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도와줘? 김 실장은 지금까지 날 도와준 적이 단 한 번도 없어. 또 다른 거래를 제안하려는 거겠지.”
그나마 이 정도의 판단 능력이라도 있는 걸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그녀는 그저 무표정한 얼굴로 침묵했다. 빈틈없는 그 얼굴을 노려보던 승운이 쥐고 있던 서류를 우그러뜨렸다.
“어디까지 할 수 있는데? 그 자식을…….”
말끝을 늘인 승운이 느릿하게 이어 말했다.
“내 눈앞에서 영영 사라지게 할 수도 있나?”
김 실장은 가만히 그를 응시했다. 그녀의 입술이 부드럽게 열렸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죠.”
“사람을 죽여 본 적 있냐고 묻는 거야.”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승운이 짓씹듯 말했다. 눈썹을 들썩인 김 실장이 낮게 눈을 내리깔았다. 잠시 숨을 들이쉰 뒤 그녀가 조용히 말했다.
“도련님이 열 살 되던 해 아버님을 찾아온 여자가 있었습니다. 배가 불러 있었죠. 어릴 때부터 부모님 사이가 썩 좋지 않았던 건 기억하실 겁니다.”
승운의 눈동자가 희미하게 흔들린다. 김 실장의 말이 이어졌다.
“그 여자가 무엇을 요구했는지를 아는 사람은 세상에 세 명뿐입니다. 그 여자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를 아는 사람은 두 명뿐이죠. 그 두 가지를 다 아는 사람은.”
몸을 낮춘 그녀가 속삭였다.
“저뿐입니다.”
가까운 거리에서 두 사람의 시선이 부딪쳤다. 마른침을 삼킨 승운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 여자는.”
“거주 불명자로 등록되어 오래전에 주민 등록이 말소되었습니다.”
서늘한 냉기가 허공을 가로지른다. 조금 거칠어지는 제 숨소리를 의식한 승운이 헛기침을 했다. 그는 옆에 떨어져 있는 이불을 움켜쥔 채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나한테 뭘 요구할 거지?”
“저는 한경이, 어머님이신 홍 이사님의 손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 싶습니다. 제가 하는 모든 일은 오직 그것을 위한 일입니다.”
“알지. 얼마나 충성스러운 개인지.”
쓸데없는 날을 세우는 승운을 무시하며 김 실장이 말했다.
“이 일에 뛰어들기로 하셨으니 일단 어머님 손안에 있는 재무 구조를 정확히 파악하세요. 이번 주총을 위해 어떤 돈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아셔야 합니다. 명확히 이해하셨음을 증명하시면 그다음 할 일을 알려 드리죠.”
“뭐? 그다음 할 일?”
눈을 가늘게 뜬 승운이 날카롭게 웃었다.
“이쪽에서 하나를 요구했으면 그쪽에서도 하나를 요구해야지. 공정하게 들리지 않는데.”
“거래가 공정해야 한다고 말한 적은 없습니다. 그리고.”
대수롭지 않다는 얼굴로 김 실장은 말을 이었다.
“도련님이 요구한 일이 그렇게 간단한 일이라고 생각하시는 것은 아니겠죠.”
승운이 입을 다물었다. 이불을 몸에 두르고 있는 그를 보며 김 실장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바라는 건 도련님이 자격을 갖추는 것입니다. 이 거래로 도련님이 잃을 건 없어요. 제 목적과 도련님의 목적은 결국 겹치는 부분이 있으니.”
그녀는 팽팽하게 당겨진 승운의 턱을 가만히 응시했다. 생각에 잠긴 것처럼 침묵하는 승운을 보는 그녀의 눈매가 좁아졌다.
