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준영은 천천히 의자에 다시 앉았다. 이 자리가 취조일지 청탁일지 가늠해 볼 필요가 있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만큼은 아니지만요.”
“명인일보와의 오작교를 놓은 게 윤 대리라는 말도 있던데요.”
“홍 이사님께 장세라 씨를 추천한 건 맞습니다.”
그녀의 대답에 임 과장의 가느다란 눈썹이 들썩였다. 그가 안경을 추어올렸다.
“그 정도로 홍 이사님과 가깝다고 보면 될까요?”
준영은 물끄러미 임 과장을 응시하며 입술을 움직였다.
“그분은 지시를 내리고, 저는 받는 입장이죠. 가깝다는 표현이 적합할지는 모르겠습니다.”
음, 하고 기계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던 임 과장이 눈을 들었다.
“혹시 우리 일에 도움이 될 만한 정보를 듣게 되면 공유할 건가요?”
준영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녀는 무감한 얼굴로 대답했다.
“공유가 필요하다고 판단되면요.”
아니면 혼자 진행하겠다는 뜻이다. 임 과장도 알아들었는지 슬쩍 웃었다. 그는 펼쳐 둔 서류를 그러모으며 말했다.
“나 팀장과 명인일보 건은 나랑 같이 진행합시다. 언론 쪽 채널은 명인일보만 다룰 게 아니니까 주요 언론사 담당자에 대한 자료도 같이 봐 둬요. 네트워크에 올려 둘 테니까. 미팅은 내일 11시에 하는 걸로.”
그러니까 오늘 내로 읽어 두라는 말이다.
일벌레에는 두 종류가 있다. 자기만 독박 쓰는 타입과 주변인에게 전파하는 타입. 아무래도 임 과장은 후자인 것 같았다.
“알겠습니다.”
한숨을 삼키며 준영은 대꾸했다. 벌써부터 피곤이 몰려오는 것 같았지만, 그날의 하이라이트는 따로 있었다.
* * *
회사에 오래 남아 있고 싶지 않았다. 자료를 읽어 봐야 한다면 권범진을 담요처럼 두른 채 읽는 게 훨씬 나았다. 효율은 좀 떨어질 테지만 말이다.
아마도 자기 직전까지 살펴봐야 할 것 같은 두툼한 자료를 가방에 넣은 준영은 회사 건물을 나왔다. 10시가 다 되어 가는 시간인데도 아직 낮의 열기가 남아 있었다.
그녀는 입구 쪽에서 삼두의 차를 기다렸다. 퇴근 10분 전에 메시지를 보내 달라고 했으니 곧 나타날 것이었다.
이제 부산도 아닌데 삼두 씨를 이렇게 계속 나한테 붙일 필요가 있나? 아마 분명히 더 중요한 일을 할 게 있을 텐데. 어차피 내일부터는 퇴근도 범진이 집으로 할 거고.
기사처럼 쓰는 것도 미안한데 오늘 범진이 만나면 말해 봐야겠다, 라는 생각을 할 때쯤 준영은 또각또각 걸어와 제 앞에 우뚝 서는 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낯익은 얼굴이 서 있었다.
“윤준영 씨?”
구불거리는 긴 머리를 하나로 높이 묶은 그녀는 화려한 프린트의 민소매 블라우스를 입고 굽이 높은 샌들을 신고 있었다. 몸에 걸친 액세서리는 목에 건 목걸이 하나뿐이었는데, 준영은 저 주렁주렁 매달린 큼지막한 보석들이 제 연봉쯤은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우리나라엔 참, 자발적 워커홀릭들이 많다니까. 이런 시간까지 일하는 게 당연해서는 안 되는데 말이야. 안 그래요?”
오늘은 그 속내를 알아봐야 할 만남이 퍽 많은 날이다. 준영은 덤덤하게 물었다.
“절 찾아오신 겁니까?”
“놀라질 않네. 내가 누군지 아나?”
“작업실 인테리어는 잘돼 가나요?”
그녀의 말에 세라의 눈꼬리가 바짝 세워졌다. 비딱하게 코웃음을 친 세라가 붉게 물든 입술을 움직였다.
“얘기 좀 하죠. 궁금한 게 있어.”
“여기서 끝낼 거 아니면 다음에요. 제가 일이 좀 많습니다.”
