하는가. 변하지 않는 것을 찾기 힘든 이 세상에서 말이다.
“재무 구조에 대한 브리핑은 다음 주 월요일에 듣겠습니다. 오늘은 푹 쉬세요, 도련님. 곧 주총입니다.”
김 실장은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돌아 나왔다.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주름진 그녀의 눈가가 짧게 휘어지고 있었다.
12
어느 팀에 가든 놀 팔자는 아닌가 봐.
준영은 뻐근한 목덜미를 주무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원래 제가 담당했던 건의 팀원들은 일이 마무리된 상태라 다들 퇴근한 후였다.
언론사에 배포할 자료를 홍보팀에서 받았지만 도저히 그냥 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명인일보에서도 협조하는 대신 조금 더 나승운을 부각시킬 수 있는 자료를 만들어 달라고 했기 때문에 준영은 경영기획팀에서 진행한 최근 몇 년간의 실적을 샅샅이 훑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원래 정확한 분석이 전문이지 실적 뻥튀기가 아니라고요.”
이를 악물고 있다가 무심코 본심을 중얼거린 준영은 제 쪽을 향해 걸어오는 기척에 눈을 들었다. 임 과장이 퀭한 눈으로 다가왔다.
“자료 나왔습니까?”
“일단 이 정도까지는 정리했어요. 더 수정해야 할 게 있을까요?”
이 선에서 타협합시다, 라는 의사를 강력하게 어필하며 준영이 모니터를 돌려 주었다. 고개를 구부정하게 숙이고 화면에 떠 있는 서류를 꼼꼼히 읽어 본 임 과장이 흘러내린 안경을 밀어 올렸다.
“좋긴 한데, 여기 이 철도 건설 사업 건은 현재 유보 중인 사업…….”
“환율 때문에 철근 수입 계약이 미뤄지고 있어서 그렇죠. 경영기획팀에서 진행한 펀드레이징 자체는 문제없었습니다.”
마무리가 안 됐을 뿐.
미간을 좁힌 임 과장이 음, 하고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그리고 이 러시아 천연가스 수출 계약 건은 나 팀장이 아니라 이전의 최 팀장이 진행했던 사업인데.”
“보고서는 나승운 팀장 이름으로 올라갔거든요. 숟가락만 얹은 셈이긴 하지만.”
임 과장은 마뜩잖은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준영이 의자를 조금 뒤로 밀며 말했다.
“이런 거 저런 거 다 잘라 내면 자료 만들 게 없어요. 경영기획팀의 눈부신 실적이 있었더라면 이런 노력을 할 필요도 없었겠죠.”
다소 신랄한 그녀의 말에 임 과장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한참 만에 결단을 내리듯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이대로 갑시다. 최종본으로 만들어서 명인에 토스하고 이쪽 주총 끝나는 대로 연락하는 걸로 하죠.”
“네.”
다시 앞으로 당겨 앉으며 준영이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제 자리로 갈 줄 알았던 임 과장의 시선이 느껴져 그녀는 흘끗 고개를 돌렸다.
“하실 말씀 있으세요?”
“아니, 뭐……. 이 건이 끝나면 좀 쉴 수 있으면 좋겠군요.”
임 과장답지 않게 묘하게 말끝을 흐리는 느낌이다. 준영은 픽 웃으며 대꾸했다.
“매번 그렇게 생각하곤 했지만 그런 날은 오지 않더라고요.”
“윤 대리 혹시.”
파티션을 톡톡 두드린 임 과장이 물었다.
“해외 지사 쪽에 지원한 적 있어요?”
“아뇨. 아, 입사 초기에 한 번 호주 쪽에요. 당연히 떨어졌고요.”
여러 곳이 있지만 호주는 특히나 경쟁률이 무시무시한 곳이었다. 그녀의 앞에 이미 우수한 실적과 인사 평가를 내세우고 있는 수많은 선배 직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후로는 딱히 지원할 생각을 해 보지 않았다. 그런 생각을 할 여유도 없었고, 출장을 자주 다닐 때는 어차피 거의 파견 같은 느낌이라 해외 생활이 질리기도 했고 말이다.