나승운은 모르는 게 너무 많다. 내내 온실 속의 도련님으로 자라 오던 그가 마음 한번 먹었다고 한순간에 왕좌에 우뚝 선다는 것은 동화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그는 본인이 누군가와 거래를 할 수 있는 자격조차 없는 애송이라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미향은 그녀를 완전히 신뢰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그녀는 모르는 게 없었다. 미향이 누구를 만나는지, 어떤 자산을 언제 매도하려 하는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하루에 얼마의 수익이 생기는지. 실질적인 집행은 다른 사람이 하더라도 김 실장은 모든 것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균열의 시작은 아주 작은 일에서였다. 50세가 되던 해 겨울, 그녀는 작은 수술을 받은 적이 있었다. 수술 전후로 3개월 정도 제대로 걸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미향을 보필하지 못했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한 팀장에게 재무 관리를 넘겼다. 완전히 회복할 때까지 푹 쉬고 오라며 미향은 그녀를 다독였다.
인생에서 그렇게 쉬어 본 적이 없었다. 시간이 넘쳐 나자 생각도 넘쳤다. 수십 년을 매일같이 함께하던 미향과 떨어져 있으니 그녀는 김 실장이 아닌 김현희가 되었다. 그리고 김현희는 생각보다 너무…….
초라했다.
물론 좋은 병실에 있었다. 사람들도 친절했다. 미향의 말이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병원에서 VIP 대접을 받았다. 그 모든 것이 제가 아닌 미향의 그림자 덕이라는 것을 그녀 역시 알고 있었다.
하지만 머리로 아는 것과 직접 겪는 것은 다르다. 수술 후 회복 기간에는 VIP실 전담 스태프들에게 의지할 일이 많았다. 가족이 없었기에 필요한 물건도 모두 그들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군소리 없이 면전에서는 웃으며 기꺼이 달려오던 그들이 뒤에서 무슨 말을 하는지를 우연히 듣기 전까지는 그저 가벼운 무력감에만 빠져 있었을 뿐이었다.
‘자기가 무슨 한경 사모라도 되는 줄 안다니까. 말끝마다 그래요, 맞아요, 그렇게 해요. 짜증 나 죽겠어.’
‘말투 진짜 거슬리죠? 그때 진짜 웃기지 않았어요? 팬티 사다 달라는 말을 못 해서 그거, 그거 필요해요, 라고만 한 다섯 번 말하다가 나중에 언더웨어라고. 나 그때 진짜 현웃 터질 뻔했다니까.’
‘명품숍 직원들도 그런 사람들 있잖아. 자기가 그 명품인 양 콧대 세우면서 손님 무시하는. 딱 그래, 저 여자가.’
‘원래 저런 사람들이 더 그렇대요. 윗사람한테 당한 게 있으니까 밖에 나가면 자기가 더 대접받으려고.’
‘쉿. 말조심해.’
‘아니, 한경 사모님이 그렇다는 게 아니죠, 당연히. 그 사모님은 진짜 너무 멋있잖아요. 항상 우아하시고.’
‘그러니까 말이야.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는데 정신 차려야 할 텐데. 난 안쓰럽더라구. 저러다 잘리면 어떡해. 가족도 없다잖아. 결혼도 안 했고.’
‘별걱정을 다 하네. 그래도 당신보다 연봉이 몇 배는 될걸.’
그녀가 좋아하는 딱 떨어지는 슈트를 갖춰 입고 빈틈없이 일하고 있을 때 만약 그런 소리를 들었다면 한 명도 가만두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속옷도 제대로 입지 못한 환자복 차림에 소변줄을 매달고 휠체어에 앉아 있었다. 벽 모서리를 돌기는커녕 제 쪽으로 걸어오는 소리에 그녀는 재빨리 병실 안으로 다시 들어가야 했다.
그 순간의 수치심과 무력감은, 정말로 그녀가 아주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것이었다.
미향의 이름은 그런 순간에도 함부로 다뤄지지 않는다. 하지만 가슴속에서 끓어오르는 불편한 마음을 그녀는 주머니 입구를 조이듯 꽉 붙들어 맸다.
미향에 대한 찬사들은 제 자부심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지금까지 살아왔다.
