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경찰 조사가 끝난 것은 새벽 3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경찰은 준영의 진술과 함께 그녀의 휴대폰에 녹음된 음성을 몇 번이고 돌려 들었다. 몰랐지만 그들 역시 최근 일대에 일어난 연쇄 추락 사고의 연관성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고 했다.
“오늘은 일단 이 정도로 됐고요. 추가 조사가 더 있을 수 있으니 당분간 어디 가지 마세요.”
“네.”
준영은 뻐근한 몸을 일으켰다. 뒤에 앉아 있던 범진이 다가왔다. 정만수 건으로 안면이 있던 형사가 그녀에게 야단치듯 말했다.
“다음부터는 이런 일 하지 마시고 미리 경찰에 신고하세요. 자백을 받아 내려고 하다니, 큰일 날 뻔하셨습니다. 때맞춰 애인분이 안 오셨으면 어떻게 됐을지 누가 압니까?”
“자백을 받아 내려고 한 게 아니에요. 녹음 버튼도 통화 중에 우연히 눌린 거고.”
“대화 내용이 누가 들어도 그렇게 유도하고 있던데요. 일부러 자극적인 말만 하면서.”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보는 형사를 향해 준영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건 제 성격이라. 그래서 최영복 씨랑도 첫 만남부터 다퉜었죠.”
막힘없는 대답에 형사가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아니, 그리고 그런 상황이었으면 애인이 아니라 112에 전화를 걸었어야죠.”
“말했잖아요, 단축 번호로 건 거라고. 애인이 근처까지 거의 다 왔다는 걸 알고 있어서. 그리고 버튼을 그렇게까지 많이 누를 정신이 없었어요. 최영복이 눈앞에 나타났을 때, 나를 유인한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진술 때부터 느끼고 있었지만 어떤 갑작스러운 질문에도 준영의 대답은 빈틈이 없었다. 혀를 차며 뒤로 물러서는 형사에게 인사를 하고 경찰서를 나오며 그녀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삼두가 달려왔다.
“고생하셨습니다, 형님, 누님.”
“삼두 씨도요. 나 은근히 경찰서랑 인연이 있나 봐. 살면서 너무 자주 드나드는 것 같아.”
농담처럼 웃으며 옆에 서 있던 범진을 돌아봤지만 그는 눈길을 주지 않았다. 그저 삼두를 향해 말을 던질 뿐이었다.
“수고했다. 집에 먼저 가라.”
“예.”
넙죽 웃으면서 허리를 숙인 삼두가 차를 타고 떠났다. 준영은 조용히 눈을 굴렸다. 새카만 어둠 한가운데 서 있는 범진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던 것이다.
“너 진짜 피곤하겠다. 우리도 빨리 가서 쉴까?”
“타.”
차로 걸어가며 범진이 짤막하게 말했다. 준영은 입술을 비죽이며 조수석에 올라탔다.
그러나 차는 할머니 집 방향이 아닌 곳으로 향했다. 범진이 만들어 낸 침묵 속에서 잠자코 있던 준영은 눈앞에 나타난 호텔을 보고는 눈썹을 들썩였다.
나랑 같은 생각 했나? 안 피곤한가? 나야 조금 피곤하지만 뭐, 못 견딜 정도는 아닌데.
먼저 조사가 끝난 사이에 예약을 해 두었는지 카드 키를 챙긴 범진의 뒤를 따르며 준영은 헛기침을 했다. 장소에 어울리지 않게 그가 풍기는 서늘한 공기에 괜스레 긴장이 됐던 것이다.
범진이 열어 준 문 안으로 들어간 준영이 작게 탄성을 내질렀다. 다소 고풍스러운 인테리어로 꾸며진 널찍한 방은 탁 트인 시야에 야경이 시원스레 펼쳐져 있었다.
“스위트룸은 처음이네. 호텔은 출장 때만 와 봐서. 좋다. 되게 넓고.”
종종걸음으로 거실 공간을 훑어보았지만 온 신경은 내내 입을 다물고 있는 범진에게 가 있었다. 턱을 긁적이며 준영이 그를 돌아보았다.
“뭐 좀 마실래? 아니면 빨리 씻고 잘래? 와, 여기 침실 두 개야?”
“윤준영.”
