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저 여명일 뿐-70화 (70/86)

<70화>

“나에 대해 궁금한 게 많더군. 내가 다른 현장에서 일한 내역을 알아봤다고?”

누구 입이 또 이렇게 가벼웠을까.

짧게 한숨을 내쉬며 준영은 영복을 응시했다. 영복의 검은 눈은 어두워서 어떤 감정을 품고 있는지 알아챌 수가 없었다. 그를 주시하며 준영이 입을 열었다.

“왜 그러셨어요?”

“뭘 말이야?”

“정만수 씨요.”

간결하게 말하자 영복의 뺨이 실룩였다. 준영이 덧붙였다.

“김천규 씨도 그렇고. 아마 다른 사람들도.”

내려앉은 침묵 사이로 바람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들이닥쳤다.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던 영복이 느릿하게 말을 뱉었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군.”

“차라리 원한이 있었다면 이해가 쉬웠을 거예요. 아니면 흔한 돈 문제라든가. 그런데 둘 다 아니잖아요. 최 반장님은 그 사람들과 정말로 친했던 것 같으니까.”

“뭔 헛소리를 하고 있는 거냐고 묻잖아.”

“기분이 어떠세요?”

영복의 거칠어진 목소리를 무시하며 준영이 고개를 기울였다. 그녀의 입술이 희미하게 기울어졌다.

“정만수 씨는 ‘실패’했잖아요.”

순간 영복의 팽팽하게 다물린 턱이 가늘게 떨렸다. 그의 시커먼 눈이 비로소 다른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준영은 가만히 주먹을 움켜쥔 채 턱을 쳐들었다. 그녀의 또렷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 사고가 없었다면 정만수 씨는 몇 년 내로 무탈하게 빚을 청산했을 거예요. 그렇다고 고생길이 끝난 건 아니지만 한고비를 넘은 것만은 분명하겠죠. 그 후부터는 가족끼리 의지하며 잘 살아 나갔을 테고요.”

잔뜩 찌푸려진 영복의 눈가가 불규칙하게 경련한다. 조용히 숨을 고른 준영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정만수 씨는 여기서 등을 떠밀려 추락했어요. 언제쯤 제대로 움직일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지만, 확실한 건 예전만큼 일할 수는 없을 거라는 겁니다. 온 가족이 견뎌야 할 짐이 더 무거워졌죠. 아내인 이지선 씨도, 피아노를 곧잘 친다는 딸도,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군요.”

그녀의 한 마디 한 마디가 칼이라도 되는 것처럼 영복은 흠칫거렸다. 충분히 흥분하고 있는 게 보인다. 일그러진 그의 얼굴을 지켜보던 준영이 아, 하고 눈을 치떴다.

“혹시 그걸 바라신 거예요?”

“뭐?”

갑자기 목을 짓눌린 사람처럼 영복이 잔뜩 쉰 목소리로 되물었다. 준영은 그에게 한 걸음 다가선 채 중얼거리듯 말했다.

“같은 상황인데도 가족끼리 힘을 합쳐 그 위기를 극복해 나가는 것이 싫었던 거지.”

영복의 눈이 펄쩍 뛰어올랐다. 불꽃이 터져 나오는 듯한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며 준영이 쐐기를 박았다.

“당신은 그러지 못했으니까.”

“그 입 닥쳐!”

얼굴을 일그러뜨린 영복이 포효했지만 아직 완전히 무너지지는 않았다. 준영은 한 발 더 다가가 그의 앞에 똑바로 섰다.

“정만수 씨가 정말로, 자기를 민 사람이 누구인지 모른다고 생각해요?”

영복의 동공이 순식간에 커다랗게 확장된다. 준영은 그에게 눈을 고정시킨 채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그러고는 이내 희미하게 눈으로 웃으며 속삭였다.

“반장님한테선 항상 좋은 냄새가 나요. 바람이 불면, 더 진하게.”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영복의 입이 슬며시 벌어졌다. 준영이 친절하게 덧붙여 말했다.

“그날도 그랬겠죠.”

그제야 그녀의 암시를 알아들은 영복의 눈빛이 시커멓게 죽었다. 단번에 멱살을 잡아채인 준영이 콜록, 기침을 내뱉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며 영복이 지그시 그녀의 목을 눌렀다.

“너는 아무것도 몰라. 응? 곱게만 자라 온 아가씨는 진짜 지옥을 모른다고.”

“당신이 겪은 지옥만 지옥은 아니야. 나한테는 내 지옥이 있었거든.”