“그런데 갑자기 해외 지사 얘기는 왜…….”
“아닙니다. 이 자료만 넘기고 우리도 퇴근합시다.”
임 과장이 고개를 저으며 등을 돌렸다. 뻑뻑한 눈을 끔벅이던 준영은 다시 모니터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 문득 시야에 휴대폰이 들어와 얼른 집어 들고 메시지를 날렸다.
[앞으로 10분.]
오래지 않아 휴대폰 화면이 깜빡거렸다.
[늦지 마. 1초라도 늦으면 한경 폭파시키고 싶을 것 같아.]
네가 하면 농담으로 안 들린다니까.
입술을 비죽인 준영은 손가락을 빠르게 움직였다.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가 경쾌하게 사무실을 울리고 있었다.
* * *
회사 건물을 빠져나와 건너편에서 낯익은 차를 발견한 준영이 손을 흔들었다. 좌우를 살피고 길을 건넌 그녀는 서둘러 차 문을 열어젖혔다.
“9분 컷! 맞지?”
안에 올라타며 운전석에 앉은 범진에게 말하자 그가 휴대폰을 들어 보인다. 스톱워치가 정확히 9분 39초를 가리키고 있었다.
“아깝네. 한경 폭파되는 꼴을 봐야 하는데.”
못 말린다는 듯 주먹으로 그를 가볍게 툭 치니 범진이 피식 웃었다.
“언젠가는 보게 되겠지. 벨트 매.”
“집은 깨끗이 치워 놓은 거야? 삼두 씨가 아침에 내 짐 실어 갔는데.”
“일단 침대는 깨끗해.”
벨트를 당기던 준영은 그의 무덤덤한 대답에 뾰족하게 눈꼬리를 치켜세웠다.
“난 안 돼. 오늘 못 해. 내일 주총이라 신경 쓸 일 많아서 예민하다고.”
“하자고 안 했는데. 윤준영 머릿속엔 왜 그 생각밖에 없을까?”
범진이 짐짓 혀를 찬다. 핸들을 쥔 그를 멀뚱히 바라보던 준영은 탄탄하게 근육이 올라붙은 그의 허벅지를 은근히 쓸며 속삭였다.
“권범진이 너무 잘하니까?”
“사고 난다.”
이를 악문 목소리로 대꾸한 범진이 그녀의 손을 낚아챘다. 그의 입술이 슬쩍 느슨해진 것을 확인한 준영이 웃음을 흘렸다.
“저녁 뭐 먹었어?”
“안 먹었는데.”
“뭐?”
미간을 좁히는 범진을 쳐다보며 준영은 어깨를 으쓱였다.
“안 먹고 참았지. 권범진이 사는 집에 처음 가는 건데 당연히 라면 끓여 주지 않을까 해서.”
사실은 시간도 없고 별로 배도 안 고파서 패스했지만 곧이곧대로 말할 필요는 없다. 아주 거짓말도 아니고.
그녀의 말에 범진이 희미하게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내가 끓인 라면 같은 건 아무 때나 먹을 수 있잖아. 끼니는 챙겨야지.”
“나보다 더 바쁘면서 공수표 날리기는. 너 새벽에 한 3시쯤에 와서 6시 전에 나갔지? 또 꿈인 줄 알았네. 나야 한경에서 한낱 대리니까 일을 시키면 해야 하지만 넌 이사잖아. 무슨 이사가 그렇게 바빠? 내가 JBK를 폭파해야 할 판이야.”
눈을 부릅뜬 채 위협하듯 말하자 범진이 낮게 웃는다. 가볍게 입꼬리를 물고 있는 옆모습이 보기 좋다. 그의 손을 두 손으로 조몰락거리며 준영이 물었다.
