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저 여명일 뿐-75화 (75/86)

<75화>

‘경찰 조사를 받은 뒤 윤준영 씨는 권범진 씨와 함께 호텔에 투숙했습니다. 체크아웃은 12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했고, 곧장 가까운 한정식집에서 점심 식사를 했습니다.’

부산 현장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안전사고가 아니라 누군가의 고의로 이루어진 상해 사건임이 밝혀졌다. 그 일에 얽혀 준영도 하마터면 4층에서 떨어질 뻔했다고 했다. 범진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크게 다쳤을지도 모른다고.

……차라리 떨어져 버리지.

어둠 속을 묵묵히 바라보던 승운은 더듬더듬 술병을 잡았다. 입에 물자 반은 입으로, 반은 헐벗은 몸을 타고 흘러내린다.

술병이 텅 비고 나니 게슴츠레한 눈이 허공을 향한다. 며칠 내내 그를 미쳐 버리기 직전까지 몰아붙이고 있는 장면들이 또다시 재생되고 있었다.

얼마나 했을까. 하면서 무슨 말들을 나눴을까. 준영이의 손은 어떻게 움직였을까. 눈빛은. 흥분할 대로 흥분한 몸이 겹쳐질 때마다 소리를 내질렀을까? 온몸을 경련하면서?

그의 머릿속을 아득하게 하는 것은 바로 그 지점이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윤준영이 내뱉는 신음이 상상이 되질 않았다. 쾌락에 흠뻑 빠진 여자들이 무의식중에 흘리는 들척지근한 소리들이.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준영의 곁에 있었지만 그가 아는 윤준영의 목소리는 그런 상상을 불가능하게 했다. 별다른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늘 무관심을 은은하게 드러내는 그 판에 박힌 목소리.

준영이 서울에 올라왔다는 소식에 그는 퇴근 시간에 맞춰 그녀의 집 앞에서 기다릴 작정이었다. 그러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내 저를 차 위에 내던지고 짓누르던 범진의 그림자가 떠올랐다.

권범진은 악령이다. 기생충이다.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주변을 시커멓게 죽이는 오물. 이미 썩어 문드러져 악취 나는 폐수를 내보내고 있는 쓰레기 더미.

준영은 지금 눈이 멀었을 뿐이다. 어릴 때의 추억에 잠시 젖어 있는 것뿐이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할 때가 있다. 그녀는 똑똑하니 자기가 있어야 할 자리가 어디인지 곧 깨달을 것이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갑자기 호흡이 가빠진다. 가벼운 질식감에 숨을 헐떡이던 승운은 빈 술병을 낚아채 그대로 집어 던졌다. 벽에 부딪쳐 요란하게 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의 흥분은 조금도 가라앉지 않았다.

아니, 준영이는 서운해하고 있을 수도 있다. 아무렇지 않게 장세라와 결혼하려 하는 나를 이런 식으로 비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이 말만은 해 줘야 한다.

내가 장세라와의 결혼을 하는 건 결국 널 얻기 위해서라고. 네가 잘못된 곳으로 가지 않도록 테두리를 쳐 주기 위해서라고. 너를 내 품에서 보호해 주기 위해서라고.

“왜. 왜 권범진이야, 왜! 왜!”

난데없이 고성을 터뜨리며 승운이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옛날에도 그랬다. 항상 친절하게 웃으며 가까이 다가가려고 노력했던 건 자신이었는데도 준영은 무뚝뚝하고 험악하며 폭력적인 권범진을 받아들였다.

어른이 되어 나타난 범진은 그때 그대로였다. 여전히 무뚝뚝하고 험악하며 폭력적이었다.

……그래서 그런 것인가. 준영이는 그런 것에 끌리는 건가. 나도 그렇게 하면 되는 걸까.

비실비실 웃음이 새어 나와 승운은 비틀거렸다. 천장이 빙글빙글 도는 것 같았다. 그는 힘없이 소파 위로 다시 나동그라졌다. 제정신이 아니었기 때문에 누군가 집 안으로 들어오는 것조차 인식하지 못했다.