이를 악문 채 어렵게 말을 뱉었지만 목이 더 눌린 준영은 그의 팔을 정신없이 내리쳤다. 꼬집고 할퀴는데도 영복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의 입술이 기계적인 미소를 그려 냈다.

“돈. 돈이란 건 항상 그래. 모래알 같아. 쥐었다고 생각하면 빠져나가지. 착한 사람들이야. 다들 가족만 생각하며 죽도록 일했다고. 그런데 세상은 그 사람들을 내버려 두질 않았어. 큰 병에 걸린 죄로, 누군가를 지나치게 믿은 죄로 더 깊은 구렁텅이로 굴러떨어졌지.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그 구렁텅이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어. 그건 너무 가혹하잖아.”

“이 손 좀……!”

점점 호흡이 힘겨워진다. 얼굴이 벌게진 채 영복의 팔을 떼어 내려 했으나 요지부동이었다. 그녀를 향해 있지만 그녀를 보고 있지 않은 눈으로 영복이 빠르게 말을 뱉었다.

“끝도 없이 계속되는 무의미한 빚 갚음이 인생의 전부인 사람의 삶을 상상할 수 있겠나? 평생을 그 모래알만 쥐고 살아가야 하는 사람의 삶을? 그 가족의 삶을? 절망적인 삶이지. 이미 삶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삶일 거야.”

느릿하게 눈을 깜빡인 영복이 중얼거렸다.

“아무도 돕지 않는 그 사람들을 도와주고 싶다고 생각한 게, 잘못인가?”

순간 준영의 손톱이 그의 살을 깊숙이 파고들었다.

“개소리하지 마.”

억눌린 목소리가 튀어나온다. 영복은 미간을 찌푸린 채 준영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입술을 달싹이며 말을 내뱉었다.

“당신은 여기서 사람을 밀었어. 그 사람들이 죽지 않고 딱 넉넉한 액수의 보상금을 탈 수 있을 만큼만 다치리라는 보장이 어디 있지? 당신이 신인 줄 알아? 그 사람들은 전부 죽을 수도 있었어!”

“실제로.”

무감정한 눈으로 그녀를 응시하며 영복이 중얼거렸다.

“잘해 낸 사람이 있지. 김천규는 내 덕에 신도 안 해 주는 구원을 받았어. 만수는…….”

공허한 표정으로 잠시 망설이던 그가 나직하게 말했다.

“운이 나빴던 거야. 가만히 버텼으면 됐을걸.”

그의 발을 밟으려 버둥거리던 준영은 순간 제게로 곧장 향하는 그의 눈빛에 동작을 멈췄다.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 영복이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거칠게 쉰 목소리가 그녀를 쿡 찔렀다.

“아니지. 너 때문이지, 윤 대리. 네가 얌전히 있으려는 만수 놈을 들쑤셨잖아. 병원에서 다 봤어.”

그건 또 언제, 라고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그녀의 멱살을 쥔 손에 힘을 준 영복이 그녀를 뒤로 밀쳤다.

뒷걸음질을 치던 준영은 난간에 등을 부딪쳤다. 몸이 뒤로 크게 휘청거려 저절로 비명이 튀어나왔다.

“자, 잠깐만요, 최 반장님. 날 여기서 미는 건 좋은 생각이 아니에요. 당신 신념에 위배되는 일이라고요. 혹시나 경찰에게 잡히더라도 제정신 아닌 놈을 만나면 다른 사람을 돕고 싶은 마음에 그랬다는 말이 어떤 식으로든 먹힐지 몰라요. 하지만 나를 미는 건 경우가 달라. 당신은 그냥 살인자가 되는 거라고!”

속사포처럼 빠르게 튀어나오는 말에 눈살을 조금 찌푸리던 영복이 조용히 말했다.

“네 입을 막으면 만수도 생각이 달라질지 모르지. 그래. 이것도 결국 그 사람들을 위한 거야.”

틀렸다. 생각을 고쳐먹을 것 같지 않았다. 아까는 피하려던 영복의 손에 필사적으로 매달리며 준영이 헛웃음을 흘렸다.

“서, 설마 내가 아는 걸 나만 알고 있다고 생각해요? 이건 권범진도 다 알고 있는 사실이라고요!”

그녀의 말에 영복이 성기게 난 눈썹을 들썩였다. 그러나 그는 이내 준영의 희망을 저버리며 손에 힘을 주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새하얀 머리칼이 사신처럼 보였다.

“권범진이 누군지는 몰라도 그때 일은 그때 생각하지.”

아차 싶어 준영이 목청 높여 소리를 내질렀다.