나직한 부름이 선고처럼 날아왔다. 소파 한쪽에 자리 잡고 앉은 범진이 눈짓했다.
“여기 앉아.”
눈빛이 날카롭다. 적어도 그녀를 품에 안고 물고 빨고 하던 남자 같지는 않은 눈빛이었다. 그제야 비로소 이 장소에서 제가 상상했던 그림이 그려지지 않을 것임을 깨달은 준영이 작게 하품을 했다.
“나 지금 너무 피곤한데, 얘기는 내일 하면 안 될까? 아니, 오늘이구나. 어쨌든 일단 자고 나서.”
“앉아.”
타협의 여지가 없다. 범진의 얼굴에는 별다른 표정이 없었지만 화가 났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입맛을 다시며 준영이 터덜터덜 소파에 앉았다. 그걸 기다렸다는 듯 눈썹을 치켜올린 범진이 앞으로 몸을 당긴 채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를 뱉었다.
“내가 근처까지 왔다는 거 알았으면 기다렸어야지. 거길 혼자 올라가?”
“아니, 나는 별일 있을까 싶어서.”
“유인했다고 생각했다며. 설마 최영복이 말장난하자고 널 유인했을까?”
“그래서 전화는 했잖아.”
입술을 우물거리던 준영은 대번에 범진의 눈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보고는 헛기침을 했다.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던 그녀가 푹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었다.
“알았어. 인정해. 내가 성급했어. 그렇게까지 안 했어도 되는데 좀 과했다고.”
“좀 과해? 형사 말대로 내가 조금만 늦었어도 너 어떻게 됐을지 몰라. 그게 좀 과했다고?”
다소 거칠게 흘러나오는 목소리에 준영이 해명하듯 말을 뱉었다.
“그럼 어떡해. 빨리 해결하고 싶었단 말이야. 최영복 자백 끌어낼 자신도 있었고. 내가 이 일 때문에 얼마나 많은 피해를 보고 있는지 알아? 회사에서 내가 맡고 있던 프로젝트는 상사한테 다 뺏기고, 내가 해낸 일에 그 라인 타고 있는 다른 사람 이름이 올라가고. 부산에는 언제까지 있어야 할지 모르겠고, 너는 서울로 가 버리고. 그래서 목숨 걸고 도박 한판 했다, 왜.”
“너…….”
하, 하고 한숨을 토해 낸 범진이 미간을 찌푸린 채 얼굴을 쓸어내렸다.
“네 목숨이 그렇게 가벼워?”
“가볍게 건 걸로 보여?”
눈을 바짝 치뜬 준영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차피 최영복이 범인이라는 증거는 없어. 자백 말고는 잡아넣을 방법이 없다고. 경찰이 자백을 받을 수도 있겠지. 근데 언제? 그 전에 눈치채고 최영복이 잠적이라도 해 버리면, 이 사건이 언제 마무리가 될 것 같아? 두 달? 세 달? 나는 언제까지 여기에 있게 될 것 같고?”
빠르게 쏘아붙이는 그녀를 향해 범진도 미간을 좁혔지만 준영은 그의 입을 틀어막듯 이어 말했다.
“몰랐다면 이참에 알아 둬. 나는 이럴 때 승부수를 던지는 타입이야. 한 계단씩 아래로 내려가는 것에 익숙해지면 깨달았을 땐 이미 바닥이라고. 상황이 오래갈 것 같으면 타개책을 마련해야지. 밑바닥에 떨어질 때까지 멍 때리고 있을 게 아니라.”
무어라 말을 하려던 범진은 고개를 내저으며 헛숨을 내뱉고 말았다. 저렇게 진지한 눈으로 나오는 준영을 이길 수는 없었다. 그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불만스레 말을 뱉었다.
“무슨 회사 일을 그렇게 치열하게 해?”
“그럼 내가 멋으로 일하다 응급실 드나드는 줄 알았어?”
입술을 비죽인 준영이 기세를 조금 누그러뜨렸다. 도도한 고양이처럼 은근슬쩍 제 쪽으로 다가와 무릎에 걸터앉는 그녀의 행동에 범진이 어이없이 웃으며 준영의 코를 가볍게 튕겼다.