복귀 이후 그녀는 가장 먼저 병원의 VIP실 담당 스태프들을 손봤다. 그 병원에는 한경의 돈이 상당히 들어가 있었기 때문에 입김을 넣을 수 있었다. 몇 명은 서비스 마인드 부족으로 인한 컴플레인을 이유로, 몇 명은 환자 개인 정보 유출을 이유로 일자리를 잃었다.
물론 그랬다고 해서 그녀의 기분이 나아지지는 않았다. 더한 일이 그녀의 앞에 벌어져 있었기 때문에.
‘아, 저쪽 일은 한 팀장에게 맡겨 둬. 지금 한창 작업 중인 게 있거든. 같이 하기로 한 사람들이 새가슴이라 말 새어 나가는 걸 너무 싫어하더라고. 이참에 올해는 연말까지 지켜보지. 김 실장은 내부 인맥 관리하는 데만 집중해. 좀 쉬엄쉬엄하고.’
고작 3개월 자리를 비웠을 뿐인데, 그녀가 맡고 있던 일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이 한 팀장에게로 넘어가 있었다. 미향의 말과는 달리 한번 그녀의 손에서 떠난 재무 관리 업무는 그녀에게로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근데 김 실장. 나 몰래 혹시 S 병원 VIP실 건드렸나?’
왜일까. 내가 무슨 실수를 한 게 있었나. 복귀해서 제대로 일을 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나. 더는 나를 믿지 못하나. 그런 생각만 하고 있을 때 어느 날 미향이 지나가듯 툭 말을 던졌다.
그 일은 미향에게 보고를 하지 않았었다. 그동안 세세히 보고를 하지 않은 자잘한 일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S 병원의 일은 미향의 지시 없이 제가 저지른 일이라는 점에서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다.
‘죄송합니다. 업무 관련 통화를 하는 것을 엿들은 사람들이 있어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일곱 명이 다 엿들었어?’
미향은 웃는 얼굴에 다양한 감정을 담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자비롭게 미소 짓고 있었지만 그녀는 직감적으로 이것이 자신이 밀려난 이유 중 하나임을 깨달았다.
‘무슨 문제가 생겼다면 제가 해결하겠습니다.’
‘아니야, 괜찮아. 걔들 중 한 명이 사귀는 남자애가 무슨 노동 시민 단체 홍보단 소속이라는데, SNS 통해서 부당 해고네 어쩌네 떠들어 대고 있는 모양이야. 하필 곧 재단 이사회라서 민 원장이 예민하더라고. 농담이랍시고 나한테 툭 말을 꺼내는데 무슨 일인지 영문을 알 수가 있어야지. 당황했잖아. 설마 김 실장이.’
말을 천천히 늘인 미향이 작게 중얼거리던 목소리.
‘나한테 말도 없이 내 이름을 썼을 줄은 몰랐으니까.’
당신의 이름은 당신 혼자 만들어 온 것이 아니다. 그게 내가 당신을 향한 찬사에서 자부심을 느낀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 생각이 반발적으로 들었지만 말할 수 없었다. 해명이 먼저였다.
그러나 미향은 그녀의 해명을 듣지 않았다. 바쁘다는 핑계로 가볍게 웃고 등을 돌린 이후로 미향과 그녀의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벽 하나가 생겼다. 수십 년간 쌓아 왔던 신뢰가 단 한 번에 끝난 것이다. 변명의 기회조차 없이.
그녀는 여전히 미향을 위해 일했다. 하지만 예전과는 달라졌다. 그리고 다시는 그때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도 알았다.
한 팀장의 업무에 불만족하면서도 제게 일을 맡기지 않는 미향의 태도가 그 증거였다.
배신감을 느꼈을 수도 있다. 하지만 한 번쯤은 눈감아 줄 수도 있는 일이 아닌가. 그동안 제가 보인 충성을 잠시라도 생각해 봤다면 말이다.
미향이 얼마나 실망했든, 제가 느낀 배신감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