“윤준영 씨.”
신경질적인 웃음을 내비치며 세라가 팔짱을 꼈다.
“내가 누군지 안다면서 어떻게 그런 태도를 보이지?”
“충분히 정중했다고 생각합니다만.”
“하. 정중이란 단어 뜻을 모르는 건 아니고?”
“용건이 있는 건 제가 아니죠.”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응시하며 준영은 차분하게 가라앉은 말투를 뱉었다.
“이대로 간다면 어떻게 붙잡으실 건데요?”
기가 막혀 세라가 헛숨을 내쉬는 순간 준영이 슬쩍 방향을 비틀었다. 세라는 정말로 저를 지나쳐 가려는 준영의 손목을 잡아챘다.
“너 도대체 뭘 믿고 이렇게…….”
“누님!”
옆에서 우렁차게 날아온 걸걸한 목소리에 눈을 동그랗게 뜬 세라가 고개를 돌렸다. 시커먼 정장 차림의 덩치를 본 그녀는 잠시 눈을 깜빡이다 얼른 준영의 손목을 놓았다. 삼두는 험상궂은 얼굴로 그녀와 준영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
“무슨 일 있으세요?”
“10분 후에 갈게요. 미안한데 잠깐만 기다려 줘요.”
삼두의 타이밍 감각은 정말이지 상을 받아 마땅하다. 한결 어깨에 힘이 들어간 준영이 그에게 눈짓하자 고개를 끄덕인 삼두는 허튼짓하지 말라는 듯 세라를 위아래로 한 번 훑어보고는 돌아섰다. 준영은 긴장한 얼굴을 하고 있는 세라를 보며 말했다.
“중요한 분이 기다리고 계셔서. 궁금한 게 뭡니까?”
무엇을 상상했든 바라던 게 이런 그림은 아니었을 것이다. 주도권을 완전히 빼앗긴 세라가 입술을 짓씹으며 눈을 바짝 치떴다.
“승운 씨랑 잔 적 있어요?”
한쪽 눈썹만 희미하게 들썩인 준영은 물 흐르는 듯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없습니다.”
“당신을 좋아한다던데.”
세라의 말투는 가벼웠다. 준영은 그녀가 프랑스에 있었을 때의 생활을 대강 알고 있었다. 적어도 어지간한 남녀 관계를 트집 잡을 입장은 아니었다.
“그런 소문이.”
피곤한 듯 짧게 한숨을 섞어 내쉬며 준영이 느릿하게 되물었다.
“이미 결정된 두 분의 미래에 무슨 영향이 있을까요?”
“건방 떨지 마. 내 미래는 내 손으로만 결정해.”
공격적으로 날아온 세라의 말에 준영은 그녀에 대한 데이터를 떠올렸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성격에 변덕스러운 취향. 큰 틀에서는 부모의 뜻에 따른다는 것은 승운과 같을지 모르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장세라는 아버지의 뜻을 꺾고 미대에 진학한 전적이 있었다. 미향에게 보고는 하지 않았지만 유학을 반대하는 아버지의 턱밑에 ‘무언가’를 들이밀어 제 뜻을 관철시켰다고 했다.
그 무엇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은 걸로 보아 당연히 평범한 것은 아닐 터였다. 완고함으로 유명한 장의태 사장을 녹다운시킬 정도였으니 어쩌면 회사에 관련된 중요한 무엇이었을 수도 있다.
어쨌든 중요한 건 장세라가 진심으로 무언가를 원한다면 장의태 사장도 그녀를 이기지는 못할 것이라는 점이다. 이 결혼의 밑바탕에 수많은 계산이 깔려 있었지만 결정적으로 승운이 세라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면 여기까지 못 왔을 일이었다.
“차라리 몇 번 자고 끝난 관계라면 상관없는데.”
생각에 잠겨 있던 준영이 고개를 들었다. 세라가 싱그럽게 웃고 있었다.
“날 옆에 들러리 세우고 다른 여자 뒤통수만 쫓을 거라면 이야기가 다르지.”
“장세라 씨를 들러리 세울 수 있는 남자가 있을까요.”
여러 의미에서 준영은 승운이 세라와 무사히 결혼하기를 바랐다. 그러려면 적당히 세라를 다독여 줄 필요가 있었다. 제 말에 미심쩍은 표정을 짓는 세라를 보며 준영은 나직하게 말을 뱉었다.
