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저 여명일 뿐-73화 (73/86)

<73화>

비스듬히 고개를 돌린 승운의 대답에 세라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럼 나 잠깐 화장실 좀. 갈 시간 없을 것 같으니까.”

그녀는 가방을 들고 복도를 빠져나왔다. 화장실에 들어가 물로 입을 한 번 헹군 뒤 세라는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통화 버튼을 눌러 턱과 어깨 사이에 끼운 채 가방 안에서 립스틱을 찾아 손을 휘젓는 사이 전화가 연결되었다.

“아저씨? 나 세라예요. 궁금한 게 있어서.”

새빨간 립스틱을 능숙하게 바른 그녀가 입술을 가볍게 튕겼다.

“나승운 뒷조사 끝냈죠? 에이, 모른 척하지 말아요, 내가 우리 아빨 아는데. 그 정도도 안 하고 날 내놓을 생각을 했을까. 그리고 저쪽에서도 당연히 내 뒤를 캘 만큼 캤을 텐데 아무것도 안 했다면 아저씨 월급 반납해야지.”

놀리듯 하는 말에 한숨과 함께 답변이 돌아왔다.

- 사장님께서 허락하셨다는 말은 특별히 문제 되는 일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쪽에서는 보기 드물 정도로 깔끔한 건 확실합니다.

“여자 문제도 없어요?”

- 몇 번 사귀다 헤어진 게 답니다.

“정말로?”

거울을 향해 눈을 치뜨며 묻자 잠깐의 머뭇거림 끝에 상대가 말했다.

- 가깝게 지내는 동창 하나가 있긴 합니다. 홍미향 이사가 운영하는 재단에서 키워 낸 장학생인데, 고등학교 때부터 알고 지낸 사이라고 하더군요.

“자는 사이예요?”

- 그건 아닙니다.

“어떻게 알아? 그 여자 집에 카메라라도 달아 놨나?”

상대가 희미하게 한숨을 억누르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 한경 내부에서는 소문이 좀 돌았었나 봅니다. 나승운 팀장이…….

망설이는 듯한 기색에 세라의 눈썹이 비딱하게 치켜 올라갔다.

“말해요.”

- 오래 마음에 두고 있었는데 그쪽에서 받아 주지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 하고 세라가 실소를 흘렸다. 입술을 깨무는 바람에 방금 바른 립스틱이 번졌다. 혀를 차고는 옆에 있는 티슈를 뽑은 그녀가 입술을 닦아 내며 물었다.

“그 여자 이름이 뭔데?”

* * *

준영은 시간을 확인하며 걸음을 재촉했다. 다리 사이로 자꾸 치마가 휘감긴다. 늦잠을 자는 바람에 속치마를 챙겨 입을 정신이 없었던 것이다.

“됐어. 너도 바쁠 텐데. 주총 얼마 안 남았잖아.”

좌우를 살피고 횡단보도를 건너며 준영은 목과 어깨 사이에 끼우고 있던 휴대폰을 반대편 손으로 빼냈다. 듣기 좋은 울림의 목소리가 그녀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 주소도 모르면서.

“삼두 씨는 알 거 아냐.”

- 내 손으로.

잠이 덜 깼는지 유난히 목소리가 나른하다. 뒤척이는 듯한 소리와 함께 범진이 중얼거렸다.

- 데려가고 싶어, 내 집에는.

달콤하게 들리는 말에 입술이 저절로 흐느적거린다. 준영은 큼, 하고 목을 가다듬으며 애써 표정을 가다듬었다.

“그럼 내일 갈게. 어차피 오늘은 짐도 좀 챙기고 정리도 해 두게. 나 새벽 2시에 올라와서 집이 완전 아수라장이야.”

- 흐음.

식사에 만족하지 못한 호랑이가 그르렁대는 듯한 소리를 내며 범진이 작게 하품했다.

- 알았어. 그럼 오늘은 내가 그 집으로 가지.

피식, 웃음이 흘러나와 준영은 회사 건물을 앞에 두고 멈춰 섰다.

“너 날 너무 좋아하는 거 같다, 권범진. 기회만 있으면 같이 못 자서 안달이야.”