“기, 기, 김 씨! 권범진이 아니라 김 씨 말이에요! 아저씨가 아는 김……, 왔으면 빨리 안 도와주고 뭐 해?”

준영의 말을 허풍으로 넘기지 않은 것은 갑자기 제 뒤로 달려드는 기척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뒤를 돌아보자마자 얼굴을 세게 후려 맞은 영복이 비틀거렸다.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그는 제 다리를 꺾으며 단번에 밀어 넘어뜨리는 힘에 그대로 바닥을 나뒹굴었다.

“누님, 괜찮으세요?”

“삼두 씨가 왜 여기 있어요?”

후다닥 계단을 뛰어 올라온 삼두가 저를 감싸는 것을 느낀 준영이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녀의 눈앞에는 영복의 양팔을 뒤로 꺾어 짓누른 채 그의 등 위에 올라타 있는 범진이 있었다. 새까만 슈트를 입고 있어 범진은 마치 어둠에서 솟아난 그림자처럼 보이기도 했다.

“집으로 가라고 하셨지만 오늘 형님께 야단맞아서, 형님과 합류하시는 것까지는 봐야겠다 생각했거든요. 사무실로 오는 골목에서 형님과 마주쳤어요. 이러길 천만다행입니다.”

“일단 그, 경찰부터 불러요.”

“올라오면서 연락했습니다. 곧 올 거예요.”

아, 하고 준영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삼두의 팔을 붙잡고 있는 그녀의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김 씨가 여길 어떻게…….”

몇 번 몸을 뒤틀었지만 벗어날 수 없다고 판단했는지 영복의 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범진은 건조한 목소리를 뱉었다.

“충고대로 미인에게 용기 있게 들이댔거든요.”

어느 날엔가 나눴던 대화를 떠올리게 하는 말에 영복의 일그러진 얼굴이 서서히 펴졌다. 그가 허탈한 웃음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하하, 그거 잘됐네. 잘됐어.”

범진은 말없이 그의 손목을 움켜쥔 손에 힘을 주었다. 짧게 날아오는 시선에 준영은 안도한 얼굴로 웃어 보였다. 영복의 목소리가 공허하게 울렸다.

“자네라면 이해할 수 있을 거야. 빚도 있고 아픈 여동생도 있지 않은가. 지옥 같은 삶에서 몸부림치는 불쌍한 사람들, 그 사람들이 벗어날 수 있게 도와준 걸 누가 욕한단 말이야?”

“글쎄요. 덕분에 채무 회수가 한정 없이 늘어져서 욕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건 아닌데요.”

“뭐?”

범진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영복이 고개를 비틀었다. 그의 등을 무릎으로 꽉 짓누르며 범진이 몸을 낮췄다. 나직한 목소리가 그의 잇새로 흘러나왔다.

“아픈 여동생 없습니다. 김 씨가 아니라 권 씨고요. JBK 파이낸셜에서 일하고 있죠.”

영복이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범진이 조용히 덧붙였다.

“빚을 지는 쪽이 아니라 지우는 쪽이라는 말입니다. ”

“이…… 징그러운 놈들! 세상의 쓰레기들! 퉤! 손 하나 까딱 안 하고 남의 피나 빨아먹는 거머리 같은 새끼들이!”

몸을 움직일 수 없자 영복이 그악스럽게 목청을 높였다. 악에 받쳐 소리를 지르는 그의 목을 범진은 팔꿈치로 지그시 누르며 속삭였다.

“그 거머리 덕분에 잠시나마 숨통이 트이고 희망을 품기도 하지. 사금융 중 우리만큼 양심적으로 이자 받는 곳도 없을 텐데 돌아오는 건 욕뿐이니 서운하군.”

“잡소리 집어치워. 너 같은 새끼들 때문에 천규가, 두창이가, 승래, 만수가 다 그렇게 된 거다! 네놈들이 그 사람들의 인생을 망쳤어!”

“그건 아니지.”

비딱하게 눈썹을 들어 올린 범진의 목소리가 더욱 낮아졌다.

“결국 그 사람들 인생을 망친 건 당신이야, 최영복. 책임 회피하지 마. 이쪽이 더럽다고 자기 오물까지 떠넘기는 건 너무 비겁하잖아.”

어디선가 사이렌 소리가 울려 퍼진다.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준영은 뒷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통화는 여전히 범진과 연결되어 있었다. 녹음 종료 버튼을 누르며 그녀는 비로소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불어온 바람에 떠밀려 온 향긋한 냄새가 점점 옅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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