“저는 나 팀장님을 오랫동안 봐 왔어요. 그분은 분명 다른 재벌 3세들과는 다릅니다. 권위를 내세우거나 재력을 자랑하지도 않아요. 함께 공부하고,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 평범하게 어울리죠. 같은 학교에서 만난, 스페인어 강사의 딸과 연애를 하기도 하면서요.”
세라의 커다란 눈이 반짝거린다. 준영은 무덤덤한 말투로 말했다.
“저도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있었습니다. 혹시 날 좋아하나, 하고. 워낙 스스럼없이 대하기도 했지만, 결혼에 있어서만큼은 홍 이사님이 재촉하시는데도 좀처럼 내켜하지 않더군요. 그래서 장세라 씨를 만나고, 이렇게 빨리 결혼을 추진할 줄은 몰랐습니다. 그게…….”
짧게 숨을 들이쉰 준영은 세라를 똑바로 응시하며 쐐기를 박았다.
“인연이라는 거겠죠.”
세라는 코웃음을 쳤지만 가파르게 날이 서 있던 표정은 한결 누그러진 뒤였다. 준영은 부드럽게 입가를 끌어 올렸다.
“그쪽 세계 사람들, 그러니까 재벌들은 당연히 정략으로만 결혼하는 줄 알았어요.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건조한 듯하면서도 딱 그만큼 깍듯한 말투에 세라는 대답 대신 거만하게 고개를 까닥였다. 준영은 손목시계를 보는 척하며 입을 열었다.
“그럼 이만 가 봐야겠네요.”
“이봐요, 윤준영 씨.”
막 삼두가 있는 쪽으로 걸어가려던 준영이 고개를 돌렸다. 세라가 비딱하게 웃으며 물었다.
“애인 있어요? 없으면 하나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승운 씨도…….”
“알고요.”
막힘없는 그녀의 대답에 세라는 고개를 느긋하게 끄덕였다.
“그래요. 잘되길 바라요, 그쪽도.”
마치 허락이라도 해 주는 듯한 말투에 피식 웃은 준영이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피로가 몰려온다. 권범진의 품이 간절했다.
* * *
부드럽게 시선을 보내며 준영이 입고 있던 블라우스를 벗는다. 하지만 성급한 범진의 손이 먼저다. 단추가 순식간에 풀린 블라우스가 흐느적거리며 꽃잎처럼 바닥에 떨어진다.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 넘기려던 준영의 손은 범진에게 붙잡히고, 무어라 항의하려던 그녀의 입술은 범진에게 먹힌다.
옷가지가 떨어지는 소리. 살결이 스치는 소리. 진득하게 얽혀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뱉어 내고 있는 신음이 들린다. 쾌락에 대한 기대로 부푼 숨소리가 점점 가빠지고, 모든 소리들은 물기를 머금은 채 야릇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준영의 매끄러운 피부에 붉은 자국들이 새겨진다. 목덜미를 한입에 문 채 다소 우악스럽게 몰아붙이는 범진의 아래에 깔린 그녀가 몸부림을 치지만 끝내 헐떡이며 기다렸다는 듯이 허리를 튕기고 말았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천박한 미소를 띤 준영의 입술이 점점 벌어지고 있었다.
그 입 안은 모든 것을 녹여 버릴 만큼 뜨겁다. 손가락으로 그 안을 헤집자 금세 끈적한 타액으로 물든다. 깊숙이, 그리고 무자비하게 파고들면 준영의 눈가가 눈물로 그렁그렁해진다. 그 모습을 상상하자마자 아득함이 밀려와 승운은 그대로 고개를 치켜들었다.
“읏, 하아!”
일순 몸이 꼿꼿해짐과 동시에 나른함이 몰아닥쳤다. 건조하게 말라붙은 입술을 핥으며 승운이 시선을 내린 곳에는 사진 몇 장이 있었다.
늦은 새벽 시간, 준영이 범진의 손을 잡은 채 호텔로 들어가는 장면과 햇빛이 환하게 내리쬐는 한낮, 말갛게 씻은 듯한 얼굴로 범진을 향해 웃으며 호텔에서 나오는 준영이 찍힌 사진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