“화 풀린 거 아니다. 난간까지 떠밀린 너 보고 심장이 멎는 줄 알았어.”
“내가 거기 혼자 올라갈 수 있었던 건 네 덕이기도 해. 네가 근처에 와 있다는 걸 알았으니까. 권범진이 나한테 무슨 일 생기는 걸 두고 보진 않겠지, 하는 믿음에서.”
준영이 그와 눈을 마주치며 나직하게 말했다. 선이 곧은 눈가에 결코 가볍지 않은 신뢰가 넘실대는 것 같았다. 비뚜름하게 눈썹을 세운 범진이 그녀의 엉덩이를 콱 움켜쥐며 작게 으르렁거렸다.
“그 미친 짓을 벌인 게 결국 나 때문이다?”
“굳이 그렇게 꼬아서 들을 필요는 없잖아. 피곤하고 힘든 하루였는데 그만 성질부리고 이제 좀 안아 주는 게 어때?”
불퉁한 얼굴로 태연하게 두 팔을 뻗던 준영이 아, 하고 이죽거렸다.
“우리 권범진 씨 잠을 못 자서 너무 피곤하려나. 내가 씻는 거 도와줄까?”
악마의 속삭임도 이보다 더 유혹적일 수는 없으리라. 허벅지에 닿아 있는 그녀의 부드러운 몸이 주는 새삼스러운 감각에 솟아오르는 한숨을 애써 억눌러 삼킨 범진이 느릿하게 눈을 내리떴다.
“어떻게 도와줄 건데.”
순간 준영의 눈꼬리가 미끼에 걸린 물고기를 보는 것처럼 휘영청 휘어졌다. 그녀는 빙긋 웃으며 손을 들어 범진의 뺨과 목덜미를 쓸어내렸다. 탄탄한 피부가 그녀의 손바닥이 닿을 때마다 펄떡이는 것 같았다.
“어떻게는. 일단 재킷부터 벗기고.”
감이 매끄러운 그의 재킷 안쪽으로 손을 넣은 준영이 가볍게 그것을 미끄러뜨렸다. 범진은 가늘게 뜬 눈으로 그녀를 응시하며 순순히 팔을 뺐다. 넥타이 매듭을 순식간에 풀어 헤친 준영이 귓속말을 하듯 작게 말했다.
“단추도 하나씩 풀고.”
시선을 맞춘 채 준영은 그의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어 내렸다. 군더더기 없이 잡혀 있는 몸의 근육들이 이미 뜨거운 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공기가 수축하듯 바싹 조여든다. 범진의 뺨을 감싼 채 눈가에 가만히 입을 맞춘 준영이 천천히 그를 마주 보며 앉았다.
말없이 그녀를 올려다보는 범진의 눈동자가 까맣게 빛난다. 엉덩이 아래에 맞닿은 그의 몸의 변화가 고스란히 느껴지고 있었다.
“욕실로 갈까?”
“아니.”
짤막하게 대답한 범진의 손이 그녀의 목덜미를 잡아 내렸다. 그대로 입술이 거칠게 겹쳐진다. 열띤 숨을 주고받으며 준영은 그의 셔츠를 마저 밀어뜨렸다.
미끈한 혀가 그녀의 혀를 집어삼킬 듯 얽어 온다. 제 옷 안으로 파고든 범진이 가슴을 움켜쥐는 감각에 준영이 작게 신음했다. 몸이 벌써부터 잘게 떨려 오고 있었다.
“근데 너, 진짜 잠 안 자도 돼?”
어느새 그녀의 옷을 벗겨 바닥에 내던진 범진의 입술이 그녀를 깨물고 있었다. 달콤한 과육을 맛보듯 혀를 굴려 충분히 적시며 범진이 중얼거렸다.
“잠 다 깨워 놓고 할 소리냐.”
“나는 씻는 거 도와준다고만 했……, 으응!”
그에게 기대 바지를 벗은 뒤 무릎으로 서서 놀리듯 범진의 귓가에 입술을 스치던 준영은 순식간에 깊이 파고드는 손길에 엉덩이를 튕겼다. 안쪽을 손가락으로 길게 훑으며 범진이 속삭이듯 말했다.
“걱정시키지 마, 윤준영. 나 그런 거에 면역이 없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얼마나 참아야 할지 모른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