“도련님.”

경악스러움을 최소한으로 억누른 듯한 부름에 승운이 눈만 굴려 소리 나는 쪽을 확인했다. 환하게 켜진 센서등 불빛이 그림자 하나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어지간한 일엔 면역이 된 김 실장이지만 그가 알몸으로 어둠 속에 드러누워 있는 모습이 놀랍긴 한 모양이었다. 그녀가 느릿느릿 말을 뱉었다.

“주주현황표와 주총 이후의 계획안을 직접 확인하겠다고 하셔서……. 여사님께서 보내셨습니다.”

센서등이 꺼지자 다시 어둠이 찾아왔다. 스위치를 향해 자연스레 손을 뻗던 김 실장이 멈칫하고는 벽을 더듬으며 잠시 사라졌다. 천장을 멍하니 보고 있던 승운은 불이 켜짐과 동시에 제 위를 풀썩 덮는 무언가에 눈을 감았다. 이불이었다.

“깨진 물건부터 치우겠습니다.”

“아. 하하. 주주현황표? 맞아. 그게 있었지.”

대충 이불을 두른 채 승운이 비척대며 일어섰다. 들고 온 서류를 테이블에 내려놓던 김 실장의 눈이 일순 늘어져 있는 사진들에 닿았다. 그러나 그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몸을 굽힌 채 깨진 술병 조각들을 쓸어 담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실소를 내뱉으며 승운은 서류를 들어 올렸다. 그것을 한 장 한 장 넘겨 보던 그가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JBK 파이낸셜 실력 좋네. 아니, 권범진 실력이 좋은 건가? 이거 다 거기서 한 거죠? 홍인섭 사장님한테 안 들키게 지분 매수를 끝내 놨네. 나 이사 되는 데 문제없겠어요.”

김 실장은 무어라 말하려는 것 같았지만 이내 입을 다물었다. 승운은 그녀를 위에서 물끄러미 내려다보다 입을 열었다.

“이거 경찰에 넘기면, 권범진 감옥 가나?”

“네?”

눈을 부릅뜬 김 실장이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승운이 눈썹을 들썩이며 서류를 흔들어 보였다.

“차명으로 지분 매수한 증거니까, 이 더러운 빨래를 누가 했느냐, 짚고 넘어가면 권범진 그 새끼 감옥에 보낼 수 있는 거 아니냐고요.”

만취한 게 분명한 그를 묵묵히 바라보던 김 실장이 미간을 찌푸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얄따란 입술 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 전에 도련님과 홍 이사님이 먼저 불려 들어가겠죠. 홍인섭 사장님도 가만있지 않을 테고요. 기업 이미지를 추락시키느니 두 분을 아무도 모르는 곳에 보내려고 할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아마 실종 신고를 내겠죠.”

좀처럼 또렷해지지 않는 승운의 눈을 응시하는 그녀의 얼굴에 혐오감이 떠올랐다. 짧게 혀를 찬 그녀가 눈썹을 추켜올렸다.

“대체 언제까지 유치한 감정놀음에 휘둘리실 겁니까? 이사님 앞에서 당당하게 말하셨죠, 어머니의 힘이 되고 싶다고. 정신 차리신 줄 알았습니다. 윤준영 하나가 뭐라고 그렇게 한심하고 멍청한 말을…….”

김 실장은 비명을 지르지 못했다. 서류를 내팽개치고 그녀의 입을 틀어막은 승운이 그대로 벽으로 거칠게 밀쳤다. 얼굴뼈를 으스러뜨려 버리겠다는 듯한 힘에 고통이 밀려왔다. 그녀의 얼굴을 쥔 승운이 두어 번 그녀의 머리를 벽에 찧어 대며 입을 열었다.

“한심하고 멍청한 건 당신이야, 김 실장. 잘도 내 집에 기어들어 오는군. 날 몸 파는 놈 취급해 놓고 겨우 따귀 몇 대로 끝나니까 내가 아주 우습지? 응?”