“거기 회장님이 제일 높은 분이지? 너랑 오래된 사이라고 했던. 내가 한번 만나 볼까?”
“생각도 하지 마.”
농담으로 던진 말이긴 하지만 의외로 딱 잘라 대답하는 범진의 태도에 그녀는 눈을 깜빡였다.
“왜? 좀 무서운 타입이셔?”
헛웃음을 흘린 범진이 고개를 저었다.
“널 궁금해해. 아마 만나면 2박 3일은 안 놓아줄걸. 쓸데없는 말도 많이 할 거고.”
“그 쓸데없는 말이라는 게, 주로 네가 감추고 싶은 과거지사라면 빨리 날 잡아야겠네.”
준영이 눈을 찡긋거렸다. 깊은 한숨을 내쉬며 범진이 핸들을 틀었다.
“집 근처에 조용하고 늦게까지 하는 식당 있어. 배고프면 거기서…….”
“권범진이 끓인 라면. 오랜만에 달걀 안 푼 버전으로.”
‘라면 끓이기 귀찮은 건 아니지?’라고 물으려던 준영의 가방에서 진동이 울렸다. 휴대폰을 꺼낸 그녀가 침묵하는 것을 느낀 범진이 고개를 돌렸다. 화면에 뜬 이름 세 글자를 확인한 그의 눈매가 조용히 가늘어졌다.
준영이 휴대폰을 무음으로 바꾸고 다시 가방 안에 넣는 것을 본 그가 입을 열었다.
“회사에서 마주치진 않았고?”
“일부러 찾아오지 않는 이상은 볼일이 없거든. 층도 다르고, 업무가 겹치는 것도 아니고.”
짧게 숨을 내뱉은 그녀가 의지하듯 범진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변했어, 나승운. 그런 눈을 하는 날이 올 줄은 몰랐는데.”
예전 같았다면 순간 감정이 격해져서 저를 몰아붙였더라도 곧장 사과했을 것이다. 그녀가 아무리 냉랭하게 군다고 해도, 다시는 그런 일이 없을 것임을 설득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날 이후로 승운은 사과는커녕 얼굴 한 번 비추지 않았다. 방금의 전화가 그날 이후로 처음 걸려 온 전화였다.
무언가 틀어졌다. 나승운의 안에서 오랫동안 체계를 잡고 있던 무언가가.
그것만은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나승운이 이사가 된 다음에도, 한경을 나올 생각 없어?”
생각에 잠긴 듯 쉽게 대답하지 않는 그녀를 보며 범진이 덧붙여 물었다.
“어머니 때문에?”
대답 대신 눈썹을 까딱인 준영이 어깨를 으쓱였다.
“한경 쪽 연이 닿아 있는 병원에 있거든. 거기가 아니었더라면 진즉 파산했거나.”
잠시 말을 멈춘 그녀는 한숨처럼 말을 뱉었다.
“어떤 선택을 해야 했겠지.”
준영의 시선이 허공을 막막히 떠도는 것을 본 범진은 가만히 그녀의 손등을 어루만졌다. 제가 떠나고 지금의 윤준영이 되기까지, 혼자서 버텨 온 시간이 어땠을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지만 결코 쉽지 않은 길이었으리라는 것만은 짐작할 수 있었다.
제 옆에는 삼촌도, 아버지 대부터 연이 닿아 있는 변호사도, 삼두도 있었지만 그녀는 오롯이 혼자였으니까.
“나를 알아보기는커녕 의식도 없이 숨만 쉬고 있는 거라고 해도 그런 식으로 보낼 수는 없었어. 너 우리 엄마 보면 깜짝 놀랄걸. 아무것도 먹지 않고 누워만 있는데도 그 시절보다 얼굴빛이 훨씬 보기 좋다니까? 딸 고생시키는 게 속 편한가 봐.”
“그래. 못 알아보겠더라.”
그의 대꾸에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던 준영이 뒤늦게 눈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