- 그만해.

무뚝뚝한 대답에 그녀는 미간을 좁혔다.

“뭘?”

- 부추기는 거.

느릿하게 말하며 범진이 뒤척이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 난 아직 침대고, 네 목소리를 듣고 있어. 내 손이 어디로 갈 것 같은데?

“야! 아침부터!”

버럭 소리를 지르자 지나가던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뺨을 스친다. 범진이 낮게 웃음을 흘렸다.

- 출근 잘하고 와. 점심도 잘 챙겨 먹고.

“알았어. 나중에 봐.”

휴대폰에 대고 소리 내어 입을 쪽쪽 맞춘 준영이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이제 뛰어야 할 시간이었다.

일주일 사이 부산에서의 일은 대부분 정리가 끝났다. 최영복은 정만수와 다른 사람들에 대한 범죄 행위와 관련해 조사를 받고 있었다. 상해일지 살인미수일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연쇄적인 행위였다는 점에서 가중 처벌을 받는 쪽으로 가닥이 잡히고 있었다.

현장의 인부들은 소식을 듣고 충격에 빠졌다. 최영복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다며 욕을 퍼붓는 사람들과 쉽게 비난하지 못하는 사람들로 나뉘었지만, 어쨌든 그래도 공사는 별 탈 없이 진행되었다.

준영은 경찰 조사를 완전히 마무리하고 현장 분위기가 정상화되는 것을 지켜본 오늘 새벽에야 서울에 올라온 참이었다.

“아, 윤 대리. 출근했나?”

사무실에 들어서자 제일 먼저 눈이 마주친 것은 성 팀장이었다. 그가 손을 까닥이는 것을 본 준영은 가방을 내려 두고 곧장 그에게로 향했다.

“부산 현장은 잘 정리됐다고?”

“네. 박형준 대리가 요청했던 보상금 예산은 철회해도 될 것 같습니다.”

그 인간이 얼마나 일을 건성으로 했는지를 은근히 어필하자 성 팀장이 눈썹을 까닥였다.

“뭐, 예산이야 확보해 둬서 나쁠 건 없으니까. 하여튼 수고했네.”

“마틴에게 이메일이 와 있던데 바로 팔로우업 하겠습니다.”

“마틴? 마틴이 아직도 윤 대리에게 이메일을 보내나?”

이맛살을 찌푸린 성 팀장이 체중을 실어 의자 등받이를 뒤로 젖혔다. 팔짱을 낀 그는 고개를 짧게 내저으며 지시했다.

“TANDOZ 건은 우리 쪽에서 진행 중이니까 이메일은 박 대리에게 토스해. 자리 오래 비워서 정신없을 텐데 일단 임 과장이 맡고 있는 매스컴 관리 쪽에 합류하고. 백업이 필요하다더군.”

“……네?”

“통화해야 하니까 자리 좀 비키지.”

반론을 차단하듯 성 팀장이 눈짓했다. 수화기를 드는 그의 행동에 버티고 있을 수가 없었다. 준영은 그대로 몸을 돌려 제 자리로 돌아왔다. 헛웃음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예상을 못 한 건 아닌데 너무 적나라하잖아.

분위기 보아하니 이번 주총에서 나승운이 이사 자리에 오를 거라는 소문은 이미 퍼진 모양인데. 그래서 이렇게 안달이 났나?

컴퓨터를 켠 준영은 사내 메신저로 임 과장 그룹에 참여 메시지를 보냈다. 백업 요청을 그냥 한 것은 아니었는지 곧장 그가 보내온 회의 일정을 눈으로 빠르게 훑으며 그녀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무시하려 했지만 승운이 이사가 되고 난 후의 여파는 어떤 식으로든 제게도 미칠 것이다. 본의는 아니지만 그녀는 홍미향 이사 라인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

또 한 팀의 팀장이던 승운이 이사가 된다는 것은 사내에서 그만큼의 권력을 더 쥐게 된다는 뜻이다. 마지막으로 봤던 그의 얼굴을 떠올리자 손목이 욱신거리는 것 같아 준영은 한숨과 함께 주먹을 움켜쥐었다.