신음을 흘리며 김 실장은 승운의 손목을 밀어냈지만 그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가늘어진 승운의 눈이 매섭게 그녀를 후벼 팔 듯이 주시하고 있었다.

“네가 그런 더러운 판을 깔지만 않았어도 이럴 일은 없었어. 개는 개답게 주인에게 꼬리만 흔들면 되잖아. 왜 날 건드려. 왜 날 이용해. 왜!”

승운의 고함에 그에게서 벗어나려 몸부림치던 김 실장의 움직임이 멎었다. 그녀의 눈은 승운과는 달리 차분해지고 있었다. 짓눌린 그녀의 입술이 천천히 움직였다.

“제가 강제했던가요?”

“……뭐?”

“도련님과 제가 한 것은 거래입니다. 비록 예기치 못한 일이 일어나긴 했지만 그렇다고 제가 약속을 어긴 것은 아니지요. 원하는 걸 얻지 못했다고 무조건 남을 원망하기만 해서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습니다.”

승운의 뺨이 경련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김 실장은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조용히 덧붙였다.

“도련님이 이런 식으로 나오신다면 앞으로 저와는 어떤 거래도 하실 수 없을 겁니다. 모든 거래의 기본은 신뢰니까요.”

하, 하고 웃음을 터뜨린 승운의 눈에서 분노가 터져 나왔다.

“약속도 제대로 지키지 않은 네가 신뢰를 말해? 날 그냥 이용해서 추잡한 판을 벌인 주제에!”

“주주현황표 아래에 권범진에 대한 보고서가 있습니다.”

귓가를 날카로운 것으로 긁는 듯한 김 실장의 목소리에 승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잠시의 정적 끝에 그녀에게서 물러난 승운이 바닥을 두리번거렸다.

김 실장은 그가 이내 납작 엎드려 바닥에 흩어진 서류를 허겁지겁 긁어모으는 것을 차가운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그녀가 던져 준 이불은 이미 바닥을 아무렇게나 뒹굴고 있었다.

누가 개인가.

혈통이 좋을 뿐 그는 범이 될 수 없는 개다. 신념도 의지도 품위도 없는, 그저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셀 수도 없이 많이 깔려 있는 평범하고 쓸모없는 그런 존재.

미향은 아무래도 아들이라고 그를 감싸는 경향이 있었지만 그녀가 보기에 승운은 딱 그 정도였다. 지금 임원 자리에 오른다고 해도 스스로의 힘으로는 고작 몇 년도 버텨 내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제가 지금 누구에게 가장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할지 정도는 판단이 서야 하는 거 아닌가.

아직도 얼얼한 입가를 매만지며 김 실장은 냉담하게 입을 열었다.

“앞으로 어떤 거래를 할 때에는 원하는 기한을 확실하게 명시하는 습관을 들이세요. 조건은 구체적이어야 하지만 내게 제약이 될 정도로 너무 구체적이어서는 안 됩니다.”

제 말을 듣고는 있는 것인지, 승운은 서류를 정신없이 훑어보고 있었다. 주주현황표를 저렇게 들여다봤다면 이 정도로 한심해 보이진 않았으리라. 혀를 차고 싶은 것을 가까스로 참고 있던 김 실장의 귀에 승운의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주소 몇 개에 최근 며칠간의 동선, 회사 내에서의 입지, 고작 이것들로 뭘 하라는 거야?”

“손에 쥔 정보로 무엇을 할지 결정하는 사람은 제가 아닙니다.”

나직하게 대꾸하자 서류에 코를 박고 있던 승운이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든다. 그녀는 똑바로 서서 승운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원하는 걸 말씀하세요. 저는 도련님을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비록 취기에 절어 있었지만 승운의 눈에는 그래도 아주 작은 빛은 남아 있었다. 뚫어질 듯 그녀를 올려다보던 승운의 입술이 비딱하게 기울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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