대비까지는 하지 못하더라도 변화에 대한 예상은 필요하다. 임 과장에게 답변을 보내는 그녀의 눈이 조용히 빛나고 있었다.

* * *

“곧 주주총회를 앞두고 있고 새로운 이사의 선임이 걸려 있기 때문에 우리는 예상 가능한 이슈를 어떻게 다룰지에 대한 논의를 해야 합니다.”

브리핑 끝에 임 과장이 하는 말에 준영이 손을 들었다.

“원래 이쪽 업무는 홍보팀에서 담당하고 있지 않나요? 추가로 저희가 나서야 하는 이유가…….”

“홍보팀은 지금 사장님 지시로 해외 플랜트 사업 쪽에 매달려 있습니다. 주총에 대한 언론 플레이를 해낼 여력은 없어 보이더군요.”

코끝에 걸린 안경을 밀어 올리는 그의 대답에 준영은 비뚜름하게 웃었다.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그 한마디로 이해할 수 있었다. 홍 사장은 승운이 이사가 되면서 받을 수 있는 스포트라이트를 비춰 주지 않을 작정인 것이다.

“우리 팀은 회사에 위험이 될 수 있는 요소들을 관리합니다. 확대해서 보자면 더 큰 이윤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기회를 버리는 것도, 위험으로 간주할 수 있겠죠.”

준영은 그의 말에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서류를 훑었다. 회의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임 과장은 딱히 파벌 싸움에 발을 담그고 있지 않았다. 나무늘보 같은 이미지의 그는 승진이 빠르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딱히 무시당하지도 않았다.

홍인섭 사장의 부친인 홍 회장이 회사 운영 전면에 나서던 시절 전략기획팀에서 일했다는 전적 때문인지 홍 사장도 딱히 그를 포섭하거나 내치지 않았다. 그는 그저 한경이라는 회사 안에서 제가 해야 할 일을 지원도 훼방도 없이 묵묵히 하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게다가 나승운 팀장은 현재 명인일보 장의태 사장의 차녀인 장세라와의 약혼 발표를 앞두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사로 등재될 경우 명인일보와의 협업을 통해 충분히 주가를 끌어올릴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됩니다.”

“뻔한 후계 다툼의 가능성을 제시하기보다 공정한 경쟁 쪽으로 프레임을 잡는 게 좋을 거예요. 어떤 언론이든 나승운 팀장을 다루면서 사장님과의 관계를 드러내지 않을 리는 없으니까. 어차피 물어뜯기 좋은 기삿거리를 낼 거라면, 우리 쪽에도 남는 게 있어야죠.”

또렷하게 끼어드는 준영의 말에 사람들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쏠렸다. 펜을 가볍게 돌리며 준영이 몸을 당겼다.

“명인일보 홍보팀과 실시간으로 연락 가능할까요? 우리로서는 주주총회 결과가 나올 때쯤에 기사를 내는 게 훨씬 시너지를 노릴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임 과장이 마지막으로 고개를 주억이며 노트에 무언가를 끄적였다.

“연락처는 윤 대리에게 보내죠. 기사 컨트롤해 주세요. 하지만 아직 나승운 팀장의 이사 선임이 확정된 것은 아닙니다. 타이밍에 신중해야 할 겁니다.”

“숙지하겠습니다.”

“다음 안건으로 넘어가죠.”

임 과장은 느릿한 말투로 회의를 끌어갔다. 큼직한 안건들을 맡을 팀원을 나누고 향후 전개 방향까지 의논한 다음에야 길고 긴 회의는 끝을 보였다. 시계는 이미 공식적인 퇴근 시간을 훨씬 넘긴 후였다.

“일단 해산하고 팀원끼리 정보 공유 충분히 합시다. 윤 대리는 잠깐 시간 좀 내줘요.”

쓰린 속을 부여잡고 일어서던 준영이 멈칫했다. 사람들이 다 회의실에서 나가자 북적이는 느낌은 사라졌지만 긴장감은 그대로였다. 임 과장이 눈을 껌뻑이며 자리를 권했다.

“나승운 팀장과 친분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맞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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